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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35화 (35/254)

35 화

"아, 아가씨? 도련님!?"

어젯밤 내 만행으로 장엄하던 강철 문이 개박살 난 뒤, 임시로 만들어진 나무판자 문을 열고 들 어가자 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 던 마리아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수치스러워......

이 나이 먹고 안겨 다닌다니, 얼

굴을 들 수 없었다. 어떻게든 몸 을 작게 하려 칼의 품속에서 뒤척 였다. 칼의 작은 웃음소리에 조금 죽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요?"

얼굴도 들지 못하는 나와 태연 하다 못해 뻔뻔해 보이는 칼을 번 갈아 본 마리아가 재빠르게 침착 함을 되찾고 물었다. 칼이 비죽거 렸다.

"내 동생께서 나무에 거꾸로 매

달려 계시기에 모셔왔다."

"••••••네?"

희미한 웃음기가 깃든 칼의 목 소리와 기겁하는 마리아, 놀란 사 용인들의 시선.

난 부끄러워서 혀를 깨물기 직 전이었다.

"내려 주십시오......

힘을 뺀 주먹으로 소심하게 칼 의 가슴팍을 쳤다. 칼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내려 주면 또 이상한 짓을 저 지를 것 같은데."

" 아닙니다!"

이를 악물고 버럭 소리 질렀다. 칼이 웃음을 참듯 입술을 깨물었 다. 눈 내리는 창밖을 응시하며 즉사 방법을 고민하고 있을 때쯤, 그제야 나를 내려 준 칼로 인해 비로소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었 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를 악물고 협박 같은 감사 인 사를 전했다. 칼이 내 머리를 꾹 눌렀다.

"너무 가볍더군. 좀 더 먹어라."

'정말, 왜 다 먹는 거 가지고 난 리지?'

내가 밥을 먹는 내내 옆에 서서 많이 먹어야 한다는 잔소리를 늘 어놓던 의원 폴을 떠올리며 한숨 을 쉬었다.

"공작님이 조금 전 돌아오셨습

니다. 아가씨와 도련님이 저택에 돌아오는 대로 집무실에 모이라고 명하시더군요."

마리아가 고했다. 아침 일찍 황 궁으로 떠났던 카이사르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집무실이 어디인지 몰라 눈치를 보고 있으니, 칼이 1 층 복도를 향해 앞장서 걸었다. 나는 그를 따라갔다.

"2층은 공작가 혈육들의 침실 이, 1층 우측 복도엔 사용인들의 숙소가, 좌측 복도 끝엔 공작 집 무실이 있다. 저택에 대해 궁금한

것이 더 생긴다면 마리아에게 물 어보도록."

"네."

복도 끝자락으로 향하는 칼과 발맞춰 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랄. 당신은 날 못 해쳐."

그리고 다다른 복도 끝. 살짝 열 린 문틈 사이로는 심상치 않은 일 이 벌어지고 있었다.

북풍설한처럼 서늘하게 식은 익 숙한 목소리. 책상 앞에 앉아 턱

을 괸 채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은 카이사르. 공작과 마주 보고 선, 분홍머리의 소녀.

'......o> 리 O}?,

아리아와 카이사르가 대치하고 있었다.

앞뒤 가릴 것 없이 앞서 있던 칼을 제치고 문틈 사이로 온 신경 을 집중했다. 방 안 분위기는 싸 늘했다.

설마.

'공작이 아리아를 괴롭히고 있는 건가......?'

카이사르가 조금 미친놈이긴 해 도 자신의 반도 안 되는 작은 아 이를 괴롭히는 양아치는 아니다. 허나 아리아가 관여되는 일엔 늘 걱정이 앞섰다.

마음이 급해져 노크도 잊고 문 고리에 손을 올릴 때였다.

'조금 기다려 보지 그래.'

나른한 붉은 눈이 이쪽을 주시 함과 동시에, 마나의 울림을 통한 진언이 머릿속을 울렸다. 마나를 극한으로 활용하는 소드 마스터들 에게 의식을 통한 진언 전달은 무 척이나 쉬운 일이었다.

'......공작님? 뭡니까?'

갑자기 진언까지 보낼 게 뭔가 싶지만, 일단 문고리에서 손을 물 렸다. 혼란스러운 내 표정을 본 카이사르의 붉은 입술에 한 떨기 붉은 장미 같은, 짙고 매혹적인

미소가 피어났다.

'네 동생, 무척이나 재밌어서 말 이지.'

' 무슨••••••

"뒷골목에서 살며 느는 건 빌어 먹을 눈치 하나거든. 내 눈치로 봤을 때...... 당신은 날 못 해쳐. 슈슈 언니를 사랑하잖아, 안 그 래?"

카이사르에게 되묻기도 전 귓구 멍에 직통으로 꽂히는 익숙한 소 녀의 목소리.

목소리에 날씨가 있다면 소녀의 목소리엔 분명 서리가 끼어 있을 것이다. 한겨울 칼바람처럼 차갑 고 권위적인 목소리가 집무실을 갈랐다.

분명 익숙한 목소리임에도, 통치 자의 것처럼 위압적인 분위기가 낯설었다.

