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53화 (53/254)

53 화

'다만 이번 봄은...... 아주

겠지.'

입술을 굳게 닫았다.

나는 이번 겨울 내내 검의

를 높이는 데 전념한 탓에

근육통을 앓고 있는 어깨를

툭툭 쳐 주었다.

바쁘

경지

만성

괜히

카슈미르 크리시스로서 맞는 첫

봄은 험난한 계획들이 줄지어 있

북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내 사랑하는 것들을 지킬 수 있기를.'

씁쓸하게 웃고는 창가에서 일어 나 방을 나섰다. 또다시 검을 수 련하러 갈 생각이었다.

나는 화창한 봄에 겨울을 준비 하고 있었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해 야 하는 법이었으니.

"르웰린 데카르도 영애가 나랑 아리아를 티파티에 초대했다고?"

"네. 여기 초대장이에요."

햇볕이 좋아 아리아와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지던 어느 날, 마리아 가 나와 아리아에게 초대장을 건 넸다.

'아리아야 사교계에서 열심히 활

동 중이니 르웰린과 자주 부딪쳤 다고 하지만...... 나는 데뷔탕트 이후에 검술에만 집념하느라 사교 활동을 거의 안 했는데. 왜 나한 테도 보낸 거지?'

현재 사교의 정점에 서 있는 아 리아에게 초대장을 보낸 건 이해 할 수 있었다. 허나 현재 사방에 서 오는 모든 초대장을 거절하고 있는 내게까지 초대장을 보낸 건 의외였다.

금빛 장미가 정밀하게 음각된 편지봉투를 이리저리 돌려 보다

준비된 편지 칼로 편지를 열어 보 았다.

내부엔 평범한 초대장이 위치해 있었다.

"하! 데카르도 영애가 나랑 언니 한테 동시에 초대장을 보냈다고? 속이 너무 훤히 보여서 웃길 지경 이네!"

초대장을 아니꼽게 바라본 아리 아가 헛웃음을 쳤다. 아리아가 저 정도로 말하다니, 무슨 영문인지 어리둥절했다.

"왜? 문제 있어?"

"그 인간이 내게 초대장을 보낼 리가 없어. 언니라면 철천지원수 한테 한가하게 차나 마시자고 초 대장을 보내겠어? 결투장을 보냈 으면 보냈지!"

아.

작게 탄식을 뱉었다. 르웰린과 아리아의 사이가 안 좋다는 것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현재 르웰린과 아리아는 사교계

의 황제를 두고 다투는 숙명의 라 이벌. 원작처럼 아리아가 일방적 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면 내 가 끼어들어 중재했겠지만, 둘 다 서로를 물어뜯으며 선의의 경쟁 비스무리한 것을 하고 있기에 우 선 내버려 두고 있는 참이었다.

'......그렇게 싫나?'

르웰린이 보낸 초대장을 한 무 더기의 파리 변사체 보듯 노려보 는 아리아를 보며 떨떠름한 표정 을 지었다.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얼마나 사이가 좋지 않 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르웰린 그 인간, 분명 언니한테 초대장을 보내고 싶은 거야. 그런 데 구실이 없으니까 나를 초대하 는 게 목적인 척 우리 둘 다한테 초대장을 보낸 거라고! 언니가 목 적인 게 분명해!"

"••••••뭐?"

야차 같은 표정을 한 아리아가 빽 소리를 질렀다. 나는 눈을 끔 뻑이다 미간을 지었다.

"......데카르도 영애가 나를 왜? 그건 너무 과대해석 아닐까?"

"잘 봐! 티파티 날이 언제인지! 하네스랑 바디체인 수출을 위한 사업 설명회 날짜잖아!"

초대장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티 파티는 오늘로부터 사흘 뒤. 아리 아가 아타라 왕국의 상인들과 만 남을 갖기로 한 날이었다. 중요한 만남이었기에 절대 뺄 수 없었다.

'르웰린이 그걸 모를 리 없는데 도 굳이 가지 못할 아리아에게 초

대장을 보냈다는 건...... 좀 이상 하긴 하네.'

데카르도가 어떤 가문인가. 제국 내 모든 금화의 입구이자 출구라 고 칭송받는 최고의 재력 가문이 었다. 크리시스도 순수한 재력에 한해선 데카르도에게 한 수 접어 줄 정도니, 이 제국 내에서 데카 르도가 모르는 금전 거래는 없다 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영악한 데카르도가 내가 갈 수 없다는 걸 모를 리는 없잖아! 일부러 내가 갈 수 없는 날로 골

라서 난 못 오게 하고 언니를 홀 랑 잡아먹을 계획인 게 분명하다 니까!"

