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화
내 자리는 주최자인 르웰린 바 로 옆이었다. 자고로 주최자의 양 옆은 최고의 상석. 황궁에 황녀가 없으니만큼 제국에서 신분이 가장 높은 영애인 내가 이곳에 맞는 게 맞았다.
자리를 가지고 장난치진 않았다 는 사실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초대에 응해 주신 것에 감사를 표합니다, 크리시스 공녀. 덕분에 오늘 이 자리가 빛날 것 같군요."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초대자와 참가자로서의 형식적 인 인사가 짧게 오갔다.
보통이라면 이런저런 칭찬이 붙 으며 인사가 훨씬 길어져야 했지 만, 나와 르웰린 둘 다 허례허식 을 중히 여기지 않았기에 짧게 끝 났다.
이미 초대자 명단을 확인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느리게 테이블 앞에 앉은 영애들을 살펴보았다.
이곳에 자리한 영애들 모두가 바디체인을 차고 있다는 것이 조 금 자랑스럽기도 했다.
'내 바로 앞은 하넬 백작가의 영 애고. 나머진 백작 혹은 남작 가 문 영애들이네.'
당연하지만 나보다 신분이 높은 영애는 없었다.
허나 사교계는 신분으로 좌지우
지되는 곳이 아니었기에, 사교계 에서의 권력이 제일 큰 영애는 단 연 르웰린이었다.
내게 짧은 인사를 건넨 영애들 은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면서도 나를 힐끔거렸다.
눈빛에 든 것은 대부분이 호기 심, 혹은 한 번쯤은 건드려 봐도 되지 않을까 간을 보는 호승심, 그리고 악의였다.
'......좀 피곤하겠네.'
데뷔탕트 이후 첫 사교 활동이 었으니 시선이 몰리고 시비가 걸 리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 만 막상 마주하지 귀찮아지는 게 사실이었다.
김이 폴폴 오르는 밀크티를 한 모금 머금으며 속으로 한숨을 쉬 었다.
'......르웰린도 날 싫어하려나?'
다른 영애들이 날 어떻게 생각 하는지는 관심 없었다. 악의야 익 숙했고, 그들 중 내 계획에 필요
한 이들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르웰린이 내게 악의를 품었다면 어쩐지 섭섭할 것 같았 다.
느리게 눈을 굴려 내 측면에 앉 은 르웰린에게 시선을 보내다 살 짝 놀랐다.
르웰린은 날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녹색 눈동자에 깃든 것은 예리 한 관찰력과 긴가민가함, 그리고
날뛰는 흥분이었다.
르웰린은 나와 눈이 마주치고도 눈을 피하기는커녕 더욱 눈을 부 릅뜨고 날 노려보았다. 그 눈이 너무 부담스러워 나도 모르게 시 선을 피하고 말았다.
'날 싫어하는 것 같진 않지 만......
눈빛이 상당히 부담스럽다. 그래 도 내가 그 소드 마스터라는 걸 확신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의심은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날 힐끔거리긴 해도 내게 직접 적으로 말을 거는 이들은 없었다. 그 덕분에 귀찮은 일 없이 차를 세 잔이나 비우고 데카르도의 재 력 수준답게 삐까번쩍한 디저트 중 많이 달지 않은 것들을 먹어 치우고 있을 때였다.
"큼! 그나저나 크리시스 영애 는...... 복장이 무척 편해 보이시 네요."
연보랏빛의 귀여운 드레스를 입
은 영애 하나가 내게 슬그머니 말 을 걸었다.
'언제 지적하나 했다.'
이젠 한숨도 안 나왔다. 무료하 게 눈을 깜빡이다 스스로를 내려 다보았다.
새하얀 와이셔츠 위에 걸친 진 보라색 베스트. 베스트 위를 가로 지른 검은색 하네스. 손바닥의 반 정도가 드러난 검은색 가죽 하프 팜 장갑. 다리를 딱 맞게 감싸는 하이웨스트 검은 승마바지. 어깨
위에 걸친 검은색 코트.
남자였다면 절대 지적받지 않았 을 평범한 복장이었다.
남자였다면.
"그래요. 무척 편합니다. 제가 간편함과 편리함을 중시하는 편이 라서."
말 사이에 깃든 비꼼을 알아듣 지 못한 척 건성으로 대답했다.
