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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48화 (48/254)

48 화

웃옷을 챙겨 입고 나간 방문 앞 엔 테일러가 서 있었다. 그가 건 넨 것은 서류 봉투였다. 보자마자 무엇인지 짐작한 나는, 미소 지으 며 아리아에게로 돌아왔다. 마침 아리아에게 주려고 했던 서류였 다.

"......내게 사업 총책임자를 맡 기겠다고?"

서류를 모두 읽은 아리아는 얼 떨떨한 표정으로 서류를 내려놓았 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곤 고 개를 끄덕였다.

"응. 카트린느 부인에겐 이미 말 해 뒀어. 아버지께도 네가 하네스 와 바디체인 사업의 총책임자가 될 거라고 말씀드렸고. 내일부터 테일러가 네 사업 교육을 맡을 거 야."

"어, 언니."

"총책임자라고 해서 부담 가질 거 없어. 모두가 널 도와줄 거고, 네가 사업에 익숙해지기 전까진

전체적으로 테일러가 관리할 테니 까. 아버지 말로는 사업을 아예 말아먹어도 금고에 흠집도 안 간 다고 하니까 마음 편하게 해."

"잠깐, 잠깐!"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듯 삐걱 거리던 아리아가 벌떡 일어났다. 동그래진 하늘색 눈이 혼란스럽게 서류를 다시금 읽어 내렸다.

서류의 내용인즉슨, 아리아 크리 시스가 하네스와 바디체인 사업의 총책임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왜? 이건 언니가 하는 거 아니었어?"

"너도 알다시피 난 책상에 앉아 서 서류 처리하는 것엔 그다지 재 능이 없어. 내가 잘하는 건 검을 휘두르는 거지."

혼란스러워하는 아리아를 달래 듯 잔잔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잘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몸을 움직이는 일이다.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고 마수를 때려잡는 일 같은 것.

머리로 하는 것도 정 시킨다면 못하진 않지만, 그 분야론 나와 비교도 되지 않는 천재가 옆에 있 는데 내가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 했다.

'......이게 뭐야?'

'응, '역대 제국의 경제 성장과 제국의 경제가 대륙에 끼친 영 향'! 도서관에서 빌려왔어!'

'이걸 읽고 있었어......?'

'아니! 그건 이미 다 읽었어! 지 금은 '사업 흥망성쇠의 원인과 고 찰' 읽고 있어!'

'이해가 돼?'

'으응. 모르는 단어들이 있어서 조금 어렵긴 했는데 대충 이해는 돼. 책 내용은 다 외웠에'

아리아는 단연 세기의 천재였다. 돈이 없는 탓에 그 천재적인 두뇌 에 걸맞은 교육을 시켜 주지 못한 것이 내 천추의 한이었다.

"나는 이 사업을 계획할 때부터 널 염두에 두고 있었어."

자신 없이 흔들리는 아리아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했다.

"네 의견을 묻지 않고 진행해서 미안해. 네게 꼭 시켜 주고 싶어 서 진행을 조금 급하게 했어."

"아니, 그건 괜찮은데......

입술을 꾹 문 아리아가 느리게 서류를 쓸었다. 분명 혼란스러워 보였음에도, 푸른 두 눈에 넘실거 리는 것은 완연한 야망이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두 눈은 뜨겁게 이글거리는 야 망을 품고서도 입술은 자신 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 웃겼다. 나는

푸스스 웃었다.

'아리아는 절대 귀족 영애로 끝 날 아이가 아니야.'

나는 아리아를 잘 안다. 아리아 는 배움에 대한 열망과 새로운 것 을 개척하고픈 야망을 가득 품은 아이였다. 나는 그런 아리아가 제 꿈을 펼치기를 바랐다.

"네가 싫다면 강제하진 않을 거 야. 싫은 걸 억지로 하길 바라진 않으니까."

나는 신뢰가 가득히 깃든 눈으 로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다만 나는 네가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조금의 의심도 없 이."

아리아는 어린 시절부터 경제와 사업에 관심이 많았고, 범인과는 비교를 거부하는 계산 속도와 냉 철한 판단력을 지니고 있었다. 거 기다 사교에도 뛰어났으니, 타고 난 사업가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원작에선 왜 이런 아리아의 재

능을 묵혀 두었던 건지.'

원작에서 부각된 아리아의 장점 은 요정같이 아름다운 외모와 무 식하도록 선한 성격, 요정 혼혈로 서 타고난 치유력뿐이었다.

'전형적인 여주인공의 상이었 지.'

원작에선 아리아를 천사표 여주 인공으로 만들기 위해 아리아의 요정 같은 점만 부각시켰다. 그 때문에 인간 아리아로서의 무궁무 진한 가능성은 모두 묻혀 버린 것

이다.

'네 자의로 천사표 여주인공처럼 살기를 바란다면 말릴 수야 없겠 지만, 내가 여태껏 봐 온 너는 그 렇지 않았으니까.'

"네 스스로를 믿지 못하겠다면, 네 언니가 믿는 아리아 크리시스 를 믿어봐. 네 언니는 사람 보는 안목이 꽤 좋거든."

