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화
"아가씨의 상태는 어느 정도 진 정되었습니다. 정기를 흡수하는 속도가 빨라 한숨 자고 일어나시 면 일상생활에 문제가 없으시겠지 만 그래도 이후 일주일 정도는 푹 쉬시는 게 좋겠군요."
아리아의 맥박을 잰 의원이 밝 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깨끗한 침대에 누워 고른
숨을 뱉는 아리아를 보며 거칠게 숨을 뱉었다.
'끝났다.'
내 인생을 괴롭히던 재앙이 마 침표를 찍었다. 지독하리만치 길 던 고통의 순간들이 공작가의 힘 을 빌리자 허무할 만큼 쉽게 끝났 다. 그 사실이 못내 허탈하면서도 기뻤다.
'기분이 이상해.'
힘없는 웃음이 헤실헤실 튀어나
왔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기쁘고, 벅차오르도록 슬프며, 괴롭도록 쓰라렸다. 너무 많은 감정이 물밀 듯이 쓸려와 오히려 감정이 느껴 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온몸에 긴장이 탁 풀리며 살짝 비틀거리는데, 그런 내 어깨 위로 올라온 큰 손이 날 지탱했다.
"한 병만 먹여도 충분한 건가."
"네. 적어도 이후 5년간은 정기 부족에 휘말리지 않을 겁니다."
카이사르는 눈 뜨고는 못 봐 줄
내 처참한 꼴을 보곤 당장 들어가 서 치료를 받으라고 했지만, 난 아리아가 멀쩡해지는 것을 보기 전엔 잠들 수 없었다. 태어나 처 음으로 떼까지 부려 아리아가 정 기를 섭취하는 모습을 눈에 담은 나는 휘몰아치는 감정의 범람 속 에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 아리아.'
내 작은 세상.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옮겨 누운 아리아 옆에 꿇어앉았다.
살점이 터져 피범벅이 된 손을 조심스레 들어 피가 묻지 않은 손 끝으로 아리아의 뺨을 쓸었다. 창 백하지만 분명 살아 있는 이의 온 기를 품고 있는 뺨을.
"......살았구나."
뱉으면 증발해 거짓이 될까 꾹 삼키고 있던 한 문장을 한숨처럼 내뱉었다. 꿈이라고 해도 믿을 만 큼 현실성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손끝에 닿는 온기가 지독한 현실 감을 불러일으켜 눈물을 떨어트리
고 말았다.
"••••••다행이다••••••
소리 죽여 울며 아리아의 손등 위로 입을 맞췄다. 드디어. 평생 을 꿈꾸고 노력해 왔던 염원이 이 루어졌다. 주위가 고요해졌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이유는 없었 다.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며 떨 리는 두 손으로 아리아의 창백한 손을 붙잡았다.
감히 형용조차 할 수 없는 감정 의 폭포가 밀려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신음조차 내지 않고 눈물만 흘 리고 있는 나를 보고 있기가 지루 할 법도 한데, 카이사르와 테일 러, 그리고 의원은 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꽤 오랜 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기다려주었다. 얼마 나 눈물을 흘린 건지 어지러워 살 짝 비틀거릴 즈음이 돼서야 뒤에 서 가만히 지켜보던 카이사르가 내게로 다가왔다.
"이러다 탈진하겠군. 시간이 더 필요한가?"
상체를 굽힌 그가 허리를 여민 샤워 가운의 긴 끈을 들어 눈물로 뒤덮인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 손길이 지나치게 다정해 넋을 놓 고 있다가 카이사르가 여전히 샤 워 가운 하나만 걸치고 있음을 깨 닫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죄, 죄송합니다. 이제 괜찮습니 다."
손등으로 눈물을 벅벅 닦아 내 곤 굽혔던 무릎을 일으키는데, 순 간 현기증이 몰아치며 몸이 휘청
거렸다.
"조심."
커다란 손이 등을 받쳤다. 카이 사르의 표정은 여전히 잔잔했으나 나는 그의 앞에서 소드 마스터답 지 못한 모습만 보여 준다는 생각 에 민망할 뿐이었다. 황급히 혼자 몸을 지탱하려 다리에 힘을 주었 지만 한 번 더 휘청거렸을 뿐, 지 친 몸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쯔 "
느리게 혀를 찬 카이사르가 가 볍게 날 들어 올려 제 팔 위에 앉 혔다.
"호, 혼자 걸을 수 있습니다!"
그의 하얀 샤워 가운 위로 내 피와 흙먼지들이 묻어났다. 난 당 연히 기겁하며 발버둥 쳤다.
"퍽이나. 가다가 쓰러지겠군."