사교계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
진 않았으나 크리시스 공작가의 입양된 뒤 불가피하게 귀족들과 만남을 가져야 했던 나는, 말을 꼬아 들어야 할 때와 있는 그대로 들어야 할 때를 알게 되었다.
"크흠! 그래도 데카르도 영애께 서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에 초대 해 주셨는데 예의에 맞지 않는 복 장은 아닐까 염려돼요. 남성복이 잖아요."
그리고 이렇게 시비가 걸릴 때 는 그 말의 진의를 굳이 파헤쳐서 따지는 것보단 있는 그대로 듣는
편이 나았다.
답답해진 상대방이 직접 진의를 꺼내 들 때까지.
크리시스가 된 뒤, 바지를 입고 나갈 때마다 지겹도록 지적을 들 어 왔다. 여자가 바지를 입는 건 예의에 맞지 않는다고.
'칼과 커플룩을 맞춰 입고 같은 장소에 나가도 칼에겐 그런 소리 한마디를 안 하고 내게만 하지.'
칼이 속옷만 입고 거리를 활보
해도 무서워서 찍소리도 못 할 인 간들이 내게만 헛소리를 하는 이 유는 너무 투명해 구역질이 날 정 도였다.
'내가 여자니까.'
내가 선택할 수 없고,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
얼굴을 무표정으로 굳힌 채 잡 은 잔에 살짝 힘을 주었다. 소드 마스터의 악력에 노출된 잔이 힘 겹게 떨려 왔다.
'뭐, 무슨 상관이야. 그 인간들 도 곧 나를 필요로 하게 될 텐 데.'
어떤 간웅은 세상이 저를 버리 면 저 또한 세상을 버리겠다고 했 던가.
나는 조금 달랐다.
세상은 단 한 번도 날 가진 적 이 없다. 세상이 날 원하지 않는 다면 직접 세상에 없어선 안 되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내 발에 입 맞추며 내 존재를 간
원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내 발을 걸려 맴도는 역풍들은 내게 간지러울 뿐이었 다.
"데카르도 영애. 혹시 제 복색이 영애의 티파티에 무례가 되었습니 까?"
수군수군 자기들끼리 떠드는 영 애들을 뒤로 하고 르웰린에게 단 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티파티 내내 빙빙 돌려 까이느
니 한 번에 끝내는 게 나았다.
르웰린이 나를 바라본다. 르웰린 이 날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지 만, 그렇다고 대부분의 영애가 내 게 적의를 보이는 상황에서 내 편 을 들어줄 것 같진 않았다.
무례했다는 대답이 돌아오면 깔 끔하게 사과하고 끝낼 생각이었 다. 별것도 아닌 것엔 한 번 꿇고 들어가는 게 편했다.
" 아뇨."
그리고 돌아온 답변은 나를 놀 라게 했다.
"잘만 어울리는데 다들 왜 그러 시는지 잘 모르겠군요."
르웰린이 나를 보며 작게 웃었 다.
처음으로 보는 웃는 모습에 놀 라 눈을 크게 뜨니 그녀는 금방 웃음을 지워 냈다.
"하, 하지만 그래도 남성복이니 까......
"옷에 성별도 있던가요? 잠옷을 입고 오신 것도 아닌데 굳이 문젯 거리로 삼을 필요성은 느끼지 못 하겠네요. 오늘 입으신 진보라색 베스트가 잘 어울리시는걸요."
반박하는 영애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낸 르웰린은 심지어 나를 칭 찬하기까지 했다.
어안이 벙벙해 눈을 빠르게 깜 빡였다.
"어...... 칭찬 감사합니다. 데카 르도 영애의 드레스도 정말 디자
인이 잘 되었습니다."
내 떨떠름한 칭찬에 새초롬하게 눈을 내리깔던 르웰린이 휙 고개 를 돌렸다.
역시 여전히 도도했다.
'르웰린은...... 이런 캐릭터가 아 니었을 텐데?'
원작의 르웰린은 전형적인 악녀 캐릭터로서, 여성성과 품위, 아름 다움을 집착에 가깝도록 중시하던 캐릭터였다.
사실 나서면서 복장 때문에 르 웰린에게 욕을 얻어먹진 않을까 걱정까지 했는데, 참으로 쓸데없 는 걱정이었던 모양이다.
'역시 요정의 밤은 폐기해야 되 는 쓰레긴가 봐.'
