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화
멈춰 선 마차에서 가볍게 뛰어 내렸다. 시녀도, 호위도 없이 혼 자 도착했기에 마차 아래서 잡아 줄 사람은 없었다. 눈앞에 웅장한 건물을 마주하고 잠시 할 말을 잃 었다. 하얗게 빛나는 신전은 사람 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헬레네랑도 분위기가 비슷
하네.'
오랫동안 발걸음을 멈춘 레스토 랑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곳 에서 만나 오던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늘은 율리안과의 약속을 지키 러 방문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확인할 게 있었다.
'추측에 확신을 얻어야지.'
혼자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건 딱 질색이다.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오늘 결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크, 크리시스 공녀님?"
신전의 문 앞으로 성큼 걸어가 니 날 발견한 성기사 하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보통 귀족들은 며 칠 전 예약을 하고 방문하는데 나 는 일언반구도 없이 등장해서 그 럴 터였다. 거물의 등장에 어찌할 줄 모르고 방황하는 성기사를 향 해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신관님께 기도를 받고 싶어 조
용히 방문한 겁니다. 소란은 없었 으면 합니다."
마지막 말을 강조해서 또박또박 말하니 제 상관을 부르려는 듯싶 던 성기사가 빠르게 차렷했다.
"신전은 모두에게 언제나 열려 있지 않습니까?"
"무, 물론입니다!"
조용히 기도하러 왔다는데 열어 주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잠 시 내 눈치를 본 성기사가 내 허 리춤에 있는 검을 가리켰다.
"저...... 다만 무기는 반입 금지 입니다. 이리 주시면 잘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아, 물론입니다. 아끼는 검이니 잘 맡아 주시면 감사하겠군요."
검을 몸에서 떼는 것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애써 웃으 며 검집을 성기사에게 건넸다. 귀 족 영애가 검을 차고 다닌다는 사 실이 의외인지 미묘한 표정을 짓 던 성기사는 금방 표정을 정리하 고 문을 열어 주었다.
끼익.
거대한 문이 열렸다. 먼지 한 점 없는 대리석 바닥 위를 걸어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스테인드글라스 를 통해 들어온 형형색색의 빛들 로 빛나는 신전은 웅장함과 엄숙 함이 가득했다.
복도를 지키고 있던 신관이 날 발견하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 지만, 이내 재빠르게 표정을 관리 하고 성스럽게 웃엇다.
"신전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
니다, 자매님. 자매님께 태양의 가호가 함께하길."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 관님도 늘 빛이 머무는 곳에 거주 하시길."
"특별히 찾아오신 이유가 있으 십니까?"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개인적으로 율리안 대신관님을 만나 뵙고 싶은데요. '엘'에 대해 서 물어볼 게 있다고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원래 대신관과는 미리 언질도 없이 개인적인 만남을 가질 수 없 지만, 나는 크리시스였다. 조금 난감하단 표정으로 고민하던 신관 이 말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 습니까? 우선 대신관님께 여쭤 보고 오겠습니다."
신관이 안내해 준 의자에 앉아 5분쯤 기다렸을까, 신관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대신관님께서 지금 바로 만나
뵈어도 괜찮다고 하십니다. 응접 실로 안내해 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빙긋 웃으며 그를 따라 복도를 가로질렀다. 어느 방으로 날 인도 한 신관이 고개를 숙였다.
"대신관님께선 금방 도착하실 겁니다."
조용히 나가는 신관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다 마련된 소파에 털썩 앉았다. 굳은 결심이 들어찬 눈으로 율리안이 들어올 문을 노
려보았다.
'직접적으로 물어볼 거야.'
사실 엘을 직접 찾아가서 물어 볼까 했지만, 여태껏 대신관이라 고 불러도 정정을 안 해 주던 인 간이라 발뺌을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율리안은 솔직히 대답해 줄 것 같거든.'
내 앞에서 보이던 태도를 생각 하면 알아채 주기를 바랐던 것 같 기도 하고.
탁자 앞에 세팅된 다과 세트로 직접 차를 우려 마시며 10분쯤을 기다렸을까.
