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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39화 (39/254)

39 화

" 아니."

딱 잘라 부정했다. 예전부터 알 고 있었던 건 아니다. 요정의 외 향은 인간과 거의 똑같은 데다, 혼혈인 아리아는 얼마 없는 요정 의 특징마저 보이지 않았으니까. 어려서는 아리아가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굳게 믿었다.

"알게 된 지는 얼마 안 됐어."

아리아가 보통 인간과 다르다는 낌새를 느낀 건 자연의 흐름을 읽 는 소드 마스터 경지에 오르고 나 서부터였다. 그냥 요정의 피도 아 닌 요정왕의 딸인 아리아는, 기운 이 보통 인간들과 달랐다.

'그땐 아리아가 워낙 특출 나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전에 요정을 만나 본 적이 없 으니, 아리아에게서 느껴지는 자 연의 기운이 요정의 기운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을 리 없었다. 아

리아가 요정 혼혈이라는 것을 알 게 된 건 전생을 기억하면서부터 였으니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하기 어려웠다.

조금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아 리아는 두 번째 질문을 입에 담았 다.

"언니 소드 마스터지? 그것도 용병왕 미르."

집무실에서 카이사르와 아리아 의 대화를 엿들으며 아리아가 이 미 알고 있음은 알게 되었지만,

직구로 날아오니 또 다른 기분이 었다.

입술을 꾹 깨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아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전부터 아리아가 이에 대 해 아예 무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날마다 곤죽이 되어 돌아가는 만큼 험한 일을 한다는 것을 모르기가 더 어려울뿐더러, 아리아는 천재였으니까.

'......이걸 다 외웠다고?'

'응! 쉽던데?'

고대어 교과서를 사 준 당일에 책을 통째로 외웠다면서 해맑게 웃던 아리아를 기억한다. 한 번 본 것을 모두 암기하는 천재인 아 리아는 머리 회전이 범인을 초월 하고 상황 유추에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

그런 아리아로서는 내가 용병 일을 한다는 것을 모르는 척해 주 는 게 더 어려웠을 것이다.

"......용병이라는 걸 알아낸 건

그렇다고 쳐도, 내가 미르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속이 시원하면서도 쓰라렸다. 애 써 여상스럽게 웃는 내게 아리아 가 슬프게 웃었다.

"언니가 독 때문에 한동안 못 깨어났을 때 언니 주머니에서 미 르한테 내려진 의뢰서 봤어."

"......음, 그러니까 언제쯤?"

나는 눈치를 보며 머리를 긁적 였다. 독으로 한동안 못 깨어났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확실

한 시기를 예측할 수 없었다. 입 술을 꾹 물었다 놓은 아리아가 한 숨을 쉬었다.

"독사 독으로 쓰러졌을 때 말이 야."

"아...... 그럼 안 지 2년도 더 된 거네."

"언니가 용병 일을 한다는 건 언니 용병 되면서부터 알았거든."

애써 장난스럽게 담소를 나누지 만 서로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깃 들었음을 우리 둘 다 모르지 않았 다. 혼들리는 표정으로 심호흡을

한 아리아가 쓰게 웃었다.

"그럼 마지막 질문. 언니는 여전 히,"

날 사랑해?

궁금한 것이 한가득할 텐데도 그런 것을 물었다.

내 사랑스러운 동생. 영원히 사 랑할 내 반쪽.

내 세상은 너로 시작해 너로 종 말을 맞는다. 세상이 확장하고 사

랑하는 것이 늘어난다 해도 가장 사랑하는 것은 영원히 너일 것이 다• 여태껏 내 인생은 네게 바치 는 하나의 제물이었으니까.

한숨처럼 웃은 나는 아리아를 꽉 끌어안았다.

"영원히, 아리아."

영원하고 불변할 거야, 내 사랑.

"흥미롭군."

사업 계획서를 주의 깊게 읽어 보던 카이사르가 종이를 내려놓았 다. 그의 무심한 눈동자에 미미한 흥미가 감돌았다.

"이 아이템으로 카트린느 의상 실과 일해 보겠다고."

