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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34화 (34/254)

34 화

'어.'

느리게 눈꺼풀을 들었다.

몽롱한 정신에 흐려졌던 시선이 초점을 잡았다. 다시금 펼쳐진 거 울나라의 세상 아래.

내가 마주한 것은 제단 위에 흐 르는 피만큼이나 붉고, 광기에 사 로잡힌 것처럼 짙게 번뜩이는 한

쌍의 눈동자였다.

차가운 손이 내 뺨을 붙잡는다. 서늘하게 올라간 눈꼬리가 사르르 접혀 들었다.

광택이 나는 짧은 칠흑빛 머리 칼. 서릿발처럼 차가운 인상. 소 름 끼치는 아름다움. 차갑게 번뜩 이는 붉은 눈동자.

'강한 네가 날 지켜 줄 거 아닌 가.'

마음 한 곳에 선명하게 각인된

옅은 온기를 담은 목소리.

" 잡았다."

내 이복형제, 칼 카이사르 드 하 이마 크리시스였다.

'••••••어?'

여전히 거꾸로 뒤집힌 채로 두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꽤 높은 가지 위에 올라와 있었으나 칼의 키가 컸던 덕에 바로 정면에 칼의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떨어지는 눈송이보다 더 차가워 보이는 서늘한 인상. 미묘한 빛을 띠고 나를 지그시 응시하는 적안.

' 미친.'

입이 벌어지며 뇌가 굳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동시에 나 무 위에서 추락했다.

"••••••이런."

그 순간 내 몸을 잡아채는 손길.

"어."

머리로 닿아 오는 딱딱한 가슴 팍에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단단 한 팔 너머로 미지근한 온기가 느 껴졌다. 멍하니 고개를 들어 칼을 올려다보았다. 날 내려다보는 그 의 입가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가 득 퍼졌다.

"이번엔 내가 받았군 그래."

'떨어지시죠. 받아 드리겠습니

다.'

'왼팔이 물리지 않았었나.'

'칼 정도는 충분히 들 수 있습니 다.'

지친 칼을 안아들었던 한밤중 숲 속에서의 일을 연상케 하는 한 마디였다. 그의 눈꼬리가 휙 접혔 다. 애처럼 나무 위에 대롱대롱 달려 있었던 걸 들킨 것도 모자라 추락하며 그에게 안기기까지 했다 는 사실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

"저 착지할 수 있었습니다!"

"강한 미르 님이시니 여부가 있

겠나."

짓궂게 키득거린 그가 나를 더 단단히 고쳐 안았다. 등 뒤까지 열이 올랐다.

'칼이 여기서 왜 나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식사 후 마 리아에게 물어 대답을 들은 바, 칼은 어젯밤 마탑에서 외박을 하 고 오늘 밤쯤 돌아온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은 겨우 4시가 넘은 오후였다.

"분명 밤이 돼서야 돌아오신다 고 들었는데......?"

"용병왕이 내 이복동생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듣고 일을 할 수 가 있어야지."

'......알고 왔구나.'

칼은 분명 시원하게 웃고 있음 에도 내 몸은 살짝 움츠러들었다. 용병으로서 귀족을 마주하는 건 늘 익숙했으나, 동생으로서 오빠 를 마주하는 건 처음이다.

카슈미르로서의 칼과 첫 만남이 었다.

'원작의 칼은...... 카슈미르를 싫 어했지.'

원작을 떠올리며 얼굴을 굳혔다.

칼은 카슈미르를 경멸했다. 카슈 미르가 평민 사이에서 나온 혼외 자식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애초 에 칼은 귀족들의 같지도 않은 혈 통 중시 사상을 경멸하는 데다, 칼은 카이사르가 뭘 하고 다니든 관심이 없었으니까.

칼은 내가 혼외 자식이라는 사 실을 들었을 때도 카이사르에게 실망하기는커녕 그 인간이 흥분도 하냐며 놀라는 수준에 그쳤다고 했다.

칼이 본격적으로 카슈미르를 경 멸하기 시작한 건 카슈미르가 아 리아를 건드리면서였다. 원작에서 카슈미르가 아리아에게 했던 짓들 을 떠올리면 나 스스로 연못에 머 리 박고 죽고 싶을 지경이었으니 그건 당연한 일이다.

'그 자식 엄마가 평민이든 늑대 족이든 관심 없다. 그런데 마탑까 지 쫓아와서 기물 파괴하는 짓은 제발 그만하라고 전해.'

