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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42화 (42/254)

42 화

혼란에 잠겨 멍하니 걸어가다,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황급히 몸을 틀었다. 부딪치기 직 전의 거리에서 아슬아슬하게 물러 섰다.

"아, 죄송합니다."

'정신 차리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곤 고개 를 들었다.

또다시 경악했다.

"......당신은?"

흔들리는 은회색 머리칼. 강직함 을 담은 지독히 아름다운 외모. 코끝을 스치는 로즈우드 향과 커 다랗게 뜨인 금색 눈동자.

'라이너 아인하르트!'

어찌 된 것이 밟는 것마다 지뢰 였다. 무너지는 표정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을 때, 혼란스러운 눈으 로 날 뚫어지라 응시하던 라이너 가 중얼거렸다.

"당신이 어떻게......

"죄, 죄송합니다! 먼저 가 보겠 습니다!"

멍하니 서 있는 라이너를 두고 황급히 줄행랑을 쳤다. 심장이 미 친 듯이 방망이질 쳤다.

'빌어먹을! 이러다 여기서 전 남

자친구도 만나겠네!'

물론 전 남자친구 같은 것은 없 었으나, 돌아보는 곳마다 폭탄이 니 놀라울 지경이었다.

'얌전히 있자. 조용히 쪼그라져 있자.'

아무도 없는 구석에 몸을 밀어 넣었다. 하네스와 바디체인에 대 해선 아리아가 충분히 홍보해 줄 테니 나까지 낄 필요는 없다는 무 책임한 생각이 들었다. 그늘진 구 석의 커튼 틈새로 몸을 숨기는데.

"안녕, 미르. 혼자 심심하지 않 나요?"

또 다른 불청객이 등장했다.

온몸을 덮은 하얀 신관복. 입과 눈을 제외하고 다 가린 가면. 신 관복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써 잘 보이지 않는 얼굴.

코끝을 찌르는 은은한 백합 향 과, 모자 너머로 날 응시하는 다 정한 은빛 눈동자까지.

" 엘?"

'네가 여기서 왜 나와!'

졸도하기 직전의 기분으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가 여느 때와 같은 상냥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 다. 순진해 보이는 얼굴이 천사 같았으나, 기이하게 번뜩이는 은 빛 눈동자가 이질감을 주었다.

"오랜만이에요, 미르."

아니, 이젠 카슈미르 크리시스 영애라고 불러야 할까요.

꿀을 잔뜩 발라 놓은 듯 달콤한 목소리가 내 몸을 굳게 만들었다. 분명, 엘은 여전했다. 여전히 상 냥한 웃음을 짓고, 천사 같은 얼 굴을 하고 있었다.

허나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이한 분위기는 예전과 다른 양상을 띠 고 있었다.

'나를, 알아봤다.'

엘과의 만남에선 늘 가면을 쓰 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날 알

아보았다.

'......어디까지 예상한 거지.'

엘에 대해선 깊이 생각하지 않 은 감이 없잖아 있었다. 워낙 순 하고 착한 사람이었으니. 허나 이 상황에서 조금의 당황스러움도 없 어 보이는 엘은, 분명 이 만남을 의도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미르라는 걸 소문이라도 내면.'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갔다. 그런

날 응시하던 엘이 읽을 수 없는 기색을 담은 채 입꼬리를 말아 올 렸다.

"걱정하지 말아요. 비밀은 잘 지 키니까. 당신이 미르라는 걸 말하 고 다닐 생각 없어요."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습니 까?"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순간 엘 의 얼굴로 퍼져 나가는 상처받은 기색에 양심이 쿡쿡 찔려 왔지만, 워낙 예민한 안건이었기에 물러설 수는 없었다.

"우린, 친구잖아요."

낮은 목소리가 가라앉으며 옅게 그르렁거렸다. 처연한 얼굴과 상 반되는 목소리에 뒷골이 서늘함을 느끼면서도 상처 입은 아기 고양 이 같은 엘 앞에서 무게를 잡기가 힘들었다.

"......친구인 것과는 다른 문제 입니다."

"친구는 서로 믿어야 하는 거잖 아요."

엘의 애처로운 시선을 슬그머니 피한 채 변명하듯 답했다. 그러다 은빛 눈동자에 차오른 눈물을 보 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돌겠네.'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이 된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분명 나도 엘을 친구라고 생각 하고 있었고, 그를 믿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일은 내게 지나치게 예 민한 안건이었다. 거칠게 머리를 긁적이고 있으니 엘이 손등으로

눈가의 물기를 닦아 냈다.

"어떻게 하면 믿을 건가요? 미 르에게 믿음을 줄 수 있다면 뭐든 할게요."

애처로운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 다. 내게 믿음을 주기 위해 무엇 이든 하겠다는 엘은 지나치게 순 진해 보였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애써 표정을 굳힌 채 그와 마주했 다.

