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화
그가 무감한 표정으로 다정을 말 하는 게 싫었다. 진심인지 짐작하 기 어려웠으니까.
생각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고 날 들이겠다고 말하는 게 두려웠 다. 내 본모습을 보면 지금만큼이 나 가볍게 날 내칠 것 같았으니까.
'......버림받기 싫어.'
그래. 나는, 들여졌다가 버림받는
게 두려웠다.
진득하고 지독한 붉음이 날 훑는 다. 파동 한 점 없는 잔잔한 눈동 자에서 감정을 읽어내기란 무척 힘 들었다. 날 관찰한 그가 입을 열었 다.
"공포에 질렸군."
M | M
"내가 가벼이 말하는 것 같나."
카이사르는 너무도 쉽게 날 읽어 냈다. 크게 흠칫하는 나를 보며 제 턱을 쓸어내린 그가 내 뺨을 잡고 얼굴을 들어 올렸다. 살짝 서늘한
온기가 뺨을 타고 온몸에 퍼져 나 갔다.
"어떤 말을 해야 따님은 내 진심 을 알아줄까."
"내가 오래전부터 널 찾았다고 하 면 믿겠나."
'뭐......?'
눈을 크게 떴다. 원작에서도 나오 지 않는 내용이었다.
"......여태껏 제 존재를 모르셨던 거 아닙니까?"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몰 랐다. 허나 네 존재는 알고 있었 다."
처음 듣는 정보에 당혹스러워하는 날 두고 고민하던 카이사르가 말을 이었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는 게 좋겠지."
무언가 숨기려는 듯 말을 돌리는 카이사르를 보며 내 탄생에 사연이 있었으리라는 걸 어렵지 않게 예측 할 수 있었다. 입에 담기려는 질문 을 그저 삼키고 말았다. 카이사르
가 곤란해하는 걸 보고 싶진 않았 기에.
그가 혼들림 없는 눈으로 날 마주 했다.
"다만 난 빈말을 하지 않는다. 널 들이겠다고 한 건 가벼운 치기에서 나온 말이 아니야. 네가 생겼을 때 부터 널 책임지려고 했었고, 미르 인 널 봤을 때도...... 널 내 곁에 두고 싶었다."
카이사르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의 덤덤한 한 마디 한 마디가 마 음에 꽂히는 기분을 느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째서 영웅이 되었느냐 물었을 때. 넌 그게 네가 해야 하는 일이 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었지."
카이사르가 발걸음을 옮겨 성큼 거리를 좁혔다. 그는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나를 가 볍게 안아들었다. 몸이 허공으로 떠올라 그의 품에 안착한다. 목덜 미로 그의 단단한 팔이 닿았다.
"아비 된 자로서 딸을 책임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 내가 널 들이려 하는 것도 그게 내가 해야 하는 일
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지."
고개를 숙여 품에 안겨 있는 나와 눈을 맞춘 카이사르가 씨익 웃었 다.
"난 네가 마음에 들었다."
이해할 수 없었고, 믿기도 힘들었 다. 허나 이해하지 못해도 믿고 싶 었다.
'• ...오늘만 믿자.'
몸과 마음 모두 지쳐 온기를 갈망
하던 내게 안긴 품은 시리도록 따 뜻해서. 그만 생각을 멈춘 채 그렁 한 눈을 감고 말았다.
카이사르 칼라 드 케니스 크리시 스는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났다.
공작가의 외동아들로서 공작 작위 는 따 놓은 당상. 검술에 대한 천 재적인 재능을 지녀 24살이라는 젊 은 나이에 소드 마스터 경지에 이 브렀다. 사람들은 그가 제국 최연 소 소드 마스터라고 입을 모았다.
태어날 때부터 손에 쥐어진 막강 한 권력과 부유한 환경, 그리고 검 에 대한 천재적인 재능. 카이사르 크리시스는 감히 완벽하게 태어났 다고 말할 수 있을 법한 인물이었 다.
그에게 선천적으로 쥐어진 것들 중 유일하게 문제가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였다.
'평민 새끼가 감히! 이 자식 목을 쳐라!'
'난 공작이다! 이 나라의 유일한 공작이란 말이다!'
