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화
원작에서조차 사창가 창기와 공 작 사이에서 카슈미르가 태어난 과정을 설명하지 않았다. 일회용 악녀의 탄생은 작품에서 그리 중 요한 사항이 아니었으니. 미간을 좁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 니라는 생각에 의문을 지웠다.
'나야 전생을 떠올리고 알아낸 거라지만...... 얜 진짜 뭐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엘을 올 려다보았다. 그 작은 단서들로 용 병 미르가 크리시스의 공녀라는 것을 알아냈다는 것이 놀라웠다. 내 멍한 표정을 보고 웃던 엘이 제 손목을 살짝 들어 보였다. 태 양의 맹세의 흔적이 새겨졌던 손 목이었다.
"걱정하지 마요. 다른 이들에겐 절대 말하지 않아요."
태양의 맹세까지 한 이상, 엘을 의심하진 않았다. 조금 누그러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
가 고개를 살짝 숙여 얼굴을 가까 이 했다.
"난 미르가 크리시스 공녀인 게 기쁜걸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은빛 눈동 자에서 반짝인다. 지나치게 아름 다웠다. 나는 그 눈에 매료되는 느낌이었다.
"......어째서?"
멍한 내 물음에 느리게 웃음 지 은 엘이 하이라이트로 치닫는 반
주를 따라 스텝을 밟았다. 그는 팔로 내 허리를 단단히 받친 채, 휙 상체를 숙였다.
허리가 굽어지고, 엘과 내 가슴 이 맞닿는다. 흐트러짐 없이 완벽 한 춤의 한 동작일 뿐임에도 일순 코앞으로 온 그의 얼굴에 당황하 던 찰나.
"이젠 가면에 가려지지 않은 당 신을 마음껏 볼 수 있으니까."
귓가 직전에서 옅은 속닥거림이 울려 퍼졌다. 그의 입꼬리가 매혹
적인 호선을 머금었다.
순진하기 짝이 없어 보이던 엘 은,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이 인간 정말
포커페이스는 무너지지 않았으 나 귀 끝이 살짝 붉어진 느낌이 들었다. 나는 숨을 들이쉬어 애써 침착을 유지했다.
"......그 정도 정보로 제가 크리
시스 공녀일 것이라고 예측하셨다 니, 대단하십니다."
"음, 난 미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사람일걸요."
슬쩍 말을 돌리며 칭찬하자 엘 이 태연히 자부심을 드러냈다. 미 소를 걸치고 있던 그는, 어느 순 간 얼굴을 진지하게 굳혔다.
"사실 오늘 이곳에 온 건 전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예요."
춤이 끝날 무렵이 돼서야 엘이 본론을 꺼냈다. 나는 미세하게 미
간을 좁혔다.
"곧 아타라 왕국에서 사절단이 온다는 거 알고 있죠."
"네. 국왕이 얼마 전에 즉위했으 니......
"그 사절단을 조심하세요."
" 네?"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진지하게 충고하는 엘에 덩달아 나까지 진 지해져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타라 왕국 사절단에 문제라 도 있습니까?"
"아마 그 사절단에 미친놈이 하 나 붙어 올 거예요."
"••••••네?"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끔 뻑였다. 엘은 여전히 진지했다.
"그 미친놈은 상대해 주지 마세 요. 미르에게 해로워요. 달라붙어 도 빠르게 잘라 내시고 안 되면 제거해 버려요. 외교 문제로 시끄 러워지긴 하겠지만 카이사르 공작 이 뒤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 나 도 뒤처리를 도울게요."
"무슨...... 그 사람이 누군데
요?"
대화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해 물음표만 띄우는 날 보며 엘이 한 숨을 쉬었다.
"누군지는 말해 줄 수 없지 만...... 하여간 미르를 보자마자 달라붙는 것이 하나 있을 거예요. 그거에는 관심을 주지 마세요."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 없 는 소리만 가득했으나, 우선 고개 를 끄덕이고 보았다.
'원작에서도 아타라 왕국에서 온 사절단 때문에 큰 사건이 생기니 까.'
원작을 아는 나로선 곧 다가올 태풍에 단단히 각오하고 있는 참 이었다. 엘이 안심한 표정을 지었 다.
종장에 돌입한 왈츠. 우아하게 한 바퀴 돈 뒤, 노래가 끝을 맺었 다.
"어울려 줘서 고마워요, 미르."
"별말씀을. 함께해 영광이었습니
다, 엘."
가벼운 인사와 함께 그의 손을 스르륵 놓을 때였다.
TTTT-
엘이 떨어지는 내 손을 단단히 잡았다.
'내 애칭을 어떻게......•'
그의 입에서 나온 내 애칭에 놀 라는데, 내 손을 끌어당긴 엘이 손등 위로 입술을 내렸다.
촉
짧은 소리와 함께 엘의 입술이 떨어졌다. 눈을 끔뻑거리는 날 향 해 그가 슬프게 웃었다.
"다시 만날 때...... 내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도 너무 놀라지 말아요. 슈슈를 향한 것들은 언제 나 불변하니까."