"당신 슈슈 언니에 대해 말할 때 눈빛이 달라지거든. 슈슈 언니 를 사랑하는 이상...... 슈슈 언니 가 가장 사랑하는 난 해치지 못하

겠지."

소녀의 길고 하얀 손가락이 책 상을 짚었다. 상체를 숙인 소녀의 얼굴이 흥미롭다는 눈빛을 한 카 이사르의 직전에 당도했다. 카이 사르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겁이 없군."

"그보단 내 생각에 확신이 있는 거지."

아리아의 입가 위로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이 놓은 수 에 단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오만

한 책략가를 닮은 표정.

내겐 보여 주지 않는 모습이었 으나, 아리아의 본모습이었던 것 처럼 잘 어울렸다.

"내가 아팠던 이유는 요정 혼혈 인데 정기를 섭취하지 못해서고, 당신은 그런 날 도왔다고 했지. 당신은 카이사르 크리시스 공작이 고 말이야. 그럼 그 악마 공작이 왜 날 도왔을까. 분명 나랑 어떤 접점도 없었는데 말이야. 나 자체 를 동정해서 도운 건 아니라는 건 당신 태도로 충분히 유추가 가능

해. 이유는 슈슈 언니한테 있는 것 같은데, 슈슈 언니와 당신에겐 어떤 접점이 있는 걸까."

아리아의 하늘빛 눈동자가 냉철 함으로 번뜩였다. 광기가 담긴 집 요한 눈빛에는 소름끼치도록 반짝 이는 총기가 깃들어 있었다. 아리 아가 느리게 카이사르를 훑어보았 다. 카이사르는 문틈 새의 나를 힐끔 보더니 느리게 웃었다.

"난 카슈미르의 아버지다."

"직감상 그럴 것 같더라."

아리아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받아쳤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카이사르의 소름 끼치는 적안과 마주한 아리아가 입꼬리를 비틀었 다. 덩치도 나이도 두 배 가량 차 이 나는 소드 마스터와 일반인의 대치였지만, 아리아는 기백에서 전혀 밀리지 않았다.

두 맹수의 싸움을 보는 기분이 었다.

"그런데 말이야. 여태껏 언니가 힘들 땐 한 번도 도와주지 않던 사람이 왜 이제야 나타나 우릴 도

와준 거지?"

" 그건••••••

아리아의 날카로운 질문에 카이 사르가 처음으로 말문이 막힌 표 정을 지었다. 그의 눈빛이 가라앉 고, 분위기의 주도권을 잡은 아리 아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왜. 이제야 관심이 생겼다고 할 거야? 슈슈 언니가 용병왕 미르 라서 그 힘을 이용하고 싶어? 설 마 고귀하신 공작님께서 뒷골목에 사는 자매 등골을 빼먹으려고 하 는 건 아니겠지?"

"그만."

순간 내가 미르라는 것을 아리 아가 알고 있음에 당황했지만, 천 재인 아리아가 여태껏 모르기도 어려웠을 거란 생각에 입을 꾹 다 물었다. 아리아가 도발하듯 밀어 붙이자 무심하던 카이사르의 표정 이 서늘하게 굳었다.

"살고 싶다면, 도를 넘지 말아야 할 거다, 아가."

서릿발처럼 식은 붉은 두 눈. 오 금을 저리게 하는 위압적인 눈이

었으나, 그걸 정면으로 마주한 아 리아는 오히려 더욱 서늘하게 읏 었다. 툭 건드리면 터질 듯 팽팽 한 분위기에 달려 들어가 막아야 하나 고민을 하는데, 아리아가 느 리게 입을 열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 거였답니다, 공작 각하."

난폭한 서릿발처럼 몰아치던 목 소리가 순식간에 귀족의 그것처럼 정중하고 단호하게 바뀌었다. 아 리아의 빠른 태세 변환에 놀라 들 어가려다 말고 눈만 끔뻑이고 있

는데, 아리아가 눈매를 날카롭게 세웠다.

"슈슈 언니는 정과 호의에 약한 사람이에요. 각하께서 잘해 주신 다면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각하께 마음을 주겠죠. 그러다 각하께서 호기심이 식어 언니에게 등을 돌 리면 크게 상처받을 거예요."

나에 대한 정확한 관철을 뱉는 아리아의 눈은 차가웠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카이사르와 눈을 정면으로 마주

한 채, 아리아가 짓씹듯 내뱉었

"각하께서 절 구해 주신 건 무 척이나 감사하게 생각해요. 생명 의 은인에게 이렇게 굴면 안 되는 것도 알아요."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긋한 말투. 허나 조금도 상냥하거나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정점을 차지한 맹수의 여유로운 그르렁거림 같았 다.

눈을 내리깐 채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던 아리아가 천천히 눈을 들었다. 한기가 서린 두 눈을.

하늘빛과 핏빛의 상반된 색체가 허공에서 뒤엉키며 치열한 기 싸 움을 이었다.

