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화
"말도 안 돼...... 이건 6일을 꼬 박 채워도 아슬아슬한 커리큘럼이 었는데......
6일에 걸쳐 진행될 몸가짐 수업 을 2시간 만에 마치게 된 헬레나 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사교댄 스 도우미로 참석한 칼과 완벽한 춤을 선보인 후 물을 마시던 나는 살짝 웃었다.
"아리아의 재능이 상당하죠?"
"상당하다마다요! 두 분 영애는 천재입니다! 두 분을 가르치게 되 어 정말 영광이에요!"
청출어람을 두 눈으로 목격한 사람처럼 감격스럽게 외친 헬레나 가 눈을 반짝였다.
"원래는 몸가짐만으로도 시간이 빠듯해 언변에 대한 수업은 끝에 조금만 하려고 했건만, 영애들이 너무 잘해 주니 언변도 정식으로 배우고 가죠."
헬레나는 나와 아리아가 언변도 빨리 배울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 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생각은 잠 시 뒤 무참히 무너졌다.
"누군가 카슈미르 영애에게 다 가와 아리아 영애에 대해 돌려 욕 을 하면 어떻게 하죠?"
"......장갑을 얼굴에 던지고 결 투를 신청합니다."
"카슈미르 영애! 우선 부드럽게 웃고 나서 은근히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야 한다고 했잖아요!"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아리아를 욕하는데!"
"기사들 말투 사용하지 마시라 니까요! '그러겠습니까'가 아니라 '그러겠어요'! 두루높임 해요체를 사용하시라고 몇 번을 말씀드려야 겠어요!"
이런 상황은 아리아도 크게 다 르지 않았다.
"누군가 아리아 영애에게 다가 와 영애의 출신을 욕하면 어떻게 하죠?"
"입가를 가리고 웃으면서 '듣기
불쾌하군요. 이는 크리시스의 이 름과 나를 입적해 주신 공작님을 함께 욕하는 거라고 이해하면 되 나요?'라고 대답해요."
"완벽해요! 그럼 영애의 출신을 욕하면서 카슈미르 영애도 함께 욕하면......•"
"발코니에 거꾸로 매달려서 포 크로 찔릴 미친 새끼가......
"영애!"
헬레나는 꼬박 3시간 만에 나와 아리아의 말투 교정을 포기했다.
"그냥 황제폐하와 교황성하 앞
에서 욕만 하지 말아 주세요
지친 헬레나가 의자에 늘어앉았 다. 수업을 참관하고 있던 칼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힘겹게 웃음을 참고 있었다.
"너희 모습을 마도구로 녹화하 지 못한 게 한이군. 우울증 치료 제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데."
"아버지나 오라버니나 말본새가 참 아름다워요. 누가 부자 아니랄 까 봐."
기나긴 수업에 지쳐 나가떨어진 아리아가 칼을 흘겨보았다. 칼 또 한 아리아를 웃는 얼굴로 노려보 았다.
'그래도 남주인공이랑 여주인공 인데...... 너무 철천지원수 보듯 보고 있는 거 아닌가.'
핑크빛은 무슨, 핏빛뿐이다. 둘 사이에 풍기는 분위기는 누구 하 나가 상대 얼굴에 장갑을 던지며 검 들고 뛰어 나오라고 소리쳐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서늘했다.
'둘은...... 안 이어지려나......?'
솔직히 둘이 붙으면 개연성은 없어도 원작의 억지력 같은 것에 따라 눈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 각을 하던 내 스스로가 머쓱해질 정도였다. 남매가 된 상태에서 서 로 사랑에 빠지는 것도 이상하긴 했지만.
"내 말본새가 아무리 아름다워 도 우리 사랑스러운 작은 동생만 하겠나?"
아리아의 눈매가 치솟고 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살벌한 눈빛을 주고받는 둘 사이에서 쪼그라들어 눈치를 봤다.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는 질문이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각자 돈을 모아 서로에게 암살자 를 보내기로 한 사이라는 대답이 나올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둘 다 행복하면 그만 아 니냐.'
그 생각으로 머릿속을 정리하며
물을 들이켰다.
사실 원작 따위 내겐 안중에도 없다. 처음에 어느 정도 맞춰지길 바랐던 건 미래가 어떻게 튈지 모 른다는 불안감과 아리아의 행복 때문이었지만, 여기까지 비틀린 이상 원작을 고수하는 게 더 이상 했다. 애초에 지금 내가 세운 계 획은 원작을 비틀다 못해 작살내 는 길이기도 하고.
'내 삶은 내가 만들어. 내 주위 사람들의 행복도 내가 만들어 줄 거야. 내가 할 수 있어.'
