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화
내게로 손을 뻗은 두 남자. 웅성 거리는 사람들. 그 중심에서 시선 의 주인공임에도 꿔다 놓은 보릿 자루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는 나.
'......왜? 왜 나한테 춤을 요청 하지?'
잔을 든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 다. 상상도 못 한 상황이었다. 한
참 입을 떡 벌린 채 멍한 표정을 짓다, 느리게 시선을 내려 내게 뻗은 두 손을 응시했다.
얼마 전에 보았던 그대로 고생 한번 안 해 본 것처럼 깨끗하고 예쁜 디에고의 손. 기사로 살아온 게 티가 나는, 거칠지만 올곧은 라이너의 손.
'미쳐 버리겠네.'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아팠 다. 난 혼란스러워하며 두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아인하르트 소후작. 반갑네. 제 2 기사단에 문제는 없나?"
"황태자 저하를 뵙습니다. 걱정 해 주신 덕분에 잘 운영되고 있습 니다."
동시에 손을 내민 상대를 확인 한 둘이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 았다. 디에고는 은은한 미소를, 라이너는 무감하지만 잔잔한 표정 을 짓고 있었으나, 두 사람 사이 의 분위기는 살얼음판 같았다.
"황태자 저하를, 뵙습니다. 안녕
하십니까, 아인하르트 소후작."
둘의 대치를 멍하니 바라보다 어찌 되었건 인사는 해야 한다는 생각에 황급히 목례했다. 내게로 시선을 돌린 두 사람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감정이 퍼져 나갔다.
'설마 내가 미르라는 걸 눈치챈 건 아니겠지? 그냥 정치적인 이 유인가?'
나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크리시스의 이름은 고귀하다. 그 들이 아닌 다른 영식이 춤을 청했 다면, 내게 호감을 가진 게 아니 라 크리시스의 이름을 탐내어 다 가왔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예측 했을 것이다.
'하지만 원작의 디에고와 라이너 는 그럴 사람들이 아닌데......
디에고와 라이너는 권력을 보고 누군가에게 다가갈 이들이 아니었 다. 본인들이 지닌 권력이 대단하 기도 했지만, 사람 자체가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미르라는 걸 알 아챘다고 하기엔......
너무 애매하다.
미간을 좁히며 그들을 날카롭게 살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엔 이 유를 알 수 없는 호의와 미묘한 흥분만 보일 뿐이었다.
당혹스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디에고와 라이너는
버벅거리는 날 다정하게 바라봐 주었지만 나는 한참 생각해도 어 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감이 잡히 지 않았다.
"황태자 저하와 아인하르트 소 후작에게 동시에 춤 요청을 받다 니, 역시 크리시스라는 걸까요."
"저 영애가 누굴 선택할지 궁금 한걸요! 역시 세상에서 가장 완벽 한 도형은 삼각형이죠! 정말 흥미 진진해요."
자극적인 스캔들에 흥분한 귀족 들이 시끄럽게 웅성거렸다. 우리
안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어차피 춤은 한 번 춰야 하고, 여기서 누굴 선택하든 스캔들은 피할 수 없다.'
데뷔탕트 첫 춤 상대와의 추문 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고 들었 다. 상대가 남주인공인 디에고와 라이너라서 당황했을 뿐, 춤은 춰 야 했다.
'문제는...... 둘 중 누구를 선택 하느냔 건데.'
피부에 닿는 두 사람의 뜨거운 시선에 식은땀을 흘렸다. 어느 손 을 잡는 것이 더 좋을지 쉬이 판 단할 수 없었다. 내가 미친 듯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쯤.
"아직 늦지 않았다면 저도 끼고 싶은걸요."
인파를 뚫고 나온 누군가가 디 에고와 라이너 사이로 손을 내밀 었다.
"괜찮다면 나와 춤을 춰 주지 않겠어요?"
새하얀 신관복을 입은 채 흰 가 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 가면 아래 가득 품은 천사 같은 미소.
대신관 엘이었다.
'돌겠네.'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쯤 되 니 셋이 짜고 날 놀리는 게 아닐 까 싶을 정도였다. 그렇다기엔 모 습을 드러낸 엘을 보며 당혹스러 워하는 디에고와 라이너의 표정이 지나치게 실감 났지만.
