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화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십니까."
황제의 급한 호출을 받은 카이 사르가, 라이너가 가장 올곧고 착 해 데려오긴 했지만 귀찮게 하면 처단해 버리라는 말을 남기고 사 라진 이후.
커다란 수련장에 단둘이 남게 된 나와 라이너는 벌써 세 번째
어색한 인사만 나누고 있었다.
"이렇게 만나고 싶진 않았는데."
여기 온 이후부터 상당히 복잡 한 얼굴을 하고 있던 라이너가 한 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무슨 뜻인 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는데, 그가 벽에 기대었던 등을 일으키며 내 게로 다가왔다. 불타오르기 시작 한 그의 양 귀가 한 눈에 보였다.
'저 얼굴로 살면 어떤 기분일 까.'
다가오는 라이너의 번쩍거리는 미모를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신 이 빚은 얼굴 위로 어우러지는 달 빛 머리칼과 금빛 눈동자는 라이 너로 하여금 차가우면서도 짐승 같은 분위기를 내뿜게 했다. 그의 미모는 뭇 여인네의 가슴을 두근 거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조차도 잠시 모든 상황을 제 쳐 두고 감상할 정도로 잘난 얼굴 이었다.
"체력 단련부터 시작하죠. 미르 님의 체력이 어느 정도 단련되면
그때부터 방어 기술을 함께 병행 해서 배우는 게 좋을 것 같습니 다. 괜찮으십니까?"
"네."
"그럼 미르 님의 기초체력을 확 인하기 위해 수련장 100바퀴 돌 기부터 해보겠습니다."
"네."
라이너는 날 어려워하는가 싶으 면서도 익숙하게 훈련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의 지시에 따라 수련 장을 돌기 위해 발목을 휙휙 돌리 고 마나를 가볍게 내뿜기 시작했 다. 마나로 강화한 몸으론 100바
퀴야 쉬웠다.
"아니. 안 됩니다."
그리고 그런 내게 라이너가 단 호박 같은 표정을 지었다.
"••••••네?"
"마나로 몸을 강화해서 뛰시려 는 거 아닙니까. 안 됩니다. 그건 미르 님의 기초 체력이 아니라 마 나 운용 실력을 확인하는 것에 불 과하지 않습니까."
"어...... 그럼요?"
정식적인 훈련은 눈곱만큼도 하 지 않은 내가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었던 건 독보적인 마나 운용 실력 덕분이었다. 나는 선천적으 로 마나 양이 무궁무진했고, 한번 감만 잡으면 마나를 이용한 고난 이도 기술들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그로 인해 기본이 조금도 갖춰져 있지 않았다.
"맨몸으로 100바퀴입니다. 저도 같이 달려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 시죠."
라이너의 단호한 표정에 마나를 이용한 오래달리기만 해 봤던 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정말 괜찮으신 거 맞습니 까?"
한참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힐끔거리던 라이너가 결국 달리다 말고 물었다. 나와 함께 98번째 바퀴를 돌고 있는 라이너의 이마 로 투명한 땀방울이 흘러내려 그
의 기다란 속눈썹을 건드렸다.
'어쩜 사람이 이렇게 멀쩡하냐.'
땀에 축 젖어도 땀 냄새가 나기 는커녕 특유의 체향인 로즈우드 향이 깊어지기만 하는 라이너를 보며 이를 악물고 읏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허세였다. 오로지 정신력으로 달 리기를 계속했다. 온몸은 땀으로 절어 축축했고, 다리는 후들거렸 다. 라이너는 할 말이 많아 보이
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말할 힘도 없어 입을 꾹 다물고 달리기 를 계속했다.
"힘드시면 그만하셔도 괜찮습니 다."
"끝까지, 뛸 수 있다고, 했습니 다."
뚝뚝 끊기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솔직히 혀 깨물고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지만, 중도 포기 는 내 이름이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명색이 용병왕 미르인
데......!'
이 이름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나는 일정한 속도로 숨조차 몰아 쉬지 않으며 수련장 100바퀴를 묵묵히 돌고 있었다. 다리가 풀린 건 60바퀴 대부터였으니, 지금 날 달리게 하는 건 오직 자존심이었 다.
'앞으로 반 바퀴......!'
내가 땀을 그리 많이 흘리는 편 이 아닌데도 온몸이 젖었다. 표정 은 애써 태연을 가장하고 있으나
영혼은 이미 육체에서 가출한 이 후였다. 내 체력이 정말 약하다는 걸 새삼 다시 느끼며 마지막 스퍼 트를 냈다.
"허윽••••••
"하......
"하, 으......
그리고 골인. 100바퀴를 마치고 멈춰서 천천히 숨을 골랐다. 폐가 쪼그라든 기분을 느끼며 잠시 벽 에 기대섰다. 다리가 미친 듯이 후들거렸다. 가면 사이로 찬 땀이 답답해 가면을 벗어 던지고 싶을
정도였다.
"수고, 하셨습니다."