너스레를 떨 듯 덧붙이고 부드 러운 시선으로 아리아를 바라보았

"물론, 선택은 온전히 네 몫이 야."

강요는 하지 않는다. 내가 바라 는 것은 아리아의 행복이니까. 선 택은 온전히 아리아의 몫이어야 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이는 눈 으로 나를 응시하던 아리아가 굳 게 결심한 표정으로 서류를 들어 올렸다.

"••••••할래."

넘실거리던 불안함을 깨끗이 씻 어내고 자신감으로 채운 하늘빛 눈동자가 자신만만하게 휘어졌다.

"나, 할 수 있어."

역시 내 동생이었다.

"오늘 아침, 너희를 데리고 입궁 하라는 명이 내려왔다."

봄이 코앞으로 다가온 어느 겨

울날, 아리아와 나를 불러들인 카 이사르가 황궁 초대장을 내밀었 다. 초대장을 멀뚱히 바라보다 마 시던 차를 내려놓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황제가 너희를 만나고 싶어 한 다. 너희가 준비되지 않았다고 둘 러대서 최대한 입궁을 미뤘건 만...... 미안하다. 황제가 더는 그 빌어먹을 호기심을 못 참나 보 군."

혀를 차는 카이사르에겐 지긋지 긋하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나와

아리아는 황족 모독을 가벼이 입 에 담는 카이사르를 이제는 익숙 하게 바라보았다. 그가 얼굴을 구 겼다.

"너희, 황제 앞에서 절대 흥미롭 게 보여선 안 된다."

"••••••네?"

"아니, 너희 둘 다 너무 흥미로 워 관심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으 려나. 젠장...... 하여간 눈에 띄는 행동을 해선 안 된다."

황제를 모르는 아리아는 카이사 르의 충고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

정을 지었지만, 원작을 아는 나로 선 어색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현 황제는 남주인공 디에고의 아버지 헬리오스 1세. 뛰어난 정 치적 감각과 대중을 단번에 사로 잡는 위엄, 호탕한 성격을 지닌 성군이었으나, 단점이 하나 있었 다.

'지독한 흥미주의자라고 했지.' 그는 원작 칼과 비슷한 수준의

미친 흥미주의자였다.

속으로 푹 한숨을 쉬었다. 원작 에선 아리아를 만난 헬리오스 1 세가 재밌어 보인다는 이유로 아 리아에게 황태자비를 권하던 에피 소드까지 있었으니, 돌기는 어지 간히 돈 사람이었다.

'엮이게 되면 골치 아프지만

내 미래 계획을 위해서라면 필 연적으로 엮여야만 하는 인물이 다.

솟아오르려는 두통을 꾹꾹 눌렀

다. 황제가 아무리 미친 짓을 해 도 잘 보여야 한다고 스스로를 세 뇌시 켰다.

"아리아, 슈슈, 준비해라. 우리 는 오늘 오후, 빠르게 입궁하고 빠르게 돌아온다."

엄숙한 표정을 지은 카이사르가 전장에 출전하는 기세로 입궁을 선포했다.

"°1 집안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언니가 이런 옷들을 입을 수 있게 됐다는 건 너무 행복해."

아리아가 황홀해하며 중얼거렸 다.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화려 한 바로크 문양이 은실로 새겨진 검은 정장과 와이셔츠 위에 착용 한 두 줄 형식의 하네스는 내 몸 에 딱 맞았다.

'이렇게 좋아하면 평소에도 잘 입을 걸 그랬나.'

검은 와이셔츠에 검은 망토만 대충 두르고 다니던 나날들을 떠 올리며 머쓱하게 웃었다. 워낙 어 둡고 음침한 옷들만 고집해 전에 어떤 이에게 어둠의 자식이냐는 소리까지 들었던 나로선 할 말이 없었다.

'나야 불편하지만 않은 옷이면 충분하지만...... 아리아가 저런 옷 을 입을 수 있다는 건 좋네.'

화사한 연둣빛 드레스를 차려입 은 아리아를 뿌듯하게 바라보았

"아비 바로 앞에서 집안이 마음 에 안 든다는 소리를 하는 내 둘 째 따님도 참 대단하단 말이지."

"이런. 공작님 거기 계셨어요? 내가 우리 언니 보느라 공작님 계 신 걸 깜빡했지 뭐예요."

내 옆에 앉은 카이사르가 실소 를 터트리자 맞은편의 아리아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아옹다옹하 는 둘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래도 첫 만남을 생각하면...... 많이 발전한 거지.'

카이사르의 목을 조르던 아리아 를 떠올리니 목 뒤가 서늘해졌다. 카이사르는 아리아를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로, 아리아 는 카이사르를 짜증 나는 멀대 1 정도로 보는 것 같지만, 그래도 몇 달간 함께 생활하니 서로 미운 정이나마 든 것 같았다.

" 황궁이군요."

