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41화 (41/254)

41 화

나는 표정을 싹 지웠다.

"일리움 영애. 말이 지나치십니

탁 _

큰 소리가 나도록 잔을 내려놓 고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훑어보 았다. 릴리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크리시스 공작가의 이름이 이 런 곳에서 나올 정도로 가벼워 보 였습니까?"

"그, 그게 아니라......

"크리시스는 오랜 역사 동안 검 으로 제국을 지키던 무가입니다. 크리시스의 일원으로서 검을 잡는 것은 당연한 일일진대, 무슨 의도 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크리시스의 역사를 욕하시는 겁니까?"

사교계에선 가문의 권력이 잘 통하지 않는다. 허나 아예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제국 유일의 공작가로, 견제할 조직이 황가와 신전뿐이며 평민들 에게까지 칭송되는 크리시스의 이 름은 대륙 전역에서 그 무게가 무 거웠다.

"공녀. 오해가 있는 듯하네요. 저희는 크리시스 공작가를 욕하는 것이 아니라, 영애가 검을 잡는 것이

"난 영애이기 이전에 크리시스 의 일원입니다. 나를 모욕하는 것 은 공작가를 욕하는 것임을 모르

십니까?"

서늘한 시선에 희미한 살기를 담자 영애들이 몸을 파드득 떨었 다.

"그리고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시대를 거 스르는 클래식한 사상들을 가지셨 습니다."

제국에선 여전히 남성우월주의 의식이 강했으나, 요즘은 여성이 작위를 물려받거나 여성이 기사가 되는 일도 드문드문 일어나곤 했

다. 입꼬리를 비트니 영애들의 얼 굴이 붉게 물들었다.

"크리시스 영애!"

발끈한 릴리가 언성을 높이던 찰나.

강렬한 장미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쯤 하지 그래요, 일리움 영 애."

화염을 닮은 붉은 머리. 영롱하 게 반짝이는 녹빛 눈동자. 우아한

몸짓. 먹이사슬 최상위 짐승을 닮 은 노련한 사냥꾼의 눈빛.

제국 모든 금화의 입구이자 출 구. 수많은 상권의 주인. 세 개의 후작가 중 하나.

부유함으로는 그를 따라갈 이름 이 없다는, 통칭 '돈을 먹는 장 미', 데카르도 후작가의 르웰린 데카르도였다.

릴리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 미친.

나 또한 놀라 육성으로 욕을 뱉 을 뻔했다.

'르웰린이 왜?'

당혹스러움에 사교용 웃음이 무 너지기 시작했다. 이곳에 르웰린 이 나타난 것까진 문제가 되지 않 으나, 르웰린이 미르를 본 적 있 다는 것이 문제였다.

'르웰린이 여기서 날 알아보기라 도 하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주옥이 돼 버린다. 동공이 제 자리를 모르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데, 데카르도 영애가 무슨 자격 으로 끼어드는 건가요! 이건 저와 크리시스 영애의 일이니 물러서 요!"

호랑이 없는 산에 여우처럼 군 림하던 릴리가 진정한 지배자의 앞에서 움찔거리면서도 성을 냈 다. 코웃음을 친 르웰린이 날 지 키듯 앞으로 나섰다.

"사교계 선배로서 괴롭힘당하는 크리시스 영애를 돕는 것이 당연 하지요. 갓 데뷔탕트를 치른 영애 를 도와주기는커녕 텃세나 부리고 있으니...... 사교계의 격이 떨어지 는 것 같더군요."

"터, 텃세라니! 괴롭힘이라니요! 우린 그게 아니라......!"

"적당히 해요, 릴리 일리움. 추 해요. 듣자 하니 크리시스 공작가 도 나오던데. 큰일이 나고 싶은 건가요? 크리시스의 이름이 절대 가볍지 않다는 것을 그대도 알 텐 데요. 일이 커지기 전에 사과하길 권유하죠. 이 일이 크리시스 공작

님 귀에 들어가는 건 그대도 원치 않을 테니까."

르웰린이 약 올리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릴리의 얼굴이 새파랗 게 질렸다.

'와.'

속으로 손뼉을 쳤다. 직설적이고 깔끔한 언변. 조금은 거칠지 않나 싶은 말투를 완벽히 포장해 주는 우아함.

후에 빼앗긴다 한들, 현 사교계

의 황제는 단연 르웰린이었다.

"......미안해요, 크리시스 영애. 실례를 범했군요."

