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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31화 (31/254)

31 화

카슈미르가 아리아를 안고 찾아온 날. 소드 마스터의 예민한 감각을 가진 카이사르는 소란의 대상이 저 택 앞에 도착한 순간 잠에서 깼다.

' 위험하다.'

거대한 존재감이 다가옴을 실감함 과 함께, 온몸에 털이 솟고 눈이 번쩍 떠졌다.

스릉.

카이사르의 침대 옆에 기대어 있 던 검집에서 서슬 퍼런 검날이 드 러났다. 카이사르가 입매를 굳혔다. 다가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확실히 예사롭지 않았다.

'북부인들의 침입인가.'

대군이 몰려오고 있다고 느낄 정 도로 위압적인 존재감이었다. 요즘 들어 북부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던 만큼, 카이사르는 여러 가 정을 세우며 혹시 모를 상황을 위 해 통신구를 준비했다.

' 그런데......

카이사르의 미간이 좁아졌다. 다 가오는 존재감이 기묘하게도 익숙 했다. 카이사르는 늘 죽은 이의 것 과 닮아 있던 심장 박동이 점점 더 고양됨을 느끼며 창문 앞으로 발걸 음을 옮겼다.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사 방에 터지는 눈부신 빛. 주위가 잠 시 빛에 잠식되다 다시금 밤의 장 막 아래로 침잠했다. 공작가를 지 키던 방어막이 한순간에 박살 났

다.

최대한 기척을 죽인 채 창에 손을 짚고 마당을 내려다본 카이사르는 순간 숨을 멈췄다.

고삐 없는 맹수처럼 위협적으로 날뛰는 기운. 숨 막힐 정도로 우울 하고 음습한 무언가. 끝없이 아래 로 떨어지는 절망을 담고 폭주하는 오러.

'•..."미르.'

"제기랄! 문 열어! 나오라고!"

난폭한 마나를 폭주하듯 터트리는 미르가 공작가의 대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난장판이 된 긴 검은 머리• 물기 에 젖어 처절하게 빛나는 진분홍빛 눈동자. 제 품에 안은 작은 여자아 이가 자신의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순간 카이사르는 심장이 떨어지는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문 열어! 제발!"

미르가 처절하게 소리쳤다. 작은

손이 끊임없이 문을 두드린다. 문 위로 붉은 핏물이 묻어났다. 카이 사르는 어째서인지 그 작은 인영에 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

카이사르는 문득 생각했다. 미르 가, 자신과 조금은 닮은 것 같다고.

윤기가 흐르는 검은색 곱슬머리 도, 붉은 기가 도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도, 모두 자신과 닮아 있었 다.

'......그 여자.'

순간 떠오른 한 여자의 얼굴에 카 이사르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사람 둘 살린다 생각하시고 한 번만 도와주세요. 제 마법, 제 능 력, 제 영혼까지 모두 공작님의 것 입니다, 대가로 무얼 요구하시든 평생을 바쳐 갚아 내겠습니다! 제 가, 제 사랑하는 것을 지킬 수 있 도록...... 한 번만, 한 번만 도와주 세요.'

카이사르는 그의 생에 딱 한 번 누군가를 대가 없이 도운 적이 있 었다. 끝없이 절망하고 있는 와중

에도 심지가 꺾이지 않은 굳건한 태도로 제게 간원하던 한 여자를.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소중한 것 을 지키려 하던 존재에게 감화되어 몸을 섞었었다.

' 아.'

그 순간 카이사르는 미르에게서 느끼던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냈다.

'제가 다 할 테니 침대 한 번만 빌려 주시죠.'

미르는, 그 여자와 닮아 있었다.

카이사르는 짙은 눈으로 일렁이는 진분홍빛 홍채를 응시했다. 그는 저 눈을 본 적이 있었다. 자신보다 소중한 무언가를 지켜야 할 때만 나오는 처절한 눈동자였다.

' 저건가.'

무감각한 그의 시선이 미르의 품 속에 안긴 여자아이에게 향했다. 아이에게서 나는 신경을 건드리는 숲의 향취는 분명 요정들의 것이었 다. 그 사실에 붉은 눈동자가 잠시 흥미로 반짝였으나, 이내 증발하듯 빛을 잃었다. 무감한 눈동자는 시

선이 미르에게로 옮겨지고 나서야 잃었던 빛을 되찾았다.

어떤 것에서도 오랫동안 감흥을 느끼지 못하던 카이사르는, 미르에 게서 터질 듯 강렬한 무언가를 느 끼고 있었다.

쾅! 쾅!

