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화
"아, 아리아 크리시스 공녀가 그 런 걸 다 일러바치던가요!?"
"음...... 네."
르웰린의 귀와 목덜미까지 붉게 타올랐다. 그녀의 얼굴에 깃든 감 정은 수치스러움이었다. 대체 어 느 부분에서 부끄러움 포인트가 있는 건지 알기 힘들어 미간을 좁 혔다.
"하! 아리아 공녀는 정말 못됐군 요! 무슨 그런 걸 다 일러바치 고......
"어...... 제가 알아선 안 되는 부분이었습니까?"
새빨개진 얼굴로 노발대발하는 르웰린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하루 종일 어른스럽 게 굴던 르웰린이 갑자기 앙칼진 아기 붉은 고양이가 되니 당황스 러웠다.
"물, 물어보긴 했지만......! 가벼 운 인적 사항이나 안부 같은 것만
물었어요! 절대 스토커처럼 영애 의 사생활을 캐면서 음흉하게 읏 고 그러지 않았다고요!"
재 풀에 당황한 르웰린이 시키 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격 하게 부정하는 모습이 '내가 그랬 소.' 하고 실토하는 것 같았지만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겠죠. 르웰린 영애께 선 그러실 분이 아니니까요."
내 정보를 캐며 음흉하게 웃는 르웰린이라니, 상상도 가지 않았
다. 르웰린이 굳이 그럴 이유도 없을 거고. 내가 긍정하자 어쩐지 르웰린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우선 질문에 대한 대답을 부탁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 곤란하
다면 묵비권을
다."
사용하셔도 됩니
마주치지 못하는 배려하는 말투로 정말 궁금한 건 대답하지 않아도
나와 시선도 르웰린을 보며 말했다. 어차피 따로 있었으니
상관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르웰 린이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로 눈
을 질끈 감았다.
"고, 공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 했으니까요!"
"......제가요?"
살짝 미간을 좁혔다. 기묘하고도 애매한 대답이었다. '제가 왜요?' 라고 되물을까 하다가 질문은 하 나씩 주고받기로 했으니 입을 꾹 다물었다.
"후...... 그럼 이제 제가 질문하 죠."
새빨갛던 얼굴을 겨우 식힌 르 웰린이 아직까지 격양된 감정이 살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질문해 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까 닥였다.
"크리시스 공녀께선 절 구해 주 신 적이 있죠?"
두 번째 만에 묵직한 직구가 날 아왔다. 이미 예상했던 바였기에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 여유롭게 차를 들이켰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늘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인생 을 산다는 건 정말 피곤하다는 것. 불의를 지나치지 않고, 눈앞 에 흐르는 무고한 피를 무시하지 않으며 사는 것은 정말 고단하다 는 것.
그럼에도, 난 그 당연한 일들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정체와 힘을 숨기는 주제에 오 지랖은 넓은 나도 참 멍청한 종자 였다.
읽을 수 없는 표정을 한 르웰린 은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찻 잔을 두 손으로 잡은 채 만지작거 리는 소모적인 행동만 하고 있던 그녀는 한참 뒤에 한숨을 뱉었다.
"......참 미련한 사람이네요, 공 녀는."
"정확한 관철이네요."
반박할 여지도 없는 말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니 르웰린 이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
렸다.
"어떻게 아신 건지 여쭤도 됩니 까? 보너스 질문으로요. 얼굴은 가면으로 가렸고 목소리는 변조했 는데 어떻게 눈치채신 겁니까?"
디에고야 원작에서 천재적인 눈 썰미를 가진 이라고 서술됐던 데 다가 미르인 나와 두 번이나 만났 다. 그런 그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르웰린은 그렇게 잠 깐 보고 어떻게 눈치챈 건지 궁금 했다.
르웰린이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 올렸다.
"도와주신 은혜를 감안해 이 정 도는 그냥 알려 드리죠. 영애의 손이에요."
"••...손?"
고개를 기울였다. 찻잔을 잡은 내 손을 힐끔 본 르웰린이 설명을 시작했다.
"내겐 사람을 만나면 손으로 그 사람의 인생을 추측하는 습관이 있어요. 어려서부터 있었던 습관
이라 지금은 여러모로 발전해 만 나는 사람들의 지문 형태를 기억 하는 식으로 바뀌었지만요."
'저건...... 천재라는 소리 아닌 가?'
사람 손을 한 번 보고 그 사람 지문을 기억한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싶었지만, 르웰린이 그렇다 니 그럴 듯해 보였다. 르웰린이라 면 다섯 살에 솔방울로 수류탄도 만들었을 것 같으니까. 르웰린이 말을 이었다.
"공녀가 날 구해 줬을 때도 공 녀 손을 유심히 봤었어요. 공녀 손은 워낙 상처가 많아 잊기 힘들 정도였죠. 무엇보다 지문이 다 닳 아서 안 보이는 게 무척 신기해서 줄곧 기억하고 있었어요."