"이게 무슨, 교......
"쉿."
부드러이 웃은 엘이 검지를 입 가에 올림으로 당황스러워 보이는 라이너를 저지했다. 라이너가 단 번에 입을 닫았다. 경악스러워하 는 디에고와 라이너를 보아 그들 은 엘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대신관이 무도회에 온 게 그리 놀라울 일인가?'
혼자만 상황을 모르는 것 같아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
"저자는 누구죠?"
"글쎄요...... 가면을 쓰고 있으 니......
나만 모르는 건 아닌지, 주위에 서 엘의 정체를 추측하는 속닥거 림이 시끄럽게 들려왔다.
'하여튼 선택은 해야 하는데.'
여기서 셋 다 내치고 가 버린다
면 무례하다는 얘기를 들을 것이 다. 데뷔탕트의 첫 춤은 청하는 이에게 내어 주는 것이 전통이니 까.
창백할 정도로 하얀 엘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대신관답지 않게 거친 자욱이 남은 커다란 손. 지 극히 익숙한 손이었다.
잡은 뒤 감촉은 쉬이 예상할 수 있었다. 엘의 두 손은 태양의 반 려자에 걸맞게 늘 따스했으니까.
'이렇게 되면...... 내 선택은 정
해졌지.'
느리게 한숨을 뱉었다.
인간의 손은 자신의 삶을 닮는 다고들 한다. 제각각의 삶들을 담 은 세 개의 손 중 하나를 붙잡았 다.
"고마워요, 크리시스 영애."
엘이었다.
'솔직히 이 인파 사이에서 황태 자랑 소후작 손을 어떻게 잡아!
그럼 둘 중 하나를 차 버린 게 될 텐데!'
디에고와 라이너는 제국 내 최 고의 신랑감으로 거론되는 이들 로, 따르고 연모하는 이들이 인파 를 이루었다. 디에고와 라이너 중 한 명을 선택한다면 다른 하나를 차 버리는 그림이 될 테고, 그럼 분명히 적이 생길 터였다.
'그렇다면 둘 다 차 버리는 수밖 에 없지.'
엘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정체
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정체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느니, 이상한 추 문에 휘말리더라도 정체가 드러나 지 않은 엘을 선택하는 것이 났 다.
"이런. 차였군. 크리시스 가엔 오랫동안 영애가 없었으니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는데 말이야. 크 리시스 영애의 춤 실력이 궁금했 지 뭔가."
손을 물린 디에고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자칫 자극적인 사각관계
스캔들로 퍼질 수 있는 상황을 단 순한 사교 문제로 풀어 버리는 능 숙함이 사교의 정점에 선 황태자 다웠다.
"미숙한 춤 실력으로 저하께 폐 를 끼칠까 저어되었습니다. 용서 해 주신다면 다음 만남 때는 제가 먼저 춤을 청하겠습니다."
"그날을 기다리겠네."
디에고가 녹아내릴 듯 달콤하게 웃었다. 언행 하나하나에 날 향한 배려가 느껴져 기분이 이상했다.
"다음엔...... 제게도 함께 춤출 영광을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
무감한 인상의 라이너가 올곧게 목례했다. 표정엔 변화가 없었으 나, 금빛 눈동자에 너울거리는 감 정의 파동은 거셌다. 조금 처진 눈매가 버림받은 강아지 같아 크 게 움찔했다.
'이러니까 내가 잘못한 것 같잖 아......
"그...... 다음엔 제가 먼저 춤을
요청하겠습니다."
" 기다리겠습니다."
축 처진 귀가 그의 머리 위로 보이는 것 같아 식은땀이 흘렀으 나 애써 가볍게 웃음 지어 보였 다. 거절을 태연하게 넘기는 둘을 보며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잦아들 었다.
"그럼 크리시스 영애는 나와 춤 을 출까요."
내가 디에고, 라이너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지그시 응시하던 엘
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날 잡 아끄는 손길이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아 갸웃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 다.
"물론, 제게 영광입니다."
내 형식적인 대답에 엘이 흐드 러지게 웃음 지었다. 그의 인도를 따라 홀 중심으로 발걸음을 옮겼 다.