"그럼 태양의 맹세도 하실 수 있습니까?"

태양의 맹세. 태양신을 증인으로 두고 하는 불멸의 약속. 신관이 다리가 되어 신성력으로 발동시키 는 맹세로, 태양의 맹세를 깨뜨린 자는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목숨 을 담보로 건 맹약이었다.

"미르가 원한다면, 그조차도 기 꺼이 할게요."

워낙 무거운 맹세였기에 엘조차 도 조금은 고민할 거라 생각했건 만, 그는 거침이 없었다. 난 살짝 흠칫했다.

"태양의 맹세가 무엇인지 모르 시는 건 아니겠죠."

"......모를 것 같아요? 내가?"

순진한 엘이 뭣도 모르고 수락 하는 건 아닌가 싶어 무심코 묻 자, 엘이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하기야, 대신관인 엘이 태양의 맹세를 모를 리는 없었다.

'알면서도 이렇게 쉽게 수락한다 고?'

아무리 엘이 순진해도 목숨을

건 태양의 맹세를 이렇게 쉽게 수 락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가 쥔 것은 무려 크리시스의 공녀가 용병 출신이었다는 정보. 공작가 를 협박할 수 있는 정보를, 보통 사람이라면 쉽게 포기할 리 없었 다.

"내게 바라는 게 뭡니까."

엘이 이렇게까지 믿어 달라고 하는데도 결국 또 의심하고 만다. 이런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들면서 도 눈매를 날카롭게 세우며 서늘 한 살기를 가득 내뿜었다.

"......정말 날 조금도 믿지 않네 요, 미르는."

엘이 체념한 투로 읊조렸다. 물 기가 차오른 눈동자로 허공을 바 라보다, 눈물을 흘리기 싫다는 듯 눈가를 움찔거렸다. 붉어진 눈가 가 상황에 맞지 않게 야살스러웠 다.

한참 눈물과 씨름을 하던 엘은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내게 그 런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듯.

그 안쓰러운 일련의 행동들이 하나의 유혹처럼 느껴지기까지 해 나는 살짝 눈을 돌렸다.

"미르에게...... 바라는 게 있긴 해요."

아무리 엘이 신의 현현처럼 선 한 사람이라도, 이런 값비싼 정보 를 손에 쥐게 된 이상 욕심이 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알면서도, 내가 캐물었으면서도 나는 간사하 게 조금은 씁쓸해졌다. 역시 그의 선행에도 의도가 있었을 것만 같 았다.

"말씀하시죠. 가능한 선 안에선 모두 들어 드릴 테니까. 대신 제 가 미르라는 걸 밝히지 않겠다고 지금 당장 태양의 맹세를 하는 겁 니다."

애써 담담하게 말하며 소매를 걷어 손목을 드러냈다.

태양의 맹세에선 증인이 될 신 관이 필요하고, 엘은 대신관이다. 그만 동의한다면 지금이라도 집행 할 수 있었다.

"......미르가 원하는 대로."

슬픈 듯 처지는 눈매가 못내 처 연해 보였다. 심장이 쇠꼬챙이로 푹푹 찔리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그에게로 손목을 들이밀었다.

"태양의 맹세를 하는 방법은 알 려 드리지 않아도 괜찮나요."

"네. 알고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밀어붙였음에도 여 전히 상냥한 목소리로 물은 엘이 내 손목을 사뿐히 붙잡았다. 따뜻 한 피부의 온기가 손목을 통해 온

몸으로 전달되었다. 내 손목을 잠 시 내려다보던 엘이 심호흡 후 입 술을 뗐다. 사방으로 신성력이 퍼 져 나가기 시작했다.

"나, 태양을 섬기는 신도. 혈과 육으로 이루어진 인간과 태양을 두고 맹세하노니, 아침의 태양이 떠오르는 한 이 맹세는 영원하리 라."

낮은 목소리가 맹세를 읊는다. 엘의 손에서 은빛 광채가 터져 나 와 이어진 두 손목을 감쌌다. 띠 형태가 되어 두 손목 주위를 도는

엘의 신성력은 익숙한 포근함을 담고 있었고, 어쩐지 간질간질했

신성력이 그와 나를 이었음을 느낀 나는 전에 배웠던 맹세문을 떠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 태양을 섬기는 신도. 카 슈미르 크리시스가 용병 미르임 을......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타 인에게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까?"

'공작가에 폐가 될 수 없어. 알

려지면 내 계획에도 차질이 생기 고.'

크리시스 공녀가 용병왕 미르라 는 것이 알려졌다간 대륙 전체에 파문이 일 것이 분명하다. 공작가 또한 시끄러운 소문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게 분명 했다. 난 새롭게 생긴 소중한 것 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언젠간 밝히게 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인 엘은 슬프

게 웃었다.

" 맹세합니다."

