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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46화 (46/254)

46 화

'하여간 신전 놈들은 다 이상한 가 봐.'

난 미친 듯이 웃어젖히는 율리 안을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한 참을 웃던 그가 제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고 읏음의 여운이 잔뜩 남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맹세 후 공녀님 손목과 그놈, 아니, 그 상대의 손목에 태양 만

다라가 새겨지는 것을 확인하셨습 니까?"

"네."

"그렇다면 확실히 진실이네요."

율리안이 싱긋 웃음 지었다.

"태양 만다라는 절대 위조할 수 없거든요."

그는 제국인 모두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교과서적 대답을 뱉었 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라 작게 한숨만 쉬고 말았다.

'그럼 엘은 대체 내게 뭘 원하는 걸까.'

여전히 알 수 없는 난제. 조금 지끈거리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검을 쓰는 사람이다. 알레고리와 수수께끼 같은 것들은 아리아나 잘하지 내 겐 맞지 않았다.

"그럼 하나만 더 여쭈어도 되겠 습니까?"

"물론. 제가 답할 수 있는 수준 이라면요."

율리안이 흔쾌히 수락했다. 그는 무척 유쾌해 보였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엘이라는 대신관을 아십 니까?"

엘의 정체에 대한 다른 예측이 요즘 들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 긴 했지만, 우선 알고 있던 대로 내뱉었다. 내 질문을 들은 율리안 의 얼굴이 정말 기묘해졌다. 웃음 을 참는 것 같기도, 안타까워하는 것 같기도, 어이없어하는 것 같기 도 했다.

"엘, 대신관...... 크흥, 엘이라 면, 음...... 제 오랜 친구죠."

"......정말요?"

율리안이 엘의 친구라니. 놀라서 눈을 크게 뜨니 고개를 살짝 튼 채 어깨를 들썩이던 율리안이 얼 마 후 멀쩡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 덕였다.

"네. 저보다 먼저 들어온 친군 데...... 으음...... 아,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더듬더듬 말을 잇는 게 조금 이 상하긴 했지만 궁금한 게 앞섰기 에 진중하게 물었다.

"엘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 물음에 율리안의 입꼬리가 웃음을 참는 것처럼 씰룩거렸다. 조금 고민하는 기색이던 그가 피 식 웃었다.

"자식. 내가 한 번 살려준다."

" 네?"

" 아닙니다."

이상한 중얼거림과 함께 평소의 성스러운 낯으로 돌아온 율리안이 입을 열었다.

"엘은...... 음, 다정하고요. 이타 적......이고...... 화도, 낼 줄 모르 는 아주 착한, 후...... 아주 착한 아이예요. 욕심도 없고, 꿍꿍이나 흑심 같은 것도...... 하...... 없, 는, 태양신 라 같은 성품을 가지 고 있죠. 그래요! 이 말이 딱 맞 네! 엘은 라의 현신 같은 친구예 요!"

"......라는 불같은 성미와 난폭 한 성질을 가진 신 아닙니까?"

많은 이들이 라를 자애로운 신 이라고 하곤 했지만, 사실 라의 신화를 보면 자애로움보단 엄격과 더러운 성격이 더 돋보였다.

"제 말이 바로 그거......! 아니, 아니지. 그러니까 제 말은! 태양 처럼 따스하고 온화한 성품을 가 진 친구라는 소리입니다!"

어쩐지 아주 힘겹게 칭찬을 이 어 가던 율리안이 황급히 수정했 다.

'그냥 욕을 하지 그러냐.'

다른 건 몰라도 엘을 향한 율리 안의 평가가 진실이 아니라는 건 5살짜리 애도 알 것 같았다.

'엘은...... 무척 착하고 순진하지 않던가.'

사실 율리안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긴 했다. 내게 있어 엘은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고 있는 건지 염려되는 천사 같은 이였으 니. 상당히 의심스럽긴 하지만 나 쁘진 않은 사람 같다는 게 내 총

평이었다.

진지한 물음도 아닌데 굳이 거 짓말을 하는 율리안을 떨떠름하게 바라보다 노력이 가상하니 속은 척 정도는 해 주기로 했다.

"어쨌든 나쁜 사람은 아닌 거 죠?"

"라이시여, 용서하소서...... 물론 아니죠."

속이고 싶은 마음이 있긴 한 건 지, 대놓고 기도를 올리는 율리안 을 보며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꾹

물어 웃음을 참았다. 하여간 웃기 는 인간이었다.

'신전에선 그렇게 착하게 살진 않는 모양이지만...... 애초에 이렇 게 덮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나쁘게 살지 않았 다는 뜻 아닐까.'

엘에 대한 평가를 살짝 수정하 며 피식 웃었다.

"아, 그리고 엘은 신전 내에서 무척 유명합니다."