다만 그전까진 카슈미르가 저택 에서 패악을 부리며 칼 자신에게 징그럽게 집착하는 것을 싫어했 다.

그걸 떠올리자니, 지금은 원작과 많이 달라졌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조금은 불안해지는 것이다.

'칼이...... 카슈미르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미르에겐 호감 을 가진 것 같았지만 카슈미르는 원작처럼 경멸하게 된다면...... 그 래서 미르까지도 경멸하게 되면 어떡하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그 잠시 동안 마주했던 칼에 게 이미 마음을 줘 버려서, 칼에 게 경멸받는 걸 버티기 힘들 것 같았다.

"......내려 주세요."

분홍빛으로 들떴던 마음이 심해

저 아래로 침잠해 파란빛으로 물 드는 것을 느끼며 살짝 몸을 일으 켰다. 힘으로 그를 내칠 순 있었 으나, 힘 조절에 실패했다간 칼의 팔뼈가 아작 날 가능성이 파다했 기에 쉬이 움직이지 못했다.

"갑자기 낯이 안 좋아졌군."

날 지그시 내려다보던 칼이 입 매를 굳혔다. 그를 올려다보려 고 개를 들다 마주친 눈에 도로 푹 숙이고 말았다.

그의 서늘한 적안에 어렴풋이

다정한 걱정이 서렸다고 착각을 해 버려서. 다시 한번 마주치면 방금 봤던 것이 착각이라고 확신 해 버릴까 봐, 그의 감정을 읽기 가 두려웠다.

"조금 추워서 그렇습니다. 내려 주시면 알아서 돌아가겠습니다."

시선을 피한 채 웅얼거렸다. 피 부에 닿는 시선이 좀 더 집요해진 것 같아 식은땀을 흘리는데, 칼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내가 싫나?"

"••••••네?"

축 처져 우울한 목소리. 그가 한 말에 순간 귀를 의심하며 휙 고개 를 들었다.

기이한 광기로 들끓는 눈으로 날 내려다보는 칼은 눈빛과 상반 된,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 O □ 入、 "

nr, nrw -

"그렇지 않나. 날 보자마자 기겁 하듯 떨어져 버리고, 안색이 안 좋아지더니 이젠 안기기도 싫어하

니 말일세. 내가 그렇게 싫은 건 가?"

"그, 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제 가 어떻게 공자님을......•"

더듬거리며 집요한 시선을 피했 다. 칼이 싫지 않다. 오히려 너무 마음을 줘 버려서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는 것에 가까웠다.

"그대는 분명 내 이복동생이라 들었는데 내 이름조차 불러 주지 도 않는군. 그래. 내가 싫은 거겠 지. 마수 토벌 때 돌아가는 그대 말을 듣지 않고 따라가기나 하

고...... 도움도 별로 안 돼서 말이 야. 내가 싫어서 내게 인사도 안 하고 홀연히 떠나가 버린 거지?"

"아니, 잠깐, 무슨......!"

'공자님'이라는 단어에 미간을 꿈틀거리던 칼이 가라앉아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 위로 짙은 그림자가 졌다. 커다란 죄를 지은 것만 같은 죄악감에 빠 져 땀을 뻘뻘 흘리며 황급히 고개 를 저었다.

"절대, 절대 공자님이 싫은 게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공자님을

싫어하겠습니까!"

"그러면서도 내 이름은 불러주 지 않지. 그때 봤던 겁쟁이 공자 가 오빠인 게 불만족스러운 거 아 닌가."

칼이 처연하게 고개를 떨궜다. 순간 가식적이라는 느낌이 확 들 었으나, 거기에 연연하기에는 내 가 그를 시무룩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컸기에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칼! 칼! 절대 칼이 싫지 않아 요! 칼이 제 형제라서 너무 기쁩

니다!"

그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르자, 축 처져 있던 칼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나는 진땀을 흘리며 조심 스럽게 변명했다.

"그러니까 저는...... 소중한 사 람이 생기는 게 익숙하지 않습니 다. 사람을 대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고요. 그래서 혹시라도 칼에게 실수를 할까봐 두려웠을 뿐입니 다."

우물쭈물하며 솔직히 실토했다.

이미 원작에서 카슈미르를 싫어한 전적이 있는 칼이기에 조금만 실 수를 해도 관계가 비틀려 버릴까 걱정되었다.

