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화
엘은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굳은 그의 표정은 읽을 수 없을 만큼 뻣뻣했다. 허나 나는 그 침 묵 속에 망설임을 읽었기에, 다만 그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네."
차가 다 식을 때쯤 되었을까 엘 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짙은 고
독과 슬픔, 후회 같은 것들이 굳 고 또 굳어 노폐물처럼 돼 버린 무언가가 그의 달빛 눈동자 위를 달의 구멍처럼 장식했다.
"있었어요, 여동생이."
"지금은 죽었지만요."
그 한마디는 지나치게 무거워 보였다. 그가 감당할 수 없을 정 도로.
'......결국 죽었구나.'
텅 빈 공간에서 돌아섰을 때부 터 그 아이의 임종은 지킬 수 없 을 거라 예상했지만, 그럼에도 가 슴이 아팠다.
그렇게 죽어선 안 되는 아이였 는데.
아리아를 연상시키던 동그란 두 눈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죄송합니다."
"미르가 미안할 게 뭐 있나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걸요."
엘과 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언니, 고마워요! 덕분에 우리 오빠가 많이 밝아진 것 같아요! 언니랑 평생 같이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잠시 눈을 감고 과거 어느 날을 회상하다 느리게 눈을 떴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상처투성이라 얼굴을 알아보 기조차 힘들었던 그 아이. 지독한
가난의 향기를 풍기면서도 한편엔 성스러운 백합 향을 흘리던 아이. 독기와 세상을 향한 증오로만 가 득 차 있던 검은 눈동자와 짧고 투박한 진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아0].
그리고 눈앞의 인물을 바라본다. 수많은 것들이 뒤섞여 무어라 정 의할 수 없는 감정을 담은 눈으로 날 바라보는 남자를.
백옥같이 새하얗고 뽀얀 얼굴. 천사같이 선한 인상. 가난의 흔적 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진득한
백합 향. 고귀하게 반짝이는 은빛 눈동자와 곱게 정돈된 하늘색 머 리칼.
'이름이 없던 아이와 교황 엘리 오르 라.'
공통점이라곤 내 코를 간지럽히 는 그리운 향기밖에 없다. 허나 그럼에도 내 마음은 엘이 그때 그 아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여 쭙겠습니다."
소파에 살짝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던 엘이 기다란 속눈썹을 든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은빛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황 하던 눈동자가 내게로 초점을 잡 았다. 그의 눈꼬리가 아프게 처졌 다.
"무엇이든 물어봐요."
대답하기 싫어 보였다. 그게 확 연히 보임에도, 엘은 허락했다. 마치 나라면 뭐든 허락된다는 듯. 그 모습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내가 뭐라고.'
과거의 그 아이는 내게 어린 날 의 추억과 아픔으로 남아 있었다. 허나 과거 그 아이에게 나는 어떻 게 남아 있을까. 감히 예상하기 어려웠기에.
'왜 그때 오지 않았어?'
정말, 정말 묻고 싶었던 질문은 마음 너머로 묻고, 다만 어렸던 그때와 같은 질문을 내놓았다.
"내가 모르는 척해 줬으면 좋겠 어?"
'검정아. 내가 모르는 척했으면 좋겠어?'
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지 않냐는 눈빛에 그저 웃어 보였다.
나는 그가 싫어하는 걸 강제하 고 싶지 않았다.
"......모르는 척해 줬으면 좋겠 어요. 내가 직접 말할 용기가 생
길 때까지."
'•• ...모르는 척해 주셨으면 좋겠 어요. 당신한테 약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요.'
어린 날의 아픈 추억이 떠올랐 다.
당신에겐 최악의 시절이었을 텐 데 아직도 기억하고 있구나.
곤죽이 되어 날 꼭 끌어안던 그 때 그 소년.
"......그래. 그럼 되었습니다."
부드럽게 웃었다. 이걸로 충분히 대답이 되었다.
사실 이곳에 올 때만 해도 생각 이 아주 많았다. 엘이 정말 교황 이라면, 엘이, 그때 그 아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허나 직접 당면해 진실을 알게 된 지금은 별 생각이 들지 않았 다. 그가 교황이었든, 그 아이였 든, 여태껏 날 도와주었던 일들은 변하지 않는다.
