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화
"......제 인생 최대의 불명예군 요."
잠시간의 무거운 침묵 후, 아리 아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슈슈 언니를 위해서라 면 불명예도 감수해야죠. 분명히 말해 두지만 제게 진정한 가족은 슈슈 언니밖에 없어요. 우리는 부 녀라기보단 슈슈 언니 행복을 위
한 동업자라고 해 두죠."
"참 맹랑하단 말이지."
"용감하다고 해 주시죠."
카이사르와 아리아 사이에 날카 로운 눈빛이 오고 갔다. 분명 둘 다 서로를 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으나, 기 싸움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 그럼 카슈미르. 넌 어떤 가."
내게로 향하는 카이사르의 시선 에 흠칫 몸을 떨었다.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이런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원작과 지나치게 비틀려버린 이 상황이 괜찮은 건지.
내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어도 될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는 것이 두려웠다. 사람이 사랑 때문 에 어디까지 처박히는지도 잘 알 고 있었기에 소중한 것이 생기는 것도 두려웠다.
현재까지 아리아를 제외한 모든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은 것 은 그 때문이었다.
' 하지만......•'
사람 사이에서 상처받지 않는 대신 지독히 고독했다.
나는 아리아에게 버팀목이 되어 야 했다. 안 그래도 아픈 아이에 게 기댈 수는 없었다. 아리아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아리아는 친구가 아니라 지켜야 할 동생이었으니까.
허한 빈자리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가슴을 태웠다.
나는 어쩌면, 오래전부터 마음 놓고 기댈 버팀목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저는 정말 별 볼 일 없는 사람입니다."
시야가 뿌옇게 일렁였다. 조금은 눈시울이 달아오른 것 같기도 했 다.
내 자존감이 답답할 정도로 낮 다는 건 알고 있지만,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는 건 내게 있 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할 줄 아는 게 검 휘두 르는 것뿐인 사람도 괜찮다면
하지만 그래도.
"공작님의 딸이 되고 싶습니다."
이런 나도 마음 편히 행복해져 보고 싶었다.
"그거면 되었다."
피식 웃은 카이사르가 내 머리 칼을 헝클어트리곤 날 꽉 안았다.
"카슈미르 크리시스, 아리아 크 리시스. 내 딸이 된 걸 축하한 다."
그 겨울날은, 내 생애가 모두 닳 아 사라져도 잊히지 않을 만큼 황 홀한 날이었다.
아리아 크리시스는 천재다.
이 단순한 문장에 반대를 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 다. 그녀는 누구도 부정 못 할 세 기의 천재였으니까.
'너무 쉬워.'
무엇이든 한 번 본 건 잊지 않 는다. 수학이나 마법처럼 응용을 필요로 하는 과목들, 체스처럼 공 간 지각 능력과 전술, 센스를 동 시에 필요로 하는 게임, 확률 계
산, 추리, 논술 등. 머리를 써야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그녀에 겐 너무 쉬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쉽고 능숙한 것은 사람의 감정을 읽고 부리는 일이었다. 아리아는 치밀한 눈치 와 타고난 감각, 센스와 빠른 상 황 파악 등을 요하는 일에서도 뛰 어난 실력을 보였다.
그녀는 간교했다. 굽혀야 할 때 와 밀고 나가야 할 때를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아슬아슬한 적당선을 읽을 줄 알았으며, 눈앞의 타인이
자신을 해칠 늑대인지, 자신을 지 켜 줄 개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아리아의 눈에 카이사르 크리시 스는 자신을 절대 해칠 수 없는 늑대였다. 제 목덜미를 단번에 물 어뜯을 수 있는 송곳니를 가지고 있으나, 절대 자신을 공격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말이야. 여태껏 언니가 힘들 땐 한 번도 도와주지 않던 사람이 왜 이제야 나타나 우릴 도 와준 거지?'
카이사르를 도발했던 것도 그가 자신을 해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확신 없 이 맹수와 맞서지 않았다.
아리아는 단 둘뿐이던 세상에 다른 이들이 침범했다는 사실이 불만스러웠다. 카슈미르는 자신만 의 것인데. 자신의 언닌데. 카슈 미르의 행복을 위해 둘만의 세상 을 공유하는 것에 동의를 표하긴 했어도 싫었다.
카슈미르가 누구나 사랑에 빠질 만큼 빛나는 이임을 알고 있었고,
분명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길 바 랐다. 허나 막상 상황이 닥치니 온전히 받던 카슈미르의 사랑을 나눠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속이 뒤틀리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공자님."
아리아 크리시스가 칼 크리시스 를 탐탁지 않게 여긴 것은 이런 사정들에 기인했다.
