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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43화 (43/254)

43 화

'음. 요정 혼혈이라더니 치유도 제대로 못 하네요.'

'프레이야 백작가도 안목이 다 되었나 봐요. 이런 양녀를 들이고 말이죠.'

'쯧. 그리 멍청해서야• ... 당신 치유력이 아깝군요.'

엘리오르는 성스럽고 아름다운 태양의 한 면 같은 미모를 가졌으 나, 입을 여는 순간 지옥에서 올

라온 개로 돌변한다고 묘사되는 사람이었다.

늘 웃고 있는데 어딘지 꿍꿍이 가 있는 흑막으로만 보이는 사람. 잔인하고, 위협적이며, 지옥의 주 둥아리를 가진 재수 없는 놈이었 다.

'그래도 인기가 엄청 많았지.'

사람들은 특이함에 끌리곤 하니, 엘리오르는 칼과 함께 인기 남주 인공 양대 산맥이었다. 등장할 때 마다 그 주둥아리를 가만히 못 있

어 있는 대로 욕을 얻어먹긴 했지 만, 까칠한 미인은 클래식인 법. 입은 사나우면서도 미묘하게 다정 한 행동들이 인기가 많았다.

'원작이 비틀렸는데...... 엘리오 르는 여전히 아리아와 사랑에 빠 지려나?'

새삼 떠오른 의문에 홀 일대를 쭉 훑어보았다. 원작 속 라이너, 디에고는 이번 무도회에 참석해 아리아를 봤을 텐데도 그다지 반 응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칼은 남주인공임에도 아리아와 원수지

간 같으니, 이 세계에 원작의 억 지성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문제는 없겠지......

원작에 연연하지 않기로 결심하 긴 했지만, 역시 조금은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생각이 많아져 멍하니 무리를 바라보다, 나는 번뜩이는 황금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

내가 착각하는 게 아니라면, 그 눈동자는 내가 그를 돌아보기 전 에도 날 향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 다. 조금 놀라 눈을 크게 뜨니 그 의 눈빛이 짙어졌다.

황금빛 늪. 너무도 깊고 짙어 감 히 이름을 정의 내릴 수 없는 감 정들이 넘실거리며 내 시선을 잡 았다. 흠칫하면서도 그에게서 시 선을 뗄 수 없었다.

라이너 아인하르트.

제국의 영광을 정의로 삼던 라 이너의 세상은 아리아와의 만남을 통해 제 정의의 정의를 바꿨다. 아리아의 충견이라 불리던 라이너 의 사랑은 올곧고 찬란해, 소설을 보는 당시엔 그런 사랑을 받는 아 리아가 부럽다고까지 생각했던 기 억이 났다.

'아리아를 볼 땐 무심하던 황금 빛 눈이 불꽃처럼 짙게 일렁인다 고 했던가.'

사랑에 빠진 이는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된다고 누군가 말했다. 그

말의 신빙성을 더하는 것처럼, 작 품 속 무심하고 딱딱하던 라이너 는 아리아 앞에서만 열정적으로 변했다.

'그런데 왜......

분명 아리아를 볼 때만 그런 눈 을 한다고 했는데, 지금의 라이너 는 나를 소설 속 묘사와 똑같은 눈으로 보고 있는 건지.

인적이 드문 구석 벽에 등을 기 댄 채 팔짱을 끼고 있는 라이너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황금

빛 늪이 날 옭아맨다. 그와 나의 거리는 인사하기도 애매할 만큼 멀었으나, 그가 풍기는 진득한 분 위기는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 다는 듯 나를 간지럽혔다.

'......이상해.'

왜 이리 이상한 것투성이인지. 보는 것만으로 심장이 조이는 기 묘한 눈이었다.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눈빛에 빠져 꽤 오랫동안 라 이너와 시선을 교환하고 있을 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슈미르 도레마 드 카이사르 크리시스 영애와 아리아 포스텔 드 카이사르 크리시스 영애는 앞 으로 나와 주십시오."

'......정신 차리자.'

고개를 휘저어 잡생각들을 지워 내고 라이너에게서 어렵사리 시선 을 뗐다. 등 뒤로 진득하게 따라 붙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아리 아와 함께 홀 가운데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춰 주세

요."

새하얀 신관복을 입은 남자가 나와 아리아 앞에 섰다.

반짝이는 짧은 은발. 고양이처럼 새초롬하게 올라간 눈꼬리. 라일 락 빛깔을 닮은 은은한 연보라색 눈동자. 색감이나 분위기나 여러 모로 신성한 느낌이 나는 젊은 미 형의 남자였다.

한쪽 무릎을 굽히니 그가 나와 아리아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미리 공지된 차례에 따라 그가 신

성력을 발동시키고 축복문을 읊기 를 기다리는데, 신관은 신성력을 발동시키기는커녕 나를 바라보며 눈동자를 반짝였다.