변조되었음에도 쉰 게 티가 나 는 목소리로 라이너에게 말했다. 얄밉도록 멀쩡해 보이는 라이너는 고개를 끄덕이곤 내게 마시라는 듯 물병을 건넸다.
' 살았다.'
죽기 직전 생명수를 찾은 사람 처럼 미친 듯이 물을 들이켰다. 급하게 들이켜느라 물을 반은 흘
린 것 같지만 어쨌든 마시고 나니 훨씬 나아진 것 같았다.
O •••••• 스시 쑤] Q,1^ ••••••
흘린 물방울이 목을 타고 옷 안 으로 들어가 안 그래도 땀으로 축 축한 몸을 더 찝찝하게 만들었다. 옷을 벗어 던지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며 덮어쓴 후드 속으로 손을 넣어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했다.
"......왜 그러고 계십니까?"
문득 라이너를 돌아봤다가 눈이 마주치고 고개를 기울였다. 물을 마시려는 듯 물병을 기울이고 있 는 라이너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 며 물을 다 제 몸으로 흘리고 있 었다.
내 부름에도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아 살짝 다가가자 퍼뜩 뒷걸 음질 친 그가 물병을 내려놓았다. 라이너도 지치긴 한 건지 그의 양 귀가 식을 틈도 없이 타오르고 있 었다.
"미르 님의 체력은 나쁘지 않습
니다. 검사 평균에 비해서 말입니 다. 다만 소드 마스터 평균으로 봤을 땐......
" 형편없죠?"
라이너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나 도 이제는 반쯤 해탈한 채 바닥에 털썩 내려앉았다. 조심스레 다가 온 라이너가 내게서 꽤 멀찍이 떨 어진 곳에 앉았다.
"운동은 근력운동과 유산소운동 을 겸해서 진행할 겁니다. 다음 주에 제대로 된 트레이닝 코스를 짜서 미르 님께 전달해 드리겠습
니다.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하 면 영양분을 충분히 섭취하셔야 할 것 같군요. 미르 님께서는 너 무 마르셨습니다."
앞으로 진행될 운동을 설명하던 라이너는 끝에 가선 잔소리에 가 까운 말들을 늘어놓았다. 라이너 가 이런 캐릭터였나 싶어 조금 의 아하면서도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걱정이 들어 있음을 깨닫고 기분 이 조금 이상해졌다.
'다정한 사람이구나.'
원작에선 의무적인 일과 검에 관련된 일, 아리아에 관련된 일을 제외하곤 꽤 무심한 사람으로 표 현됐는데, 역시 원작은 믿을 만한 게 못 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나 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걱정 어린 말들을 늘어놓고 있었
"아인하르트 경, 오늘 운동은 더 해야 합니까?"
라이너의 말을 끊고 물었다. 잠 시 내 몸 상태를 살핀 라이너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첫날이니 이 정도만 해 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오늘 특별한 약속 같은 건 있으신지요."
"없습니다. 물어보시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강아지처럼 기우뚱 고개를 기울 이는 라이너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럼 저랑 식사하러 가시지 않 으시겠습니까? 제가 사겠습니다."
'물어볼 것도 있고. 도와줘서 고
맙기도 하고.'
내 계획대로라면 라이너는 자주 얼굴을 맞대야 하는 사이였다. 이 왕 이렇게 된 거 이 기회에 친해 지는 게 좋았다.
"시, 식사 말이십니까?"
라이너가 답지 않게 말을 더듬 었다. 그의 목덜미가 불타는 고구 마처럼 붉어졌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라이너의 얼굴 위로 숨길 수 없는 설렘이 드러났다.
'역시 내가 소드 마스터라서 그 런가?'
미쳐 버린 검 덕후가 소드 마스 터에게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한 일 이었다. 라이너가 나를 보자마자 대련을 신청하지 않았던 게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역시 라이너가 자신보다 강한 이를 좋아한다는 설정은 들어맞는 듯했다.
"나름 데이트 신청인데, 저 거절 당하는 겁니까?"
그 무심하고 금욕적인 인상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웃겨 눈을 접으며 괜히 섭섭해하는 말투를 지어냈다. 파드득 몸을 떤 라이너 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이젠 그의 손까지 달아올라 있었다.
"절대, 아닙니다! 저는......
나보다 덩치도 훨씬 큰 남자가 내 한마디에 쩔쩔매는 모습은 꽤 즐거웠다. 조금 더 놀렸다간 울기 라도 할 것 같아 라이너의 대답을 얌전히 기다려 주니, 한참 고민하 던 그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네? 잘 못 들었습니다."
작게 웅얼거리는 라이너를 향해 엉덩이걸음으로 다가가 못 들은 척 능청스레 상체를 숙여 몸을 가 까이 했다. 크게 움찔한 라이너가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고자 했던 것 같았지만, 손등까지 발그레했 으니 소용이 없었다.
"......좋다고, 했습니다."
