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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9화 (29/254)

29 화

'실패한 건가.'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크리 시스 공작가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아리아는 꼼짝없이 죽을 것이다.

산 채로 지옥에 끌려가는 기분이 었다.

'미안. 미안해......

피로 더럽혀진 아리아의 얼굴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곧 멎을 듯 가 쁜 숨이 심장을 저리게 했다.

아리아의 이마 위로 느리게 입술 을 내렸다. 아리아가 살지 못한 건 모두 내 탓이다. 내가 무능력해서. 내가 쓸모가 없어서. 사랑하는 것 하나 지키지 못할 정도로 볼품없어 서.

'내 세상. 네 모든 죄와 업보는 내가 지고 가기를.'

저승에서 죽음의 신이 인생 동안 지은 모든 죄를 그의 저울에 달 그 때, 네게 달릴 죄들은 모두 내게로

넘어오기를. 너는 다만, 내 별 볼 일 없는 생에 허락된 조그마한 행 복까지 모두 안고 가기를.

'곧 따라갈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나는 생의 저편으로 사라질 아리 아를 따라갈 생각이었다.

죽음을 결심하던 순간, 내 앞에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내밀어졌다.

뻗어진 손을 초점 없는 눈으로 바 라보다 손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내게로 손을 뻗은 카이사르가 천천

히 입을 열었다.

" 일어나라."

귀를 간지럽히는 감미로운 목소 리. 무뚝뚝하던 목소리 위에 옅은 다정함이 담겼다. 눈을 크게 뜨며 그를 주시했다.

그제서야 카이사르와 제대로 마주 했다.

"내 딸은 그 누구에게도 무릎 꿇 을 필요 없다. 설령 이 제국의 황 제라 할지라도, 네 무릎을 다시 굽 히게 할 순 없을 것이다."

차갑게만 느껴지던 그의 눈동자는 간질거리는 온기를 담고 있었다.

'무슨 뜻이지?'

그의 손을 앞에 둔 채 빠르게 머 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내, 딸?'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이상한 기 분이 깊은 곳에서부터 퍼지려는 것 을 애써 저지하며 그의 말에 담겼 을 속뜻을 추리하기 시작했다.

'......모르겠어.'

그리고 포기했다. 분명 문자 그대 로의 뜻이 아닐 거라고 스스로에게 세뇌해도 다른 뜻은 떠오르지 않았 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그가 나를 자신의 딸로 삼겠다는 뜻으로 들리지 않는가.

'착각하지 말자.'

심장을 간지럽히는 묘한 감각에 이를 악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카이사르 크리시스다. 살육을 위해 태어났다 는 차갑고 잔인한 크리시스 공작.

그런 그가 나 같은 사람을 딸로 인정해 줄 리가 없었다.

"잡지 않을 생각인가?"

고뇌에 빠진 내 앞에 커다란 손이 혼들렸다. 퍼뜩 정신이 들어 그의 손을 잡으려다 크게 멈칫했다.

'......너무 더럽잖아.'

아리아의 피와 달려오며 묻은 흙 먼지로 더러워진 손을 움찔 뒤로 물렸다. 검사로서의 굳은살은 있지 만 길고 깨끗한 카이사르의 손을, 내 더럽고 투박한 손으로 잡을 용 기가 나지 않았다.

"저, 지금 손이 너무 더러워 서 ...

민망함에 뺨이 살짝 붉어진 것 같 기도 하다. 카이사르의 빤한 시선 에 부끄러워져 손을 등 뒤로 감추 려던 찰나.

커다란 손이, 먼저 내 손을 잡고

날 끌어올렸다.

아리아를 한쪽 팔에 안아 든 채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카이사르 에게 손이 잡힌 채로 일어서다 살 짝 비틀거렸다. 여전히 다리가 떨 리고 있었다.

"2쯔. "

내 다리를 보고 혀를 찬 카이사르 가 아리아를 덥석 안아 들었다. 하 얀 샤워 가운 위로 붉은 피가 번졌 다.

"왜, 왜

"살려 달라며."

당황스러워하며 더듬거리는 내게 카이사르가 무심하게 답했다. 그가 우측에 서 있던 테일러에게 손짓하 니, 테일러가 목례했다.

"주인님."

"빈 방으로 데려가. 주치의를 깨 워 진찰하게 해라."

" 네."

테일러가 아리아를 안아들었다. 그 일련의 과정을 멍하니 바라보았 다.

왜?'