"지랄도 가지각색이군. 내가 너 처럼 한가한 줄 아나?"
"아, 진짜 좋아서 자빠질 거라니 까? 우선 와 봐! 절대 후회 안 한 다고!"
문 밖에서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둘 다 익숙한 목소리였 다.
4내가 왜 찾아왔는지 눈치쟀구 나.'
역시 율리안은 눈치가 빨랐다. 그냥 물어볼 생각이었건만, 직접 장본인까지 데려와 확인을 시켜 주려는 것이 상당히 짓궂었다.
"널 개인적으로 만나겠다고 한 귀족과 내가 왜 만나냔 말이다."
"거 참, 우선 와 보라니까. 똑 똑!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오십시오."
여전히 실랑이를 하며 입으로
똑똑 소리를 내는 율리안의 목소 리를 듣고 가볍게 허락했다.
멈칫.
밖에서 느껴지던 기척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어느 순간 발버 둥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놔! 놓으라고! 이 빌어먹을 새 끼가 진짜......!
"악! 내 발 밟지 마! 미친, 머리 잡아당기지 마! 도망가지 말라 고!"
"옷만, 옷만 갈아입고, 아니, 모
자, 모자도......
"대체 언제까지 숨길 건데 멍청 아! 커헉, 아니 좀만......!"
벌컥.
열리길 기다리다간 날밤을 샐 것 같아 내가 먼저 열었다. 내게 들리지 않게 하려는 듯 속닥거리 면서도 싸우는 소리는 아주 요란 해 못 들은 척해 줄 수가 없었다.
내가 문을 열자 뭍에 나온 물고 기들처럼 퍼덕거리던 두 인영이 우뚝 멈췄다. 머리가 산발이 된
율리안이 나와 눈이 마주치고 딸 꾹질을 했다. 팔짱을 낀 채 식은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누군가를 도망치지 못하게 꼭 안고 있는 율리안. 그의 새하얀 신관복 여러 곳엔 걷어차인 발자 국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눈을 휘둥그레하게 뜬 엘
늘 모자 아래 숨겨져 있었기에 처음 보는 그의 머리칼은 물결처 럼 일렁이는 신비한 연하늘색을
품고 있었다.
그가 입은 옷은 다름 아닌 태양 신전의 주인에게만 허락되는 태양 이 새겨진 흰색 정복이었다.
'이건 앞구르기하면서 봐도 교황 이네.'
지긋한 눈으로 엘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주친 눈을 피하지도 못한 채 애처롭게 동공을 흔들고 있었 다.
'후......'
속으로 분노 어린 숨을 쉬었다. 이미 95% 정도 확신하고 있었지 만 확인 사살을 당하는 건 또 다 른 기분이었다.
분명 속인 사람은 없지만 된통 속은 기분. 잔뜩 약이 오른 채로 이를 악물며 미소 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교황 성하. 카슈미르 크리시스 공녀입니다."
엘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아학! 하하학! 정의의 철퇴 맛 이 어떠냐, 요놈!"
"그러게 아랫사람을 괴롭히니까 벌을 받는 거예요!"
응접실 안. 나를 마주하고 앉은 율리안과 엘의 표정은 딱 정반대 로 나눈 것처럼 상반되었다.
다리를 덜덜 떨며 어쩔 줄 모르 고 내 시선을 피하는 엘. 친구의
고통은 내 행복이라는 듯 엘을 보 며 즐거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율 리안.
그런 둘을 지그시 바라보는 내 표정은 서늘했다.
"율리안."
"꺄하학! 네?"
" 나가요."
"넵!"
내 단호한 목소리에 율리안이 전광석화처럼 뛰쳐나갔다.
열렸다 닫히는 문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엘만 지그시 응시하고 있으니, 그의 하늘빛 머리칼을 타 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꼰 다리 를 까닥거리며 턱을 쓸었다.
"성하."
"••••••네?"
"왜 이리 긴장을 하셨습니까. 전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큰 몸 으로 움츠러든 모습은 그에게 어 울리지 않았다.
"......화나셨어요?"
"아뇨."