'내 손이 그렇구나.'
새삼스레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시간 검을 잡으며 닳고 닳 아 굳은살밖에 남지 않은 손끝은 무척이나 투박했다. 잠시 쓰게 웃 음 짓다 진지하게 표정을 굳혔다.
"방금 전엔 보너스였으니, 이제 진짜 질문 가죠. 그에 대해 비밀 로 붙여 달라고 부탁드리면 지켜 주실 겁니까?"
진중한 목소리로 부탁하듯 물었 다.
"공녀가 원한다면요."
나를 지그시 응시하던 르웰린이 조금 새침한 표정으로 수긍했다. 좀 더 확실한 답을 받고 싶어 눈 을 가늘게 떴다.
"확실히 맹세할 수 있으신 겁니 까?"
"하! 크리시스 공녀, 나도 은혜 를 아는 사람이에요. 내 모든 명 예와 데카르도의 붉은 장미를 걸 고 맹세해요. 원한다면 태양의 맹 세도 해 드리죠."
내 되물음에 르웰린이 자존심 상한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데카르도는 자신들의 가문에 대 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족속 들이었다. 데카르도의 일원이 데 카르도의 붉은 장미를 걸고 맹세
한다는 건, 이를 어기면 할복하겠 다는 뜻과 같았다.
르웰린이 내게 엿을 먹이고 싶 은 게 아닌 이상, 굳이 알려서 얻 을 이득도 없을 테니 믿기로 했 다.
"내 차례네요. 크리시스 공녀. 당신은 용병왕 미르인가요?"
'아.'
이건 좀 아픈 직구였다. 어깨를 살짝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검은 오러를 드러냈던 것 부터 미르라는 건 알리고 들어가 는 수준이었기에 눈치챘을지도 모 른다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때 는 미르인 게 알려져도 별 상관이 없었지만, 크리시스 공녀로서 미 르인 것을 숨기기로 하며 상황이 달라졌다.
"걱정하지 마요. 이 부분도 데카 르도의 장미를 걸고 비밀로 붙일 테니까. 그냥 확인 차 물어본 것 뿐이에요."
내가 보내는 애처로운 눈빛에 살짝 움찔한 르웰린이 스스로 맹 세를 해 보였다. 살짝 웃으며 고 개를 끄덕였다.
조금 멍청하다 말할지도 모르겠 지만, 어째서인지 르웰린에겐 믿 음이 갔다. 그녀가 자신이 할 말 을 지킬 거라는 믿음이.
"그럼 제 다음 질문인데, 음...... 이상하게 듣지 않아 주셨으면 좋 겠군요."
"뭔데 그래요?"
조금 민망해서 망설이니 르웰린 이 재촉했다. 르웰린의 눈치를 보 다 입을 열었다.
"라이너 아인하르트 경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 질문에 르웰린이 정말 뜬금 없는 소리를 들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생각해도 그랬기에 어이없어 하는 르웰린의 눈을 피해 허공을 보았다.
"약속은 약속이니 대답은 하죠. 자세히 생각해 본 적은 없는
데...... 음, 낯짝 반반하고 능력 쓸 만한 사람?"
필터링이라곤 한 번도 걸리지 않은 직구에 순간 웃음이 튀어나 왔다.
뜬금없는 질문을 한 이유는 다 름 아닌 이 세계에도 흔한 판타지 소설들처럼 원작의 억지력 같은 게 있는지 확실히 확인하기 위해 서였다.
'혹시 구해 준 게 나였는데도 르 웰린이 라이너에게 반하진 않았을
까 궁금했는데...... 그럴 리는 없 는 것 같네.'
아리아와 칼을 통해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만나도 첫눈에 반하기 는커녕 첫눈에 원수지간이 될 수 있다는 걸 확인했으나 말 그대로 한 번 더 확인차 물어본 것이었 다.
그리고 라이너에 대해 말하는 르웰린의 표정은 말 그대로 무심 그 자체였다.
"설마 공녀는 아인하르트 경
o "
" 네?"
"흠...... 아니에요."
무어라 중얼거리는 르웰린에게 되묻자, 묘한 표정과 함께 기묘한 콧바람 소리만 돌아왔다. 금방 원 래의 새침한 표정으로 돌아온 르 웰린이 입을 열었다.
"저는 질문 하나만 더 하면 되 는데 공녀는 더 해야 할 질문이 있나요?"
"아뇨. 저도 하나만 더 하면 될 것 같군요."
"좋아요. 그럼 마지막 질문을 할 게요."
무슨 질문을 하려는 건지, 이번 엔 천하의 르웰린도 살짝 망설이 는 기색을 보였다. 여차하면 묵비 권을 사용하면 되니 나는 그리 긴 장하진 않았지만, 무얼 생각하는 지 르웰린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 져 조금 걱정될 때였다.