호랑이의 포효에 왕 노릇을 하 던 여우가 얌전히 꼬리를 말았다. 르웰린에겐 아무 말도 못 하면서 내겐 독기 서린 눈빛을 보내는 모 습이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았으 나, 넘어가 주기로 마음먹었다.

"되었습니다. 실수는 누구나 하 는 법이니까요. 다만 그대들

차가운 눈으로 세 영애를 둘러 보았다.

"입은 재앙을 여는 문. 혀는 자 신을 베는 칼이라는 걸,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함부로 입 놀리다간 끝장난다는 뜻이었다.

오싹한 것처럼 파드득 몸을 떤 릴리가 다른 영애들을 이끌고 황 급히 자리를 떴다.

"......도와줘서 고마웠습니다, 데 카르도 영애."

한바탕 폭풍이 지나갔음에 한숨 을 돌리곤 르웰린에게 짧게 감사 인사를 남겼다. 새침한 눈빛으로 날 흘겨본 르웰린이 휙 부채를 펼 쳐 제 입가를 가렸다.

"영애를 위한 게 아니었으니 착 각하지 말아요. 사교계의 격이 떨 어지는 걸 두고 보기 싫었던 것뿐 이에요."

'과연 소설 그대로구나.

잔을 기울이며 피식 웃었다.

소설 속 르웰린은 라이너에 대 한 사랑과 아리아를 향한 질투 때 문에 흑화하기 전까진 일명 '츤데 레' 성격이었다.

그녀를 향해 짧게 고개를 숙였

"그래도 감사합니다. 뒤늦게 인 사를 하는군요. 카슈미르 도레마 드 카이사르 크리시스라고 합니

르웰린이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 들었다.

"데카르도 후작가의 장녀, 르웰 린 베르타 르 체슬러 데카르도예 요."

아무리 새침하게 굴어도 전생 현생 도합 약 60년을 산 소드 마 스터에겐 그저 귀여워 보일 뿐이 었다. 속으로 웃고 있던 찰나, 새 침하게 날 흘기던 르웰린이 일순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크리시스 영애."

" 네?"

예리한 녹빛 눈동자가 날 지그 시 응시하다, 이내 잔을 잡은 내 손으로 시선을 옮겨 갔다. 눈동자 가 깊어졌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나 요?"

쿨럭

헛기침이 터져 나왔다.

"아니, 아닐, 아닐 텐데요?"

"흠...... 어디서 본 것 같은데."

" 아닙니다."

당황한 나머지 지나치게 단호하 게 부정했다. 시선을 슬금슬금 피 하는 나를 보며 미간을 좁힌 르웰 린이 느리게 입술을 뗄 때였다.

"솔라티네 제국의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그의 아들 황태자 저 하와 2황자 저하께서 연회장에 입장하십니다!"

태양이 지지 않는 솔라티네 제

국의 지배자들이 모습을 드러냈 다.

'와••...

위압감을 풍기며 등장한 황제에 게 제일 먼저 눈이 갔다.

황가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황금 빛 머리칼을 흩날리며 당당히 옥 좌에 오르는 사내. 헬리오스 1세 였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연회장 전역에서 동시에 인사가 쏟아졌다. 나 또한 살짝 허리를 굽히며 인사말을 중얼거렸다. 권 태롭게 황좌에 걸터앉은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긴 말 할 거 뭐 있겠나. 다들 연회를 즐기게."

황제의 연설은 싱거울 정도로 빠르게 끝냈다. 난 만사가 귀찮아 보이는 황제를 올려다보며 혀를 찼다.

'소설 속에선 좀 이상한 놈이었

지만......•'

그래도 황제는 황제였다. 그의 시린 벽안에 은은히 실린 위압감 을 구경하는데, 문득 그의 눈동자 가 내 쪽으로 굴러왔다.

황제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어......

깊은 푸름에 홀린 듯 빠져들다 번뜩 정신을 차렸다. 황제는 확연 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미 눈을 마주쳤는데 무시하기도 좀

그렇고 인사하기엔 거리가 멀어서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황제의 입 꼬리가 짓궂게 올라갔다.

'••••••윙크?'

진짜 뭔가 싶었다. 잔망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황제를 보 고 당황한 나는, 아무것도 못 본 셈 치고 고개를 돌려 외면해 버리 고 말았다.

돌린 시야에 잡힌 것은 다름 아 닌 황태자가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난 경악했다.

'......디, 디, 디디?'

황태자는 머리색만 바뀐 디디였 다.

"......쯧. 그럼 난 이만 가 보 죠."

