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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50화 (50/254)

50 화

'기색을 보니까 계속 모르는 척 해 줄 것 같기도 하고. 디에고가 사람 곤란해하는 걸 즐기는 캐릭 터도 아니니까...... 그냥 직접 부 탁하자.'

무식하게 모르쇠하기보단 잘 구 슬려서 입을 닫게 하는 게 상책이 었다.

"저하께선 비밀을 잘 지키시는

편입니까?"

"지키기로 한 건 지키는 편이 지."

디에고는 여전히 의뭉스레 웃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쉬곤 진지하 게 표정을 굳혔다.

"그럼 비밀을 지켜 달라고 부탁 드리면 지켜 주실 겁니까?"

디에고가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나는 조금 해탈한 채로 그를 마주 했다.

'내가 조금만 더 냉정한 사람이 었다면...... 이런 골치 아픈 일을 겪을 필요는 없었을 텐데.'

그때 디에고를 지나쳤다면. 모르 는 척 돌아섰다면.

느리게 숨을 뱉었다.

몸이 편해지는 길이야 쉬웠다. 외면을 택하면 되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나는 늘 마 음이 불편하지 않은 길을 택하겠 지.'

스스로에 대한 한탄을 뱉을지언 정 누군가를 구한 일을 후회하진 않을 것이다. 후폭풍으로 괴로워 할지언정 과거로 돌아간다면 또다 시 이 길을 택할 것이다.

그게 나니刀E

"황태자를 구한 일은 가문 대대 로 영광스러워할 일일세."

"물론 압니다."

"내가 황제 폐하께 살짝 언질만 드려도 커다란 상을 내리며 치하 하시겠지."

"그렇겠죠."

"그대가 원한다면 자세한 사정 은 알리지 않고 그대가 날 구한 사람이라는 사실만 알려 그대를 영웅으로 만들 수도 있네."

"그렇습니까."

디에고도 빙빙 돌리는 걸 그만 둔 건지 단도직입적으로 내게 말 해 왔다. 진지한 그의 말들에 조 금 심심한 동의를 표했다. 턱을 살짝 괸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비밀로 붙이기를 원

하는 거지?"

나는 느리게 눈을 굴렸다. 황태 자를 구했다는 건 확실히 명예와 재물이 함께 따라올 대단한 업적 이었다. 미간을 좁힌 채 내 의중 을 읽으려 하는 그를 바라보다 피 식 웃었다.

"우선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알 려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겠지."

" 안타깝게도요."

디에고가 눈을 가늘게 떴다. 냉

철한 이성과 날카로운 분석, 일렁 이는 감정이 기묘하게 버무려진 푸른 눈동자가 날 응시한다.

원작의 디에고는 천성이 다정한 이였으나, 어려서부터 목숨의 위 협과 중상모략에서 살아남아야 했 기에 지독한 이성 또한 함께 탑재 한 이였다.

'나는, 분명 그대를 사랑하는 데...... 내 이성은 그대를 그저 좋 은 신붓감으로만 보고 있는 것 같 아. 그래서 내가 정말 진심으로 그대를 사랑하는 건지 잘 모르겠

네.'

언젠가 원작의 디에고는 아리아 에게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었 다. 솟구치는 감정과 지독한 이성 사이에 괴로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조금 혼란스러워 보이는 디에고 를 빤히 바라보다, 충동적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대가 없이 돕겠다고 하 지 않았습니까. 그런 식으로 보상 을 받으면 대가가 없는 게 아니

죠."

나긋하게 덧붙이니 디에고의 눈 이 커졌다.

그때 나는 호의에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는 디에고를 보며 대 가 없이 돕겠다고 했다. 그 말은 아직까지 정정할 생각이 없었다.

"사람이 사람을 돕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개의치 마시죠."

태연하게 차를 들이켰다. 피부 위로 쏟아지는 뜨거운 시선은 추

운 겨울날 나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려는 디에고의 배려라고 생각하 기로 했다.

하, 하고 작게 숨을 뱉은 디에고 가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아주 출구를 봉쇄해 버리는군 그래."

" 네?"

"아무것도 아닐세."

살짝 달아오른 그의 귓가를 보 다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디에고가 옅게 숨을 뱉

었다.