터져 나온 빛이 손목을 감쌌다. 생명을 잇는 동맥이 욱신거림과 동시에 손목 위로 태양 신전의 상 징인 만다라 태양이 새겨졌다가 사라졌다.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 은 손목을 쓸다 서늘하게 물었다.

"이제 뭘 바라는지 말씀하시죠."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엘이 뭘 바라고 있는 건지 조금

걱정이 되긴 해도, 이미 맹세는 이루어진 데다 그의 성격상 지나 친 것을 바라진 않을 것 같았다. 엘은 씁쓸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 렸다.

"미르에겐 사랑하는 것이 많아 졌더군요."

뜬금없는 서두에 어리둥절해져 고개를 기울이니, 엘이 한숨 같은 웃음을 뱉었다.

"그것들 중 하나라도 괜찮으니."

새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아주 조심스레 내 얼굴 옆으로 내려온 머리칼을 뒤로 넘겨 주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은빛 눈동자는 나만을 집착적으로 담고 있었다.

이 작은 다정이 뭐라고. 잠시 심 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부디 나도 사랑해 줘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었다, 엘은. 분명 천사 같은 미소 를 짓고 있었음에도 참담해 보였

'......닮았어.'

코끝을 스치는 백합 향이 익숙 하다. 끊임없이 머리를 두드리는 기시감.

닮았다. 그 아이랑.

"엘, 당신......

조금 제정신이 아닌 채 충동적 으로 의문을 입에 담으려 할 때.

"축복식이 곧 시작됩니다!"

데뷔탕트의 하이라이트가 시작 하려 했다.

"......나중에 다시 보죠. 먼저 가 보겠습니다."

축복식에 늦어선 안 됐다. 혀끝 까지 차오른 의문을 삼키곤 황급 히 발을 옮겼다. 다급하게 뒤로 돌았기에 그 순간 엘이 어떤 표정 을 지었는지 보지 못했다.

"언니! 어디 갔다 왔어? 엄청

아슬아슬했네. 축복 순서 직전이 야."

초조한 듯 드레스 자락을 움켜 쥐던 아리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들뜬 아리아가 내 손을 꼭 잡아 왔다.

데뷔탕트에선 그 해 데뷔를 치 르는 어린 귀족들 중 가장 신분이 높은 이가 대표로 나가 교황에게 축복을 받았다. 데뷔탕트를 치루 는 황가의 일원이 없었으니, 이번 대표는 나와 아리아였다.

'올해는 교황이 사정상 참석하지 못해서 대신관이 대신 축복을 진 행한다고 했지.'

미리 전달받았던 사항을 떠올리 며 이번 대의 교황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태양 신전의 주인, 교황. 매 시 대에 교황이 간택되는 과정은 단 순했다. 구 교황이 승하한 직후 머리카락 색이 연하늘색-태양을 받치는 창공이 하늘색이기 때문에 교황의 상징 또한 하늘색이라고 한다-으로 변하는 신관이 바로

태양신이 점지한 차대 교황이었

제국 역사상 교황으로 점지되는 기준은 지극히 들쑥날쑥했다. 곧 죽을 것처럼 쇠약하고 나이 든 대 신관이 점지되기도 했고, 신전에 바쳐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갓난아 이가 교황이 되기도 했다.

'이번 세대의 교황은 상당히 젊 은 편이라고 했지. 열여덟에 즉위 해 올해 스물이니까.'

이번 세대 태양 신전의 주인은

'엘리오르 라'.

'어린 나이 때문에 즉위한 당시 엔 상당히 무시당했지.'

엘리오르가 즉위한 지 얼마 되 지 않았을 때의 저잣거리 분위기 를 기억한다. 대부분 소년이 통치 할 수 있겠느냐는 부정적인 입장 이었다. 게다가 이전 교황이 폭군 에 가까운 인물이었기에, 신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바닥을 찍 고 있었다.

허나 사람들의 예상과 다르게,

엘리오르 라는 잔인하지만 유능한 군주였다. 그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전의 부정부패를 싹 갈아엎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시작했다.

엘은 어린 나이에 공포 정치에 가까운 엄격함으로 군림하며 신전 의 수뇌부들을 휘어잡은, 범상치 않은 이였다.

'그리고 '요정의 밤'의 남주인공 중 하나지.'

역하렘 소설 '요정의 밤'의 남주

인공은 총 다섯이었다.

솔라티네의 황태자 디에고. 크리 시스 공자 칼. 아인하르트 소후작 라이너. 아타라의 국왕 알렉산드 로.

그리고 태양신전의 교황 엘리오 르.

지금 생각해 봐도 원작의 작가 는 남주인공들의 포지션을 겹치지 않게 참 잘 잡았다.

디에고는 다정 포지션. 칼은 잔

인한 미친놈. 라이너는 순정 포지 션. 알렉산드로슨 검 든 망나니라 면.......

엘리오르는 웃는 개자식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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