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화
"......왜 우십니까."
어쩔 줄 몰라 뻘뻘거리며 손을 들어 마리아의 눈물을 닦아 주었 다. 내 손길을 거부 없이 받아들 인 마리아가 크게 훌쩍거렸다.
"왜 이렇게 다치셨어요...... 얼 마나 아프셨을까......
나를 위해 울어 줄 사람이 있다
는 것에 기분이 이상해져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마리아를 달래듯 횡 설수설 말했다.
"괜찮습니다. 더는 아프지도 않 고...... 전 소드 마스터니까요. 이 런 걸로 힘들어했다면 이 경지까 지 오지 못했을 겁니다. 정말, 괜 찮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니. 아니에요, 아가씨."
마리아가 제 눈물을 닦아 냈다. 슬픔을 담았음에도 굳건한 눈동자 가 날 따스하게 응시했다.
"이 세상에 아무렇지 않은 상처 는 존재하지 않는답니다."
'아.'
눈을 질끈 감았다. 다정이 지나 치다. 내가 무얼 그리도 잘못했는 지, 이곳 사람들은 내가 또다시 소중한 것을 만들도록 종용했다. 소중한 것은, 늘 날 아프게 하는 데.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살아왔으 나, 아무렇지 않은 적은 없었다.
늘 아팠다. 매일 밤 상처가 살점 을 파고드는 기분을 느꼈다. 행복 할 수 없음에,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음에 고통스러워했다.
"이제 괜찮아요, 슈슈 아가씨."
나를 달래는 다정한 목소리에 솟구치던 감정이 느리게 흘러내렸 다.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닦았 다.
다정에 잠겨 죽을 것 같은 기분 이었다.
목욕이 끝난 후, 나는 내 몸에 난 상처들을 보며 긴 잔소리를 늘 어놓는 마리아에 의해 온몸에 연 고를 바르고 나서야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꿈은 아닐까'
다급하게 일어난 모든 일이 지 나치게 현실감 없었다. 거대하고 푹신한 침대에 푹 잠긴 채로 발가 락을 꼼지락거렸다.
'내일은 어떻게 될까.'
입술을 꾹 물었다. 내일이 되면 카이사르의 변덕이 끝날까 봐 두 려웠다. 내가 어제 잠시 미쳤었다 며 나와 아리아를 죽이려 들면 어 떻게 대응할까 열심히 고민하다, 어느 순간 가슴이 아파져 생각을 그만두었다.
보드라운 이불을 꽉 쥐었다.
두렵고, 의심되고, 걱정됐으나, 동시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행복했다.
'••••••몰라.'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공작의 변덕이, 최대한 오래 지 속됐으면 좋겠어.'
눈을 스르르 감았다. 더는 밀려 오는 수마를 피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소드 마스터가 된
이래 처음으로 잠을 푹 잤다.
그리고 아침.
아침 식사를 위해 홀에 들어선 나는 거대한 접시에 먹음직스럽게 놓인, 내 몸의 두 배만 한 짐승의 대가리를 한 번, 음식 옆에 남겨 진 쪽지를 한 번 번갈아 보며 입 을 벌렸다.
[네가 너무 말라 툭 치면 뚝 꺾 일 것 같기에 대륙에서 서식하는
가장 거대한 짐승의 고기를 구워 오라고 시켰다. 모두 먹어치우고 의원에게 검사를 받도록.]
내 아버지는...... 미친놈인가?
"와......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뺨 위로 시원 한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흰 눈이 쌓인 공작가의 정원은
아름다웠다. 코끝을 스치는 꽃향 기가 좋아 나도 모르게 입꼬리를 잔뜩 올렸다.
침대가 너무 푹신해서였는지 답 지 않게 늦잠을 자고 이른 오후가 되어서야 눈을 뜬 내게 들린 소식 은 카이사르가 황제의 부름으로 아침 일찍 입궁했다는 것이었다. 아리아도 아직 깨어나지 못했기 에, 나는 거대한 저택 홀에서 혼 자 아침식사를 해야 했다.
'저...... 저 혼자 먹는 건데 이건 너무 많습니다......
'카슈미르 아가씨께선 딱 보기에 도 저체중입니다. 얼핏 봐도 근육 량은 상당한데 살집이 너무 없어 서 온몸이 근육이에요. 많이 드셔 야 합니다. 살집을 늘려야 하는 만큼 음식은 지방과 단백질 위주 로......