저택 일대가 미르의 작은 손이 문 을 두드림에 따라 혼들렸다. 강철 로 만들어진 문에 흠집이 나는 동 시에, 작고 투박한 손에선 핏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미르는 주먹 뼈 가 으스러지기 시작해도 두드리기

를 멈추지 않았다.

카이사르가 얼굴을 구겼다. 작은 손이 피를 흘리며 문을 두드림에 따라 제 속에 있는 무언가도 무너 지는 것만 같았다. 그의 속에서 무 언가가 들끓어 올랐다. 분노와 닮 은 감정이 솟구침과 동시에, 카이 사르는 무언가를 부숴 버리고 싶은 짙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미친 건가.'

늘 잔잔하던 심장이 폭풍을 만난 돛단배처럼 울렁이는 것이 익숙하 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피가 흐 르는 미르의 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만.'

카이사르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미르의 살갗이 찢어질 때마다 제 피부 또한 난도질되는 느낌은 기묘 하면서도 고통스러웠다.

미르가 다치지 않았으면 했다. 보 다 못한 그가 문을 열어 주기 위해 몸을 돌릴 때쯤.

"빌어먹을! 다 물러서!"

거칠게 숨을 고르던 미르가 자신 의 허리춤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쉬익!

난폭하게 날뛰던 마나가 검날 주 위로 모인다. 불안정한 상태를 표 하듯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들리는 마나를 억지로 검 주위에 응집시킨 미르가 오러를 내뿜었다.

미르가 검은 오러를 사용한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칠흑과도 같은 검은 오러로 마수라는 재앙을 난도질하는 재앙들의 재앙.

카이사르 크리시스는 미르의 오러 를 처음으로 두 눈에 담았다.

그것은, 절망 그 자체였다.

'왜.'

의문이 치밀어 올랐다.

오러는 한 사람의 검사가 자신의 한계와 부딪쳤을 때 찾아낸 자신만 의 정답이다. 오러는 그 정답을 기 반으로 형성되었으니, 찾아낸 정답 이 어두울수록 오러도 어두운 것이 정석이었다.

카이사르가 소드 마스터를 앞에 두고 찾은 답은 '학살'이었다. 그는 방해하는 모든 것을 베어 냈으니 까. 그 때문에 그의 오러는 피를 닮은 검붉은 색을 띠었다.

'하지만 저자는.'

감히 빛을 허용하지 않는 아득한 검정. 끝없는 어둠. 카이사르는 여 태껏 단 한 번도 미르의 오러보다 어두운 오러를 본 적이 없었다.

'넌 어째서 그런 색을 가지게 되 었을까.'

가면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고 싶다는 이유 모를 충동을 느 끼며, 카이사르는 아연하게 미르의 행보를 관전했다.

그리고 몇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 는 크리시스 저택의 대문이 미르의 일격 아래 개박살 난 것은 얼마 지 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하하하!"

카이사르는 아주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악마가 산다는 소문이 파다한 크 리시스 공작가의 문을 두드리는 것 도 모자라 이제는 유구한 역사의 저택을 개박살 낸 미르가 밉지 않 았다. 아니, 오히려 그가 느끼는 감 정은.

' 사랑스럽군.'

카이사르는 자신이 미르만 보면 이상해진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그 것이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미르 의 손이 다치는 것을 본 순간 무언 가 돌아 버리는 것 같았던 불쾌한

경험을 제외하곤 미르로 인한 감정 의 변화들이 즐겁기만 했다.

문을 가루로 만들고 당당하게 저 택으로 입성한 미르는 그의 시야에 서 사라졌다. 카이사르는 유쾌함을 느끼며 방문을 나서 계단 옆 벽에 몸을 숨겼다.

"......저택의 총괄 집사 테일러입 니다. 성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 까?"

" 미르입니다."

"네, 미르 님. 어쩐 일로......

"공작님부터 불러 주세요. 나중에 다 설명하겠습니다."

'내가 목적이었나.'

카이사르는 상황이 점점 더 흥미 진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왜 인지 피어오르려는 미소를 누르며 상황을 관전했다.

"......죄송하지만 그건 좀 곤란합 니다. 공작님께선 이미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홀 일대가 살기로 가득 찼다. 카 이사르는 같은 소드 마스터인 자신 조차 순간 숨이 턱 막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지금 당장 공작을 봐야겠습 니다."

갈라지는 목소리가 처절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부터 말 씀해 주시죠. 이렇게 나오시면 제 가 도와 드릴 수가 없습니다."

긴 세월 동안 공작가의 집사로서 종사한 테일러는 피부를 저미는 살 기 앞에서도 이성적이었다.

테일러의 물음에 죽은 눈을 하는

미르.

'왜.'

자신의 가슴이 이렇게 저린지는, 알 수 없었다.

