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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38화 (38/254)

38 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크리시스 영애들. 카트린느 의상실의 수석 디자이너, 카트린느 파탈리테입니 다."

카트린느가 나와 허리 숙여 인 사했다. 30대쯤 되어 보이는 그녀 는 수도 최고 의상실의 수석 디자 이너라는 명칭에 어울리게 유행하 는 패션과 시대를 앞선 패션을 적 절히 섞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부인. 아리 아 크리시스입니다."

"카슈미르 크리시스입니다."

마주 고개를 숙이곤 고개를 든 카트린느의 눈동자가 무섭게 번득 였다. 먹잇감을 앞둔 맹수 같은 눈동자였다.

그녀의 노골적인 시선이 나와 아리아를 훑고 지나갔다. 벌거벗 겨지는 기분이었다. 기나긴 관찰 끝에 시선을 뗀 그녀는 무서울 정 도로 환하게 웃곤 두 번 손뼉을

쳤다. 의상실 내부를 박차고 나온 사람들이 나와 아리아를 감쌌다.

"그럼, 치수부터 재 볼까요?"

그 이후로는 온갖 길이 재는 것 들의 향연이었다.

온몸의 치수를 재는 것만 30분 이 걸렸다. 분명 며칠 동안 마수 를 때려잡아도 멀쩡하던 몸이 그 잠시 동안 진이 빠졌다. 마찬가지 로 지쳐 보이는 아리아와 함께 푹 신한 소파에 앉아 대기하고 있으 니, 카트린느가 카탈로그를 포함

한 온갖 것들을 들고 다가왔다.

"두 분 영애는 정말 정반대 같 아요. 아리아 영애는 청순한 인상 에 근육량이 적고 몸 선이 예뻐서 은근한 노출이 있는 프릴 드레스 가 어울릴 것 같고, 카슈미르 영 애는 차가운 인상에 근육이 단단 하고 체형이 완벽해서 깔끔한 새 틴 드레스가 잘 어울릴 것 같아 요."

카트린느는 수석 디자이너답게 빠른 판단력과 좋은 눈썰미의 소 유자였다.

"요즘 유행은 튜닉 드레스지만 유행 따위 알 바인가요. 영애들의 몸은 정말 옷 입힐 맛이 날 것 같 아요! 이번 데뷔탕트에서 단연 가 장 아름다운 자매로 만들어 드리 리라 자신하죠. 두 분께선 유행의 선도 주자가 될 겁니다."

눈을 번뜩이는 카트린느에게서 는 광기마저 엿보였다. 조금 섬뜩 함을 느끼다,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꿀을 넣은 따뜻한 레 몬차 덕에 입 안엔 상큼한 레몬 향이 가득했다.

"본격적으로 의상을 제작하기에 앞서 두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 다."

오는 마차에서 아리아와 충분히 대화를 나눈 뒤 정한 사항들이 있 었다. 내가 진중하게 말을 떼자 카트린느도 덩달아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첫째. 아리아의 드레스는 코르 셋 없이 입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현재 사교계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아이템은 코르셋. 때문 에 현재 시판되는 드레스의 대부 분은 코르셋과 함께 입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내 사랑스러운 여 동생에게 그런 허리 학살 도구를 입게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새하얘진 카트린느를 보고 싱긋 웃어 주었다.

"둘째. 내가 입을 옷은 제복이라 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크리시스의 공녀가 되었다고 한들, 영원하고 불면할 내 정체성은 단연 '검사'였다.

크리시스 가에 입적된 뒤 무수 히 고민했다.

이제 공녀가 된 나는 더 이상 검을 휘둘러선 안 되는 걸까. 편 했던 바지를 벗고 드레스를 입어 야 할까. 검이 되기를 포기하고 꽃이 되어야 할까.

넘쳐흐르는 고뇌들로 잠 못 들 었던 어젯밤, 충동적으로 카이사

르가 묵는 옆방을 찾아가 물었다. 크리시스의 공녀가 됐으니 이제 예전 삶은 모두 버려야 하냐고. 공작님께선 그걸 바라시냐고. 그 런 날 한참 응시하던 카이사르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 넌 이제 크리시스의 공녀 지. 그와 동시에 뒷골목에서 자란 평민 카슈미르이기도 하고, 용병 왕이라 칭송받는 소드 마스터 미 르이기도 하다. 그 모든 정체성을 버린 채 크리시스의 공녀로만 남 아야 할 필요는 없다. 물론 네가 계속 미르로 일하며 위험해지기를

원치 않는다. 하지만 네가 원한다 면 말리진 않을 것이다. 난 네 모 든 정체성을 품을 자신이 있으니 네가 원하는 걸 해라.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다.'