"......비밀은 지켜 주겠네. 원한 다면 태양의 맹세도 해줄 테니 걱 정 붙들어 매게."

" 믿겠습니다."

디에고는 침묵할지언정 빈말을 할 인물은 아니다. 별 어려움 없 이 믿겠다고 선언했다. 금방 평소 의 페이스로 돌아와 싱긋 웃은 디 에고가 느리게 고개를 기울였다. 기우는 각도를 따라 황금빛 머리 칼이 사르르 흘러내렸다.

"우린 이제 서로에게 디디와 슈 슈가 아니라 황태자와 공녀가 된 건가."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가 황태자임을 알게 된 이상 그 오두막에서처럼 시건방지게 굴 수 없었다. 설마 그때 일로 경을 치려는 건가 싶어 살짝 긴장하고 있으려니, 눈을 곱게 휜 디에고가 상체를 숙여 내게로 얼굴을 가까 이 했다. 가까이 다가온 얼굴에 움찔할 때였다.

"그래도 우리 단둘이 있을 땐

조금의 일탈 정도는 괜찮지 않 아?"

"어......

바뀐 말투에 눈을 느리게 깜빡 였다. 코앞에서 눈동자가 맞부딪 친다. 기묘하게 일렁이는 눈을 축 늘어뜨린 디에고가 유려하게 입꼬 리를 올렸다. 분명 천사를 닮은 외모였으나, 미소는 사람을 꾀어 내는 악마를 닮아 있었다.

"단둘이 있을 땐 디디라고 불러 줘. 우리가 함께 보냈던 그날 밤 처럼."

'미친, 돌았나......

누가 듣고 오해할까 무서운 기 묘한 말을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 는 디에고를 보며 환장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 만, 저 목소리로 저렇게 말하니 그냥 잠만 잤던 밤을 말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이 인간, 지금 즐기네.'

무척 즐거워 보이는 디에고를 떨떠름한 눈으로 바라봤다. 황태

자의 애칭을 부르는 건 거의 형제 수준의 친한 이가 아니면 불가능 했다.

"하지만 제가 어찌 황태자 저하 를 "

"안 불러 줄 건가?"

고양이처럼 새초롬한 눈매가 안 쓰러울 만큼 축 처진다. 그가 저 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조국을 내 다 판 매국노가 된 기분이었다. 디에고에게 말려드는 것 같은 기 분을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디디. 다른 사람들 앞에선 그렇게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게 각색하여 말하지 말아 주시길 바 랍니다."

"물론 그대가 원한다면, 슈슈."

디에고가 방긋방긋 웃었다. 웃는 그의 주위로 햇살 가루가 막 떨어 지는 느낌이었다. 저렇게 웃음이 헤퍼서야 주위 사람들 시신경에 대한 배려는 하나도 없는 것 아닌 가. 난 속으로 혀를 찼다.

"그날 내게 치료받았던 팔은 괜 찮나."

"소드 마스터의 회복력을 아시 잖습니까. 깨끗하게 회복됐습니 다• 디디 상처는요."

"나 또한 치료해 줬던 이의 실 력이 좋아 말끔하게 회복됐네."

디에고의 너스레에 살짝 웃음 지었다. 이 상황이 어이없기도 했 고, 꽤 재밌기도 했다. 그런 날 보던 디에고의 동공이 살짝 혼들 렸다.

" 디디."

"어, 어?"

어울리지 않게 멍한 표정으로 내 눈과 코 사이 어딘가를 보고 있던 디에고가 한 박자 늦게 대답 했다. 냉철과 다정 중간에 맞춰진 완벽한 로봇 같던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엿보았다는 생각에 키득 웃었다.

'어려서부터 친구를 가지고 싶었 지.'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전에 하나가 있긴 했었으나, 지금 은 절연했다. 엘도 내 친구라고 하긴 했지만 그는 어쩐지 애매했

다. 조금 설레는 웃음을 지은 채 입을 열었다.

"단둘이 있을 때 한정이긴 하지 만 우리 서로의 애칭을 부르는 사 이 아닙니까."

"그......렇지."

"게다가 함께 밤도 보냈고요."

"아니...... 그렇기도 하지."

어쩐지 디에고의 얼굴이 확 붉 어졌다. 그런 그를 향해 활짝 읏 었다.

"그럼 우리 이제 친구인 거죠?"