르웰린은 입을 떡 벌리고 멍한 듯 굳어 있는 날 지그시 응시하다 혀를 차고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 지든 말든, 난 그 자리에서 움직 일 수 없었다.

'디디가 여기서 왜 나와?'

그야말로 경악의 극치였다. 벌어 진 입은 닫힐 생각을 안 했고, 머 릿속은 새하얗게 굳었다. 난 디디 가 황좌 옆자리에 앉는 것을 멍하 니 보고만 있었다.

'솔라티네 제국의 황태자는...... 남주 중 하나잖아.'

디에고 일리아스 디 헬리오스 솔라티네. 제국의 황태자이자, 소 설 '요정의 밤'의 남주인공 중 하

나.

황태자 디에고가 내가 구한 디 디와 동일 인물이다.

' 미친.'

나오는 건 욕밖에 없었다.

'그때가 그때였어?'

비틀렸다. 내가 원작을 비틀어 버렸다.

원작에서 디에고와 아리아의 접

점은 다름 아닌 디에고가 암살자 들로 인해 의식불명이 되는 사건 이었다.

황태자 디에고는 승하한 전 황 후의 아들로, 태어나면서부터 황 태자로 임명받았다. 하지만 그가 5살이 되던 해에 티나 키프로스 가 황후로 즉위했고. 자신의 친아 들 2황자를 후계로 올리기 위해 디에고의 목숨을 위협하기 시작했 다.

'황제는 디에고를 친애했으나, 대놓고 지켜줄 순 없었지.'

황태자 임명은 황제가 하나, 이 후 황제가 되는 것은 황태자 혼자 해야 한다. 황제는 황위를 둔 혈 전에 일절 관여할 수 없다. 솔라 티네 황가의 오랜 전통이었다.

'이 과정에선 모든 편법과 불법 이 암묵적으로 허용된다.'

그것이 바로 디에고가 황태자임 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암살 위기 를 겪어야 하는 이유였다.

'여태껏은 버텼지만 결국 소설

도입부 시점에서 암살자들의 공격 으로 의식 불명이 되지.'

디에고가 쓰러졌다면 제국이 뒤 혼들렸을 터. 여태껏 이에 대한 기사 한 점 없었다는 것에 이상함 을 느꼈어야 했다. 소리 없는 비 명을 지르며 머리를 헝클어트렸 다.

'아리아와 디에고의 접점은 의식 불명인 디에고를 아리아가 치유하 면서부터란 말이야!'

자연과 가장 가까운 존재인 요

정들에겐 얼마나 다쳤든 목숨만 붙어 있다면 살릴 수 있는 치유력 이 존재했다. 요정 혼혈인 아리아 는 이 힘을 타고났고, 치유력으로 황태자 디에고를 치유하며 플래그 가 꽂혀야 했다.

'그런데 망했군.'

혼수상태가 돼야 했던 디에고를 내가 구해 버렸다. 그래. 난 어느 새 원작 박살쟁이가 돼 버린 것이 다.

' 빌어먹을!'

쥐고 있던 잔에 금이 갔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한참 디에고를 응 시하는데, 황좌 옆에 앉아 그린 듯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던 그 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빠질 듯 깊은 푸른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가 크게 뜨이며 커 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제기랄!'

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디에고의 시선이 끈질기 게 내 얼굴로 따라붙었다.

'못 알아봤겠지? 설마! 가면까지 쓰고 있었는데!'

그가 알아볼 리 없다. 그와 마주 할 땐 늘 가면을 쓰고 있었으니 까.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한들, 그때 그 소드 마스터와 공작가 영 애를 연관시킬 수 있을 리 없었 다.

"......뭐야. 언니 왜 목덜미가 빨 개졌어?"

어느새 다가온 아리아가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이는 나와 여전히 날 주시하는 황태자를 번갈아 보 더니 미간을 좁혔다.

"설마, 저 자식 마음에 들어?"

흠칫할 정도로 가라앉은 목소리 였다. 무슨 소린가 싶어 돌아본 아리아는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 었다.

"얼굴은 봐줄 만은 하다만...... 아니. 우리 언니에 비해선 곰 한 마리지. 황태자면 돈은 많겠지만 우리 언니는 드래곤 할애비한테도 못 주는데......•"

이글거리는 눈으로 황태자를 노 려보는 것이 정인을 첩에게 빼앗 겨 격분하는 정실 같았다.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아는 사 람이랑 닮아서."

대충 얼버무린 나는 눈을 가늘 게 뜨는 아리아의 시선을 피하며

황급히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설마 알아봤겠어.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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