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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49화 (49/254)

49 화

"내 그대들을 아주 만나보고 싶 었네. 공작이 딸 생겼다고 어찌나 유세를 부리던지! 내 부러워서 배 가 아프더군!"

" 이" , 하'하"   "

"오! 아리아 공녀! 공녀로 인해 사교계가 아주 뜨겁던데! 하네스 와 바디체인이라고 불리는 액세서 리들을 판매하기 시작했다지? 어 린 나이에 아주 대단하더군. 요새 시종들이 툭하면 하네스가 최고

유행이라고, 안 차면 폐하는 시대 에 뒤떨어지는 거라고 얼마나 잔 소리들을 하나 몰라!"

" 어 감사 99

"영애가 사교계를 휘어잡았다는 얘기도 자주 들리더군. 영애가 사 교계에 진출한지 이제 몇 달 되지 도 않았는데 말이야! 대단한

그러니까, 황제는 그렇게 안 생 겨서 엄청난 수다쟁이였다.

감사하다는 말조차 할 틈을 주 지 않고 칭찬을 쏟아붓는 황제를

보며 상당히 떨떠름한 표정을 지 을 수밖에 없었다.

폭력에 가까운 칭찬들을 맞으며 말라 가는 아리아를 안쓰럽게 바 라보다, 뺨 위로 닿는 뜨거운 시 선에 지금 내가 누군가를 걱정할 처지가 아니라는 걸 자각했다.

'나를 눈빛으로 태워 죽이고 싶 은 건가.'

디에고의 집요한 시선을 필사적 으로 피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알 현실로 들어선 순간부터 지금까지

디에고와 나는 시선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아악! 악!'

뜨거운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눈 마주치는 것 정도는 별일 아 니라는 것도, 이렇게까지 피하는 게 더 이상해 보인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아 쫌! 자! 자라고!'

'무슨•..."!'

'잘 자요...... 좋은 꾸우움......

하지만 아무리 태연하게 굴려 해도 그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했 던 만행이 떠올라 죽고 싶어졌다.

'디디가 황태자 디에고일 거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냐고!'

속으로 벽을 머리에 박았다. 한 밤중에 암살자의 습격을 받아 거 리에 쓰러진 남자를 누가 황태자 일 거라고 생각하느냔 말이다.

디디를 끽해야 백작가 자제 정 도로 생각하고 있던 나로선 환장 할 노릇이었다.

어그러지는 입매를 가리기 위해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기울이는 데, 아리아에게 칭찬 세례를 퍼붓 던 황제의 시선이 어느새 내게로 향하고 있었다. 순간 찻물을 뿜을 뻔했으나 애써 참았다.

황제의 입가로 어쩐지 불길한 미소가 떠올랐다.

"카슈미르 공녀는 내 정말 만나

고 싶었지."

"폐하."

황제가 첫마디를 떼자마자 눈매 를 날카롭게 세운 디에고가 낮게 읊조렸다.

웃음을 참는 것처럼 입꼬리를 꿈틀거리던 황제는 디에고를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내게만 시선 을 맞췄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태자인 내 아들을 뻥 차 버린 멋진 사람 아닌가!"

"크 "

"하......

필터링이라곤 개나 준 황제의 말투에 나는 찻물을 다시금 뱉을 뻔했다.

디에고는 눈을 질끈 감으며 한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또 시 작이라는 태도였다.

디에고의 표정을 본 황제가 미 친 듯이 웃어 젖혔다.

"아학학! 하학학! 내 그 일로 여

태껏 디에고를 놀려 먹었지! 디에 고가 날 닮아 얼굴 하나는 출중한 데 그 얼굴로 크리시스 공녀한테 차였다고!"

" 네?"

"폐하. 슈슈가 당황하지 않습니 까."

"거 팔불출 공작은 가만히 있어 보게! 내 즐기고 있지 않나! 하여 간 디에고가 공녀한테 차이고는 한동안 냉기를 풀풀......•"

"폐하!"

고장 난 나를 가운데에 앉혀 놓 고 양옆으로 카이사르와 디에고가

황제의 날뛰는 혀를 제지했지만, 황제는 즐거워 미치겠다는 표정으 로 말을 이어갔다.

"사각관계라니! 짜릿하지 않나! 내 옥좌에 앉아 있느라 그걸 멀리 서 구경한 게 한이네. 역시 청춘 은 좋단 말이지. 나 때는......•"

황제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기 가 빨리는 사람이었다.