창문 밖을 가리켰다. 태양 제국 이란 이름답게 번쩍이는 금빛으로 꾸며진 황궁은 휘황찬란했다. 우

리는 크리시스 공작가의 문양이 찍힌 마차를 탄 덕분에 검문 한 번 없이 황궁에 들어섰다.

안내를 따라 알현실로 발걸음을 옮기며 화려하게 장식된 황궁을 둘러보았다. 깔끔함을 중시하는 크리시스 저택과 화려함이 중점이 된 황궁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저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를 커다란 문 앞으로 이끈 늙은 시종이 고개를 말했다. 흠칫

놀라 카이사르를 돌아보았다.

"황태자 저하도 함께 뵙니까?"

"그래."

'젠장•••••••'

입술을 깨물었다. 춤 요청을 걷 어찬 지도 얼마 되지 않은 데다, 디에고는 미르인 날 본 적 있는 이였기에 조금 불편했다. 껄끄러 워하는 날 본 아리아가 눈을 부라 렸다.

"설마 황태자 저하가 언니를 불

편하게 해? 저번엔 춤도 신청하 더니......

"아, 그런 건......

"황태자가 슈슈에게 춤을 신청 했다고?"

카이사르가 금시초문이라는 표 정으로 눈을 부라렸다.

카이사르는 데뷔탕트 내내 황제 의 칙령으로 바빠 디에고가 내게 춤을 신청하는 걸 보지 못했다. 이후 데뷔탕트는 어땠느냐 묻는 물음에도 그저 괜찮았다고 얼버무 렸고.

사교계에 관심이 없는 카이사르 는 소문에도 어두웠기에 여태껏 데뷔탕트에서 일어났던 일을 몰랐 던 게 분명했다.

해명을 요하듯 뜨겁게 불타는 카이사르의 눈을 피하며 땀을 뻘 뻘 흘렸다.

"신청하시긴 했는데......

"역시 저하가 언니를 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어요. 분명 사랑에 빠 진 눈이었다니까!"

"......그 어린 여우가 언젠간 일

을 벌일 줄 알았다. 역시 슈슈를 함부로 내놔선 안 되는 건가...... 그래서 황태자와 춤을 춘 건가?"

"아뇨. 춤은 웬 신관복 입은 남 정네랑 추더라고요. 그 인간 뒷조 사가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저택에 돌아가서 그 남자 인상 착의를......

"둘 다 그만하십시오."

멀뚱히 서 있는 늙은 시종 앞에 서 다른 사람이 들을까 두려운 말 들을 속닥거리는 두 사람을 황급 히 저지했다. 둘의 사이를 염려했 던 게 무색하게도 둘은 쿵짝이 아

주 잘 맞았다.

"문 열어 주시죠."

이대로 뒀다간 아리아가 카이사 르에게 데뷔탕트에서 일어난 일들 을 다 고해 버릴 것 같았다. 어쩔 줄 모르고 눈만 굴리고 있는 늙은 시종에게 명하자, 그가 고맙다는 눈빛을 보내며 문을 열었다.

"크리시스 공작님과 공녀님들이 도착하셨습니다."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응접실이

눈부셨다. 잠시 응접실 내부를 감 상하다, 화려한 장식들 사이에서 도 절대 빛이 죽지 않는 고고한 남자에게로 시선이 고정되었다.

화려한 의자 위에 권태롭게 앉 아 있는 인영. 분명 쉰을 바라본 다고 했건만 스물 후반이라고 해 도 믿을 법한 인상. 허리를 넘어 흘러내리는 황금빛 머리칼과 푸르 른 청염을 머금은 나른한 맹수의 눈동자.

태양이 지지 않는 솔라티네 제 국의 황제, 헬리오스 1세였다.

'데뷔탕트 때 나한테 윙크하던 사람이라곤 믿기지가 않는데.'

태양이 눈앞에 빛나는 듯한 기 분을 느끼며 속으로 감탄했다. 나 이 든 디에고라고 해도 믿을 정도 로 디에고와 판박이인 황제는 과 연 지배자라는 칭호가 어울릴 만 큼 무거운 위압감을 머금고 있었 다.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날 응시 하는 디에고의 시선을 피해 부러 황제에게 시선을 고정하니, 무료

하게 창밖을 바라보던 황제가 내 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다. 헬리오스와 나 사이에 꽤 오랫동안 시선이 오갔 다. 나를 날카롭게 관찰하는 짙은 시선. 위압감이 어깨를 누르는 불 편한 감각을 느꼈으나,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내 경험상 이런 사람과의 만남에선 절대 꿇고 들 어가선 안 됐다.

내 어디까지 파헤쳤을까, 날 선 시선을 천천히 떼어 낸 헬리오스 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열방

을 비추는 태양처럼 화사한 미소 였다. 그 예술 작품 같은 웃음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을 때.

"오."

얼마 뒤 열리는 황제의 산홋빛 입술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그대가 바로 내 아들놈을 찼다 는 카슈미르 크리시스 영애인가?"

황제의 위엄은 딱 입을 열기 전 까지만 이어진다고.

헬리오스는 단단히 미친놈이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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