"와. 영애께서 그 카슈미르입니 까?"

"••••••네?"

작은 속삭임에 당황스러워 눈을 깜빡였다. 차례에 없는 일이었다. 내가 당황스러워하든 말든 오십 년 지기 친구를 만난 것처럼 눈을 반짝인 남자는 신관다운 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정말 반갑습니다. 그 지랄병 걸 린 폭군을 설탕 묻힌 마카롱으로 만드는 분이시라기에 꼭 만나 뵙 고 싶었죠. 어떤 분이신지 정말 궁금했는데 직접 뵈니 그 자식이 발광하던 이유를 알겠네요."

" 2 "

"자식, 매사에 까다롭게 굴기에 눈이 하늘에 달렸나 했는데 사실 라의 처소보다 더 위에 달려 있었 던 거예요. 영애께선 그 자식한테 너무 과분하십니다."

"네••••••?"

"글쎄, 녀석이 영애만 보고 나면 미치광이가 되는데••••••

하나같이 이해되지 않는 말들뿐 이었다. 옆에서 같이 듣던 아리아 또한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냐는 표정으로 남자를 올려다보고 있었 다.

그러거나 말거나 알 수 없는 말 들을 신나게 떠벌리던 남자는 얼 마 뒤에야 멈칫했다. 나와 아리아 너머로 시선을 주던 그는, 비소를 흘리며 혀를 찼다.

"새끼, 성질 더럽기는...... 조금 만 더 이러고 있다간 저놈 손에 제 사지가 산 채로 찢기겠군요. 좀 무섭긴 하지만 속은 시원해요. 하여간 자기 연애하겠다고 힘없는 부하한테 일 넘기니까 벌을 받는 거예요."

역시나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뭔가 싶어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축복이 지연되니 무슨 일인가 웅성거리는 인파 사이에 선 엘과

눈이 마주쳤다. 차갑게 굳어 있던 그의 입매가 나와 마주하자 여느 때와 같이 상냥하게 올라갔다.

"쯧. 저 이중인격자."

엘을 보는 남자의 눈에 징하다 는 빛이 돌았다. 마치 천장 위를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를 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대신관님. 축복 안 하시나요?"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 라 멀뚱거리는 사이, 아리아가 우

아하게 쏘아붙였다. 말투와 입가 에 띤 미소만 다정할 뿐 눈은 거 의 미친놈을 보는 듯했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해야죠. 죄송합니다."

엘과 '눈으로 말해요'를 하는 듯 싶던 남자가 느긋하게 고개를 끄 덕였다. 눈을 돌려 날 지그시 응 시하던 남자가 장난감이 마음에 든 악동처럼 짓궂게 웃어 보였다.

"전 태양신전의 대신관 율리안 입니다. 신전의 도움이 필요하시

다면 언제든 절 찾아오세요."

'분명 처음 만났는데......

기묘하게도 율리안의 눈엔 호의 가 가득했다. 첫 만남부터 내게 다정하던 엘이 떠올라 내가 신전 사람들에게 잘 통하는 얼굴인가 잠시 고민될 정도였다.

"축복을 내리겠습니다."

순식간에 근엄한 표정으로 돌아 간 율리안이 손 위로 신성력을 내 뿜었다. 아리아와 내 머리 위로

은빛 광채가 터져 나왔다. 빠른 태세 변환에 어이없어하면서도 신 성력 특유의 포근하고 몽실한 느 낌에 편안히 눈을 감았다.

"수없이 태양이 뜨고 지기를 반 복하며 찾아온 한 해의 끝. 생명 이 안식에 들어가는 겨울에 새싹 을 틔우려는 어린 생명들에게 축 복이 있을지어다. 그들이 가는 길 을 태양이 비출지니, 태양이 떠오 르고 지는 한 그들에게 시들지 않 는 영광이 있으리라."

단조로운 목소리가 차분히 축복

문을 읊었다. 햇빛이 머리 위로 스미는 느낌과 함께 율리안이 손 을 뗐다.

"축복을 마칩니다. 데뷔탕트를 치루는 모든 영애 영식들의 일생 의 평안을 빕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율리안은 뒤돌아 사라지기 전 내게 눈을 찡 긋거렸다.

"잊지 말아요. 도움이 필요할 땐 날 찾아와요."

'진짜 뭐지?'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태양신전 엔 미친놈들만 있는 건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저 자식 뭐야? 언니랑 아는 사 람이야?"

"아니."

단호하게 부정했다. 율리안의 뒤 통수를 노려보던 아리아가 수상하 다고 중얼거리던 그때, 무도회 사 교댄스 전용곡이 홀을 울렸다.

"춤춰야 하나 봐."

아리아가 작게 속삭였다. 눈을 반짝이던 아리아는 내게로 손을 내밀었다.