기묘한 인사를 남긴 엘이 등을 돌리고 사라졌다. 하얀 신관복이 파도치듯 휘날렸다. 그 뒷모습을
지그시 응시하다, 문득 그가 입술 을 맞추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 하늘색 머리카락?,
손등 위에 붙은 머리카락을 들 어 올렸다.
엘의 머리카락으로 보이는 기다 란 머리카락은 확연하게 하늘빛을 띠고 있었다.
한겨울에 치른 데뷔탕트의 춤 상대가 되어 주었던 엘은 교황의 상징인 하늘색 머리카락 한 올만
남긴 채 사라졌다.
데뷔탕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그 한 달은 나와 아리아 모두에게 바쁜 시간이었다.
내 데뷔탕트가 혼돈과 파괴로 가득하던 막장 드라마였던 것과는 별개로, 아리아의 데뷔탕트는 상 당히 성공적이었다. 아리아는 데 뷔탕트가 끝나자마자 초대장을 한 무더기 받으며 사교계의 입지를 넓히고 있었다. 누구 동생인지 참
기특했다.
"예상했던 대로 영식들 사이에 서 하네스가 상당한 유행입니다! 1차적으로 찍어냈던 하네스들이 이틀 만에 완판됐어요! 바디체인 은 하네스보단 늦지만 그래도 닷 새 만에 완판이랍니다! 완전 성공 했어요! 카트린느 의상실에서 제 복을 주문 제작하는 영식들도 많 아졌습니다! 이게 모두 영애 덕분 이에요!"
카이사르와 칼의 하네스 소화력 과 아리아의 홍보 덕분인지 사업
은 성공적으로 흘러갔다. 흥분한 카트린느와 수입 분배에 대한 이 야기를 나누고, 의상실에서 아리 아와 내 옷들을 맞추는 것으로 시 간을 보내기도 했다.
"또 뵙네요, 공녀님."
율리안이 크리시스 저택으로 찾 아온 사건도 있었다. 물론 그가 미쳤다고 저택에 쳐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카이사르가 태양의 맹 세를 발동하기 위해 율리안을 초 청했기 때문이었다.
태양의 맹세가 필요해진 건 기 사들과 사용인들이 내가 미르인 걸 알아 버려서였다.
'계획이 있다고.'
'네.'
'그래. 네게 생각이 있겠지. 네 가 원하는 대로 해라.'
나는 카이사르와의 진지한 대화 아래, 아직은 내가 미르라는 것을 밝히길 원치 않는다고 고백했다.
미르에겐 적이 많다. 카이사르 또한 내가 위험해지는 걸 원치 않
았기 때문에, 우리는 태양의 맹세 를 통해 비밀을 지키기로 했다. 크리시스의 충실한 종들은 흔쾌히 태양의 맹세 진행에 동의했다.
수십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한 번에 맹세로 잇기 위해선 대신관 정도는 되어야 했기에 카이사르는 대신관 율리안을 저택으로 초대했 다. 맹세 진행을 위해 어쩔 수 없 이 율리안에게 내가 미르임을 밝 혔을 때, 율리안의 반응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담담했다.
"오, 공녀님이 용병왕 미르였다
니요. 그런 충격적인 일이? 너무 놀라서 오늘 저녁은 못 먹을 것 같아요."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 리로 충격적이라 중얼거리는 율리 안은 의심스러운 수준이었고, 언 젠가 율리안의 뒤를 캐 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될 정도였다.
"데뷔탕트 이후에 처음 뵙습니 다. 몸 건강히 지내고 계셨는지 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공녀님께서 사업을 시작하셨다 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게 저희 신전에서도 열풍이 불었거든요. 몇몇 신관들이 착용했다가 외설적 이라는 이유로 금지된 이후론 하 네스를 신전으로 밀반입하고 돈을 받는 놈들까지 생겼더군요. 글쎄 정식 신관복 액세서리로 하네스를 넣자는 미친놈도 있더라니까요? 대신관들 모두가 하네스 단속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아니 글 쎄, 오늘 아침 미사에 교황 성하 께서 하네스를 착용하고 오신 게 아닙니까? 그 미친, 아니, 보배로 우신 성하께서 얼마나......
율리안은 좋게 말하면 사교성이 좋았고, 나쁘게 말하면 시끄러웠 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떠벌거리 는 율리안을 빤히 바라보다 피식 웃고 말았다. 귀는 조금 따가워도 떠드는 모습이 귀여웠다.
"......언니. 저 자식 마음에 들 어?"
"저놈은 절대 안 된다."
율리안의 환장스러운 수다를 얌 전히 들어 주고 있으니 맹세를 구 경하러 온 아리아와 칼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런 질문을 던질 정도 였다. 나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맹세는 대신관 율리안까지 포함 하여 단체로 진행되었다.
어길 시 즉결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정식 맹세를 단체로 하기엔 율리안의 신성력을 고갈되게 할 가능성이 높았다. 때문에, 입으로 든 손으로든 비밀을 발설하려 할 시 석화 저주가 내려지는 약식 맹 세로 진행되었다.