갑자기 이뤄지는 상황이 잘 이해 되지 않았지만, 우선 다급하게 외 쳤다.

"아리아는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 다! 그 앤......

"요정 혼혈이겠지."

' 어?'

무심한 카이사르의 한마디에 동공 이 혼들렸다. 그를 휙 돌아보니 그 가 느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요정들의 기운은 인간과 확연히 달라서 감각이 예민한 이들은 쉽게 구별하지. 너도 알지 않나."

자연에서 나왔으나 자연을 해치는 자연의 적 인간과,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요정은 느껴지는 기운이 확연히 달랐으니 그의 말은 사실이 었다.

"그럼 일반 치료로는 아리아를 고 칠 수 없다는 것도 아실 텐데요."

몸을 덜덜 떠는 아리아를 초조하 게 바라보았다. 아리아에게 필요한 건 진찰이 아니라 요정 숲의 정기

였다.

"요정 혼혈인데도 여태껏 요정 숲 에 가 본 적이 없어 기운 부족으로 인해 신체가 퇴화한 것입니다. 치 료법은...... 요정 숲의 정기뿐입니 다."

무겁게 고개를 떨궜다. 아무리 그 가 내게 호의를 베푼다 한들, 한 병에도 무시무시한 가격을 자랑하 는 요정 숲의 정기까지 내줄 가능 성은 적었다. 염치없는 걸 요구하 는 스스로가 역겨워 참기 힘들 정 도였지만, 내겐 이것 말고는 방법 이 없었다.

"공작님, 제발...... 평생을 바쳐 갚겠습니다. 한 방울, 한 방울만이 라도 빌려 주신다면, 제가 평생 공 작가를 위해 일해서......

눈을 질끈 감은 채 다시금 무릎을 꿇을 작정으로 무릎을 굽힐 때였 다.

휙.

무릎이 바닥에 닿기 직전, 허리에 닿는 두 손으로 인해 몸이 휙 들어 올려졌다.

' 어?'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내 발은 공중에 떠 있고, 카이사르는 내 허리를 잡고 날 들 어 올린.......

' 미친.'

상황을 이해하고 경악했다.

무릎을 꿇으려는 나를 아예 아기 들 듯 들어 버린 카이사르는 불만 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뒤늦은 수치심에 허우적거리 며 발버둥 쳤다.

"내, 내려......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방금•..."?'

"요정들의 기운은...... 인간하곤 확연히 다르다고......

"그거 말고."

"......손, 잡으라고......

"더 전에."

카이사르에게 대롱대롱 들린 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다 떠오른 생각에 움찔하며 느리게 입술을 열 었다.

"황제라도...... 무릎을 굽히게 할 수 없을 거라고......

"그래."

그제야 카이사르가 만족스럽게 웃 었다. 그의 화사한 웃음을 바로 눈 앞에서 본 나는 딱딱하게 굳을 수 밖에 없었다.

"내 딸은 어디에서도 무릎 꿇을 필요 없다."

카이사르가 나를 사뿐히 땅에 내 려 주었다.

"그러니 다시는, 누구 앞에서도 무릎 꿇지 마라. 네 무릎은 크리시 스라는 이름만큼이나 무겁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린 카이사르가 이미 엉망인 내 머리를 더 헝클어트렸다.

심장 한편에서 이상한 것이 계속 꿈틀거렸다.

'왜 계속......

내가 착각하게 하는 거지?

기분이 이상했다. 내 아빠라도 된

것처럼 구는 카이사르가 원망스러 웠다.

'아니면서.'

그럴 리 없다.

자라나려는 기대의 싹을 다시금 짓밟았다. 나를 도구로 쓰면 몰라 도, 공작이 뭐가 아쉬워 나 같은 걸 딸로 삼으려 하겠는가.

술렁이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름이 카슈미르라고 했던가?"

심란한 마음에 넋을 놓고 있는 사 이 카이사르가 말을 걸었다. 황급 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카슈미르입니다."

"그래. 카슈미르 크리시스."

쿵.

심장이 저 아래로 추락하는 것 같 았다.

'왜.'

이해할 수 없다. 왜 그가 나를 '카슈미르 크리시스'라고 부르는지.

하지만 물어볼 용기도 나지 않았 다.

'아무런 이유도 없다고 하면.'

왜인지 절망할 것 같아서.

"네 동생은 요정 숲의 정기를 섭 취하게 해 주마."

무심한 그의 선포에 눈을 크게 떴 다. 지옥으로 굴러 떨어지던 영혼 이 한순간에 낙원에 들어간 것 같 았다.