어렸을 적 친구이자, 날 도와주 었던 조력자. 어느새 내게 소중해 져버린 사람.
그는 내게 그냥 엘이었다.
"저는 이만 가 봐야겠군요. 푹 쉬시기 바랍니다, 성하."
생각이 많아 보이는 엘을 배려 해 먼저 몸을 일으키는데, 그가 황급히, 하지만 조심스레 내 와이 셔츠 끝자락을 잡고 살짝 잡아끌 었다.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
니, 엘이 슬픈 듯 미간을 좁혔다.
"교황인 나는 당신에게 엘이 될 수 없나요? 말했잖아요. 다른 모 습이더라도 당신을 향한 건 늘 그 대로라고."
엘의 눈매가 축 늘어졌다. 애처 롭게 팔랑이는 속눈썹이 날 유혹 하는 것만 같았다.
"엘이라고 불러요, 슈슈. 그래주 기로 했잖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고막을
울린다. 애처롭고 가녀리게 포장 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눈동자에 도사리는 것은 광기가 뒤엉킨 집 착에 가까웠다.
'......날 두고 가지 마요.'
그 모습에서 조금 이질감을 느 꼈으나, 내 옷을 살짝 잡아끄는 손길에 어린 시절 그 아이가 연상 되어 그만 마음을 풀고 말았다.
'아직 앤가.'
나를 붙잡은 엘을 빤히 내려다
본다. 어려서 약하던 엘을 봐서 그럴까', 엘은 실제 나보다 2살이 많은 연상이었음에도 내 눈엔 어 리고 여리게만 보였다.
나는 늘 어리고 여린 것에 약했 다.
"......대외적으론 교황 성하라고 불러야겠지만 둘이 있을 땐 엘이 라고 부르겠습니다."
내 옷을 붙잡은 손을 천천히 잡 아떼었다. 내 손보다 훨씬 큰 손 이 살짝 튀었다. 익숙한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그러니 그런 표정 짓지 말아 요."
절망에 잠식되어 허우적거리는 은빛 눈동자. 내 거절을 예감했다 는 듯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나는 엘의 손을 꽉 한 번 잡았 다 놓아주었다. 거절하기엔 너무 도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 엘이 눈 을 싱긋 휘었다. 역시 밝은 모습 이 보기 좋았다.
"그럼 전 정말 가 보겠습니다."
엘의 안색도 그다지 좋지 않아 빨리 돌아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았 다.
조금 침울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엘을 빤히 바라보다 신 분 차이는 잠시 잊고 그의 보드라 운 하늘빛 머리 위에 손을 올렸 다. 느리게 쓸어내리니 털실 같은
얇은 머리카락들이 손가락에 엉겼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놀란 표정의 엘을 내려다보며 작게 속삭였다. 은빛 눈동자가 수 많은 감정들에 얽혀 수몰했다.
신전의 외톨이이던 아이가 역대 최고의 교황이라 칭송받기까지의 길은 절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의 과거를 모르는 척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꼭 말해 주고 싶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노라고. 네가 걸어온 모든 길을 알지 못하 지만, 네 시작점이 어디였는지는 기억하기에 네 수고를 어렴풋이나 마 이해한다고. 내 어린 날의 친 구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럼 부디 다시 만날 날까지 평안하시길."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나왔다. 엘 에 대한 모든 의문을 풀어 속이 시원했다.
이제 엘과는 진정으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 하......
딱딱하게 굳은 채 한참 허공을 바라보던 엘리오르가 허탈하게 웃 었다. 그가 자신의 팔로 눈가를 덮었다.
'당신은, 그때 당신의 도움을 받 기만 해야 했던 멍청하고 무력한 소년을 아직도 기억하는구나.'
절망적이고, 참혹했다. 들키고 싶지 않았었다. 이제야 겨우 당신 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리까지 기어올라 왔는데, 또 도움만 받아 야 하는 아이로 보이고 싶지 않았 다.
'모르길 바랐는데, 분명, 그랬는 데......
얼굴을 찌푸린 엘리오르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애처로 움과 다정함은 바닷물이 밀려 나 가듯 사라지고, 하얀 얼굴 위에
남은 것은 집착과 광기, 절망과 기이한 기쁨 등이 뒤섞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감정이었다.