"사례는 신전으로 직접 보내도 록 하겠다. 얼마를 생각했든 충분 할 거다."
맹세를 끝낸 율리안에게 카이사 르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가 아 닌 타인을 볼 때의 카이사르는 지 나치게 차가운 감이 있어서 볼 때 마다 어색했다.
"자비로운 라의 종으로서 어찌 사례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차나 한잔 대접해 주셨으면 하는군요."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율리안의
보랏빛 눈동자가 내게로 향했다. 그의 눈매가 달콤하게 접혔다.
"괜찮다면 카슈미르 크리시스 공녀께서요."
"무슨 개수작이지."
"사람의 입으로 견의 말을 하시 는군요."
율리안을 경계하며 내 양옆을 지키듯 서 있던 칼과 아리아가 동 시에 큰일 날 소리를 했다. 신전 과 공작가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 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두 사 람의 말투에 난 황급히 그들을 막
아섰다.
"대신 사과드립니다, 대신관님. 사죄의 의미로 제가 직접 차를 대 접해 드리겠습니다. 마리아, 응접 실로 티 세트 가져와."
" 언니!"
" 아리아."
단호한 표정을 지으니 아리아가 입술을 꾹 깨물고 물러났다. 아리 아에겐 미안했지만 어차피 한 번 쯤은 만나려던 사람이었기에 이번 이 기회였다. 얼굴에 불만이 가득 해 보이는 칼도 뒤로한 채, 난 율
리안을 응접실로 이끌었다.
"솔직히 진짜 대접해 주실 줄 몰랐습니다."
"제 혈육들이 실수를 했는데 뭔 들 못 하겠습니까."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역시.
의뭉스러운 미소를 짓는 율리안 을 돌아보며 마주 웃었다. 보이는 것처럼 맹탕은 아닐 거라 생각했 는데, 역시 예리했다.
"긴히 여쭐 것도 있습니다."
여상스럽게 덧붙이니 율리안이 피식 웃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난 눈치 빠른 사람을 좋아하니, 잘하면 율리안과 괜찮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쪼르륵.
루비로 장식된 찻주전자 위로 천천히 뜨거운 물을 부었다. 진한 캐모마일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
웠다. 얼마 전 배웠던 차 우리는 방법을 떠올리며 완벽하게 우러난 차를 찻잔 에 따랐다.
"공녀님께서 우려 주신 차를 마 시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영광은 제 것입니다. 대신관님 과 티타임을 함께하게 되었으니까 요."
의례적인 인사말이 오가고, 한동 안 침묵이 감돌았다. 팽팽하지 않 은, 어쩐지 잔잔한 침묵. 차를 세 번째쯤 머금었을까, 눈앞의 율리 안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 또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단 말이 지.'
곱게 다듬어진 짧은 은발. 요정 가루를 뿌린 듯 은은히 반짝이는 연보라색 눈동자. 곱고 유려한 얼 굴선. 감탄이 나는 미모였다. 잠 시 그의 미모를 감상하며 차까지 한 모금 더 넘기고 나서 입을 열 었다.
"제게 할 말이 있으셔서 부르신 것 같습니다만."
"예리하시네요. 맞습니다. 하지 만 공녀님의 질문부터 들어 보도 록 할까요."
번뜩이는 진분홍색 홍채와 은은 히 반짝이는 연보라색 홍채 사이 에 전류가 오간다. 신경전이라기 엔 우리 둘 다 지나치게 여유롭고 서로에게 악의가 없었기에 가벼운 탐색전이라고 하는 게 맞았다.
"별거 아닌 질문입니다. 급한 것 도 아니고, 개인적인 질문이죠."
"제가 답할 수 있는 선에선 무 엇이든 답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먼저 백기를 들자 율리안 이 빙그레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 았다. 잠시 말을 고르다 느리게 입을 열었다.
"제가 묻고 싶은 건, 태양의 맹 세를 거짓으로 집행할 수 있느냐 는 겁니다."
"......태양의 맹세를요?"
미간을 찌푸린 율리안이 조금 어이없다는 기색으로 되물었다. 태양의 맹세는 절대적이다. 얼마 나 멍청한 질문인지는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에 조금 부끄러워하면 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조금 전 집행한 맹세를 의심하고 계신 건......
"물론 아닙니다. 한 달 전에 비 슷한 사항으로 맹세를 한 번 했는 데, 혹시 위조도 가능한가 싶어서 말입니다."
나는 아직도 엘과 했던 맹세에 서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 그는 좋은 사람이었으나, 그의 모 든 언행은 기묘했다. 나를 볼 때 마다 은빛 눈동자에서 넘실거리던
욕망을 떠올리며 입술을 꾹 물었
"아, 설마......
율리안의 표정이 점점 요상해지 더니 어느 순간 입꼬리를 부들거 렸다. 그가 제 입을 틀어막고 몸 을 틀었다. 그의 어깨가 덜덜 떨 리고 있었다.
" 그 흐...... O 흐흐
1 1
크학학
율리안은 참는가 싶더니 결국
박장대소를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