집무실에서의 대화를 마친 뒤 아리아는 집무실 앞에서 칼을 붙 잡았다. 눈꼬리를 휙 접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아리아를 지그 시 응시하던 칼이 입가에 비소를 머금었다.
"슈슈 앞에선 그렇게 구나 본데, 내 앞에서까지 그 짓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그리 말해 준다면 기꺼이 때려 치울게."
산호 빛 입술에 걸쳐 있던 웃음 이 순식간에 걷혀 나갔다. 지나치 게 빠른 태도 변화에 칼이 어이없 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둘만 있을 땐 말 놔도 되지? 이제 신분도 같아졌는데."
" 마음대로."
아리아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남 매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차갑고 냉랭한 분위기가 둘 사이를 감쌌 다.
신경전에 가까운 치밀한 눈빛 교환이 얼마나 오갔을까, 아리아 가 먼저 입을 들었다.
"난 너랑 네 아버지 둘 다 마음 에 안 들어."
"나라고 네가 마음에 들진 않 아."
"하지만 슈슈 언니는 사랑하잖 아."
비죽거리는 웃음과 함께 날아온 직구에 칼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한 방 먹이고도 그리 표정이 좋지 않던 아리아는 칼의 눈동자를 한 참 동안 들여다보더니 제 앞머리 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가벼운 마음은 아니네."
"하...... 그래. 언니는 늘 사람들
을 끌어당겼으니까."
아리아는 타인의 감정을 읽는 데 능하다. 제 언니와 닮았기에 더 불쾌한 눈앞의 이방인은 카슈 미르를 거론할 때 무겁다 못해 집 착 어린 광기가 섞인 눈을 했다.
"하나만 물어볼게. 넌 슈슈 언니 의 행복을 바라는 거야, 슈슈 언 니를 그냥 손에 쥐고 싶은 거 야?"
"슈슈가 행복하길 바란다."
"좀 더 솔직히."
"이왕이면 내 손 안에서."
" 환장하겠군."
불쾌함을 가득 머금은 웃음을 지은 아리아가 뒤틀린 눈으로 칼 을 마주했다.
"나도 언니가 내 손 안에서 행 복하면 좋겠거든."
어둡고 끈적거리는 집착 어린 광기가 들어 찬 두 쌍의 눈동자. 둘의 눈빛은 데칼코마니처럼 닮아 있었다.
"슈슈의 행복을 바라는 건 확실
하지?"
"그래."
"슈슈의 행복을 위해선 내가 필 요한 것도 알고 있고?"
"......그래. 그래 보이더군."
칼이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마 음에 들지 않는 사실을 겨우 인정 한다는 듯 내뱉었다.
아리아는 씩 웃었다. 그녀는 그 녀의 언니에게 자신의 존재가 얼 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언니의 행복
을 위해선 너도 필요할 것 같더라 고."
"아마 그럴 거다. 나는 슈슈가 친애하는 사람이니까."
이번엔 칼이 씩 웃고, 아리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하지만 언니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
"끝까지 그럴지는 두고 봐야지."
색감은 상이하나, 눈빛의 온도와 담긴 감정은 비슷한 두 눈동자 사
이에서 치열한 기 싸움이 오갔다. 얼마나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을 까, 이를 악물며 웃은 아리아가 칼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언니의 행복을 위해선 피차 불 쾌해도 자주 마주해야겠지. 앞으 로 잘해 보자고. 남매가 아니라, 동료로서."
아리아에게 가족은 단 한 명뿐 이었다. 카슈미르를 제외한 누구 도 그 아늑하고 깊은 자리에 들일 생각이 없었다. 어쩔 수 없는 동 맹을 요청하는 것 같은 아리아의
눈동자엔 불쾌함이 가득 드러났
"그래. 슈슈의 행복을 위해."
마찬가지로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은 칼은 껄끄러움이 가득 드러 나는 몸짓으로 아리아의 손을 잡 아 흔들고는 재빠르게 손을 빼내 었다.
"그럼 이만 들어가세요, 칼 오라 버니. 저녁 식사 때 뵈어요."
순식간의 얼굴 위로 살가운 동
생의 가면을 뒤집어 쓴 아리아가 방긋 웃었다. 얼굴 가득 인상을 찌푸리던 칼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정한 오라비의 가면을 뒤집어쓰 고 빙긋 웃었다.
"그래. 이따 보지. 푹 쉬어라."
그리고 서로 등을 돌린다. 다른 방향을 본 둘의 얼굴이 동일한 온 도로 서늘하게 식어 갔다. 피라곤 한 방울도 이어지지 않았음에도 소름끼치도록 비슷한 모습이었다.