황궁 악단이 왈츠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짧게 허리를 숙여 서로 인사하면 엘의 팔이 내 허리 위에
감겼다. 잡은 손의 깍지를 끼고, 천천히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엘 은 잘 교육받은 귀족 영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완벽한 스텝을 밟았다.
"사실 미르가 내 손을 잡을 줄 은 몰랐어요."
엘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빛 눈동자는 달빛을 받아 반짝 이는 밤바다의 윤슬 같았다. 살짝 고개만 들어도 그의 붉은 입술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조금 어색해졌지만 망설임 없이 대답했
"엘과 추는 편이 가장 논란이 적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역시 그렇겠죠."
올라간 엘의 입꼬리에 씁쓸함이 진득이 묻어 있었다. 그의 손을 잡고 가볍게 한 바퀴를 돌았다.
제복을 입었기에 치마가 펄럭거 리며 돌아가는 화려함은 없었으 나,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그
깔끔함을 살리기 위해 선택한 액 세서리가 줄들을 단순히 엮은 형 태인 하네스이기도 했다.
잠시 나를 본 엘이 눈을 깜빡였 다.
"몸에 찬...... 액세서리는 뭔가 요?"
"제가 직접 디자인한 액세서리 입니다. 하네스라고 부르기로 했 습니다."
"그렇군요."
직접 디자인을 했다고 하기엔
상당히 찔리지만 뻔뻔해지기로 했 다. 상체를 촘촘히 덮은 검은 거 미줄 같은 하네스를 지그시 응시 하던 엘이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좀, 외설적이진 않습니까?"
"••••••네?"
' 이게?'
그래봐야 줄이 좀 얽혀 있는 것 뿐이다. 카이사르와 칼에 이어 하 네스를 지적하는 엘에 안 어울리 는 건가 싶어 조금 시무룩해져 물 었다.
"......별로입니까?"
"아뇨, 그건 아닌데......
엘이 난감하다는 듯 시선을 돌 렸다. 그의 귀 끝이 살짝 붉었다.
"......잘 어울려요."
지나치게 가까이 있어서인지 그 의 중얼거림이 확연하게 들렸다. 그래도 이상하진 않은 모양이라는 생각에 살짝 웃음 지었다.
"엘은 왜 여기 온 겁니까?"
대신관이야 어떤 무도회든 프리 패스로 입장할 수 있겠지만, 실제 로 대신관이 사교 활동을 하는 경 우는 적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인 엘이 화사하게 웃었다.
"그야, 당신을 보기 위해서죠."
멈칫.
잠시 스텝이 버벅거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가라앉은 눈으로 엘 을 노려보았다.
"......당신, 내가 크리시스 공녀 라는 건 언제부터 알고 있었습니 까?"
"아마 당신이 자각하기도 전에."
엘의 대답에 어떤 반응을 보여 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몸으로는 외우고 있는 스텝들을 가볍게 밟 으면서도 머리는 끊임없이 돌아가 고 있었다. 그런 나를 알았는지, 엘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 놀랄 거 없어요. 여러 상 황들을 보고 그냥 짐작만 했던 거 니까. 나도 확신을 못하고 있어서
쉬이 미르한테 묻지는 못한 거예 요."
" 무슨••••••
"카이사르 공작은 18년 전, 한 여자와 여자아이를 찾았었다고 하 죠. 호사가들은 그게 그의 정부와 정부 사이에서 낳은 딸이라고 예 측했고요."
U | 99
"꽤 열심히 찾았지만 결국 못 찾았다고 했어요."
" 그런••••••
" 많은 이들이 모르는 사실이지 만, 제국 내에서 붉은 계열의 눈 동자를 가진 이들은 크리시스 가
의 사람들이 유일하고요."
원작에서도 등장하지 않는 내용 들이었다. 무척 놀라 엘을 바라보 니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게다가 미르는 대대로 검술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크리시스 공작가의 사람들처럼 독 보적인 검술 실력까지 가지고 있 었으니...... 꽤 그럴 듯해 보였죠. 물론 어디까지나 예측이었지만 요."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이어 가는
말이 상당히 예리했다. 나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카이사르는 왜 18년 전에 한 여자와 여자아이 하나를 찾은 거 지? 정말...... 날 찾았던 건가? 자기 입으로 날 찾았다고 하긴 했 었지만...... 난 어쩌다 태어난 거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