황궁 회의실에나 볼 수 있을 법 한 기다란 탁자 앞에 혼자 앉은 나는 쏟아지는 의원의 잔소리를 들으며 탁자를 가득 채운 진수성 찬을 해치워야 했다. 난 탁자 음 식의 절반을 채우고 나서야 자리 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창문 밖에 정원이 예쁘던데, 잠 시 혼자 산책하고 와도 되겠습니 까?'
'혼자 가신다뇨! 위험할지도 모 르니까 저도 같이 가요!'
'......저보단 저랑 마주치는 사람 이 훨씬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아......
잠시 산책하고 온다는 말에 함 께 가겠다고 나서던 마리아는 내 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허리춤에 검을 차자 순순히 나를 보내 주었
"......예쁘다."
느리게 호흡하며 정원을 천천히 거닐었다. 눈송이가 내려앉은 땅 에 남은 발자국은 내 것 뿐이었 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장 눈의 요정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현실감 없이 아름다웠 다.
'봄엔...... 훨씬 아름다운 꽃들이 피겠지.'
추운 날씨로 앙상해진 나무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눈이 내린 정 원은 신비로운 매력이 있었으나, 역시 꽃이 가득 핀 봄의 정원이 훨씬 더 아름다울 것 같았다.
'하지만 과연 봄이 올 때까지 이 곳에 남을 수 있을까.'
씁쓸하게 웃음 지으며 하늘을 바라봤다. 허망한 한숨이 덧없는 입김이 되어 하늘로 사라졌다.
'참 이중적이지.
푸른 하늘을 보다 문득 그 언젠 가 나를 곧게 응시하던 푸른 눈동 자를 떠올렸다. 한겨울 밤의 손님 으로 찾아와 쉬이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을 남기고 간 정체불명의 남자를.
'디디에겐 이유 없는 호의를 믿 어 보라고 했지만......
이중적이게도, 나는 이유 없는 호의를 믿지 않았다. 기대하다 실 망하는 것에 지쳤고, 더는 긍정적 으로 생각하다 상처받고 싶지 않
았으니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 한 의심과 경계는 내게 일상과도 같았다.
'디디에게 이유 없이 친절했던 것도 내가 그런 친절을 받아 보고 싶었으니까.'
자조를 터트리며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속이 울렁거렸다.
카이사르의 이유 없는 호의가 다가온 지금, 나는 여전히 의심하 고 경계했다.
'단 한 번도 기대하지 않았던 것 들이니까. 내겐, 어울리지 않으니 까.'
편안한 잠자리. 질 좋은 식入E 무심한 듯 친절한 손길. 소중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
모두 내게 과분했다.
'내가 조금 더 순진했다면 이 상 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 었을까.'
넝마가 돼 버린 마음과 싸늘하
게 식은 지 오래인 동심을 찬찬히 더듬어 본다. 카이사르의 따뜻한 눈빛을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받을 수 있다면, 호의에 순순히 머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기엔, 너무 험난한 생을 살 았다.
그의 의중을 의심하고 또 경계 한다. 마음이 부드러워지려고 할 때마다 언제든 내쳐질 수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자각한다. 이런 과분한 것들은 하루면 충분하다고 끊임없이 되뇌었다. 아리아를 살
린 것만으로 공작가에 지울 수 없 는 빚을 졌다. 차마 다른 것을 더 바랄 수 없었다.
이런 꿈결 같은 일상이 이어질 거라는 망상은 하지 않겠다고, 절 대 분에 맞지 않는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고.
내일 당장 나가라고 해도 절대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다시금 굳 게 결심했다.
'다만 바라는 것은.'
아리아에겐, 이 호의가 머물기 를
나 때문에 다 뒤틀려 버렸다. 아 리아는 아리아 프레이야가 되어 행복해야 하는데 내 개입으로 망 쳐 버렸다.
'아리아. 나는...... 모두 널 위해 했던 것들인데...... 그것들이 네게 폐가 됐을까.'
고통스러웠다. 죄책감과 책임감 이 뒤섞인 검은 감정들이 목울대 너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만약 내가 관여하지 않았다면.'
여러 상념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수많은 '만약'들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내일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쫓겨나 다시 시궁쥐 삶으로 돌아 가도 괜찮다. 나는, 괜찮았다.
하지만 아리아는 그렇게 되선 안 된다.
'공작이 돌아오면...... 다시 한번 얘기를 해 봐야지.'
카이사르가 황궁에서 돌아오면 아리아를 입양하는 게 어떠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아리아는 세 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아이이 니, 내가 그랬던 것처럼 카이사르 도 아리아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확신했다.
그가 어제 믿기지 않는 자비를 베풀었던 것도 아리아가 너무 사 랑스러워 그랬던 것이 틀림없었 다.