거의 혼이 나간 채로 찻물을 입 에 머금은 채 멍하니 허공만 바라 보고 있는데, 허공에서 디에고와

눈이 마주쳤다. 크게 흠칫하는 사 이, 강경한 표정을 한 그가 무어 라 입 모양을 만들었다.

'뱉어.'

"크흡! 콜록! 콜록콜록!"

"슈슈!"

말의 진의고 뭐고 생각할 것도 없이 디에고의 주문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찻물을 내 무릎 위로 뱉어 버렸다. 눈이 정면으로 마주 치며 놀랐던 탓도 있었다.

내가 갑작스럽게 찻물을 뱉자 황제가 말을 뚝 그치고 놀란 카이 사르와 아리아가 벌떡 일어났다.

"괜찮아? 뜨겁지 않아?"

"화상은 아닌지 봐라!"

"아, 괜찮, 큽, 괜찮습니다. 식은 찻물이에요. 잠깐 사레가 들려 서......

호들갑을 떠는 카이사르와 아리 아를 저지하며 막힌 목으로 겨우 말을 뱉었다. 내가 숨을 고르는 사이, 맞은편에 앉아 있던 디에고 가 벌떡 일어났다.

"옷이 젖었으니 갈아입어야겠군. 제가 크리시스 공녀를 탈의실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렇게 많이 젓지도 않았는데.

디에고가 뱉으라고 했던 이유는 이곳을 탈출하기 위해서였던 모양 이 다-

카이 사르와 아리아의 날카로운 눈총이, 황제의 재밌다는 눈빛이 디에고에게로 쏟아졌다.

"자식, 개수작이냐?"

"황제 폐하, 제발 체통을......

"알았다, 알았어. 그럼 황태자가 공녀를 안내해 주도록 하게."

황제가 입에 담기엔 지나치게 천박한 단어에 디에고가 미치겠다 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그제야 황제가 얼굴에서 장난기를 지우고 진지하게 명했다. 이제 와서 진지 해져 봐야 여태껏 해 온 게 있어 여전히 장난스러워 보일 뿐이지 만, 어쨌든 황제의 명은 명이었기 에 디에고를 따라 일어났다.

"그럼 공녀는 날 따라오게."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카이사르 와 아리아를 뒤로하고 응접실을 나섰다.

문 밖으로 나와 조금 축축한 바 지를 살짝 털어내는데, 딱, 하고 손가락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따뜻한 바람이 내 몸을 감싸며 젖 었던 옷이 순식간에 말랐다.

"어

"기본적인 마법은 할 줄 알아 서."

이제는 꽤 익숙해진 낮은 목소 리가 내 귀를 간지럽혔다. 흠칫하 다 망설임 끝에 고개를 들어 뜨거 운 시선의 주인공과 마주했다.

기묘한 감정들로 넘실거리는 푸 른 눈동자가 날 맞이했다.

솔라티네 제국의 황태자, 디에고 일리아스 디 헬리오스 솔라티네.

오두막에서 작은 추억을 함께 만들었던 디디.

디에고이자 디디인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감이 잡히지 않았

"......바로 말리실 수 있는데 왜 탈의실에 데려다주겠다고 나오신 겁니까?"

"그 자리에서 탈출하고 싶어서. 그대도 그런 것 같던데, 아닌가?"

역시 자리를 피하려는 속셈이었 나 보다.

솔직히 거기 더 있다간 어색해 서 죽어 버릴 것 같았던 것이 사

실이었기에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 였다. 디에고가 피식 웃었다.

"많이 당황했겠군. 황제 폐하께 서 워낙 사람 당황시키는 걸 좋아 하시는 분이라. 대신 사과하지."

"아, 전 괜찮습니다."

'나보단...... 네 귀가 안 괜찮은 것 같은데.'

분명 얼굴은 완벽한 포커페이스 를 두르고 있지만 디에고의 귀는 타오를 듯 붉었다. 조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가 수치스러워

할 것 같아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

솔직히 황제가 놀린 대상이 나 였다면 그 자리에서 찻잔에 코 박 고 자살할 것 같았으니 그 심정이 야 이해하고도 남았다.

"이왕 나온 김에 나랑 일탈이나 해 보지 않겠나. 바로 옆 응접실 에 잠깐 있다 가는 건 어떤가?"

"전 좋습니다."

