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화
태양의 제국, 솔라티네의 겨울 황궁 무도회는 연중 최대의 행사 중 하나로서 화려하고 완벽하게 준비되었다.
겨울 특산품으로 만들어진 요리 들. 상아와 금으로 정교하게 꾸민 홀. 깃을 세운 공작처럼 잔뜩 꾸 민 귀족들.
"크리시스 공작가가 두 양녀를
들였다는 얘기, 부인도 들으셨나 요?"
"어머, 물론이죠. 제국의 가장 큰 이슈인걸요."
화려한 귀족들의 입을 뜨겁게 달구는 하나의 주제는 단연 크리 시스 두 양녀의 이야기였다.
"듣기로는 둘 다 평민 출신이라 는데...... 과연 사교 예의는 제대 로 갖췄을지 걱정되는군요."
"그러게 말이에요! 평민들을 양 녀로 들인다니, 대체 크리시스 공 작님께선 무슨 생각이신 건지!"
데뷔탕트를 코앞에 둔 시기에 돌연 출사표를 던진 두 자매에 대 하여 수많은 추문이 떠돌았다. 대 부분의 귀족들은 평민 출신 양녀 를 둘이나 들인 크리시스 공작의 의중을 궁금해하면서도, 자매의 출신을 비꼬기에 바빴다.
"크리시스 공작가의 카이사르 크리시스 공작님과 칼 크리시스 공자님, 카슈미르 크리시스 공녀 님과 아리아 크리시스 공녀님이 연회장에 입장합니다!"
연회장 입장은 보통 작위 순서 대로 이루어지며, 작위가 높을수 록 늦게 등장하는 것이 보통이었 다. 그 권력에 걸맞게 황가의 등 장 바로 직전이 되어서야 공작가 의 입장 소식이 연회장을 울렸다.
이윽고 연회장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해지고, 거대한 문이 열리 며이번 데뷔탕트의 주인공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헉."
여기저기서 탄식이 울려 퍼졌다.
칼 크리시스 공자와 함께 들어 선 봄의 요정 같은 소녀가 부드럽 게 웃었다.
백장미 생화로 장식한 연분홍색 머리칼. 하얗고 투명한 피부. 물 기를 머금은 하늘처럼 반짝이는 연하늘색 눈동자와 처연하게 축 처진 눈매. 코르셋이 없어 한눈에 보기에도 편해 보이는, 하늘색과 흰색이 섞인 하늘하늘한 슈미즈 드레스.
그리고 상체를 세밀하고 촘촘하
게 덮은 은색 체인.
"저게...... 뭐죠?"
누군가 중얼거렸다.
아리아 크리시스의 상체를 덮은 것은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박은 체인이었다. 분명 단순한 체인에 불과했으나, 상체를 속박하고 드 레스의 결을 따라 무릎까지 휘감 는 체인은 차고 있는 것만으로 분 위기가 상당히 묘했다.
탁
"......세상에."
그리고 카이사르 크리시스와 함 께 등장한 다음 주인공.
연회장 전체가 크게 술렁였다.
"저 공녀, 지금 제복을 입은 건 가요?"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크게 울려 퍼졌다.
굽이치는 기다란 검은 머리칼.
축 처진 순한 눈매. 살짝 붉게 달 아오른 눈가. 나른하게 반쯤 감긴 눈꺼풀과, 그 사이로 번쩍이는 형 광 분홍빛 눈동자. 사방으로 퍼지 는 기묘한 위압감. 몸에 딱 맞는 검은 제복.
그리고 흰 와이셔츠 위를 덮고 몸을 속박한 검은 줄들.
"와......
탄성이 퍼져 나갔다. 분명 금욕 적이기 짝이 없는 제복 차림임에 도 몸을 이리저리 속박한 검은 줄
하나가 묘한 분위기를 가득 퍼트 렸다.
그녀의 세계에선 통칭 '바디체 인'과 '하네스'라고 불리던 것들이 었다.
"많이 시끄럽군요."
예상은 했지만 피부 위로 닿는 시선들이 너무 따가웠다. 그러나 주위의 시선과 수군거림은 미르로 살며 어느 정도 익숙해진 부분이
었기에 아무렇지 않게 넘기며 와 인 잔을 하나 잡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크리시스 의 이름을 팔아라. 여차하면 검을 뽑아도 된다. 뒷수습은 내가 할 테니."
마찬가지로 와인 잔을 집어든 카이사르가 여상스러운 말투로 큰 일 날 소리를 했다. 피식 읏으며 허리춤에 찬 검집을 잠시 바라보 았다.