벅차오르는 단어들이, 내 머리를 쓸어내리는 조금 서늘한 손이, 피 부 위로 닿는 다정한 눈길이 날 안심하게 했다.

"타협할 생각은 없습니다."

나는 크리시스의 공녀이며, 힘든 삶을 버텨 온 카슈미르이고, 마수

들과 맞서 싸워 온 미르다. 그 모 든 정체성들을 버리고 싶지 않았

카트린느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사교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오래 지속되는 힘은 무엇인가.

높은 작위? 물론 그 또한 무시 할 순 없다. 허나 그것은 부가적 인 권력으로 작용할 뿐, 사교계를 좌지우지한다고 하기엔 어폐가 있 었다.

아름다운 외모? 그 또한 중요하 다. 허나 그것을 최우선이라고 하 기엔 부족했다. 아름다움이란 무 척이나 빠르게 스러지곤 하니까.

사교계를 좌지우지하는 가장 큰 힘은, 유행을 선도하는 힘이었다.

귀족이란 사치와 세련됨에 눈이 돌아간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떨어진다는 것을, 스 타일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을 버티지 못했다.

'유행을 선도하는 이들은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지.'

사교계의 유행은 제국의 금전 운행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사 교계 영애들의 지갑에서 나오는 돈이 제국의 시장판을 들었다 놨 다 했으니까.

돈은 곧 정치와도 연관되어 있 었기에, 설령 황제나 교황이라 할 지라도 절대 사교계를 무시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아리아가 유행을 선도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줄

거야.'

크리시스에 제대로 입적된 이후 부터 결심한 일이었다.

사회적 지위가 사교계에 큰 영 향을 주지 못한다는 가장 큰 증언 자가 바로 원작의 카슈미르다. 카 슈미르는 무려 제국의 유일한 공 작가의 공녀였음에도 불구하고 사 교계에서 도태되었다.

'만약 그런 걸 아리아가 겪는다 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리아가 사교계에서 무시당하지 않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물론 아리아는 내 도움 없이도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 마 나보다 훨씬 더 잘할 것이다. 허나 언니 되는 사람으로서 아리 아의 시작을 순탄하게 만들어 주 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나는 아리아에게 확실한 아이템을 하나 쥐여 주고 싶었다.

나와 아리아는 사생아와 양녀로 서 물어뜯기기 딱 좋은 자리의 인

물들. 이 페널티를 가지고도 살아 남으려면 사교계에서 분명한 권력 을 잡아야 했다.

'이번 데뷔탕트는 아리아가 사교 계에서 기틀을 잡는 사건이 되어 야 해. 나 또한 사교계에서 무시 당하지 않는 선에서 내 포지션을 확실히 해야 하고.'

데뷔탕트는 이후 사교계 행보의 흥행 여부를 결정한다 해도 과하 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행사였다. 절대 옷으로 무시당해선 안 됐고, 오히려 우러러 보여야 했다.

"하, 하지만 데뷔탕트에서 제복 을 입은 레이디는 전례가 없어요! 분명 영애는 한동안 뒷말의 주인 공이 되어야 할 겁니다!"

카트린느가 외쳤다. 놀란 시선들 사이에서 차분히 레몬차 한 모금 을 더 들이켰다.

확실히 카트린느 말이 맞긴 했 다. 솔라티네 제국엔 남존여비 사 상이 아직도 남아 있었으니까. 여 자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드레스가 아닌 제복을 입는 것은 뒷말을 들

을 법한 이야기였다.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거였 다.

'화제성과 차별성.'

모방으론 유행을 이끌 수 없다. 시선을 이끌고 떠들기 좋아하는 혀들을 한데 모을 법한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제복을 유행으로 만들긴 힘들겠 지. 지금까지 형성된 틀을 단번에 부술 용기가 있는 영애들은 적을

테니까.'

유행은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제복을 사교계 영 애들에게 유행으로 퍼트리기엔 영 애들의 복색에 대한 선입견이 너 무 강했다.

그 때문에 제복을 입는 것은 유 행 선도를 위해서라기보단 내가 검을 쓰는 기사라는 선포에 가까 웠다.

'절대 사교계에만 관심 있는 영 애로 보여선 안 돼.'