"잡, 잡아먹......

"르웰린 그 인간, 날 볼 때마다 언니에 대해 물어보는 게 수상했 어!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 거 야!"

브레스라도 뿜을 기세로 분을 터트리는 아리아를 진정시키려 노 력했지만, 이미 르웰린을 제국의 원수이자 천하에 다시없을 매국노 로 매도 중인 아리아는 눈에 뵈는 게 없어 보였다.

금방이라도 티 테이블 위로 올 라가 '르웰린 개자식'이라는 제목 의 즉석 장송곡을 열창할 기세인 아리아를 멍하니 바라보며 그냥 생각을 그만뒀다.

'언니. 르웰린 데카르도 영애랑 사귄 적 있어?'

'커흑! 뭐, 뭐라고?'

'어제 처음으로 데카르도 영애랑 단둘이 얘기를 좀 해 봤는데...... 그 인간이 계속 언니에 대해 물어 보잖아. 거슬리게...... 얼른 말해 봐. 데카르도 영애 좋아해? 설마

나보다?'

사교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르웰린과 만 나고 와 나를 무섭게 추궁하던 아 리아를 떠올리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나야 겨울 내내 수련으로 바빠 데뷔탕트 이후로 르웰린을 만난 적이 없었지만, 활발히 활동하는 아리아는 매번 르웰린과 부딪치고 돌아와 울분을 터트리곤 했다.

'언니 엉덩이에 점이 있다는 것

도 모르는 주제에! 언니를 아는 척하고! 계속 언니에 대해 물어보 고! 두고 봐, 내가 곧 암살자 고 용할 거야!'

'아리아, 진정을 좀......•'

'언니는 가만히 있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눈치 빠른 르웰린이 자신이라면 치를 떠는 아리아를 모를 리가 없 음에도 아리아에게 초대장을 보냈 다는 건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그럼 정말 목적이 난가......?'

내 이름이 떡하니 적힌 초대장 을 내려다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 었다. 르웰린이 나를 만나고자 하 는 이유가 짐작되어 불안했다.

"언니! 가지 마! 다음에 나랑 같 이 다른 영애 티파티나 가자! 아 님 크리시스 저택에서 티파티를 주최해도 괜찮잖아! 굳이 데카르 도 영애 티파티 갈 필요 없지?"

"음...... 아니. 나 한번 가봐야 할 것 같아."

"뭐라?"

분기탱천한 아리아가 벌떡 일어

났다. 납득 가능한 이유를 요구하 는 강렬한 하늘색 눈동자가 살벌 한 빛을 띠었지만, 그래도 내 눈 엔 귀여웠기에 빙긋 읏을 뿐이었 다.

'데뷔탕트 때도 신경 쓰였고...... 아리아에게 나에 대해서 계속 물 어봤다는 것도 걸려서 한 번쯤은 만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기회에 잘 됐어.'

르웰린 데카르도는 최고의 사업 가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 사리분 별과 손익계산에 무척 능했으며,

냉철한 이성과 날카로운 직감을 모두 가진 이였다.

현재까지 들어온 르웰린에 대한 이야기를 기반으로 했을 때, 르웰 린은 절대 이유 없이 사람을 돕지 않았다. 그녀의 행동거지는 대충 보았을 땐 기분파 같았지만 자세 히 보면 이유와 이득을 철저히 계 산한 뒤에 나오는 결과물이었다.

'물론 요정의 밤에선 르웰린을 악녀로 만들기 위해 그녀의 패악 과 난폭함에만 모든 서술을 집중 했지만......

'요정의 밤'은 우리 천재 아리아 도 천사표 여주인공으로만 사용했 던 빌어 처먹을 소설이다. 원작의 나쁜 서술들과 상당히 상반되는 실제 모습을 가진 크리시스 부자 와 몇 달 동안 함께 살아 본 나는 이제 소설을 깡그리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곧 닥쳐올 전쟁에 데카르도가 날 지지해 준다면 무척 큰 힘이 되겠지. 웬만하면 르웰린은 아군 으로 만드는 게 좋아.'

