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화
아타라 왕국의 사절단이 오기 전까지, 나는 검술 수련에 모든 것을 전념했다. 매일 10시간에 가 까운 시간 동안 수련장에서 마나 운용을 연습하고 검을 휘둘렀다.
혼자 연습하는 것만으론 충족되 기 어려운 점들이 있었기에, 사흘 에 한 번씩은 카이사르와 대련했 다.
승부욕에 눈이 멀어 어깨를 다 쳤던 첫 대련 이후론 오러를 씌우 지 않은 목검으로 대련을 했다. 조금 시시하긴 했지만, 같은 소드 마스터와 검을 부딪치는 것만으로 도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되었 다.
"너는 강하다."
여느 때와 같이 대련을 마치고 바닥에 누워 목구멍에 물을 폭포 수처럼 퍼붓고 있는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 다. 뜬금없는 서론에 그에게로 눈
을 돌렸다.
"다만 가장 큰 문제가 세 가지 있지."
"......문제가 세 가지면 '가장'이 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셋 다 무척 심각한 문제라서 그렇다."
카이사르는 무심한 얼굴로 뼈 때리기를 그렇게 잘했다. 특허를 내도 괜찮을 수준이었다. 아파 오 는 골에 앓는 소리를 내다 한숨을 쉬었다.
"그게 뭡니까?"
"첫째. 요령이 없다. 둘째. 체력 이 약하다. 셋째."
카이사르의 핏빛 눈동자가 무섭 게 번뜩였다.
"내가 수십 번을 말했는데, 여전 히, 방어는 하는 시늉도 안 한 다."
움찔.
그의 서늘한 목소리에 어깨를
떨었다. 그의 얼굴엔 불만이 많아 보였다.
"넌 단기전과 공격에 강해. 빠른 시간 내에 적을 제압하는 것엔 월 등하지. 실전에서 널 이길 수 있 는 검사는 이 대륙에 거의 존재하 지 않는다고 봐도 무관할 거다."
들려오는 칭찬에 귀를 쫑긋 세 웠다. 역시 칭찬은 언제 들어도 좋았다.
"하지만 장기전과 방어엔 최악 이다. 무슨 이유로든 싸움이 1시
간을 넘어서면 넌 너보다 훨씬 약 한 존재도 이기지 못하고 체력 부 족으로 나가떨어질 게 분명해. 거 기에 검을 휘두르는 요령도 없어 서 그나마 있는 체력의 효율성조 차 좋지 못하지. 방어는...... 할 말이 없군. 난 싸우면서 방어를 단 한 번도 안 하는 무식한 검사 를 내 생애 처음 봤다."
칭찬을 즐기기도 전에 매서운 질책이 날아왔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매서운 카이사르의 눈동자를 피해 시선을 살짝 비끼자 그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그런 너를 잡고 집중적으 로 훈련시켜 줄 수 있다면 좋겠지 만...... 나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엔 그리 능하지 못하다. 요즘은 너무 바빠 시간을 내기도 힘들 고."
확실히 카이사르는 좋은 선생님 은 아니었다. 황제의 명령으로 바 쁘게 움직이며 나와 대련해 줄 시 간도 겨우 내고 있으니 바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네게 선생을 하나 붙여
주려 하는데, 괜찮나?"
" 선생이요?"
"그래. 대륙의 다른 소드 마스터 들과는 친분이 없어 너보다 높은 수준의 소드 마스터를 선생으로 붙여 줄 순 없지만...... 체력 단련 과 방어 기술엔 최고인 소드 익스 퍼트를 하나 알고 있다. 너보다 약하지만 가르치는 것은 실력과 다른 문제이니 꽤 도움이 될 거 다."
나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선 생'이란 단어는, 그 자체로 내 심 장을 죄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멍한 나를 바라보는 카이사르의 눈이 가늘어짐을 느끼고 황급히 표정을 정리했다.
물론 붙여 준다면 고마웠다. 내 가 보기에도 내 체력은 젬병인 데 다, 방어 기술엔 아예 무지했으니 까.
"저야 좋지만...... 저는 소드 마 스터라는 걸 숨기고 있지 않습니 까. 배우다 보면 그 선생이라는 사람이 제가 소드 마스터라는 걸 눈치챌 텐데요."
"만날 땐 미르로서 만나면 되지 않겠나."
"......그 사람한테 설명은 어떻 게 하시게요? 갑자기 미르를 데 려와서 가르치라고 하면 그 사람 이 납득하겠습니까?"
그도 그럴 것이, 갑자기 크리시 스 공작이 자신에게 용병 미르를 가르치라고 하면 얼마나 어이가 없겠는가. 크리시스 공작과 용병 미르. 내가 생각해도 너무 접점 없는 두 이름이었다.
"그 선생이라는 사람, 내 부하
다."
이게 가능할까 싶은 나를 뒤로 하고 카이사르가 태연하게 말했 다.
"그리고 부하에게 명령을 내릴 땐 설명이 필요 없지."