"동생, 동생이 아픕니다. 제발 공 작을 불러 주세요......•"

처절한 목소리에 왜인지 카이사르 는 당장 홀 아래로 뛰어내려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조금만 더.'

갑작스러운 충동과 이성 사이에서 고뇌하던 그는, 본능을 누르며 상 황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마음먹었 다.

"공작, 카이사르 크리시스 공작 불러와! 불러오라고!"

애써 침착함을 폭발하듯 날뛰기 여자아이가 피를 서였다. 미르는

흘리며 자신을 찾았다.

유지하던 미르가 시작한 건 품속 토하기 시작하면 처절하게 눈물을

'내려갈까? 아니야.'

카이사르는 아까부터 이성을 배반 하고 요동치는 본능에 저항해야 했 다. 미르의 눈에서 눈물이 흐를 때 마다 그는 심장이 뚝뚝 떨어지는 이상한 감각을 맛봤다.

"공작님은 지금 잠자리에 드셔 서••...

"그대는 누굴 섬기는 자인가!"

그리고 미르는,

"나는 크리시스 공작의 딸, 카슈 미르 크리시스다! 나를 내 아버지 앞으로 안내해!"

거대한 폭탄을 던졌다.

'뭐......?'

심장이 아찔한 고공낙하를 계속한 다. 심장이 뛰는 속도가 점점 빨라 졌다.

그제야 어지럽게 펼쳐져 있던 퍼 즐들이 맞아 떨어졌다. 사라진 그 여자와 아이. 붉은 계열의 눈동자. 느껴지던 묘한 기시감. 이상하게 날뛰던 감정들.

카이사르는 벽에 몸을 기대었다. 모든 것이 지루하던 그에게 너무도

오랜만에 가해진 신선한 충격이었 다. 그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미르, 아니 카슈미르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리고 미르가 가면을 벗었다.

툭.

가면이 떨어짐과 동시에 드러난 얼굴은, 카이사르와 닮아 있었기에.

사랑스러웠다.

'드디어 미친 건가.'

카이사르는 제 입을 턱 막았다. 자신에게서 슬슬 새는 웃음이 어색 했다. 이성과 본능이 따로 노는 것 같았다.

' 재밌군.'

카이사르는 제 마음 한편에서 꿈 틀거리는 감정을 흥미로 단정 지었 다. 그 이상이라는 것을 그도 짐작 은 하고 있었지만, 그는 그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하는지 몰랐 다.

"막아서는 자는, 모두 벨 것이 다."

' 이런.'

이러다 저택이 무너지게 생겼다. 사실 아이가 정 무너트리고 싶어 한다면 그러라고 놔두고 싶었지만, 자신을 부르려는 시위에 불과한 만 큼 슬슬 중재해야 할 듯했다.

"물러서라, 테일러."

카이사르는 꿈틀거리는 이상한 감 정을 누르며 느긋하게 테일러를 막 아 세웠다.

그 순간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살기에 오염되어 자신의 눈만큼이 나 붉게 물든 눈동자.

광포함이 넘실거리는 눈동자 아래 에 담긴 것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절망의 형상이었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왜인지는 그 도 몰랐다. 자신이 유일한 희망이 라도 되는 양 처절하게 따라붙는 아이의 물기 어린 눈동자가 카이사 르의 속을 울렁이게 했다.

마침내 아이 앞에 섰다. 가까이에 서 본 아이의 꼴은 생각보다 더 처 참했다. 그 모습이 또 속을 흔들어 카이사르는 괜히 불퉁하게 살기를 내뿜었다. 아이가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두 소드 마스터의 기 싸움이 잠시 이어지는가 싶더니, 이를 악문 아 이가 먼저 살기를 거두었다.

챙그랑.

작은 손이 필사적으로 쥐고 있던 검을 놓았다. 소드 마스터가 같은 소드 마스터 앞에서 먼저 검을 놓

는다는 건 목숨 줄을 놓는 행위와 같았기에, 그는 묘한 기분에 휩싸 일 수밖에 없었다.

'저것이 그리도 소중할까.'

바들거리는 마른 팔이 소중히 안 고 있는 작은 여자아이에게 스치듯 시선을 주었다. 세상 다시없는 보 물을 품에 안은 모습이었다.

"재밌군."

카이사르가 희미하게 웃었다. 자 신의 딸이면서 저렇게 무언가에 간 절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재밌고,

이상했다.

성큼 카슈미르에게 다가간 그가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피 부가 눈물로 젖어 끈적거렸다.

"네가 내 딸이라고?"

바야흐로 39년 동안 사랑을 모르 던 카이사르 크리시스가 남은 일생 동안 유일하게 사랑할 것을 만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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