잠시 디에고와 단둘이 있는 상 황과 다시 황제와 마주하는 것 중

에 어떤 게 더 곤란한지 고민해 보았다. 다시 황제 앞에서 불편함 을 느끼느니, 차라리 디에고 앞에 서 정체를 들켰을까 불안해하는 게 심리적 소모가 적을 것 같았 다.

"그럼 이리 오게."

빙긋 웃고는 앞장 선 디에고가 조금 전 함께 있었던 응접실 바로 옆문을 열고 성큼성큼 들어갔다.

그를 뒤따라 들어간 방 안은 조 금 전 응접실과 칼라 코드가 조금

다르다는 점을 제외하곤 거의 똑 같은 모양새였다.

오른편 소파에 앉는 디에고를 보고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앉았 다. 디에고가 탁자 위의 마력 종 을 울리자 금방 시종이 들어오더 니 나와 디에고 앞에 다과를 준비 해 주고 사라졌다.

조금은 어색한 침묵 속에 찻잔 을 들었다. 마찬가지로 찻잔을 들 어 한 모금 들이켠 디에고가 느리 게 입을 열었다.

TTTT-

"커흑!"

디에고의 입에서 익숙하다는 듯 튀어나온 내 애칭에 또다시 찻물 을 뱉을 뻔했다. 다행히 이번엔 꿀꺽 삼키고 헛기침을 하는 정도 로 그쳤으나 내 당혹스러움은 그 칠 줄 몰랐다.

'알고, 있는 건가?'

표정 관리도 잊은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 다. 나와 눈을 똑바로 마주한 디

에고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공작과 둘째 공녀가 그대를 슈 슈, 라고 부르던데, 그대 애칭인 가?"

"네, 네? 네, 네. 애, 애칭입니 다."

"그대와 충분히 친해진다면 나 도 그대를 슈슈라고 불러도 될지 묻고 싶었다네."

당황스러움에 눈빛이 흔들릴 게 뻔한 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마주한 디에고가 화사하게 웃으며 물었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

다.

"고맙군. 그대는 우리 단둘이 있 을 땐 언제든지 날 격식 없이 디 디라고 불러도 되네. 내 애칭이거 든."

"......영광입니다. 조금 더 저하 를 알게 되면, 그때 그리 부르겠 습니다."

그의 입에서 디디라는 소리가 나왔을 땐 육성으로 지금 날 놀리 는 거냐는 물음이 나갈 뻔했지만, 이를 악물어 참고 애써 태연하게 넘겼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빠르

게 돌아갔다.

눈앞의 디에고를 뚫어져라 응시 했다. 그는 눈을 휘어 눈웃음을 지을 뿐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 다. 디에고의 태도만 봤을 땐 눈 치챘다고 보는 게 맞았지만, 그렇 다고 확정 짓기엔 실질적인 증거 가 없었다.

'그냥 돌파하자.'

빙빙 돌리는 것도 머리 아프다. 나는 애초에 무언가 숨기는 것에 능하지 못했다. 입에 총구를 넣었

다 뺐다 하는 더러운 기분을 계속 느끼고 있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내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확인사 살을 해 버리는 편이 나았다.

"저하. 요새 편찮으신 곳은 없으 십니까? 예를 들면 복부 같은 곳 이요."

디에고가 습격을 받은 것이 대 외로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내 뜬금없는 물음은 기묘하게 들릴 게 뻔했다. 내 정공법에 잠시 푸 른 눈동자 위로 옅은 파동이 일었 으나, 이내 그 위로 즐거움이 파

도쳤다.

"사실 얼마 전에 복부를 좀 다 쳤지."

"통탄스러운 일이군요. 괜찮으십 니까?"

"그래. 누가 아주 깔끔하게 치료 를 해 줘서."

또다시 흐르는 기묘한 분위기. 디에고와 나는 탐색하듯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새끼 눈치 깠네.'

그리고 나는 확신했다.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눈치 못 챌 수가 없었다. 잠시 예의도 잊 고 얼굴을 살짝 구긴 채 뒷머리를 득득 긁었다.

우선 내가 미르라는 게 밝혀진 다면 내 미래 계획에 지장이 생길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럼 디에고 의 입을 막아야 하는데.

'돈을 먹인다고 입 닫을 위인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내 약점 을 잡고 혼들고 싶은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느긋하게 턱을 괸 채 나를 응시 하고 있는 디에고를 날카롭게 관 찰하다,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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