그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비틀렸 다.
"부하는 상사가 보석함에 드래 곤을 넣어 오라고 명령해도 바로 해 와야 하는 존재다. 걱정하지
마라. 순종적으로 만들어서 데려 올 테니."
나는 정말로, 카이사르를 상사로 둔 이들이 눈물 나게 안쓰러워졌 다.
그리고 그 선생이라는 사람을 만나기로 한 당일.
나는 선생의 정체도 모른 채로 수도 중심의 공작가 소유 수련장 에 도착했다. 카이사르가 어련히
잘 붙여 줄 것 같아 누구인지도 묻지 않았다.
오랜만에 착용한 가면을 어색하 게 매만지다 수련장을 둘러보았 다. 없는 거 없이 다 갖춰진 수련 장은 깔끔하고 이용하기 좋아 보 였다. 거대한 역기를 들어보며 카 이사르가 데려온다고 한 선생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슈슈."
두 사람의 기척이 내게로 가까 워졌다. 내 애칭을 부르는 카이사
르의 목소리에 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주친 놀란 기색의 황 금빛 눈동자.
"••••••미르?"
나는 들고 있던 역기를 내 발등 위로 던질 뻔했다.
'라, 라이너?'
입을 떡 벌린 채 경악했다. 라이 너도 가르쳐야 하는 사람이 나인 줄은 모르고 왔는지 무심하던 얼
굴에 놀람을 지우지 못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카이사르를 중간에 둔 채 라이 너와 경악 서린 눈빛을 교환했다. 눈 뜨고 졸도하기 직전인 나와 딱 딱하게 굳어서 그대로 석상이 되 어도 이상하지 않을 라이너를 번 갈아 본 카이사르가 미간을 좁혔 다.
"둘이 아는 사인가?"
해명을 요하는 카이사르의 시선
에 나와 라이너 모두 난감해져 입 을 다물었다.
위기에 처한 르웰린을 구하다가 만났는데 그가 내 실명을 알고 있 는 걸 알고 실명은 비밀로 지키라 고 협박한 뒤, 크리시스 영애가 되어 다시 만나 무도회에서 춤을 신청받고 거절한 사이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내가 아는 한 없 었다.
'빌어먹을...... 그러고 보니 라이 너도 카이사르의 부하구나......
카이사르는 현재 군 최고 통솔 권을 가진 국방부장관 정도의 직 위에 있다. 황궁 제2기사단 기사 단장인 라이너는 카이사르가 까라 면 까야 하는 부하였다.
'아무리 그래도 진짜 라이너를 데려올 줄은 누가 알았겠느냐고!'
아무리 카이사르의 부하라고 한 들, 무려 황궁 기사단의 기사단장 이었다. 기사단장! 나 하나 체력 단련시켜 주겠다고 붙이기엔 너무 거물이란 말이다.
'게다가 내 실명도 알던 놈인데! 솔직히 내가 미르인 거 눈치챘을 것 같단 말이야!'
라이너와도 언젠가는 만나 르웰 린 때처럼 단판을 지을 생각이었 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만날 줄 은 몰랐다. 여전히 뻣뻣이 굳어 숨은 쉬고 있는 건가 싶은 라이너 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 다.
"황궁...... 제2 기사단장님 아니 십니까."
우선 라이너가 눈치를 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니 뒷골목에서 그에 게 소개를 받았던 대로 불렀다. 굳은 채 정처 없이 떠돌던 라이너 의 시선이 내게로 정착했다. 그의 양 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미르 님이...... 왜 여기 계십니 까?"
라이너는 상황 파악이 안 되는 표정이었다. 나도 이 상황이 어이 가 없어 무어라 설명도 덧붙이지 못하고 입만 끔뻑거리고 있으니, 나와 라이너를 유심히 번갈아 본
카이사르가 상황 중재에 나섰다.
"이미 서로 알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소개시켜 주지. 미 르, 여기는 황궁 제2기사단장이자 아인하르트 소후작인 라이너 아인 하르트 경이네."
'그러니까 그런 거물의 소중한 휴일을 내 수련 도우미로서 소비 하게 해도 되냐고요.'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내 얼빠진 눈빛을 보지 못한 게 아닐 텐데도 카이사르는 꿋꿋이 나를
라이너에게 소개했다.
"아인하르트 경, 여기는 보다시 피 황금 방패 용병 미르일세. 서 로 인사하게."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어색해 미칠 것 같은 인사가 오 갔다. 이건 뭐랄까, 부모님의 강 요로 맺어지게 된 상대와 처음으 로 만난 선 자리 같은 느낌이었 다. 나와 라이너 사이에 기묘한 기류를 느낀 카이사르가 미간을 살짝 꿈틀거리더니 내게 전음을
보내 왔다.
'슈슈. 설마 아인하르트 경이 전 에 널 괴롭혔다든지......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카이사르의 살벌한 눈빛을 보아 잠시라도 망설였다간 라이너를 직 장 내 괴롭힘의 주인공으로 만들 것 같아 빠르게 부정했다.