'당신이 날 기억했다는 게 왜 이 리 기쁠까.'
절망스러운 동시에 기쁘다. 모순 적인 두 감정이 한 번에 몰아쳤 다. 달에 치여 미쳐 버린 것 같은 기분. 하기야, 카슈미르를 만나게 된 이후로 늘 미쳐 있었으니 놀라 울 것도 없었다.
'당신은 날 파괴하고 재창조하
지.'
그 눈짓 한 번에 산산이 무너지 고, 그 손길 한 번에 구원을 받는 다. 휘둘리는 게 싫어 벗어나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굳은살이 박인 작고 투박한 그 손에 온 생이 휘둘려도 기쁠 만큼 사랑하고 있었다.
" 카슈미르......
짓씹듯 음절을 내뱉는다. 이 이 름 하나가 딱 제 생의 무게만큼
무거워 견디기가 버거웠다.
"어떻게 하면...... 당신의 마음 한 조각 얻을 수 있을까."
갈라진 목소리가 처절했다.
짝사랑이라는 것이 애초에 보답 받지 못하는 것임을 앎에도, 그 시선 한 줌, 손길 한 번 더 받고 싶어 매달리게 된다. 사랑이 안 된다면 우정이라도, 우정도 안 된 다면 동정이라도 좋으니 그 일부 를 받고 싶었다.
무소불위의 신전 권력을 손에 쥔 교황 엘리오르 라는 사랑 앞에 서 완벽한 약자였다.
"야, 잘 만났냐?"
노크조차 없이 벌컥 열린 문 너 머로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원수 의 얼굴이 보였다. 눈을 감은 엘 리오르는 아무 말 없이 신성력에 살기를 넣어 율리안을 덮쳤다.
"흑, 컥! 이, 괴팍한 놈......!"
신전의 무해한 이미지를 위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사실 막대한 신성력은 공격을 위해 사 용할 수 있었다. 잘만 하면 오러 수준의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카슈미르가 볼 때마다 눈을 빛 내던 아름다운 은빛 신성력으로 율리안의 목을 조른 엘리오르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요즘 카슈미르와 친하게 지내 더군."
"커흑......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난 엘리오
르가 끙끙거리는 율리안 앞에 섰 다. 엘리오르의 가늘고 예쁜 손가 락이 율리안의 목덜미를 잡아챘 다.
"네가 여태껏 해 온 게 있기에 네 시건방진 언행들을 두고 봐 주 고 있지만...... 알다시피 난 사랑 과 우정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네 사지를 찢어 카슈미르에게 보 내 줄 거라서."
"미친, 놈......
완연한 광인의 얼굴을 한 채 화 사하게 웃는 엘리오르와 정면으로
마주한 율리안의 얼굴이 질린다는 기색으로 물들었다. 목이 졸려 허 공에 떠오른 채 컥컥거리는 율리 안을 손짓 한 번으로 내려 준 엘 리오르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꼬리 치지 마, 개자식아. 목뼈 를 두 동강 내 버리기 전에."
율리안이 정말 너무 억울해서 죽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엘 리오르에게 율리안의 표정은 안중 에도 없었다. 다시 털썩 소파 위 로 내려앉은 그가 두 손으로 얼굴 을 감쌌다.
"하, 보고 싶어......
괴로운 얼굴을 한 엘리오르가 중얼거렸다.
그는 참으로, 지랄 맞은 첫사랑 을 나고 있었다.
수많은 사건들로 가득하던 겨울 이 지나고 어느새 봄이 왔다. 공 작 저에서 맞는 봄은 무척 기묘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내 방 창가에 앉아 꽃이 피기 시작한 정원을 지긋이 바라 보았다.
'봄은 늘 내게 휴식의 계절이었 는데.'
겨울이 되면 활개를 치던 마수 들은 날씨가 따뜻해지면 활동이 잦아들었기에, 내게 봄은 바빴던 겨울을 마무리하고 한숨을 돌리는 시기였다.
내겐 악몽의 계절인 겨울의 종
지부를 찍어 주는 고마운 계절이 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