카이사르의 아버지, 케니스 크리 시스 공작은 말 그대로 쓰레기였 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주위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성격만 난폭 한 난봉꾼. 저택의 기물은 하루에 도 몇 번씩 그의 손에서 깨져 나갔 고, 사용인들은 매일 매질을 당하 며 툭하면 송장으로 저택을 나갔 다.
'술 그만 마시고 서류 처리하라 고? 이게 미쳤나! 누구한테 명령질 이야!? 이 빌어먹을 놈을 매질하고 내쫓아라! 술이나 더 가져와!'
성격만으로도 충분히 쓰레기 같았
건만, 그는 능력까지 없는 쓰레기 였다. 재활용도 불가했단 소리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지랄병에 견디 다 못해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카 이사르는 어린 시절 내내 아버지의 지랄병에 시달려야 했다.
'이 쓸모없는 놈! 넌 나가서 술이 나 사 와!'
'고, 공작님......! 어찌 공자님께 그런 일을 !
'안 닥쳐? 이 악마 새끼는 아직도 안 나가고 멀뚱거리고 지랄이야!'
그의 아버지는 대대로 위대한 기 사들을 배출해 온 크리시스 가에서
검에 대한 재능이 없이 태어난 인 물이었다. 크리시스면서도 검을 휘 두를 줄 모른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무시당해 온 그는, 세기의 천재라 칭송받는 카이사르를 시기했다.
'게으른 놈! 벌써 자면 어쩌자는 거냐! 나와서 검 잡아!'
그의 아버지는 매일 밤 술을 마시 고 카이사르의 방으로 쳐들어와 카 이사르를 무자비하게 폭행하며 검 술 연습을 할 것을 종용했다. 사용 인들 앞에서 그에게 부끄러움을 주 는 건 예삿일이요, 잘못이 없는 카 이사르에게 손을 올리는 일도 잦았
고, 폭언을 쏟아 내는 건 일상이었 다.
사람들은 아비에게 가정폭력을 당 하는 어린 공자를 동정했으나, 그 누구도 막아 주진 않았다. 아무리 공작이 별 볼 일 없는 쓰레기일지 라도 공작과 맞서긴 두려웠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 귀찮아.'
다만 카이사르는 아버지에 대한 어떤 감흥도 없었다. 분노도 증오 도 없이 그저 무덤덤했다. 카이사 르는 그가 자신의 얼굴로 주먹을
날릴 때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애초에 늙은 아비가 검을 익힌 그를 때려 봤자 아프지도 않 았다. 그저 지랄병을 두고 봐 주는 게 귀찮을 뿐이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를 받는 건 대상에게 일말이라도 감정을 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아비 를 사랑하지 않았다. 증오하지도 않았다.
그의 아비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 니었다. 심지어 저를 낳은 어미의 죽음도 카이사르에게 어떤 감흥도 불러일으킬 수 없었다.
카이사르는 사랑을 하지 못한다. 그는 태어나기를 그런 사람이었다.
카이사르가 20살이 되던 해. 케니 스 크리시스 공작은 지속적인 음주 로 몸이 약해져 병상에 누웠다.
'나는 너를 단 한 번도 내 아들이 라고 생각한 적 없다. 그러니 너도 날 아비라 생각하지 말고 죽여라.'
시기와 열등감에 휩싸여 인생을 허비하던 이의 말로는 처참했다. 약해진 몸으로 힘겹게 숨을 헐떡이 던 아버지는 카이사르에게 마지막
명을 내렸다.
푹
카이사르에게 있어 사람을 죽이는 건 식사보다 더 쉬운 일이었다. 그 는 심장이 꿰뚫려 즉사한 아비를 무감하게 내려다보다 몸을 돌렸다. 이젠 고깃덩어리에 불과하게 된 아 비였던 것의 죽음은 카이사르에게 서 어떤 것도 불러일으키지 못했 다.
얼마 남지 않은 아비의 일생을 편 안히 끝내 주었던 건 카이사르의 마지막 자비였다.
'이번 작위를 물려받은 크리시스 공작 말일세, 글쎄 제 아비를 죽이 고 공작위에 올랐다더군!'
'그게 정말인가? 하기야 그 새빨 간 눈이 섬뜩하더니...... 악마 새끼 였군.'