"네. 사업에 대한 건은 모두 제 가 처리할 테니 공작님께선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금 긴장한 상태로 뻣뻣하게 말했다. 아무리 아이템이 좋다 한 들, 카이사르가 승낙을 하지 않으

면 투자 자금을 얻을 방도가 없었

"사업에 자신은 있나? 그리 쉽 지 않을 텐데."

"업체들에게 마수 부산물을 유 통해 본 적은 있습니다만, 오너만 저일 뿐, 실질적인 사업 운행은 믿을 만한 대리인에게 맡길 생각 입니다."

용병 일은 마수를 때려잡는 것 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토벌 후 끝난 산더미 같은 부산물들을 처 리하고, 유용한 것들을 구별한 뒤

유통해야 했다. 때문에 나 또한 어느 정도 사업에 대해 알고 있긴 했다.

'하지만 나보다 더 잘해 줄 사람 이 있으니까.'

아주 잘 아는 천재가 하나 있었 다. 사업을 한 번도 해 본 적 없 는 초짜지만 분명 사업 쪽으로 관 심을 보였기에, 어느 정도 배우고 나면 잘해 줄 거라 믿었다.

"그래. 투자해 보지. 확실히 가 능성 있어 보이니까."

카이사르의 수긍에 환하게 웃었

다. 난 그대로 조금 그의 눈치를 보다 안건을 하나 더 꺼냈다.

"음,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공작님과 공자님도 무도회 때 이 걸 한번 착용해 보심은 어떠실지 요."

"나와 칼이?"

눈을 깜빡거리는 카이사르를 향 해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아리아의 입지는 아직 없으나 칼 과 카이사르의 입지는 제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단단할 것이다• 그 런 이들이 착용해 준다면 홍보에 좋을 것이 분명했다.

"뭐, 어렵지 않다. 그렇게 하지. 칼에게도 한번 물어보마. 네가 부 탁했다고 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좋다고 하겠지만."

"감사합니다!"

피식 웃은 카이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화사하게 웃음 지 으니, 날 지그시 응시하던 카이사 르가 입을 열었다.

"대신 조건이 있다."

'•..."조건?'

조건이라고 하니 갑자기 긴장이 되었다. 비장한 낯으로 고개를 끄 덕였다.

"하명하세요. 해 보겠습니다."

그가 무슨 어려운 조건을 내걸 까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데, 그런 날 응시하던 카이사르가 바람 빠 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어려운 건 아니니 걱정 붙들어 매고."

그가 짓궂게 웃었다.

"앞으로 나를 아빠라고 불러라."

" 네?"

순간 당황해 멍청한 표정을 지 었다.

6 아•빠' '

어색하기 짝이 없는 단어를 천 천히 입 안에서 굴려 본다.

'이게 뭐라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민망하 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간지러웠 다.

입술을 달싹거리며 어쩔 줄 몰 라 하는 날 응시하던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뻔뻔하게 웃었다.

"슈슈야, 안 해 주려고?"

귀가 뜨거웠다. 아버지라고 인지 하게 된 사람의 입에서 처음으로

듣게 된 애칭은 온몸이 배배 꼬이 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 아......

"그래."

다정한 시선이 어색하다. 수십, 수백의 마수 떼를 마주했을 때도 이렇게 난감하진 않았다.

첫 음을 떼고서도 머뭇거리다, 그의 시선을 피하며 작게 중얼거 렸다.

"아, 버지......

부끄러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것이 내 최대였다.

큭, 작은 웃음소리가 탁자 너머 로 들려왔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정도면 되었다,"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덮었다. 어색하지만 느리게 쓸어내리는 손 길이 따스했다.

"천천히 와도 괜찮다. 늘 너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시야에 잡히는 부드러운 미소가 눈가를 뜨겁게 달구었다. 나도 모 르게 푹 고개를 숙였다.

다정한 사람이었다, 내 아버지

데뷔탕트 당일이 성큼 다가왔다. 꼭두새벽부터 내 방으로 몰려온 시녀들은 내 존재를 재창조하려는

것처럼 열정적으로 날 치장하기 시작했다.

"향유는 마지막으로 골랐던 와 인 향으로. 응. 귀걸이는 그거."

그리고 난 바쁘게 돌아다니는 시녀들을 지휘하느라 정신이 없었 다. 목욕부터 시작해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준비된 의상 을 차려입으니 어느새 데뷔탕트를 코앞에 둔 이른 저녁이었다.