반박할 말을 잃고 입술을 꾹 물 었다. 사실 난 지금 정신을 잡고 있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로 지쳐
있었다. 억지 부리다가 넘어져서 사고를 치느니 안기는 게 낫다는 미친 생각까지 할 정도로.
"테일러. 마리아에게 5분 안에 내 옆방을 사람 묵을 수 있는 상 태로 만들고 그 방 욕실에 목욕물 올리라고 전해. 폴. 타박상에 사 용하는 연고 가져와라."
"네, 주인님."
" 알겠습니다."
발버둥 치기도 지친 내가 힘을 푼 채 안기니, 만족스럽게 웃은 카이사르가 두 사람에게 명을 내
렸다. 테일러는 빠른 걸음으로 방 을 나가고, 의원 폴은 사물함을 뒤적이더니 연고 하나를 카이사르 에게 건넸다.
"그럼 가지."
피곤함에 절어 축 늘어진 날 확 인한 카이사르가 발걸음을 옮겼 다. 얌전히 그에게 안겨 방을 나 갔다.
어둠에 잠긴 공작 저는 기묘한 빛을 띠었다. 장엄하면서도 음습 한 분위기. 어둠이 깔린 복도를
가로지르는 동안 카이사르와 나 사이에선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닿아 있는 피부를 통해 그의 체온을 느끼며 졸린 눈꺼풀 을 겨우 들었다.
"씻고 자라."
겨우 눈만 뜨고 있는 나를 지그 시 내려다본 카이사르가 내 머리 위로 손을 올리고 느리게 쓰다듬 었다. 피와 흙먼지로 더러워진 기 다란 검은 머리칼이 그의 긴 손가 락 사이로 얽혔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뵙습니다, 카슈미르 아가 씨. 아가씨의 시중을 들게 될 마 리아입니다."
어느새 도착한 방문 앞에 서 있 던 중년의 여성이 허리 굽혀 인사 했다. 조금 멍한 상태로 카이사르 를 올려다보며 내려 달라는 눈빛 을 보내니 어쩐지 못마땅한 표정 을 지은 그가 날 내려 주었다. 땅 에 툭 착지해 살짝 비틀거리며 마 리아에게로 다가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세를 지게
된 카슈미르입니다."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각도 잡힌 인사를 했다. 잠시 주위로 침묵이 돌았다.
"......아가씨. 부디 편하게 말해 주세요. 전 아가씨의 종입니다."
"음, 전 이쪽이 편합니다."
식은땀을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마리아에 뺨을 긁적였다. 내 뒤에 서 있던 카이사르가 옅게 한 숨을 뱉었다.
"카슈미르 크리시스."
카이사르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낯설었다. 순간 굳어 그를 휙 돌 아보니 그가 팔짱을 낀 채 날 지 그시 응시했다.
"넌 이곳에 신세를 지게 된 게 아니다. 이곳은 네 거다."
단조로운 목소리로 내뱉는 말들 이 현실감 없었다. 어떻게 반응해 야 할지 몰라 굳어 있으니, 다시 금 한숨을 쉰 카이사르가 직접 나 서 방문을 열어 주었다.
"곧 실감이 나도록 만들어 주마. 다만 오늘은 우선 자는 게 좋겠 군. 지나치게 피곤해 보이니."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지금 나 는 이게 현실인지 가물가물할 정 도로 정신이 빠져 있었으니까. 멍 하니 그를 올려다보고만 있자, 희 미하지만 분명한 미소를 지은 그 가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네 옆방이 바로 내 방이니 무 슨 일이 생기면 바로 찾아와라."
잘 자거라.
무심한 목소리에 담겨 있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참기 힘들 정도로 달콤했다. 가슴께가 간지러웠다. 멍한 정신으로 달콤함에 잠겨 허 우적거리는 사이, 그는 내게서 등 을 돌린 채 옆방으로 들어가 버렸 다.
'내가...... 이 호의에 보답할 수 있을까.'
문득 치솟은 의문에 내 두 어깨 가 무거운 짐이라도 진 양 무거워
졌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 무자비한 다정함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 다.
"아가씨."
입술을 꾹 문 채 고개를 숙인 나를 부르는 인자한 목소리. 내게 로 다가온 마리아가 부드러이 웃 음 지었다.
"생각이 많으시겠죠. 걱정과 부 담도 많을 거고요. 다만 이 늙은 이가 아가씨께 무례를 각오하고도
말씀드리고 싶은 건 딱 하나랍니
천천히 내 손을 잡은 마리아가 싱긋 웃었다.
"아버지가 자식을 아끼고 보살 피는 건 당연한 이치예요."
당연한 이치들은 늘 내 삶에서 빗겨 나가곤 했다. 내 18년 인생 동안 날 위하는 아버지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기에, 아마 내가 마 리아가 한 말들을 이해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렇군요."