뜬금없는 말. 무슨 소린가 싶어 살짝 고개를 갸웃하니 율리안이 눈꼬리를 흐드러지게 휘었다.

"스무 살이 되도록 첫사랑을 못 잊어서 아직도 사랑의 열병을 앓 고 있거든요."

짓궂음이 가득 묻어나는 율리안 의 입매가 장난꾸러기 소년을 연 상케 했다.

'엘이 첫사랑......?'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다. 엘이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잠시 의문을 갖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다정했으니 정말 사랑하는 이에겐 상냥함의 끝을 보여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요. 말씀해 주셔서 감 사합니다. 제게 하실 말은 뭡니 까?"

"아, 저도 별건 아닙니다."

싱숭생숭한 기분을 뒤로 한 채 율리안에게 물었다. 그가 씨익 웃 었다.

"괜찮으시다면 시간 날 때 저희 신전을 한번 찾아 주시지 않겠습 니까?"

"그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귀족들이야 작은 소원이라도 생 기면 신전에 가 공물을 바치고 신 관을 통해 기도를 받는 게 통상적 이었으니 가는 것이야 어렵지 않 았다. 허나 율리안의 태도가 조금 묘해 되물으니 그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사실 저희 신전에 공녀님을 못

잊어 매일 지랄병을 앓는 개 한 마리가 있어서요. 여기까지 올 용 기는 없는 주제에 힘없는 사람들 을 물고 뜯는 아주 못된 놈이죠."

"......신전에서 개도 키웁니까?"

"어쩌다 보니 그 개가 우리 신 전의 최고 권력자가 돼 버려서."

생뚱맞기 짝이 없는 소리들인데, 어쩐지 이해가 된다.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운 시일 내에 한 번 찾아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걸로 일주일치

지랄은 벗어난 것 같네요."

'하여튼 이상한 사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율리안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가 내 웃음 을 보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짓는 게 느껴졌지만 차나 한 모금 더 머금을 뿐이었다.

"돌아가시는데 배웅이 필요하겠 습니까?"

"아, 아뇨. 차도 대접해 주셨는 데 배웅까지 부탁드릴 수야 없 죠."

"그럼 멀리 나가진 않겠습니다."

탁자 앞의 마력 벨을 흔드니 10 초도 채 지나지 않아 시종이 문을 두드렸다. 응접실의 문을 열며 율 리안에게 악수를 청했다.

"몸 조심히 돌아가시길 바랍니 다. 태양의 가호가 늘 함께하시 길."

"만나 뵈어 반가웠습니다. 늘 빛 이 머무는 곳에 거주하시길."

새하얀 은발을 나부끼며 돌아선 율리안이 시종과 함께 걸음을 옮

겼다. 벽에 기댄 채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휙 고개를 돌린 율리안이 눈을 축 늘어뜨리 고 입을 벙긋거렸다.

'......미안, 해요?'

율리안이 내게 미안할 짓을 한 적이 있나 갸우뚱했지만, 그는 이 미 복도 너머로 사라진 이후였다.

조금은 기묘했던 하루가 지나갔 다.

"몸은 다 풀었나?"

"네."

텅 빈 연무장 한가운데에 서서 스트레칭을 하는 나를 내려다보던 카이사르가 검을 잡은 그의 손목 을 가볍게 돌렸다.

하얀 와이셔츠와 하이웨스트 형 식의 바지를 입고 있는 카이사르 는 그 자체로 빛이 났다. 잘난 얼 굴엔 특별한 액세서리가 필요 없 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저, 용병 일은 그만해도 검은 계속 잡고 싶습니다.'

'그야 어렵지 않다. 공작가 혈육 들 전용 연무장이 있다. 원할 때 마다 언제든 가서 연습해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오러만 보이지 않 도록 조심하고.'

'네! 감사합니다!'

'아, 이번 주 목요일에 시간 있 나?'

'특별한 약속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나랑 대련 한 번만 하지 그래.'

'......네?'

'네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 하고 나도 오랜만에 몸 좀 풀 겸. 안 되나?'

'아, 아뇨. 문제없습니다.'

나와 카이사르가 서슬 퍼런 검 을 들고 서로를 마주하게 된 이 상황의 전말이었다.

"슈슈. 살살 하지 말고 아버지를 죽사발 내 버려라."

"아주 작살을 내 버려!"

구경하겠다고 온 칼과 아리아는 폐륜적인 말들을 쏟아내며 나를

응원했다. 어쩜 둘 다 카이사르를 향한 응원은 한마디도 없는지, 그 가 안쓰러워질 지경이었다.