앞으로 계획한 행보를 생각했을 때 내 첫 이미지는 기사로서 강력 하게 자리매김해 둬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유행시킬 건 따로 있지.'

"부인, 이걸 한번 봐 주시겠습니 까?"

주절주절 걱정을 늘어놓는 카트 린느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어젯밤 긴 고심 끝에 생각해 낸 아이템이었다.

"......이건?',

일순 우울해 보이던 카트린느의 눈빛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나는 그녀의 반응을 즐기며 찻잔을 한 번 더 기울였다.

"셔츠 위에 입을 아이템입니다. 심플하지만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묘한 분위기를 극대화하죠. 넓은 식견을 가진 부인께서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확실히, 단순하면서도 획기 적이군요. 단순한 덕에 꾸미는 데

로 천차만별의 느낌이 될 것 같아 요. 셔츠를 자주 입는 영식들에게 먼저 유행할 것 같지만 살짝 느낌 만 바꾼다면 영애들에게도 유행할 것 같아요."

"드레스 위에 착용할 만한 것도 이미 스케치해 왔습니다."

종이 한 장을 더 꺼내 보여 주 었다. 카트린느의 눈이 광기에 가 까운 빛을 띠고 반짝였다.

"이건 확실히 유행하겠군요."

냉철한 사업가의 태도를 한 카

트린느가 확신했다. 고개를 들어 날 올려다보는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였다.

그 모습을 본 뒤에야 나는 꽤 비열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영애! 저와 이 아이디어로 일 한 번 해 보실 생각 없으십니까!"

'계획대로.'

난 미끼를 던졌고, 카트린느는 그 미끼를 확 물어 버린 것이었

"언니, 그런 아이디어는 어떻게 생각해낸 거야?"

미친 열정을 보이는 카트린느에 게서 겨우 벗어나 마차를 타고 돌 아가는 중 아리아가 물었다. 존경 을 담아 반짝이는 눈이 부담스러 웠다.

"음, 어쩌다 보니?"

'그야 전생의 기억을 베낀 거

지.'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카 트린느가 극찬하며 함께 사업을 해 보자 제안한 그 아이템은 다름 아닌 전생에서 유행하던 패션 아 이템이었다.

"언니랑 진짜 잘 어울렸어! 드레 스 위에 입는 것도 예뻤고! 팔기 시작하면 불티나게 팔릴 것 같은 데, 정말 카트린느 부인이랑 사업 해 보려고?"

들뜬 아리아가 초롱초롱한 눈으

로 날 바라보았다. 어깨를 으쓱였

"난 돈이 없으니 공작님께 투자 해 달라고 부탁해 봐야지. 들어 주실지는 모르겠지만."

"그 양반이 언니 부탁을 안 들 어줄 리가."

아리아가 코웃음을 쳤다. 시니컬 한 아리아의 태도에 피식 읏음이 나왔다. 아리아와 나 사이에 불편 하지 않은 침묵이 감돌았다.

"......언니한테 궁금한 건 없

어?"

창밖으로 날이 저물어 사람들이 줄어든 수도를 바라보다 조심스레 질문했다. 아리아의 지긋한 시선 이 내게로 닿았다.

'아리아는 당황스러운 것투성이 일 텐데.'

난 원작을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요 며칠 폭풍처럼 몰아닥친 일들 을 모두 이해했지만, 아리아는 달 랐다.

'기절하고 눈 떴는데 크리시스 공작가. 평생을 함께하던 언니는 사실 공작의 딸이었고, 피에 미쳤 다는 소문의 공작은 우리 자매를 입양하려 한다. 무언가 제대로 된 설명을 듣기도 전에 데뷔탕트를 준비하란다.'

아리아 입장에선 황당하다 못해 믿기지 않는 것투성이일 것이다.

'사건과 사건 사이에 이어지는 다리가 없는 느낌이겠지.'

아리아와 진지하게 얘기를 해야

했는데, 계속 바빠서 대화 한번 제대로 못 했다.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그 런데도 군말 없이 따라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동시에 느끼며, 무 언가 깊이 생각하는 아리아를 얌 전히 기다려 주었다.

"......질문, 딱 세 개만 해도 돼?"

마침내 조심스레 뱉는 부탁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무엇이 든 진실로 대답해 줄 자신이 있었

"공작가 주치의한테 들었어. 나, 요정 혼혈이라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아 가 슬프게 웃었다.

"언니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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