원작에 연연하지 않기로 해 놓 고 또 원작을 기반으로 사람의 행 동을 짐작했던 스스로를 질책하며 원작의 르웰린을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지금부터 보게 될 르웰린만 을 진짜 르웰린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르웰린 영애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런 거겠죠."
르웰린이 제 편을 들어줄 거라 고 생각했던 건지,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지은 영애가 하는 수 없다 는 듯 물러섰다.
사교계 에 서 두문불줄하던 나는 부스러기로 보여도 르웰린은 무서 웠던 모양이다.
기분이 좀 더러웠지만, 애들이
철이 없어 그럴 수도 있다는 너그 러운 마음을 먹기로 했다.
티파티는 지루했다. 나야 딱히 아는 영애도 없었으니 가만히 차 나 홀짝이다 몇 번 맞장구하는 정 도가 다였다.
의외로 르웰린 또한 꽤 조용했 는데, 이곳저곳에서 말을 걸어도 단답으로만 짧게 끊어내던 그녀는 틈만 나면 나를 지그시 응시해 왔 다. 조금 부담스러웠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다들 돌
아가시는 게 좋겠군요."
한참 나를 바라보던 르웰린이 입을 열었다. 영애들 사이로 당혹 스러움이 감돌았다. 르웰린의 시 선을 슬슬 피하던 나도 놀라서 르 웰린을 바라보았다.
"하, 하지만 저희 모두 모인 지 1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아직 날이 추워 해가 빨리 져 요. 다들 일찍들 귀가하시는 편이 좋겠네요."
슬쩍 의문을 제시하는 한 영애
의 말을 뚝 끊어먹은 르웰린이 단 호하게 말했다. 저건 명백한 축객 령이 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이만 일어나 봐야겠군요."
이 장소에 주인이자 사교계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발휘하는 르웰린 의 축객령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 은 이 자리에 없었다.
'물어보고 싶은 건 못 물어봤는 데...... 어쩔 수 없나.'
다들 주춤주춤 일어나기에 나도 다음을 기리며 이만 가 봐야 하나 싶어 의자를 끄는데, 르웰린의 지 긋한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크리시스 공녀는 별일 없으시 면 잠깐 남아 주실 수 있나요. 긴 히 여쭐 것이 있어서."
나는 잠시 놀랐으나, 이내 고개 를 끄덕였다.
"그러죠. 어렵지 않습니다."
나도 할 말이 있었으니 단둘이
있을 시간을 만들어 준다면 고마 웠다. 다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 는 나를 부럽다는 눈빛으로 바라 본 영애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름다운 장미정원엔 나와 르웰 린만 남게 되었다. 조용해진 주위 를 즐기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 다.
"제게 묻고 싶으신 게 뭡니까."
"궁금하다고 하면 대답해 주실 건가요?"
"영애께서도 제 질문에 대답해 주신다면 대답해 드리도록 하겠습
니다."
르웰린과 나 사이에 기 싸움이 오갔다. 가벼운 탐색전이었다. 새 치름하게 눈꼬리를 올린 르웰린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뭐, 기브 앤 테이크는 사업의 기본 중 기본이죠. 상도덕도 없는 사람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아요. 대신 묵비권은 제공하시겠죠?"
"물론입니다. 어차피 그리 곤란 한 질문도 아니겠지만."
"질문은 하나씩 주고받기, 무조 건 진실로만 답하는 거예요. 거짓
말을 하느니 묵비권을 사용하기로 해요. 귀족의 명예를 걸고. 알 죠?"
"네."
르웰린은 꼼꼼한 협상가였다. 짧 은 협상이 오가고 둘 다 만족할 조건을 충족한 뒤, 제대로 된 대 화가 시작되었다.
"좋아요. 그럼 내가 먼저 묻죠. 크리시스 공녀, 나와 전에 만난 적 있죠? 데뷔탕트 이전에요."
직구에 가까운 변화구가 날아왔
다. 어차피 시원하게 까 버릴 생 각으로 온 것이었기에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만나 뵌 적이 있었습니다."
녹음을 담은 르웰린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르웰린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 잠시 시간을 두 고 질문을 던졌다.
"르웰린 영애께서 제 동생 아리 아를 만날 때마다 제 질문을 하신 다고 들었는데요, 왜 그러셨던 겁
니까?"
그 질문에 르웰린의 얼굴이 불 꽃처럼 타오르는 그 머리칼만큼이 나 붉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