"내 동생님께서도 겁쟁이였군."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칼이 날 고쳐 안았다. 다시 내려 달라고 말할까 하다가 칼이 또 시 무룩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얌 전히 안겨 있었다.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

"실수했다고 싫어하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으니."

알쏭달쏭한 그의 말에 갸웃하며 칼을 올려다보니 그가 피식 웃었 다.

"내가 그대를 뭐라고 부르면 되 지?"

"아, 카슈미르라고 부르시면 됩 니다."

"그건 그냥 이름이지 않나."

뭔 소린가 싶어 눈만 깜빡이고 있으니 칼이 느리게 웃었다.

"애칭이 뭐냐는 말이다."

"어...... 제 동생은 절 슈슈라고 부릅니다."

"그럼 나도 널 슈슈라고 부르 지."

칼의 입에서 처음으로 들어 보 는 애칭에 살짝 굳고 말았다.

"이제 넌 내 동생이니까."

내게로 향하는 다정한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왜인지 눈물 이 날 것 같았다.

눈송이가 흩날린다. 내 복잡한 마음까지 모두 쓸어 낼 것처럼 속 절없이 쏟아졌다.

"공자님, 아니, 칼은, 제가 싫진 않으십니까."

" 흐?"

O •

눈썹을 꿈틀거린 그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 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전 혼외 자식이고 예 고도 없이 튀어나온 이방인이잖습 니까. 평생 뒷골목에서 평민으로 살아온 별 볼 일 없는 용병 나부 랭이고요. 좋은 감정이 드는 게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덤덤하게 읊조렸다. 스스로를 천 천히 돌아보면 사랑받을 구석이라 곤 찾아보기가 힘들어서. 다가오 는 호의들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난 그 호의들을 받을 만 한 사람이 아니니까.

칼은 대답이 없었다. 그 침묵을

암묵적인 동의로 생각하며 심해까 지 떨어진 자존감이 표류하는 것 을 덤덤히 바라보고 있는데.

"......잘 들어라."

칼이 서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 었다.

"넌 날 구한 사람이다."

"그건 마땅히 해야 할 일......

"마수 토벌 때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전부터 넌 날 구해 왔어."

그 한마디에서 형용할 수 없이

아득한 감정의 깊이가 느껴졌다. 깊고 또 깊어, 발을 들이면 끊임 없이 떨어지는 무저갱 같은 그의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구도 네게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너 자신까지도. 누구도, 내 인생의 의미를 그렇게 치부할 수 없어."

이해할 수 없는 말과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칼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크리시스 공녀로서, 또 내 동생 으로서 자부심을 가져. 넌 그럴 자격이 있다."

서늘한 목소리였음에도 안에 든 활자들은 지나치게 따스했다. 입 술을 꾹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

"왜 제게 이렇게 잘해 주시는 겁니까?"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였

다. 칼은 내게 난제이자 수수께끼 이며, 불가사의 같았다. 처음부터 내게 호의를 가지고 다가오던 그 를,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넌 이해할 수 없겠지 만......

느리게 입술을 뗀 그가 고운 입 술이 폭 들어가도록 입꼬리를 말 아 올렸다. 그의 검은 머리칼 위 를 새하얀 눈송이가 덮었다. 노을 이 지기 시작한 하늘 또한 눈송이 에게 질세라 칼의 머리 위로 붉은 노을을 색칠했다.

그가 고개를 숙인다. 자연에게 사랑받는 것만 같은 그의 칠흑빛 머리칼이 내 이마를 간지럽혔다. 가까워진 그의 얼굴 위로 미소가 떠올랐다.

"넌 무료함의 무저갱에 빠진 내 손을 잡아끌어 주었지. 날 살게 했어."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이마 위 로 닿았다. 칼이 내 이마 위에 입

을 맞추었다. 얼마 전 겨울 숲에 서 내가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던 것처럼.

"널 사랑하는 건 내게 불가항력 이다. 아마 쭉 그럴 거야. 그러니 불안해하지 말고 내 호의를 즐기 지 그래."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이쯤 되면 내가 모르는 무언가 가 더 있음을 모를 수가 없다. 다 만 그 무언가를 굳이 알아내고 싶 진 않았다. 내게 중요한 건, 지금

내가 벅찰 정도로 사랑을 받고 있 다는 그 사실 하나니까.

눈을 질끈 감는다. 감지 않으면 꼴사납게 울 것만 같았다. 그런 날 내려다보며 옅게 웃음을 흘린 칼이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사람의 발자국만이 정원을 가로지르는 하얀 세상의 해가 어 느덧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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