'아.
' 아.'
그 순간 두 사람의 머릿속을 지 배한 생각은 동일했다.
' 불쾌해라.'
' 불쾌하군.'
지독하게 같은 동류에게 느끼는 불쾌감.
동족혐오였다.
카슈미르 크리시스가 된 날을 시점으로,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아가씨! 데뷔탕트 때 무슨 향유 를 사용할까요? 다섯 가지 정도 추려 보았는데 그중에 골라 주세 요!"
"데뷔탕트 땐 가문의 상징이 새 겨진 액세서리를 하나 이상 착용 하는 것이 관례인데 액세서리는 브로치로 할까요? 목걸이? 머리 핀?"
"입술은 무슨 색으로 할까요? 요즘 사교계 유행은 은은한 분홍
이지만 아가씨는 붉은 계열도 어 울리실 것 같은걸요."
다름 아닌 데뷔탕트 준비 때문 이었다.
'지금부터 일주일 동안 너와 아 리아는 데뷔탕트를 준비해야 한 다. 기간이 무척 빠듯하긴 하지만 내년까지 미루느니 올해 안에 해 치우는 게 나으니까.'
데뷔탕트. 15살 성년이 된 귀족 영애 영식들의 데뷔 무대.
매년 눈꽃 무도회 때 일괄적으 로 치러지며, 데뷔탕트에서 얼마 나 성과를 거두느냐에 따라 앞으 로의 사교계 활동의 성과가 좌우 될 만큼 중요한 행사였다.
데뷔탕트 준비를 위해 마리아를 제외하고도 시녀 다섯 명이 더 내 직속 시녀로 배치되어 시중을 들 게 되었다. 렌과 달리아, 체리쉬, 페니, 벨이라는 20대의 젊지만 노 련한 시녀들이었다.
"사실 아가씨가 문 부수고 들어 오실 땐 정말 사신을 보는 줄 알
았어요. 그 위압감과 아득함이 란...... 우리 아가씨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어요. 검 쓰는 여자가 최고라니까요."
처음엔 나를 조금 두려워하던 시녀들도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 고선 오랜 친구처럼 친근하게 굴 었다.
"영애들의 예절 교육을 맡게 된 헬레나 레비토 백작 부인이에요."
그다음 날, 나와 아리아에겐 데 뷔탕트 전에 속성 예절 교육을 위
한 선생님이 붙었다.
자신을 헬레나 백작 부인이라고 소개한 중년의 여성은 나와 아리 아를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우리 가 공작가에 입적된 것은 현재 제 국의 최대 이슈이자 관심거리였으 니, 그녀도 우리가 궁금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두 분 다 入[정상 기초부터 배 우셔야 함을 들었습니다. 시간이 촉박한 만큼 기초는 건너뛰고 데 뷔탕트에 필요한 최소한의 예절만 속성으로 가르쳐 드리려 해요. 수
업은 시간이 시간인 만큼 조금 빡 빡할 거예요."
우리가 현재까지 평민으로 살아 왔음을 알면서도 헬레나는 공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나는 그녀에 대 한 점수를 꽤 후하게 주며 수업을 시작했다.
"걸음걸이는 부드럽고 가볍게, 걸을 때 손은 흔드는 것이 아니라 드레스 앞에 다소곳이 모아요. 다 른 귀족들에게 인사할 땐 우아하 고 고고하게 고개만 살짝 숙이고, 황족이나 교황 성하 앞에서만 치
맛자락을 살짝 들고 허리를 굽힙 니다. 발은 벌어져선 안 돼요."
예상대로 귀족들의 예절은 복잡 했다. 헬레나는 예고대로 수많은 것을 속성으로 가르쳤고, 커리큘 럼대로라면 예절 수업은 하루에 4시간씩 데뷔탕트 바로 전날까지 이루어져야 했다.
다만 그녀의 완벽한 커리큘럼에 두 가지 반영되지 못했던 점이 있 다면,
"아리아 영애는 정말 완벽해요.
마치 우아한 한 마리의 학 같아 요. 세상에! 어쩜 저리 걸음걸이 가 완벽할까! 한 번 말하면 핵심 을 바로 알아차리는군요!"
아리아는 곧 사교계의 황제 자 리를 탈환할 이 세계의 여주인공 이며.
"......믿을 수가 없어요. 한 번 본 걸 모두 외우셨다고요? 그럴 수 있는 난이도가 아닌데...... 네? 탱고 동작을 모두 외우셨다고요? 제, 제대로 보지도 않으셨는데 요?"
나는 몸으로 하는 모든 것엔 천 재적인 감각을 가진 소드 마스터 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