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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47화 (47/254)

47 화

목덜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강렬한 마나의 폭주. 함께 검은 바람으로 가득하던 연무장 일대에 핏빛 안개가 스몄다. 카이사르의 눈동자만큼이나 붉은 오러가 그의 주위에서 날뛰었다. 카이사르의 눈동자가 살기로 번뜩였다.

나와 필적하는 존재가 눈앞에

있음에 본능적으로 온몸이 긴장했

'즐거워.'

허나 몸이 긴장하는 것과는 별 개로, 심장에선 끊임없이 아드레 날린을 뿜어내며 흥분과 즐거움을 고조시켰다. 오랜만에 날뛰는 감 각들에 즐겁기 짝이 없었다. 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세상 다시 없을 만큼 환히 웃었다.

"그럼 아버지 실력 한번 봐야겠 습니다."

부러 도발하듯 뱉은 말에 카이 사르는 오만한 미소로 답했다. 검 사 사이에 긴 말은 필요 없었다.

콰콰콰쾅!

우리는 검으로 대화하니까.

오러가 깃든 두 소드 마스터의 검이 충돌하자 온 일대가 들썩였 다. 그 소음과 진동까지도 즐거워 광기가 깃든 미소를 잔뜩 머금은 채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 했다.

'아, 좋아.'

스스로가 지나치게 흥분했음을 알았다. 허나 소드 마스터가 된 후 처음으로 실력이 비슷한 상대 와 해 보는 대련이었기에, 흥분을 참기 어려웠다. 광인처럼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카이사르의 상황도 달라 보이지 않았다.

검을 마주치는 지금 이 순간, 우 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닮아 있었 다. 범인의 이해를 벗어난 강자들 로서 서로의 유일한 이해자였다.

챙! 채챙! 캉!

검이 맞부딪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반 인의 눈엔 검이 움직이는 속도가 보이지 않는 수준에 다다랐다.

객관적인 실력 면에선 확실히 내가 밀렸다. 허나 방어라는 소모 적인 행동을 형식적으로나마 하는 카이사르에 비해, 나는 오직 공격 만 감행했기 때문에 쉬이 결판이 나지 않았다.

"젠장! 방어는 좀 하란 말이다!"

내 머리카락 끝을 자르며 실제 로 내 옆구리를 벨 뻔한 카이사르 가 황급히 검을 빼내며 소리쳤다. 나는 검이 내 옆구리를 배든 말든 그의 허벅지를 향해 검을 찔러 넣 었다. 카이사르가 조금 다급하게 공격을 막았다.

실력 면에선 날 올라서는 카이 사르가 아직도 이기지 못하고 있 는 이유는, 그가 날 실제로 베기 를 주저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미 온몸에 마나를 두르고 있어 실

제 검에 찔려도 그리 크게 다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그 는 내 몸에 검이 닿으려고 하면 당황하며 물러섰다.

그리고 그게 바로 카이사르의 패 요인이었다.

'한 번에 끝낸다.'

시야를 거슬리게 할 정도로 세 차게 흐르는 땀방울을 고개를 흔 들어 털어 내며 마지막 공격을 준 비했다.

벌써부터 다리가 떨린다. 장기전 으로 가면 확실히 내가 불리했기 에 여기서 끝내야 했다.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지?'

카이사르의 발목을 공격하려다 실패하곤 살짝 물러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승부욕이 속을 불살랐 다. 반드시, 반드시 이기고 싶었 다.

'그냥 몰아붙이는 걸론 안 돼. 순수한 근력으론 내가 떨어지니 까. 실력도 내가 떨어져. 나보다

강한 상대는 어떻게 이겨야 하는 거지? 나는 여태껏 나보다 훨씬 강하던 마수들을 어떻게 이겨 왔 지? 나는 !'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머리가 과 열되도록 뇌를 굴렸다.

그리고 퍼뜩 떠오르는 한 가지.

'소를 내어주고 대를 얻는다.'

그것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재 앙들과 맞서 온 방법이었다.

희생을 결심한 이상 주저할 건 없다. 입가에 만연한 미소를 띤 채 조금 느리지만 묵직하게 이어 가던 공격 패턴을 오직 스피드에 만 치중한 속검으로 바꿨다. 카이 사르는 내 속셈을 읽으려는 듯 미 간을 좁히면서도 빨라진 속도를 곧잘 따라왔다.

'좀 더, 더.'

근력이 떨어지는 만큼 스피드를 길러 온 나는, 정면 돌파에서 속 도로 밀어붙이는 방법으로 전략을 바꾼 것처럼 속도를 올려 갔다.

몇 번이고 서로의 살을 노리다 머 리칼을 베고 옷자락을 베는 아슬 아슬한 검무가 이어졌다. 소드 마 스터의 속도를 따라오려 애쓰는 인간의 몸뚱이가 욱신거렸지만 멈 추지 않았다.