보통 귀족은 무도회 안으로 무
기를 가지고 들어올 수 없었으나, 크리시스의 권력은 보통의 궤도를 상당히 벗어났기에 검을 소지하고 들어오는 것을 허락받을 수 있었 다.
"공작님."
들어선 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카이사르에게로 시종이 다가왔다. 서늘한 무표정으로 돌 아간 카이사르가 눈썹을 꿈틀거렸 다.
"황제 폐하의 호출입니다."
"빌어먹을."
그가 한숨과 함께 욕설을 뱉었 다. 황제가 호출했다는데 저래도 되나 싶어 눈만 깜빡거리고 있으 니 카이사르가 나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이번 데뷔탕트는 함께해 줄 수 없을 것 같군. 미안 하다."
카이사르의 얼굴 한편으로 짙은 짜증과 미안함이 보였기에 황급히 괜찮다는 듯 웃어 주었다.
"전 괜찮습니다. 잘 다녀오세 요."
정말 싫다는 감정과 삶에 대한 경멸을 담은 눈을 하고선 사라지 는 카이사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칼과 아리아가 호탕하게 웃었다. 아주 쌤통이라는 뜻이 담긴 것 같 은 웃음들이라 떨떠름함을 느낄 때였다.
"걱정하지 마라. 난 계속 네 곁 에......
"크리시스 공자!"
얄밉게 웃던 칼이 말을 끝마치 기도 전에 한 무리의 영식이 몰려 왔다. 칼의 얼굴이 순식간에 서늘 하게 굳었다. 그들의 눈에 탐욕이 번들거리는 걸 보니 칼에게서 떨 어지는 걸 주워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았으나, 떼로 몰려온 걸 보 아 칼이 무섭긴 한 모양이었다.
"여기가 크리시스 공자 동생 분 들이십니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크 리시스 공자, 소개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대들이 알 거 없다."
" 칼."
차갑게 영식들을 내치는 칼에게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칼이 움찔 했다.
대상의 손위 형제에게 대상의 소개를 요청할 때 거절하는 것은 무례인 데다, 가족 불화설까지 돌 수 있었다.
"......여기는 내 큰 동생 카슈미 르 도레마 드 카이사르 크리시스. 여긴 내 작은 동생 아리아 포스텔 드 카이사르 크리시스다."
칼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와 아리아를 소개했다. 칼의 서늘함 에 움찔하던 영식들이 방긋 웃으 며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헬라 부인에게서 배웠던 사교용 미소를 대충 걸치며 그들의 시끄러운 주 저리들을 한 귀로 흘릴 때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크리시스 공 자와 크리시스 공녀께서 함께 착 용하신 그 검은 액세서리는 어디 서 구매하신 겁니까?"
한 영식의 물음에 다른 영식들
도 모두 은근히 궁금하다는 기색 을 드러냈다. 집중을 끌었다는 생 각에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 다.
'칼.'
칼에게 마나의 울림을 통한 진 언을 보냈다.
'무슨 일이지.'
살짝 미간을 좁힌 칼이 대답했 다. 소드 마스터인 나와 카이사르 처럼 안정적인 진언은 아니었으
나, 그도 어느 정도 경지를 갖춘 마법사인 만큼 알아듣는 데 무리 는 없었다.
'이 영식들 끌고 가서 상품 홍보 좀 해 줄 수 있습니까?'
그를 향해 싱긋 웃으며 와인 잔 을 기울였다. 칼에겐 미안하지만 시끄럽게 떠드는 영식들 때문에 귀가 아프던 참에 영식들도 쫓고 상품 홍보도 하고 일석이조였다.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영식들을 돌 아보던 칼이 무언가 생각난 표정 을 짓더니 날 휙 돌아보았다.
'좋다. 대신 돌아가면 근 시일 내에 네가 검을 휘두르는 걸 보게 해 주겠다고 약속해.'
'......? 그야 어렵지 않습니다.'
뜬금없는 조건을 내거는 칼의 말에 갸우뚱하면서도 긍정을 표했 다. 칼이 씨익 웃었다.
"어디서 구매한 건지 알려주지. 대신 자리를 좀 옮기도록 하세."
"아! 물론입니다!"
칼이 발걸음을 옮기자 영식들이
황급히 그를 따라갔다. 몇몇은 나 와 아리아를 돌아보며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사교용 미 소를 걸친 채 손만 혼들어 주었 다.
"떨거지들이 이제야 떨어져 나 갔네."
" 아리아......
"......영식들이 이제야 갔네."
칼의 뒤통수를 보며 비열하게 웃던 아리아가 내 부름에 황급히 말을 바꿨다.
"언니랑 더 있고 싶지만...... 나 도이만 가 볼게."
잠시 나와 담소를 나누던 아리 아는 주위 영애들이 슬슬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발걸음 을 옮겼다.