정말 환상적이에요."

준비를 마친 날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훑어본 마리아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번 데뷔탕트의 주인공은 분 명 아가씨일 거예요."

마리아가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확신했다. 부끄러워져 머리를 긁 적였다.

"자! 그럼 이 멋진 모습을 모두 에게 보여 주러 가요!"

기세등등한 마리아를 따라 쭈뼛

쭈뼛 발걸음을 옮겼다. 향긋한 향 을 가득 머금은 몸이나 각 잡힌 비싼 옷 같은 것들은 역시 익숙하 지 않았다.

"슈슈. 다 됐......

진작 준비를 끝마친 건지 아래 층에서 무료한 낯으로 차를 마시 던 칼이 고개를 들었다. 날 발견 한 그가 크게 멈칫했다. 그의 맞 은편에 앉아 있던 카이사르도 덩 달아 눈을 크게 떴다.

'유전자는 위대하구나.'

원래도 눈이 부신 얼굴들이었지 만, 멀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을 보 니 어디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미 모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복장도 둘 다 형식이 비슷한 검은 제복이었기에 원래부터 닮았던 두 사람은 한 사람을 과거와 미래로 나누어 둔 것처럼 닮아 있었다.

'이러니까 드레스 코드를 맞춘 것 같네.'

물론 나 또한 검은 제복 차림이 었기에 셋이 모여 있으면 세트 같

을 것이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 푸스스 웃었다.

'그럼 아리아만 드레스 코드가 다른데...... 그건 그것대로 괜찮을 지도 모르겠네. 아리아가 주인공 처럼 돋보일 테니까.'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아리아가 데뷔탕트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는 것이다. 아리아가 멋지게 오늘 밤 의 주인공이 될 걸 생각하던 나는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었다.

"아리아는 아직 안 나왔습니

까?"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며 둘에게 물었다. 크리시스 부자는 내 물음 에도 멍하니 답이 없었다. 고개를 갸웃했다.

"......칼? 아버지?"

조금 어색하게, 바뀐 호칭을 입 에 담았다. 칼과 카이사르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방황하던 카이사 르의 시선이 닿은 곳은 내 상체를 채운 액세서리였다.

"••••••그거."

" 네?"

"너무 선정적이다."

"......네?"

'당신도 하고 있잖아.'

어이가 증발하여 카이사르의 얼 굴과 상체를 번갈아 보고 있는데 그가 표정을 굳혔다.

"이렇게까지 선정적일 줄 몰랐 다. 벗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래. 멋지긴 하지만 너무 파격 적이군."

'그냥...... 줄인데?'

칼까지 진지하게 충고하는 모습 을 보고 있자니 그렇게까지 이상 한가 싶어 쭈뼛거리게 되었다. 나 는 액세서리를 매만졌다.

"지랄이야 정말. 언니! 멋지니까 벗지 마!"

뒤통수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 리에 휙 고개를 돌렸다.

'......세상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한껏 꾸민 아리아는 말문이 막힐 정도로 아 름다웠다.

"캬...... 이게 인생이지. 좋은 인 생이었다, 진짜......

나와 똑바로 마주하더니 마찬가 지로 멍한 표정을 짓던 아리아가 나이를 의심케 하는 감탄사를 뱉 었다. 거친 숨을 내쉬며 황홀하다 는 표정으로 '미친', '살아 있길 잘했어' 같은 말들을 중얼거리던 아리아가 성큼 다가와 날 안았다.

"저 새끼들, 아니, 아버지랑 오 라버니 말은 듣지 마! 언니 오늘 환상적인걸!"

아리아를 마주 안으며 웃었다. 아리아는 평소에도 날 칭찬하는 데에 지극히 관대하긴 했지만, 저 렇게까지 말할 땐 진실일 가능성 이 높았다.

"너도 그래. 오늘 밤은 네가 주 인공일 거야."

짧지만 진심 어린 칭찬에 아리

아의 뺨이 미미하게 달아올랐다.

아리아와 손을 맞잡은 채 여전 히 내 액세서리를 아니꼽다는 눈 으로 바라보는 카이사르와 칼을 향해 빙긋 웃었다.

"그럼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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