데뷔탕트 때 르웰린은 이유 없 이 나를 도와줬던 데다, 나를 보 고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냐는 물 음까지 던졌었다. 이건 내가 그때 자신을 도와준 소드 마스터였다는 걸 예측 정도는 했다는 소리였다.

'르웰린이 날 대하는 태도를 유 심히 살펴보고, 눈치챈 것 같다면 차라리 대놓고 드러내자. 예전에 도와줬던 걸 구실로 친해지는 게 나아.'

나는 더 이상 원작을 파괴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 든 도구로 사용할 결심도 되어 있 었다.

'필요하다면 르웰린도 수단으로 사용해야지.'

"데뷔탕트 이후에 사교 활동을 아예 안 했잖아. 나도 이제 사교 계에 발을 들여야지. 그리고 르웰 린 영애가 나한테 관심이 많다며. 왜인지도 궁금해서."

하지만 내 속마음을 직접적으로 말할 순 없으니 그럴 듯하게 돌려

대답했다.

"내가 먼저 사교계를 발 아래 복속한 다음에 언니한테 선물로 주려고 했는데......

싸늘한 얼굴로, 티 테이블 위에 놓인 마카롱을 제 앞의 그릇으로 덜어 난폭하게 으깨던 아리아가 차갑게 중얼거렸다. 마카롱을 다 섯 개째 고문하던 아리아는 한숨 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래. 언니가 가고 싶다는 데 내가 반대할 순 없지."

날 말리는 걸 포기한 아리아의 눈꼬리가 처량하게 축 처졌다. 내 가 르웰린과 만나는 게 그렇게 싫 을까 싶어 순간 마음이 약해졌지 만, 어차피 한 번쯤은 만나야 하 는 상대인 만큼 무를 순 없었다.

"하지만 그 인간이 언니를 괴롭 히면 주저하지 말고 처단해야 해."

아리아의 눈이 다시금 매서워졌 다. 온몸에 오한이 드는 것을 애 써 무시했다.

"감옥은 내가 갈 테니까."

르웰린이 지지리도 싫은 모양이 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휘황찬란한 데카르도의 저택 앞에 서 있었다.

'와.'

처음 보는 데카르도 저택에 살 짝 입이 벌어졌다. 크리시스 저택

은 깔끔함을, 신전은 신성함을, 황궁은 화려함을 주된 컨셉으로 삼았다면, 데카르도 저택은 어딘 지 신비롭고 메르헨 같은 느낌이 주가 되었다.

'진짜 잘 꾸몄다.'

장미 넝쿨이 하나하나 정교하게 새겨진 저택의 겉벽을 보며 감탄 을 금치 못했다. 동화나라에서 툭 튀어나온 것만 같은 건물은 사람 의 동심을 끌어당겼다. 저택을 지 었을 이의 안목에 감탄하며 데카 르도의 시종을 따라 티파티가 진

행된다는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

데카르도의 정원은 사시사철 장 미가 피어 있어 '시들지 않는 장 미 정원'으로 유명했다. 정원을 덮은 탐스러운 붉은 장미들을 보 고 감탄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정 원 이곳저곳엔 장미를 유지하기 위해 마력을 내뿜는 마석들이 달 려 있었다.

'진짜 돈지랄.'

딱 봐도 상급인 마석들을 하나

하나 살피며 혀를 내둘렀다. 크리 시스 공작가도 이 정도로 돈지랄 을 하진 않았다.

'원작에서 전쟁이 났을 때 데카 르도 저택은 어떻게 되었더라. 부 서졌던가.'

거기까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 장미 정원이 망가지는 건 조금 슬플 것 같단 생각을 하 며 형형색색의 드레스들이 눈에 띠는 정원의 티 테이블로 다가갈 때였다.

"크리시스 공녀. 왔군요."

차분하게 가라앉은 감미로운 목 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혔다.

화려하게 불타오르는 광염을 담 은 기다란 머리칼. 고아하지만 속 에 검을 품은 듯 날카로운 분위기 를 드러내는 얼굴. 그저 자리에 앉아 있어도 그 존재로 좌중을 압 도하는 카리스마.

푸르른 녹염을 담아 고고히 빛 나는 진녹빛 눈동자.

그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조 각조각 파헤쳐지는 기분이었지만, 진득하고도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 지 않은 채 당당히 웃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데 카르도 영애."

나는 마침내 르웰린 데카르도와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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