초월한 속도에 두 날붙이의 실 체는 보이지 않고 오직 돌풍 같은 바람만 나와 카이사르 사이를 채 우고 있을 때.

"젠장, 너......

나는 검을 내렸다.

막강한 힘으로 맞부딪치고 있던 두 검 중 하나가 훅 내려가자 당 연한 순차로 부딪칠 대상을 잃은 카이사르의 검이 속도와 힘을 이 기지 못하고 내 어깨를 향해 돌진 했다. 당황한 카이사르가 검을 멈 추려 했지만, 이미 힘껏 휘두른 칼의 반동을 그 순간에 멈출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의 검 끝이 내 어깨를 꿰뚫기 위해 휘둘러질 때, 나는 피하기는 커녕 그 검 앞으로 돌진했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내 왼쪽 어 깨가 꿰뚫렸다. 온몸에 마나를 두 르고 있었기에 뼈가 부러지진 않 았겠지만, 검이 꽤 깊이 들어간 것 같았다.

어깨에서 떨어진 붉은 선혈이 땅바닥을 적시고, 카이사르의 검 끝이 붉게 물들 때.

"제가 이겼습니다."

내 검 끝은 정확히 카이사르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이겼다!'

고통이고 뭐고 내 알 바가 아니 었다. 내게 중요한 건 내가 먼저 카이사르의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는 사실뿐이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발그레한 얼굴로 배시시 웃 었다.

"이 미친 새끼야!"

그리고 그런 내 시야를 덮은 건 휘날리는 분홍색 머리카락이었다.

연무장 일대를 울릴 정도로 커 다란 마찰음과 함께 카이사르의 얼굴이 돌아갔다. 눈꼬리에 눈물 을 단 아리아가 카이사르의 뺨을 내리치고도 진정하지 못한 것처럼 씩씩거리며 카이사르의 정강이를 마구 걷어찼다.

'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이는 내 앞으론 광포한 표정

을 지은 칼의 얼굴이 들이밀어졌

"미쳤나? 돌았냐고! 어쩌자고 거기에 달려든 거지? 널 걱정하 는 사람은 안중에도 없지!"

칼이 격분한 목소리로 내게 쏘 아붙였다. 영문 모를 말에 어버버 하다 고개를 갸웃했다.

"저, 저 되게 잘하지 않았습니 까? 저 이겼는데......•"

"이 미친, 진짜!"

짝!

내 얼굴이 휙 돌아갔다. 하나도 아프진 않았지만 내 뺨을 친 대상 이 너무 충격적이라 뺨을 잡고 눈 을 커다랗게 떴다.

내 얼굴에 손을 올린 건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리아였다.

"아, 아리아......?"

"야! 너 돌았어?"

" 뭐?"

생에 처음 들어보는 아리아의

'너'라는 호칭에 나는 넋이 나갔 다. 눈앞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격노한 아리아가 서 있었다.

"내가 그만하라고 했지, 내가 그 만하라고 했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정신이 나간 것처럼 그만하라고 했다는 말만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나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벙찐 표 정을 지었다.

"모, 못 들었는데......•"

"했어! 했다고! 중간에 제발 그

만하라고 했잖아!"

너무 집중한 나머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펑펑 눈물 을 흘리는 아리아가 내 다치지 않 은 쪽 어깨를 퍽퍽 내리쳤다. 그 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나와 카이사르의 대련으로 쑥대 밭이 된 연무장. 머리칼과 옷이 잘리고 찢긴 채 어깨에서 피를 뚝 뚝 흘리는 나. 지옥에서 기어 올 라온 야차 같은 표정으로 내 상처 를 살피는 칼. 날 베란다에 거꾸

로 매달아 놓고 싶다는 표정으로 노려보는 아리아.

내 피가 묻은 검을 잡은 채 딱 딱하게 굳어 버린 카이사르.

늘 나른하던 눈동자가 당혹스러 움으로 물들고 무료하던 얼굴은 무섭도록 굳었다. 검을 쥔 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그 고고하고 무감각 하던 붉은 검귀 카이사르 크리시 스는, 나 때문에 공포에 질려 있 었다.

카이사르와 긴 시간을 본 것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처음이었 고, 앞으로도 그에게서 볼 리 없 을 거라고 생각했던 표정이었다.

"하! 그래, 평소에도 이렇게 싸 웠어? 언니 몸은 생각도 안 하고 미친개처럼 달려들기만 했냐고! 그래서 늘 그렇게 죽사발이 돼서 돌아온 거야?"

아리아가 내 멱살을 잡아끌었다. 지나치게 흥분한 기색의 아리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아

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랬다. 나는, 평생을 이 렇게 싸웠다. 내 살을 내줌으로써 살아남았고, 피와 시련으로써 성 장했다. 피로 물든 재앙이 되어, 다른 재앙들을 죽였다.