한참 후에 돌아온 엘의 조심스 러운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성하의 얼굴을 본 직후엔 좀 많이 약 올랐지만 지금은 괜찮습 니다."
움찔.
무릎 위로 다소곳이 모은 엘의 예쁜 손이 떨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엘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내 짙은 한숨에 고개를 숙이고 있 던 그가 휙 고개를 들었다. 엘의 은빛 눈동자가 물기로 반짝였다.
"이제•• ... 제가 싫나요?"
물어 오는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다. 그의 눈동자에 물기가 크 게 넘실거렸다. 그렇다고 하면 당 장이라도 지옥에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처절한 눈빛이었다.
'......왜 이렇게 닮았는지.'
떠오르는 기억의 잔재에 관자놀
이를 꾹 눌렀다. 엘이 이곳에 들 어선 순간부터 풍기기 시작한 진 득한 백합 향이 머릿속을 어지럽 혔다. 다시금 한숨을 쉬며 한탄처 럼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엘을 싫어하겠습 니까."
엘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인간의 호의 는 늘 내게 어려웠고, 그는 늘 의 뭉스러웠으니.
다만 확실한 건, 나는 엘을 꽤
소중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는 거.
비록 살아온 삶에 의해 그의 호 의를 의심하고 그의 말을 믿지 못 해도, 힘들었던 시기에 날 도와주 었던 그를 미워할 수 있을 리 없 었다.
나는 정에 약했다. 멍청하게도.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날 바라 보는 엘을 보며 손가락으로 툭툭 소파의 팔걸이를 건드리다 느리게 입을 열었다.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 대답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원한다면 기꺼이."
그가 한숨처럼 대답했다. 잠시 말을 골랐다.
"제게 교황이라는 사실을 알리 지 않으신 이유는 뭡니까. 제가 헛다리 짚는 게 재밌으셨나요?"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분위기를 풀어 보려 농담처럼 너스레를 던졌는데 엘이 격하게
부정했다. 엘의 격한 반응에 눈을 깜빡이는데, 그가 가라앉은 표정 으로 입을 열었다.
"말하고 싶었어요. 말하고 싶었 는데......
" 싶었는데?"
"제가 교황이라는 걸 알았으면 저와 거래를 했을 건가요?"
이건 생각지 못한 발상이었다. 엘이 교황인 걸 알았다면 그와 거 래를 이어갔을까 생각해봤다.
'솔직히 아니지.
부담스러워서 못 했을 거다. 입 을 턱 닫으니 엘이 그럴 줄 알았 다는 표정을 지었다.
"......좋습니다. 그럼 질문이 이 어지겠네요. 왜 여태껏 저랑 거래 를 했던 겁니까?"
• •••••
"교황이 마수 부산품을 필요로 해서 굳이 용병과 직접 거래를 했 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거 아시 죠. 말 한마디만 해도 당장 달려 가서 구해 올 사람들이 한둘이 아 닐 텐데."
무어라 대답하려는 듯 입술을 열었다가 닫는 엘은 한참 동안 대 답을 하지 못했다. 가라앉는 눈 빛. 차갑게 식는 표정. 내겐 보여 주지 않던 모습이었다. 무언가 어 두운 것을 떠올리듯 깊어지는 은 빛 눈동자를 지그시 응시하며 대 답을 기다렸다.
"나는...... 당신을 돕고 싶었어 요."
"그건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 도 움들에 무척 감사드리기도 합니 다. 다만 제가 묻고 싶은 건 왜
절 돕고 싶었냐는 겁니다."
늘 짐작하던 것을 오늘 확실히 확인할 작정이었다. 힘겹게 열렸 던 엘의 입술이 다시금 닫혔다. 그가 내 시선을 피했다. 엘이 대 답하기 싫어한다는 걸 쉬이 알 수 있었다. 망설이는 그를 보다 옅게 숨을 뱉었다.
"곤란하시다면 대답하지 않으셔 도 괜찮습니다. 그럼 다른 방향으 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데뷔탕트에서 물어보려고 했으
나 시간에 몰려 하지 못했던 질 문. 흔들리는 눈을 한 엘과 마주 한 채 느리게 입을 열었다.
"엘. 여동생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