"자식새끼들 키워 봐야 다 소용 없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칼과 아리 아를 돌아본 카이사르가 혀를 찼 다. 나도 어이가 없어져 작게 웃 고 말았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허리춤에 찬 검집에서 날이 잘

선 검을 뽑아내고 카이사르와 마 주 본 채 허리를 숙였다. 카이사 르와 나 둘 다 소드 마스터였기 에, 진검으로 대련해도 서로가 다 치지 않게 조절할 수 있었다. 잠 시간의 시선 교환이 오갔을까, 우 린 동시에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 었다.

쾅!

검이 맞부딪침과 동시에 굉음이 일대를 울렸다. 커다란 바람이 나 와 카이사르 사이를 감쌌다. 둘 다 오러를 꺼내지 않은 맨 검이었

음에도 소드 마스터끼리의 충돌은 그 자체로 강렬했다.

'같은 수준의 검사와 하는 대련 은 재밌구나.'

손목이 살짝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즐거움에 겨워 씨익 웃었 다. 빛나는 두 날붙이 틈새로 보 이는 카이사르의 얼굴 또한 미미 한 흥분으로 달아올라 화사했다.

챙! 챙! 챙!

맞부딪치는 검 사이로 가벼운

탐색전이 이어졌다. 가벼운 탐색 전만으로도 땅이 조금씩 패여 갔 다. 충돌의 여파로 위험하진 않을 까 문득 걱정스레 칼과 아리아를 돌아보니, 칼이 이미 방어막을 시 전하고 있었다. 난 안심하며 마음 껏 검을 휘둘렀다.

'절도 있고 깔끔하지만 묵직하 네. 하나하나가 날카롭고.'

가로로 그어지는 살벌한 카이사 르의 검을 머리 숙여 피하며 공격 을 분석했다. 그의 검은 틀과 기 본이 갖추어진 기사들의 검과도

비슷했으나, 무척 변칙적이고 난 폭한 것이 용병들의 검과도 닮아 있었다.

'역시 카이사르 크리시스.'

호사가들이 대륙의 최강자를 논 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이름. 그 명성이 헛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 하듯 강력한 공격들이 쏟아졌다.

묵직한 공격들을 재빠르게 막아 내고 이를 악물며 검을 휘둘렀다. 나는 어떤 수련도 없이 오직 생존 을 위해 검을 휘두르다 소드 마스

터가 된 경우이기에, 힘도, 기술 도 그에게서 떨어졌다. 검을 휘두 른 세월의 차이가 있는 만큼 카이 사르에 비해 능숙함도 떨어졌다.

허나 그런 사실을 안다 해도. 내 가 그보다 약한 건 삶의 형태를 보든 길이를 보든 당연한 일이었 음에도.

'지기 싫다.'

늘 잠잠하던 내 속에 불꽃이 타 오르기 시작했다. 불씨 위로 떨어 진 흥분과 오기 같은 것들이 장작

이 되어 내 심장을 살랐다.

나는 여태껏 베기에만 치중하던 공격 패턴을 바꾸기로 했다. 카이 사르의 복부 쪽에 검을 휘두르는 척하다, 갑자기 방향을 틀어 그의 어깨로 검을 찔러 넣었다.

앞서 복부 쪽을 방어하던 카이 사르의 검이 조금 다급하게 어깨 를 막았다. 먹히진 않았지만 카이 사르의 페이스를 조금이라도 흔들 기엔 충분했던 공격이었다.

"......검이 상당히 변칙적이군."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 는 그를 향해 씨익 웃었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의 박동을 따라 하 나로 묶었던 머리를 거칠게 풀어 헤쳤다. 손가락 아래 풀려 나간 기다란 머리카락이 허공을 수놓았

검사임에도 거추장스럽게 머리 칼을 엉덩이까지 기르고 있는 이 유를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이제 애들 장난은 그만하죠, 아 버지."

내 긴 머리는 내 싸움에 어떤 방해도 되지 못할 만큼, 내가 강 하기 때문이라고.

쉬익!

거친 돌풍과 함께 검날 위로 폭 발적인 검은 오러가 새겨졌다. 심 장을 잇는 모든 핏줄을 타고 흐르 는 마나들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 작했다.

어느새 내 온몸이 검은빛으로 물들고 눈동자 역시 붉어졌다.

싸움을 길게 끌 생각은 없다. 애 초에 카이사르가 길게 끌려 줄 위 인도 아니고, 무엇보다 장기전으 로 가면 체력이 약한 내가 전적으 로 불리했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갈 생각이었 다.

"하, 하하!"

그런 날 멍하니 바라보던 카이 사르가 구슬땀이 엉겨 붙은 앞머 리를 쓸어 넘기며 호탕하게 웃음 을 터트렸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곱게 접혔다. 처음 보는 카 이사르의 환한 웃음이었다.

"여부가 있겠나. 내 따님의 뜻대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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