분명 공식적으로 알려진 전대 공 작의 사인은 병사였건만, 카이사르 가 아비를 죽였다는 소문은 제국에 서 공공연한 비밀처럼 퍼져 나갔 다.
'사용인들 사이에 말이 샜군.'
카이사르는 사람들이 저를 피에 미친 악마라 욕하든, 아비를 죽이 고 공작위에 오른 냉혈한이라 부르 든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다만 입 이 가벼운 이들을 곁에 두고 싶지 않았을 뿐.
카이사르는 공작위에 즉위하자마 자 대부분의 사용인들을 내쫓고 소 수로만 저택을 채웠다.
'크리시스 공작이 사용인들을 다 내쫓았다면서?'
'아니. 내가 듣기로는 다 죽였다 던데?'
'소문으로는 공작가 저택에서 사
용인들이 하루에도 열댓씩 죽어 나 간다더군.'
그 일련의 과정 또한 수많은 헛소 문을 만들었지만, 카이사르는 퍼지 는 소문을 막지 않았다.
어느새 카이사르는 제국에서 인간 거죽을 뒤집어쓴 악마 새끼가 되어 있었으나 그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 했다.
'날파리들이 안 꼬이는군.'
보통이라면 갓 작위에 오른 젊은 공작에게서 하나라도 얻어먹기 위
해 날파리들이 달라붙을 터인데, 사람들은 그의 악명 덕분에 그림자 만 비쳐도 도망갔다.
카이사르는 소문처럼 사람을 보기 만 해도 베는 망나니는 아니었으나 자신을 건드리는 이를 가만히 놔둘 천사도 아니었다. 그는 귀찮게 검 을 휘두를 일이 없다는 것이 기꺼 웠다.
그리고 공작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된 스무 살의 어느 날.
'각하. 이제 슬슬 혼인을 하시고 후사를 보심이......
카이사르는 가신들에게 후계를 낳 아야 한다는 독촉을 받았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카이사르는 자신의 인생에서 사랑 이라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가 신들의 추천을 따라 가신 가문 중 하나인 백작가의 여식과 사랑 없는 결혼을 감행했다.
'고, 공작 각하를 뵙, 습니다
아내는 수많은 악명을 떨치는 카 이사르를 두려워했다. 카이사르는 그녀에게서 귀찮은 소리를 듣지 않 기 위한 후계 하나만 보면 충분했 다. 결혼한 그날 밤을 그녀와 함께 보낸 카이사르는, 이후로 그녀를 자유롭게 놔 주었다. 그녀가 남자 들을 만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는 카이사르의 스무 살 겨울, 칼을 낳고 죽었다. 카이사르는 묵 묵히 그녀의 장례를 치러 주었다.
이후 공작가 저택에 남은 크리시 스는 카이사르와 칼뿐이었다. 둘은
한 저택에 살면서도 남처럼 살았 다.
그의 성정을 빼닮은 칼은 어려서 부터 주변에 지나치게 관심이 없었 고, 아버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잘 잤느냐.'
'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그래.'
그들의 일상은 지나치게 딱딱했 다. 칼에게서 자신을 향한 살가움 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으나, 카 이사르는 그다지 불만을 가지지 않 았다.
카이사르는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열정은 없어도 자신의 아비 같은 이가 되고 싶진 않았다. 그럴 바에는 형식적인 부자 관계를 유지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카이사르는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 고, 칼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둘은 서로에 대한 불만이 없었다.
카이사르 크리시스는 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시시때때 폭풍처럼 들이닥치는 지루함을 하루하루 버 티고 있는 것뿐이었다.
아비처럼 무능한 인간이 되고 싶 진 않았기에 공작으로서의 의무는 다하고 살았다. 허나 그에게 있어 즐거운 일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 았다.
부의 정점에 올라 최고라는 것들 만 누리고 쾌락의 정점도 경험해 보았다. 안 해 본 게 없다 장담할 수 있을 정도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으나, 결국은 그 모든 것이 따 분했다.
죽고 싶진 않으나 살고 싶지도 않 았다. 숨이 붙어 있기에 연명하는 삶이었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용병 일 을 하고 있는 미르입니다.'
그런 카이사르 앞에 어느 날 나타 난 딸이라는 존재는 죽은 자들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존재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