"하지만 전 제 안위나 생명보단 언니가 상처받지 않는 게 더 중요 해요. 이런 슈슈 언니를 끝까지 책임질 자신 없으면 함부로 호의 를 베풀지 마세요. 도를 넘지 말 라는 소리예요."

맹수가 자신의 구역을 침범한

존재에게 경고하듯 차가운 목소 리. 여리기만 하던 두 눈이 차갑 게 타올랐다. 난 숨이 막혀 왔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 아리아 가 카이사르의 목 위로 손을 올렸 다. 눈가를 움찔한 카이사르가 읽 을 수 없는 눈으로 아리아를 응시 했다.

새하얗고 예쁜 손가락이 카이사 르의 목덜미를 틀어쥐고 힘을 주 었다.

"당신 때문에 언니가 상처받는

다면...... 난 악마에게 영혼을 팔 아서라도 당신을 죽여 버릴 거예 요."

어둡고 음침한 목소리로 뱉은 한마디에 담긴 감정의 무게는 감 히 예측할 수 없었다.

늘 요정 같다 여기던 벽안이 얼 어 버린 바다처럼 느껴질 때. 나 하나 상처받지 않게 하겠다고 저 를 한입에 삼킬 수 있는 맹수의 목을 틀어쥔 아이는 조금도 약해 보이지 않았다.

아주 잠깐, 내가 아리아를 사랑 하는 것보다 아리아가 날 사랑하 는 마음이 더 클 수도 있다는 생 각을 했다.

"정말 존경스럽군. 개인적으로 저 배포를 배우고 싶을 정도야."

멍하니 굳은 내 옆에 딱 붙어 아리아와 칼의 대치를 관망하던 칼이 감탄했다. 침묵이 흐르는 집 무실 내부를 들여다보다, 상황을 정리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느 리게 문을 열었다.

"••••••아리아."

힘겹게 입을 떼, 내 세상의 이름 을 불렀다.

더는 아프지 않은 내 동생. 흠칫 하며 목을 조르던 손을 황급히 뗀 아리아가 나를 돌아보았다.

"......슈슈 언니."

조금 전까지 두 눈에 가득 찼던 독기와 차가움은 썰물 밀려가듯 사라지고, 오직 날 향한 침통함과 걱정만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오

싹하리만큼 빠른 태세 변환이었지 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두 팔을 벌렸다.

"이리 와, 아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참듯 입 술을 꾹 문 아리아가 내게로 달려 왔다.

익숙한 온기가 품 안 가득 들어 찼다. 늘 생기가 없던 양 뺨에 붉 은 꽃물이 든 것을 발견하고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고 아리아를 꽉 끌어안았다.

"몸은 어때. 괜찮아?"

"으응. 이제 하나도 안 아파. 언 니랑 다섯 시간 산책도 할 수 있 을 것 같아."

물기로 반짝이는 눈을 한 아리 아가 배시시 웃었다. 안도의 한숨 을 내쉬며 아리아를 빙빙 돌려 몸 상태를 확인하고 나서야 아리아를 놔 주었다. 늘 죽어가는 이처럼 죽음의 향취를 내뿜던 아리아에게 서 생기가 돌고 있음을 모를 수 없었다.

"......공작님."

심호흡과 함께 카이사르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기 두려워 고개를 푹 숙 였다.

툭.

"제 동생의 무례는 제가 사과드 리겠습니다. 부디 자비로운 마음 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 언니!"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사죄하니

아리아가 고함을 쳤다. 내가 왜 꿇느냐는 의미가 든 외침을 읽었 으나, 다만 더 고개를 숙일 뿐이 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 씀해 주시면 그대로 따르겠습니 다. 전 온전히 공작님의 것입니 다."

심지가 굳은 목소리로 선언했다.

카이사르가 나를 딸로 들이겠다 고 말하긴 했으나, 하루 만에 그 마음이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

었다. 나는 사람의 변덕스러움을 아주 잘 알았다.

카이사르가 정기를 베풀어 주었 을 때부터 이 몸 하나는 공작가에 바치기로 마음먹은 일이니 그가 뭘 요구하든 못 할 건 없었다.

"너, 이름이 아리아라고 했나."

한참 동안 말없이 어두운 분위 기를 풍기던 카이사르는 뜬금없이 아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무릎 굽 힌 날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리던 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래. 그럼 이제부턴 아리아 크 리시스겠군."

놀라 번뜩 고개를 들었다. 눈을 크게 뜬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책임지지 않을 거면 함부로 호 의를 베풀지 말라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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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럼 책임지면 되는 거 아닌 가."

의자를 밀고 일어난 카이사르가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단단한 손이 내 앞으로 뻗어졌다.

"다시 한번 말해 주지."

••••••

"그 누구도, 설령 황제나 교황이 라 할지라도, 네 무릎을 굽히게 할 순 없다."

어젯밤 날 뒤흔들었던 활자들을 다시금 내뱉은 카이사르가 손을

더 앞으로 뻗었다. 어서 잡으라는

멍하니 그의 손을 잡으니 그가 강한 힘으로 날 잡아 올렸다. 나 와 아리아를 번갈아 본 카이사르 가 느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끝까지 책임질 테니, 너희 둘 다 내 딸이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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