조금 설레 보이던 디에고의 표 정이 확 식었다. 거의 봄에서 겨 울로 옮겨 간 수준의 온도 차이였 다.

'......원래 이 정도면 친구 아닌 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대로 된 친 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으니 친구 의 기준이 뭔지 알 노릇이 없었 다. 같이 대중목욕탕에 가 온탕에 서 어깨동무하고 노래 정도는 불 러 줘야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건가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디에 고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친구일세."

세상에게 버림받아 친구도 얼마 없이 산 지 18년째. 내 제대로 된 첫 친구는 그 이름도 대단한 황태 자 디에고 솔라티네였다. 살짝 들 떠 눈을 휘며 웃음 지었다.

"영광입니다. 무척 기뻐요."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디에고 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계속 한

숨만 쉬는 걸 보아 황궁 땅을 다 꺼뜨려 버릴 원대한 계획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제 이마를 짚은 그가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나도...... 기쁘네."

어딘지 해탈한 표정이었다.

"우리 이제 친구니 친구의 비밀 은 무덤까지 가져가셔야 합니다."

"내 비밀은 지키겠다니까. 황태 자의 직인이라도 찍어 줘야겠나?"

" 아뇨."

느리게 눈꼬리를 휘었다.

"친구는 서로의 신뢰를 기반으 로 형성되는 관계 아닙니까. 믿겠 다니까요."

엘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기묘한 표정을 지은 채 허탈하게 날 응시하던 디에고가 중얼거렸다.

"이게 성공한 건지 아닌 건 지......

한참 신세 한탄에 가까운 무언

가를 중얼거리던 디에고가 방에 위치한 괘종시계를 보더니 자리에 서 일어났다.

"슬슬 일어나지. 더 있다간 황제 폐하께서 우리에 대한 대하소설을 적어 내리실 게 뻔하니까."

황제를 언급하는 디에고의 얼굴 에 지긋지긋함이 감돌았다. 황제 를 또 마주할 생각에 구겨지려는 얼굴을 애써 펴고 나도 일어났다.

"오, 공녀 옷이 그대로네?"

황제와 내 가족이 위치한 응접 실로 들어가자 여전히 시끄럽게 떠들던 황제의 시선이 번뜩이며 내게로 향한다. 나와 디에고를 번 갈아본 그가 음흉하게 웃었다. 아 주 불경하지만 솔직히 황제는 미 친놈 같았다.

"뭐야, 뭐야! 탈의실 데려다준다 더니 데이트하고 왔나 봐?"

"폐하...... 제발...... 체통을 지 키십시오."

황제의 은근한 물음에 디에고가 제 이마를 짚었다. 그의 양 귀가

금방 달아올랐다. 데이트라는 단 어에 어쩐지 초췌해 보이던 아리 아와 카이사르의 눈이 살기로 번 뜩였다.

"폐하. 시간이 늦은 만큼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오, 저녁은 먹고 가지 그러나. 내 카슈미르 공녀와도 긴히 할 말 이......

"안녕히 계십시오."

굳은 표정을 한 카이사르는 황 제의 말도 뚝 끊고 벌떡 일어났 다. 다른 귀족이 했다면 필시 경

을 칠 행동이었으나, 크리시스가 했다는 것만으로 면죄부가 되었 다. 황제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찼 다.

"하여간 까칠하긴. 거 카슈미르 공녀! 공녀는 내가 다음에 한 번......!"

"가자, 슈슈."

황제를 개무시한 카이사르가 내 몸을 휙 돌려 문 쪽으로 이끌었 다. 아리아는 날 마크하듯 내 뒤 를 지키고 섰다. 난 황제와 디에 고에게 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카

이사르와 아리아에게 끌려 나갔

"그래."

응접실을 나온 카이사르가 우뚝 멈춰서 나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불길함을 느낄 때쯤.

"그래서 누구누구랑 사각관계라 고?"

내 데뷔탕트 일화를 황제가 다 떠벌린 모양이었다. 사람 열댓 명 쯤은 가볍게 찢어 죽일 듯 서늘한

눈빛을 한 카이사르가 내게 물어 왔다.

나는 가는 내내 남자는 장난감 으로만 가지고 놀고 마음은 주지 말라는 카이사르의 기이한 강론을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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