아리아가 무사히 살아난 이상 나를 가로막는 것은 없다. 더는 주저할 것이 없었다. 내가 카슈미 르 크리시스가 된 이상 이 세계는 활자 속에 적혔던 세계와는 달라 질 것이다.
'이왕 그렇게 되었다면,'
내 운명은 내 스스로 결정할 것 이다.
"두 분 다 수고하셨어요•••••• 부 디 데뷔탕트를 성공적으로 마치시
기를......
어쩐지 10년은 더 늙은 것 같은 헬레나 부인이 인사와 함께 백작 가 저택으로 돌아갔다.
칼이 키득거렸다.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슨 말 실수를 하든 크리시스는 덮어 줄 수 있으니까. 황제나 교황에게 욕 한 번쯤 해도 아버지가 뒷수습할 수 있을 거다."
큰일 날 소리를 하는 칼을 뒤로
한 채 다시금 물을 들이켰다. 데 뷔탕트 나흘 전,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나와 아리아 는 데뷔탕트에 입을 의상을 위해 의상실을 찾게 되었다.
"정말...... 너무 잘 어울리세요, 아가씨."
의상실에 가기 전 치장을 마친 달리아가 감격스러운 눈으로 거울
을 응시했다. 거울엔 쑥스럽고 어 색해하는 표정을 지은 내가 있었
조금 전, 내 치장을 담당한 달리 아와 나 사이엔 가벼운 논쟁이 있 었다.
'어차피 옷을 사러 가는데 차려 입어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와 이셔츠에 바지만 입고 가면 될 것 같습니다. 검은 검사에게 필수입 니다. 이곳에 올 때 차고 온 검도 함께 차고 갈 겁니다.'
'의상실은 그저 옷가게가 아니라
소문의 근거지 같은 곳이에요. 잘 차려입고 가지 않으시면 아가씨가 공작가에서 인정받지 못하신다는 소문이 돌 거라고요! 그러지 말고 이 분홍색 드레스를 입어 보시는 건 어때요? 아가씨의 사랑스러운 분홍색 눈동자와 똑같은 색인걸 요. 검은...... 호위가 있는데 챙길 필요가 있을까요?'
나는 언제든 싸울 수 있도록 가 벼운 복장에 기다란 장검을 차고 가겠다는 입장이었고, 달리아는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검은 놓고 가라는 입장이었다.
'하...... 좋아요. 그렇게까지 드 레스가 싫으시다면 바지를 입는 걸로 해요. 그 대신 달랑 와이셔 츠에 바지는 안 돼요! 물론 아가 씨는 대충 입으셔도 눈이 부시지 만, 조금만 신경 쓰면 헤엄치는 드래곤('날개 달린 호랑이'와 같은 맥락의 제국 격언)이 될 수 있는 아가씨를 꾸미지 않는 건 범죄라 고요! 검도 장검 말고 옷에 숨길 수 있는 단검으로 해요!'
평생을 위험 속에서 살았던 나 는, 언제든 전투태세에 돌입할 준
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불안했다.
꽤 긴 논쟁 끝에 우리는 타협점 을 찾았고, 타협의 결과는 이것이 었다.
부풀어 오른 비숍 소매의 하얀 셔츠. 바로크 문양이 세심하게 수 놓인 와인색 투 버튼 조끼. 짧고 귀여운 검은 케이프. 타이트한 검 은색 승마바지. 낮은 굽의 가죽 스패츠 부츠. 촘촘한 검은 망사를 덧댄 실루엣이 사랑스러운 마젠타 색 칵테일 모자까지.
분명 나임에도 낯선 모습이었다.
"엄청 사랑스러운 도자기 인형 같아 제 인생 최대 역작이에
요!"
입을 틀어막고 중얼거리는 달리 아를 보고 있자니 부끄러움이 치 밀어 올랐다. 거울 속 내 두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4 어 색 해 . '
달큼한 향유 냄새가 폴폴 풍기 는 땋은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하
나로 깔끔하게 묶어 오른쪽으로 땋아 내린 검은 머리칼이 어색했 다. 한 번 더 내 모습을 자각하고 나니 목덜미까지 달아올랐다.
"빨리 내려가요, 아가씨! 모두에 게 보여 줘야 한다고요!"
"저, 좀 부끄럽습니다만......
"아이참, 말 놓으셔야 한다니까 요! 얼른 내려가요!"
"어, 응......•"
달리아에게 끌려가다시피 계단 을 내려갔다. 홀 너머로 카이사르 와 칼, 아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아리아는 이미 준비를 끝마치고 나를 기다리며 차를 마시고 있었 다. 나는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하나로 땋아 틀어 올린 분홍색 머리는 하얀 꽃 조각과 에메랄드 로 이루어진 헤어 바인으로 장식 되어 있었다. 거기에 레이스가 풍 성한 연두색 드레스를 입은 아리 아는 그야말로 요정 같았다.