'그럼 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 는 거지? 불편한 거라면 말해라.'
'그런, 그런 건 아닙니다......•'
불편한 건 아니었다. 원작의 남 주인공인 만큼 내적 친밀감은 충 만했으니까. 다만 워낙 복잡하게 얽힌 사이인 데다, 라이너가 어디 까지 알고 있는 건지 확신할 수가 없으니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갈피를 잡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라이너가 억지로 내 수 련을 돕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라이너를 힐끔 곁눈질했다. 여전 히 패닉에 빠진 얼굴은 누가 봐도 자신의 제자가 될 사람이 미르라 는 걸 사전에 듣지 못하고 온 사
람이 었다.
"아인하르트 경은 바쁘지 않으 십니까? 제 수련을 도와주실 정 도로 한가하시지 않을 것 같은데 폐를 끼치는 것 같습니다."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라이너가 가르치는 데 얼마나 재 능이 있는지, 정석적인 기술 단련 과 체력 단련에 얼마나 뛰어난 이 인지는 익히 알고 있다.
그가 내 정체를 눈치채고 자시 고를 떠나 같은 검사로서 한번 겨
루고 싶은 인물이기도 했기에 욕 심이 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싫다 는 사람을 강제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아무래도 저는 용병이 니...... 아인하르트 경께서 절 마 주하기 불편해하실 것 같군요."
살짝 가라앉은 채로 중얼거렸다. 기사들은 용병들을 천시한다. 기 사인 라이너는, 용병인 미르와 마 주하는 걸 껄끄러워할지도 몰랐 다.
'이렇게 비리비리한 놈이 그 유
명한 미르라고? 하! 역시 용병 놈 들은 비겁하다니까! 너, 다른 기 사들의 업적을 훔쳐다 네 거라고 말하고 다니는 거지? 용병이 영 웅이라니 말도 안 되잖아!'
'아니, 여리여리하니 꽤 맛 좋게 생겼으니까 몸 팔아다 일을 구했 을지도 모르지. 용병 놈들 몸 더 럽게 굴리는 거야 흔한 일이잖 아?'
용병으로 일하며 수없이 많이 기사들에게 무시를 당했던 나는, 기사들과 마주할 때면 나도 모르 게 자존감이 낮아지곤 했다.
"......아인하르트 경."
흔들리는 라이너의 시선을 피한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인상 을 서늘하게 굳힌 카이사르가 무 언가 들끓는 목소리로 라이너를 불렀다. 목소리만 들으면 지금 당 장 라이너를 끓는 기름에 데쳐 버 릴 것 같았다. 새하얗게 질린 라 이너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미르 님을 불편해하겠습니 까!"
라이너의 목소리에 처절한 부정 이 담겼다. 카이사르가 무서워서 그러는 건가 싶었지만, 라이너의 애처로운 금빛 눈동자는 오로지 내게만 향하고 있었다.
"다만 저는 분명 제가 가르쳐야 하는 사람이 있다고 듣고 왔는데 미르 님이 계셔서 놀란 것뿐입니 다. 미르 님께선 제게 가르침을 받으실 만한 분이 아니시잖습니 까."
라이너는 분명 많이 당황했을
텐데도 겸손하고 정중했다. 솔직 한 라이너는 내가 정말 불편했다 면 카이사르가 앞에 있든 말든 싫 다고 뛰쳐나갔을 사람이었으니 사 실인 것 같았다.
"물론이지. 미르는 경을 새끼손 가락으로도 이긴다."
"공작님......
라이너의 겸손 위에 팔불출 같 은 소리로 재를 뿌리는 카이사르 를 보며 쪽팔림에 이마를 짚었다. 꼭 그래야겠냐는 눈빛으로 카이사
르를 바라봐도 그는 맞는 말이지 않냐는 뻔뻔한 눈빛을 보낼 뿐이 었다.
"경이 미르에게 검술을 가르쳐 줄 필요는 없다. 황궁 기사단에서 진행되는 트레이닝 코스에 따라 체력을 기르는 법과 방어 기술만 가르쳐 주면 되네."
그래도 라이너는 주저하는 기색 을 보였다. 그의 금빛 눈동자에서 일렁이는 감정들은 무척 복잡해 보였다.
"그래도, 제가 어떻게 미르 님
O "
"그래서."
카이사르의 핏빛 눈동자가 라이 너를 지그시 응시했다. 살짝 입꼬 리를 비튼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못 하겠다는 건가, 기사단 장?"
'저건 권력 남용이다.'
직급으로 부른다는 건명령을 내린다는 뜻이었다. 카이사르의
망나니력에 잠시 감탄하고 있을 때, 한숨을 쉰 라이너가 입을 열 었다.
"......명을 따릅니다."
장관이 까라는데 대대장이 안 깔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정말로, 카이사르를 상사로 둔 라이너가 안쓰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