"나는, 공녀를 보고 참 자유로운 사람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데뷔 탕트에서 제복을 입었던 것도 그 렇고, 검을 쓴다는 말을 아무렇지
도 않게 하고 다닌 점도 신기했어
요."
르웰린이 나지막이 말문을 열었 다. 담담한 고백 같은 그녀의 말 엔 어쩐지 씁쓸함이 묻어있어, 나 는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고정된 관념이라는 것 은 무서운 것이다.
사람들은 내 복색과 취미가 보 통 영애와는 다르다는 이유 하나 로 나에 대한 헛소문을 퍼트렸다. 나는 르웰린이 나를 이상하게 본
것이 아니라 자유롭다고 봤다는 것이 더 신기했다.
"그래서, 공녀한테 자문을 구하 고 싶었어요. 정말, 정말 하고 싶 은 일이 있는데, 얌전히 꽃으로 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공녀는 어떻게 할 건가요? "
그 마지막 질문의 무게가 지나 치게 무거웠다. 처음으로 르웰린 의 표정이 참혹하게 무너졌다. 내 시선을 피한 채 속눈썹을 파르르 떠는 르웰린을 지그시 응시했다.
붉고 탐스러운 머리카락. 화려한 연둣빛 드레스. 코르셋으로 꽉 조 인 허리. 한 떨기의 장미같이 아 름다운 자태. 분명 고고하고 아름 다운데.
'왜 저리 지쳐 보일까.'
녹음을 담은 두 눈동자가 우울 하게 침잠했다. 두 눈에 생기가 없었다.
원치 않는 삶은 살아 내는 것만 으로도 힘겨운 법이다. 늘 빛나던 르웰린의 어두운 면을 본 것 같아
조금 아연한 기분이 되었다.
어떤 답을 줘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한참 말을 고르며 망 설이다, 어느 순간 숨을 크게 들 이쉬었다.
'나는 지금 르웰린의 사정을 추 측하고 있구나.'
좋은 대답을 해 주려는 마음에, 나도 모르는 새 함부로 르웰린의 사정을 예측하고 재단하고 있었 다. 이건 르웰린을 기만하는 짓이 었다.
타인의 삶은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 모 든 인간은 서로에게 몰이해의 범 위에 있는, 미지의 존재니까.
'르웰린은 나라면 어떻게 할 거 냐고 물었지.'
그렇다면 내 얘기만 해 주면 되 는 일이었다.
"저는 조금 극단적인 사람입니 다.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살아 갈 이유를 느끼지 못해서요."
나는 내 아버지 카이사르를 사 랑한다. 그가 베푼 모든 사랑에 깊은 감사를 표했다.
허나 그런 카이사르라고 해도, 그가 내 자유를 막으려 한다면 그 에게 검을 겨눌 것이다. 그건 누 구도 감히 손댈 수 없는 것이니 까.
"시들어 꺾일 꽃이 되느니, 전 죽어서 나비가 될 겁니다."
이것이 내 답이었다. 자유 없이
사느니 죽는 것이 나았다.
르웰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 다.
"데카르도 영애는...... 참 아름 다운 머리카락을 가지셨습니다."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르웰린을 바라보며 느리게 말했 다. 분명 칭찬임에도 삽시간에 얼 굴을 굳힌 르웰린이 지긋지긋하다 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요. 귀에 딱지가 얹도록 듣
던 말이군요. 탐스럽게 핀 장미를 닮았나요?"
"아뇨."
천천히 손을 들어 르웰린의 머 리카락을 한 줌 잡았다. 그리고 르웰린을 향해 부드럽게 웃음 지 었다.
"영애의 머리카락은 모든 걸 불 사르는 화염을 닮았습니다."
꽃이다. 불꽃이었다. 다른 이들 의 눈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내 눈엔 경이롭게 불타고 있었다.
"화염에겐 불태울 권리가 있습 니다. 전 데카르도 영애가 그 권 리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정처 없이 떨리는 르웰린의 동 공이 그녀의 혼란을 말해 주었다. 아무래도 그녀에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나는 빨리 마 지막 질문을 하고 사라져 주기로 했다.
"그럼 마지막 질문 하겠습니다."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르
웰린을 향해 방긋 웃었다.
"우리 친구 할래요, 르웰린?"
르웰린의 눈이 커다래졌다. 당황 한 것 같은 그녀를 느긋하게 기다 려 주었다. 꽤 시간이 지나고 나 서야, 르웰린이 울음기가 섞인 웃 음을 터트렸다.
"당신 정말 신기한 사람이에요."
나와 눈을 똑바로 맞춘 르웰린 의 새초롬한 눈매가 활짝 휘어졌 다. 처음 보는 그녀의 환한 웃음
이었다.
"좋아요. 영광으로 여기세요, 카 슈미르."
그렇게 내게는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