'잘 키웠다.'
뿌듯하게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
다.
" 아리아!"
밝게 부르니 찻잔을 기울이던 아리아의 등이 움찔했다. 입 안에 찻물을 머금은 아리아가 더없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주친 눈.
아리아는 나를 보자마자 고개를 다시 돌려 옆에 앉아 있던 카이사 르의 무릎 위로 찻물을 뱉었다.
" 미친••••••
입가로 찻물이 흐르는 아리아가 입을 꽉 틀어막았다. 어쩐지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덩달아 내게 로 시선을 돌린 카이사르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하...... 그래. 이런 게 인생이 지......
아리아가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았다. 무릎 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찻물에 시 선 한번 주지 않은 카이사르가 느
리게 눈을 깜박이며 나를 응시했
"......정말 잘 어울리는군."
들고 있던 찻잔을 책상 위에 올 려놓은 칼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려놓으면서 손을 좀 혼들었는지 칼의 손과 책상엔 김이 오르는 찻 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으나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어쩐지 다들 과한 반응이라 얼
굴이 달아올랐다. 머쓱하게 머리 를 긁적였다.
"내가 언니한테 검은색 말고 다 른 색 좀 입어 보라고! 와이셔츠 에 망토 말고 다른 것도 입어 보 라고! 머리 하나로 묶고 다니지만 말고 다른 머리 스타일도 해 보라 고! 그렇게 말했는데! 진짜! 정말 좋아!"
아리아가 두서없이 외치며 내게 다가와 안겼다. 아리아를 마주 안 아 주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상하진 않아?"
" 절대!"
단호하게 잘라낸 아리아가 내 목에 제 머리를 비볐다.
"너무 멋져."
얼굴에 새겨지는 미소가 환했다. 아리아의 머리 위에서 반짝거리는 헤어 바인이 잘그락거렸다.
"지금 의상실을 가나?"
어쩐지 심각한 표정을 한 카이
사르가 물었다. '네.' 하고 대답하 자, 그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 내 내게 던졌다.
휙.
앞으로 날아온 물체를 단번에 잡아챈 나는 물체를 확인하고 눈 을 깜박였다.
'검을 둘러싼 검은 용은 공작가 의 문양인데.'
카이사르가 내게 건넨 것은 공 작가의 문양이 섬세하게 새겨진
황금 패였다. 어쩌라는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니 태연하게 찻잔을 들고 찻물을 반 이상 흘리며 한 모금 들이켠 카이사르가 심호흡을 했다.
"크리시스 가문이 구매자라는 뜻의 신분 보증 패다. 그것만 보 여 주면 동부 섬 하나쯤은 살 수 있을 거다."
나를 천천히 훑어본 카이사르가 휙 눈을 돌렸다. 착각인지, 그의 귀 끝이 살짝 붉었다.
"......의상실 기둥을 뽑아 와도 상관없다."
'진짜 미친놈.'
역시 카이사르 크리시스는 이상 했다.
공작가의 직인이 찍힌 화려한 마차를 타고 20분쯤 달렸을까, 아 리아와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시내 중앙 화려한 건물 앞에 도착 했다.
"카트린느 의상실은 제국에서 가장 유행하는 의상실이에요. 사 교계 시즌엔 세 달 전에 예약해도 원할 때 못 받아본다니까요."
함께 온 달리아가 조잘조잘 정 보를 풀어놨다. 이를 주의 깊게 듣고 있다, 의상실 문 앞까지 다 다르자 생겨나는 의문에 미간을 좁혔다.
"......지금은 안이 비었는데?"
눈꽃 축제를 코앞에 둔 지금은
수도 모든 의상실이 바쁠 시기. 허나 카트린느 의상실 내부는 한 산하다 못해 텅 비어 있었다. 의 문 서린 표정을 짓고 있으니 달리 아가 피식 웃었다.
"요즘 수도 사교계에서 두 분 아가씨에 대한 궁금증이 하늘을 찌르는걸요. 외출하셨다가 괜한 일을 겪을지도 모르니 공작님께서 오늘 하루 의상실을 통째로 대여 하셨어요."
'진짜 돈 지랄.'
이렇게까지 하는 게 어이가 없 었으나 어차피 의상실 하루 대여 정도는 크리시스 금고 사정에 조 그만 타격도 주지 못할 터였다. 나는 그것을 알았기에 조금 허탈 해진 심정으로 의상실 문을 열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