'하지만 그런 내 인생은 네가 모 르길 바랐어.'

멍청하게 눈가에 물기가 돌아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아리아의 두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러니까...... 나는, 검을 제대 로 배우지 못해서, 공격하고 달려 드는 것밖에 몰라. 그래서, 그랬 어. 널 걱정시키고 싶었던 게 아 니야. 내가 무식해서 그래."

"언니가 왜 무식해! 저 새끼가 잘못한 거지!"

천천히 아리아를 달래는데, 왜인 지 아리아는 더더욱 분기탱천하며 카이사르를 삿대질했다. 칼조차 카이사르에게 날카로운 눈총을 보 냈다. 분위기가 너무 과열된 것을 느끼고 당혹스러워하는데, 따뜻한 품이 나를 훅 덮쳤다.

"......공작님?"

당혹스러움에 '아버지'라는 호칭 대신 경칭이 튀어나왔다.

맞닿은 몸이 덜덜 떨려왔다. 카 이사르에게서 떨어진 식은땀이 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그는 내 피 가 자신의 흰 와이셔츠 위로 번지 든 말든 상관조차 하지 않고 내 몸을 으스러져라 안았다.

"다시는, 다시는 내가 내 손으로 널 해하게 하지 마라."

카이사르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 리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내 잘 못을 깨달았다. 나를 안고 있던 그는 한참 뒤에야 내 어깨를 잡아 밀며 나와 얼굴을 마주했다.

땀에 젖어 축 내려온 앞머리. 파 르르 떨리는 입술. 절망으로 촉촉 하게 젖은 붉은 눈동자.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제발 다치지 마

라. 위험 앞에선 도망치고 방어하 란 말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달려든 거냐! 열 번이고 백 번이 고 얼마든지 져 줄 테니 제발, 제 발 "

다시금 카이사르의 품에 폭 안 겨들었다. 나를 안은 떨리는 팔에 서, 흐르는 식은땀에서, 난 기묘 하게도 그가 날 진정으로 사랑하 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치지 마라, 제발......

포근한 품 안에서 스르륵 눈을

감았다. 나는 천천히 카이사르를 마주 안았다. 간원하는 그 목소리 앞에서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 이었다.

"......네, 아버지."

어깨에선 피가 흐르고, 온몸은 욱신거림에도 마음이 따뜻하다.

사랑받고 있다는 기분에 속도 없이 웃음이 나왔다.

화악.

"와......

내 어깨를 타고 퍼져 나가는 빛 에 탄성을 뱉었다. 처음으로 느껴 보는 요정의 치유력. 신성력과 비 슷하면서도 다른 감촉이 어깨를 간질이는 것에 눈을 반짝였다.

"이 상황에서 와...... 같은 탄성 이 나오나 봐. 와플처럼 납작 눌 리고 싶나......

서늘한 목소리에 재빨리 입을

닫았다. 온몸이 어는 것 같은 차 가운 눈초리에 모순적으로 식은땀 을 흘리며 슬쩍 눈치를 봤다.

"아리아. 내가 잘못했......

"입 닫아. 지금 사과하면 바로 풀려 버릴 것 같으니까."

내겐 늘 천사 같았던 아리아가 내게 거친 말을 했다는 건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상처로 입을 살짝 벌리다, 지금은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에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화악.

"음...... 이제, 다 나은 것 같

Q "

" 입."

나는 순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 었다. 아리아는 자신이 요정 혼혈 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치유력을 기르기 시작했고, 이제는 작은 상 처쯤은 쉽게 치료할 정도였다.

조금의 흔적도 남지 않고 완벽 하게 치료된 내 어깨에 일곱 번째 치유력을 쏟아붓는 아리아에게선 강박이 보였다.

'얼마나 놀랐을까.'

그렇게 해선 안 됐다. 난 가족 모두에게 못할 짓을 한 것이다. 얼마나 놀랐던 건지 아직도 새하 얗게 질려 있는 아리아의 뺨에 손 등을 대곤 쓰게 웃었다.

"......잘못했어, 아리아. 용서해 줘."

은구슬 같은 물방울이 툭 떨어 져 내 손을 적셨다. 입술을 꾹 물 던 아리아가 내게 달려들어 나를

안았다. 나는 가슴 압박 붕대만 두르고 상의를 벗은 몸으로 부둥 켜안은 게 민망했지만 아리아를 마주 안아 주었다.

"다시는 그러지 마."

"으 "

흐 '

"다시는, 언니 몸을 희생시키지 마."

" 으 "

O -

어깨를 적시는 물기를 모르는 척한 채 분홍색 머리칼을 몇 번이 고 쓰다듬어 주었다.

잠시 우리가 서로의 온기를 나 누고 있을 때.

똑똑.

"테일러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 는다면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테일러가 방문을 두드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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