한참 마른세수를 한 라이너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손아래 드러 난 그의 눈동자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상당히 다른 빛을 띠고 있었 다. 번뜩이는 금빛이 내 시야를 사로잡는다. 이번엔 되레 내가 놀 라 살짝 움찔했다.
수많은 감정들이 거미줄처럼 뒤 엉킨 금안에 가장 크게 자리 잡은 감정은 갈망이었다. 끝도 보이지 않는 깊고 음습한 갈망.
오랫동안 충족되지 못해 가뭄으 로 갈라진 대지처럼 말라 보이는 그 갈망의 사이사이를 채운 건 집
착과 흥분, 그리고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불꽃이었다.
'라이너가 왜, 나를 저런 눈으로 보는 거지.'
보지 말아야 했던 무언가를 봐 버린 느낌.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오랫동안 해묵은 깊고 짙은 무언가.
절대 소드 마스터를 향한 동경 같은 이름으로 형용할 수 있는 감 정이 아니었다.
"같이 가 주십시오. 원합니다."
서늘하던 눈꼬리가 흐드러지게 휘었다. 그 눈꼬리 아래 가늘게 뜨인 눈동자엔 여전히 감정들이 들끓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게 그저 식사인지,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식사를 겸할 수 있는 한적한 술 집에 들어서 자리를 잡으며 라이
너의 안색을 살폈다. 평민으로 살 던 나야 실제로 자주 들리던 곳이 었지만, 귀족인 라이너는 익숙하 지 않을 게 분명했다.
"정말 이런 곳도 괜찮으시겠습 니까?"
"충분합니다."
라이너는 아무렇지 않게 낡은 나무 의자에 걸터앉았다. 몸짓에 서 익숙하지 않음이 보이긴 했지 만, 확실히 싫은 기색은 아니었 다.
"그래도 정말 더 좋은 곳에서 사 드릴 수 있었는데......
"정말 괜찮습니다. 제게 중요한 건 장소가 아니라서."
조금 느른하게 풀린 목소리로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내게로 시 선을 고정하는 라이너와 어쩐지 시선을 마주하기 힘들어 살짝 고 개를 돌렸다.
처음엔 가려 했던 곳은 이런 곳 이 아니었다. 크리시스 가의 입적 되며 내 앞으로 막대한 사유 재산 이 생겼기에 금액은 문제가 되지
않는 만큼, 고급 레스토랑에서 대 접해 주고 싶었다.
다만 문제는 내가 수도에서 아 는 고급 레스토랑이 단 한 곳밖에 없다는 것.
'어...... 혹시 '헬레네'라는 레스 토랑 아십니까?'
늘 엘과 만남을 갖던 곳이었다. 내 물음에 순간 얼굴을 구기는가 싶던 라이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신전 바로 뒤에 있는 교황
소유의 레스토랑 아닙니까.'
'아, 헬레네가 교황 소유였나 요?'
'그래서 제 집처럼 사용했구나.'
엘은 헬레네는 자유자재로 이용 했고, 헬레네는 교황의 소유. 엘 은 교황. 이제야 엘이 늘 붐비는 헬레네를 제멋대로 이용할 수 있 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나와는 별개로, 라이너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늘 무표정이긴
하지만, 그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입술을 꾹 깨물곤 했다.
'헬레네에서 식사를 사려고 했는 데...... 경께선 헬레네를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 같네요.'
'......그것보단 그곳 주인을 좋아 하지 않습니다.'
헬레네의 주인이라면 엘이었다. 라이너가 엘을 싫어할 이유가 뭐 가 있나 싶어 고개를 기울이다, 사정이 있겠지 생각하며 다른 장 소를 고심했다. 싫다는데 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제가 귀족들이 다니는 레스토랑을 잘 모릅니다. 경께서 가고 싶으신 곳은 없으십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통 갈 만한 곳 이 없어 결국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라이너에게 직접 물었다. 가난한 평민으로 살아왔으니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무지를 드 러내는 건 늘 부끄러운 일이었다.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네?'
'전 아무거나 잘 먹어서 어디라
도 좋습니다. 저곳 어떠십니까?'
살짝 시선을 피한 나를 지그시 응시하던 라이너가 무덤덤하게 실 토했다. 소후작인 그가 이런 쪽으 로 무지할 리 없는데도 정말 모르 겠다는 듯 평민들이 갈 법한 낡은 건물을 가리키는 라이너에게서 날 향한 배려를 읽었다.
'참 사려 깊은 사람이야.'
누구일지는 몰라도 라이너에게 사랑을 받게 될 사람은 무척 행복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그럼 식사만 2인분 주문하죠."
대강 먹을 만한 메뉴로 2인분을 시키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탁자 에 두 팔꿈치를 지탱하고 깍지 낀 두 손 위로 턱을 얹은 채 라이너 를 지그시 응시했다. 내 시선에 노출된 그가 긴장한 표정으로 목 울대를 울렁였다.
"그럼 아인하르트 경. 우리 대화 를 좀 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