하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던 것은, 한 번쯤은 믿어 보고 싶었 기에.
나도, 아버지가 있었으면 했다.
* * *
"옷을 벗어 주세요."
각양각색의 거품과 입욕제를 푼 욕조 앞으로 날 이끈 마리아가 멀
뚱히 서 있는 내게 말했다.
'좀 민망한데.'
어색하게 쭈뼛거리다 마리아의 종용하는 눈빛에 하는 수 없이 셔 츠 단추를 두 개쯤 풀었다.
' 아.'
단추를 세 개째 풀다 말고 손을 멈췄다. 옷 틈새로 드러나기 시작 한 피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말 았다. 기다리는 마리아의 시선을 피해 최대한 옷을 여미며 웅얼거
렸다.
"그냥 혼자 씻으면 안 되겠습니 7J\ ?"
"귀족 가 영애로서 목욕 시중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랍니다. 부끄 러워하지 마세요, 아가씨."
내가 단지 수줍어하고 있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 건지, 마리아가 인자하게 웃으며 날 달랬다. 입술 을 꾹 물었다.
'디디 앞에서야 상처 치료를 위 해 어쩔 수 없었다지만.'
그땐 상황이 급박했던 만큼 주 저하고 말고 할 틈이 없었다지만, 지금은 위급한 것도 아닌데 타인 이 내 몸을 이리저리 만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단추 위에 손을 올린 채 주저했다.
'••••••부끄러워.,
평생 용병으로 살아온 몸. 요령 도 없이 검 한 자루만으로 마수들 과 맞서 싸워 온 내 몸이 성할 리 없다.
'천하다고 싫어하면 어떡해.'
여태껏 인생을 후회하진 않지만, 만신창이 몸을 공작가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이 꺼려지는 건 사실 이었다. 그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 으니까. 심해 아래로 처박히는 자 존감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정 부끄러우시면 제가 벗겨 드 릴까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서 다가 오는 마리아를 보며 황급히 고개 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벗겠습 니다."
'그래. 별것도 아닌데...... 마리 아도 얼른 일 끝내고 쉬어야지. 나 때문에 자다가 깼을 텐데.'
괜히 유세를 떠는 것처럼 보이 고 싶지 않은 마음에 스스로를 채 찍질하며 단추를 구멍 틈새로 밀 어냈다.
GEE
=〒, =〒, =〒•
단추가 풀려 나가고, 더러운 셔 츠가 바닥에 떨어진다. 칼로 난도 질한 고깃덩어리 같은 몸이 모습 을 드러냈다.
무자비한 마수의 공격 아래 무 사한 곳은 있을 수 없다. 아리아 가 걱정하니까 얼굴은 필사적으로 부상을 피했으나 이외에는 다진 고깃덩어리와 진배없었다.
사무직에 종사하는 이들의 손은 펜을 쥐는 증지에 굳은살이 박이 고, 수작업을 하는 이들의 손은 끝이 닳는다. 인간의 몸은 그 존
재가 살아온 삶을 몸 위에 새겼
생겼을 당시엔 목숨을 위협하던 치명상이었으나 이젠 날 죽이지 못한 흔적일 뿐인 거대한 흉터들. 벌레처럼 온몸에 다닥다닥 붙은 작은 흉터들. 드문드문 독 때문에 죽어버린 피부조직들과 부각된 혈관들. 온몸에 박인 굳은살.
내 몸도 내 삶을 새겼다. 이 짓 이겨진 몸뚱이가 용병 미르의 삶 이었다.
쨍그랑!
마리아의 손에 들려 있던 향유 가 거친 파공음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마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입술이 옅게 떨렸다.
"아•..."
마리아가 제 입을 턱 막았다. 확 장된 그녀의 동공이 그녀가 얼마 나 놀랐는지 알려 주었다. 내 몸 을 훑는 그녀의 시선에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워지며 온몸에 열이 올랐다.
"모, 목욕은 필요 없습니다! 제 몸이, 너무 징그러워서, 죄송합니 다. 진짜, 놀라게 해 드리려는 건 아니었는데, 제가......
지나치게 달아올라 욱신거리기 까지 하는 뺨을 진정시키려 노력 하며 셔츠를 주워 황급히 팔을 끼 웠다. 당황스러움에 단추를 채우 는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아니, 아니에요, 아가씨. 징그 러운 게 아니에요."
황급히 다가온 마리아가 내 손 을 꼭 잡았다. 난 고개를 들지 못 하고 바닥 타일에 시선을 고정하 다, 겨우 눈을 슬며시 들었다.
"어......
마리아와 눈이 마주친 난 아연 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마리아는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