'사실 액면가는 크리시스가가 더
나으니까. 어쩌면 프레이야 백작 가보단 크리시스 공작가가 더 좋 을지도 몰라.'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며 카이사 르에게 할 말들을 차근히 정리했 다.
잠시 아리아가 들어간 크리시스 세 가족의 그림을 상상했다. 뿌듯 하면서도 비참한, 이상한 기분이 었다.
'어.'
수많은 사념으로 발걸음을 채우 다, 어느 순간 발걸음이 멈췄다. 흐드러진 분홍빛 꽃을 피운 꽃나 무가 내 앞에 있었다.
눈송이가 내려앉은 가지들 사이 로 겨울바람에 휩싸인 꽃잎들이 휘날린다. 분홍빛 꽃잎들이 하늘 거리며 날아다녔다.
' 예쁘다.'
홀린 듯 꽃나무 가까이 다가갔 다. 떨어진 꽃잎들이 사박거리며 발아래 밟혔다.
'겨울에 피는 꽃나무라니.'
눈송이를 머금고 빛나는 꽃송이 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봄이고 겨울이고 가릴 것 없이 바빴던 내 게 이리 여유롭게 꽃나무를 구경 할 수 있는 지금은 상당히 낯선 시간이었다.
하얀 세상 위에 분홍빛 색채들 이 피어난 장관을 보며 말을 잃었 다.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꽃을 톡
건드려 본다. 부드러운 촉감이 생 생했다. 하염없이 나무를 올려다 보다, 문득 커다란 충동이 이성을 들이밀고 치솟아 올랐다.
'올라가 볼까.'
두꺼운 가지는 무척 튼튼해 보 이는 데다, 만에 하나 올라갔다가 가지가 부러진다고 하더라도 내 운동 신경으로 다치는 곳 하나 없 이 착지할 수 있었다.
'어차피 아무도 안 보니;까.
슬쩍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에선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못된 짓 을 저지르는 어린아이처럼 눈치를 살피다 나무 기둥에 발을 올렸다. 신이 나 볼이 살짝 달아올랐다.
나무를 올라가는 건 우스울 만 큼 쉬운 일이었다. 나는 그대로 날다람쥐처럼 재빠르게 가지를 타 고 올라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거대한 나뭇가지에 걸터앉았다.
나무 위에서 눈이 내린 정원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이지 현실감이 없었다.
어느새 다시 내리기 시작한 진 눈깨비가 눈앞에서 흩날렸다. 눈 도 싫고 겨울도 싫었지만, 그럼에 도 이곳의 겨울은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나는 놀라운 장 관에 넋을 놓았다.
'어렸을 땐 나무 타는 걸 그렇게 좋아했었지.'
하얀 입김이 하늘로 떠오르는 것을 보며 추억에 잠겨 들었다.
내가 어렸을 때, 하루가 버틸 수
없을 만큼 힘겨운 날엔 모두가 잠 든 밤에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고목 에 올라가 밤의 정경을 즐기곤 했 다.
'가지에 다리 걸치고 거꾸로 매 달려 있는 게 제일 재밌었는데.'
작게 키득거렸다. 다른 이들이 보면 기겁할 행위지만, 어려서부 터 짜릿한 걸 즐기던 나에겐 그것 만큼 재밌는 놀이가 없었다.
'......해 볼까.'
슬쩍 충동이 일렁거렸다. 겨울의 향기에 잠식되어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것 같았다.
어린 날로 돌아간 것처럼, 오금 을 가지에 받치고 몸을 거꾸로 뒤 집었다.
휙.
순식간에 세상이 거꾸로 변한다. 향긋한 향유 냄새가 폴폴 풍기는 긴 머리카락이 허공을 수놓았다. 상체가 앞뒤로 흔들렸다.
저절로 티 없는 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뒤집어진 정원, 뒤집어진 저택, 뒤집어진 하늘과 땅. 앞뒤로 혼들 리며 그 장관을 감상했다. 모든 것이 거꾸로 된 거울나라에 빠진 작은 소녀가 된 기분이었다.
천천히 눈을 감고 시각을 제외 한 다른 감각들에 집중한다. 머리 카락을 흔드는 겨울바람. 코를 간 지럽히는 꽃향기와 향유 냄새. 나 뭇잎이 사락거리는 소리. 온 우주 에서 혼자 동떨어진 것만 같은 몽
환경.
' 아.'
온몸이 노곤히 풀리고 늘 날카 롭던 직감이 죽은 듯 차분히 잦아 들었다. 그냥 이대로 영원히 잠들 고 싶다고 생각할 때쯤.
누군가, 내 볼을 쿡 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