아리아는 떠나기 전에 내 손을 꽉 잡았다.
"반드시, 이 사교계를 언니 발아 래 놔줄 테니까."
기묘한 포부를 다지며 떠나는
아리아의 눈동자가 열의로 불탁고 있어 뭐라 첨언하지도 못하고 어 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 다.
'나만 혼자네.'
한동안은 누군가 먼저 말을 걸 어 주기를 기다렸으나, 제복과 하 네스라는 파격적인 의상 때문인지 시선이 쏟아지긴 해도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뭔가 하긴 해야 하는데.
혀를 차며 와인을 들이켰다. 데 뷔탕트에서 실패하면 곤란했으나, 공녀로서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거는 건 너무 꿇고 들어가는 모양 새였다.
아무나 붙잡고 먼저 말을 걸까 싶기까지 할 때.
간을 보던 하이에나들이 슬슬 다가오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크리시스 공녀. 데 뷔탕트를 치르게 된 걸 축하해 요."
'......처음부터인가.'
웃으며 다가오는 세 영애를 보 며 한숨을 쉬었다. 그들의 눈에 도사리는 악의가 강렬했다.
'처음은 그래도 호의를 가진 이 들이 다가오길 바랐는데. 어쩔 수 없나.'
"반갑습니다, 영애들. 소개를 부 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귀족들의 암투는 이미 각오한
바였다. 헬라 부인에게서 배운 사 교용 미소를 입술 위로 그린 채 그들을 맞이했다.
"전 일리움 백작가의 차녀 릴리 일리움이예요. 여기는 배로니카 자작가의 플뢰르 영애, 이쪽은 테 라리나 남작가의 멜로디 영애고 요."
"안녕하세요, 공녀. 데뷔탕트를 치루시게 된 걸 축하해요."
"반가워요, 공녀. 무사히 데뷔탕 트 마치시기를 바라요."
'릴리 일리움 백작 영애를 조심
하세요. 사교계를 주름잡은 르웰 린 데카르도 후작 영애 바로 다음 가는 영애예요. 분명 공녀를 견제 하려 할 겁니다.'
헬라 부인의 충고를 떠올리며 릴리를 지그시 응시했다. 굽이치 는 연갈색 머리에 순한 하늘색 눈 을 가진 릴리에게는 날 향한 악의 가 가득했다. 성가심을 느끼면서 도 싱긋 웃었다.
"감사합니다. 영애들에게도 즐거 운 연회가 되길 바랍니다."
우아하게 잔을 들었다. 날 위아 래로 훑어본 그들은 슬슬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크리시스 공녀는 복색이 굉장히 독특하네요."
"그러게요. 검은 제복이라니, 상 당히 이색적이에요."
"무도회에서도 이런 옷이라니, 공녀는 정말 수수한가 봐요."
'그냥 욕을 해라.'
자기들끼리 하하 호호 웃으며 내 복색을 시원하게 돌려 깎는 모
습이 참 즐거워 보였다. 느리게 웃어 보였다.
"영애들이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사실 제가 검 을 잡는 사람인지라 제복을 즐겨 입거든요."
"검을...... 잡는다고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까기 좋은 거대한 미끼를 냅다 던져 주니 영 애들이 크게 흠칫했다.
제국에선 영애라면 마땅히 남성 기사들에게 보호받아야 한다 여겨
졌기 때문에, 검을 잡는 여성은 돈 없는 평민이라는 인식이 강했 다. 조금 충격받은 표정을 짓던 그들은 이내 냅다 날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어머! 검을 잡는다니요! 제국에 서 귀족 여성은 검을 잡지 않습니 다!"
"이런. 아무래도 영애가 평민들 과 함께 자라 영애로서의 덕목을 잘 모르시나 봅니다. 저희가 사교 계의 선배로서 조금 도움을 드려 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세상에 공녀의 손을 좀 봐요!
고생을 많이 하신 모양이군요. 가 슴이 아파요. 보습에 좋은 크림을 조금 추천해 드릴까요?"
'그래. 신나게 까고 소문 좀 내 줘라.'
건수를 잡아 신난 표정들을 보 며 느긋하게 와인을 들이켰다. 주 위에서 엿듣던 이들이 웅성거리는 것을 살피며 속으로 웃었다.
'소드 마스터라는 게 밝혀져선 안 되지만, 검을 쓰는 사람이라는 건 소문이 나야 하니까.'
내 미래 계획을 위해서였다.
"귀족 영애가 검을 쓰다니, 크리 시스 공작가의 부끄러움이 아닐지 모르겠네요!"
별말 없이 내버려 두니 더욱 신 나서 입방아를 찧던 영애들이 비 로소 선을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