"언니! 나랑......!"

"안녕하십니까, 크리시스 영애!"

노래가 시작하자마자 이곳저곳 에서 수많은 영식이 몰려와 아리 아를 에워쌌다. 일순 혐오스럽다 는 표정을 짓던 아리아는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며 그들에게 부드 러이 웃어 보였다.

"무슨 일이실까요?"

"저, 저와 함께 한 곡 춰 주시겠 습니까?"

"저와 함께도 춰 주십시오!"

"저리 비켜! 저와 춰 주세요!"

"빌어먹을...... 눈치 없는 놈들."

자기들끼리 다투기 시작한 영식 들을 살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는 아리아의 입꼬리가 파들거렸다. 다른 이들은 못 들었을 희미한 속 삭임이 내 귀로 꽂혔다. 나는 애 써 모르는 척했다.

'아리아는 사랑받을 만한 아이니 까.'

영식들에게 둘러싸인 아리아가 너무 커 버린 것 같아 입 안이 씁 쓰름했지만, 동시에 인기 많은 모 습이 뿌듯했다.

아리아에게 춤 신청을 한 영식 들의 정보를 알아보리라 마음먹고 있을 때.

"아, 여기 계셨군요. 아리아 영 애, 괜찮으시다면 저와 한 곡조

추지 않으시겠습니까?"

몰려든 영식 사이로 잠시 사라 졌던 율리안이 등판했다. 그는 왜 인지 오른쪽 눈가에 전엔 없었던,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멍을 달 고 있었다.

'설마...... 말은 나한테 걸었지만 사실 관심은 아리아에게 있었다는 그런 전개?'

원작에서 등장하지 않은 인물이 라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건 만, 율리안이 아리아에게 관심 있

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대신관이라는 거물의 등장으로 파문이 인 영식들 사이에서 대치 중인 율리안과 아리아를 흥미진진 하게 관전했다.

"......대신관님께서 제게 춤을 청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아리아는 부드러이 웃으면서도 황당하다는 눈빛을 숨기지 않았 다. 떨떠름한 아리아의 반응을 예 상했다는 듯 웃은 율리안이 아리 아와 무어라 작게 대화를 나누었

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

조금 궁금했다. 마나를 이용하면 내용을 들을 수 있었지만, 에티켓 이 있는 만큼 얌전히 관전하기만 했다.

"......그렇다면 사양 않고."

'그린라이트?'

사뿐히 율리안의 손을 잡는 아 리아를 보며 감탄했다. 무언가 통

한 모양이었다. 괜히 내가 설레기 도 하고 한편으론 섭섭하기도 한 미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원작 아리아는 남자 주인공들 중 하나와 추지만...... 여기까지 비틀린 마당에 그런 걸 따질 수 있을 리가.'

원작이야 엿이나 먹으라는 생각 을 하며 와인 잔을 기울였다.

'그나저나 춤 한 번은 춰야 하는 데.'

춤이 시작됐음에도 목석처럼 서 있기만 한 내게 몰리는 조롱 어린 시선들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데 뷔탕트 땐 춤을 한 번이라도 추는 것이 보통이었고, 첫 춤은 타인에 게 요청받는 것이 전통이었다.

'춤 요청을 하나도 못 받으면 이 걸로 꼬투리가 잡힐 텐데.'

보통은 데뷔탕트 춤 상대를 미 리 구해 두지만, 나와 아리아는 시간이 없어 구하지 못했다. 아리 아는 당연하게도 수많은 이들에게 춤 요청을 받았으나 나에겐 쉬이

다가오는 이가 없었다.

'내가 먼저 춤 요청이라도 해야 하나?'

고개를 숙인 채 짜증스럽게 머 리를 긁적일 때였다.

그리고 그런 내 눈앞에 나타난 두 쌍의 구두.

"반갑네, 크리시스 영애."

"안녕하십니까, 크리시스 영애."

나를 부르는 두 개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두 남자가 시선을 사로잡았

샹들리에 아래 찬란하게 반짝이 는 금발. 깊은 심해와 닮은 푸른 빛의 영롱한 눈동자. 요요하게 치 켜 올라간 눈매와 부드러운 눈웃 음.

달빛을 그대로 담아 실로 짠 듯 빛나는 은회색 머리칼. 짐승의 것 을 닮은 나른한 금빛 눈동자. 맹 수처럼 사나운 눈매와 무뚝뚝한 표정.

' 미친.'

입을 떡 벌린 채 굳은 듯 멍하 니 굳은 내게, 두 사람이 동시에 손을 뻗었다.

"나와 한 곡 추지 않겠나?"

"저와 한 곡 춰 주시지 않겠습 니까?"

제국의 황태자 디에고 솔라티네 와 황궁 제2 기사단장 라이너 아 인하르트가 동시에 내게 춤을 청 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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