'뭐든, 뭐든 해야 해.'

필사적으로 그의 소맷자락을 잡았 다.

"감사합니다! 뭐든, 뭐든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뭐든 하겠습니다."

덜덜 떨리는 눈꼬리를 접은 채 그 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실감이 나 지 않아 어안이 벙벙하지만, 정말, 정말 기뻤다. 그가 명한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나를 빤히 내려다보던 카이 사르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넌 누구지?"

"••••••네?"

"넌 누구냐고 물었다."

여상스러운 말투로 다가오는 물 음. 너무 단순해 오히려 입을 턱 막히게 하는 질문이었다.

"전...... 용병 미르입니다. 평생 검을 휘두른 소드 마스터죠."

"그래. 내 앞에서 힘을 가진 자의 권리를 말하던 미르지•"

그의 대답에 얼마 전 카이사르와 의 첫 번째 만남이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카이사르는 미르로 서의 만남에서도 이유를 알 수 없 는 호의를 보였었다. 대뜸 보석을 꺼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또. 넌 누구지?"

그가 다시금 물어왔다. 아무래도 내게 원하는 대답이 있는 것 같았 지만,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건지 잘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한참 고민하 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소심하 게 대답했다.

"......카슈미르. 아리아라는 동생

을 둔...... 뒷골목에 사는 평민 카 슈미르입니다."

"이젠 아니지."

" 네?"

"네가 부정하는 것 같으니 확실히 말해 주지."

카이사르가 느리게 내 턱을 들어 올렸다. 내게로 얼굴을 가까이 하 고 조용히 속삭였다.

"너는 지금부로 내 딸, 카슈미르 크리시스 공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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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도움만 받고 사라져 버리려 고 했던 건가?"

그의 입가에 피는 웃음이 서늘했 다.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절대 아닙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고......!"

"그래. 그 은혜는 내 딸이 돼서 갚아라."

쿵.

가슴이 속절없이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무어라 대답도 못 하고 있 는 사이,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리 고 느리게 쓸어내린 카이사르가 희 미하게 웃었다.

"아비는 딸에게 명령하지 않지. 상하 관계가 아니잖으냐."

누군가 다정하면 죽고 싶을 때가 있다.

그 다정함이 동상이몽에서 나왔을 까 봐. 금방이라도 흩어져 버릴까 봐.

차라리 순간의 만족을 품에 안은 채 이대로 눈을 감는 게 낫다고 생 각할 만큼, 다정함은 치사율이 높 았다.

왜일까. 가슴이 너무 아팠다. 내 게 뭘 바라는 건지, 다정이 날 죽 여 버릴 것 같았다.

"네게 부담을 주려는 건 아니다. 충분히 생각해 보고 대답해도 좋 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술 을 꾹 깨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으니 카이사르가 부담을 덜어 주 려는 듯 덧붙였다. 가슴에 꽂히는 다정함에 말랐던 눈물이 다시 차올 랐다.

"••••••울어?"

"제게 왜 그러십니까?"

"뭐?"

북받쳐 오른 감정이 방울져 떨어 진다. 원망 어린 눈빛을 보내는 날 보며 카이사르가 당황스럽단 표정 을 지었다.

"저는 용병 미르입니다."

"그래."

"돼먹지 못한 용병 새끼란 말입니 다!"

용병을 향한 선입견은 상당히 깊 었다. 지금이야 영웅이라고 불리며

칭송받지만, 아직까지도 용병을 돈 만 쥐여 주면 뭐든 하는 돼먹지 못 한 족속들로 보는 이들이 많았다.

'대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

나는 카이사르의 거침없는 태도를 믿기 힘들었다. 내겐 익숙하지 않 은 것이었다. 내 으르렁거림에도 태연하게 눈을 깜빡인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네 오라비가 돼먹지 못한 짓 저 지르기를 좋아하지. 칼과 잘 맞겠 군."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잖

습니까!"

태연하다 못해 지나치게 가벼운 카이사르의 발언에 발끈해 살기를 자욱이 내뿜었다. 무례한 내 행동 에도 그는 여전한 표정으로 날 지 켜 보았다.

"내 뭘 믿고 딸로 들이겠다는 겁 니까! 조심성도 없으십니까? 용병 은 돈만 주면 뭐든 하는 족속들이 라는 것도 모르시냔 말입니다! 내 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새하 얗게 질리고 이성을 잡기가 힘들었

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범람하 듯 밀려왔다.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난 화가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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