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화
내가 진지한 눈빛을 보내자, 라 이너의 표정이 덩달아 진지해졌 다. 들어오며 아무도 들이지 말라 고 이미 언질을 해 둔 술집 내부 엔 나와 라이너밖에 없었다. 술집 이 주가 되는 매장인지라 조명도 어두침침해 취조실에서 죄인을 취 조하는 느낌이었다.
"......무슨 대화 말씀이십니까?"
무슨 말을 꺼낼지 어느 정도 눈 치챘을 텐데 모르는 척하는 라이 너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아인하르트 경께서 제 실명을 알고 계신 부분 말입니다."
라이너의 어깨가 살짝 움찔했다. 그 일로 그의 목에 칼까지 들이밀 었으니 기억이 안 난다고 할 리는 없었다. 흔들리는 라이너의 동공 을 지그시 응시하다, 긴장감을 유 지하며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그때 골목에서 절 카슈미르라
고 부르셨죠."
"아주 신기한 우연으로 크리시 스 가의 장녀 이름도 카슈미르 고."
"놀랍게도 경께 절 소개해 준 사람은 크리시스 공작님이네요?"
특이점들을 직접 나서서 하나하 나 짚어 나가는 내 모습에 라이너 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어쩔 줄 모르고 내 시선을 피하던 그가 몸을 살짝 뒤로 물렸다. 본 능적인 행동인 것 같았다.
마나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파동 처럼 느껴지는 그의 기운과 그의 표정, 그의 눈빛 등을 날카롭게 읽어낸 나는 결론을 내렸다.
'라이너는 이 상황을 피하고 싶 어 한다.'
정확히 뭘 피하고 싶어 하는 건 지는 확신할 수 없다. 다만 내 감 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라이너는 용병 미르의 정체를 이미 눈치채고 있지만, 당사자 앞
에서 그걸 직면하고 싶어 하지 않 는다.'
눈을 가늘게 떴다.
라이너 아인하르트는 바보가 아 니다. 용병 미르가 카슈미르 크리 시스와 동일 인물이라는 건 아마 데뷔탕트에서 만났을 때 진작 눈 치를 챘을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당사자와 그 문제에 대해 직면한 상황에서 피하고 싶 다는 기색을 만연히 드러내는 건, 무슨 이유가 있음이 분명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저는 카슈미르 크......
"잠깐 I"
빙빙 돌리는 건 내 성격에 맞지 않는다. 그의 사정이 어떻든 나는 이 부분에서 비밀을 지켜 주겠다 는 확답을 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내 입으로 먼저 말하고 시작하려 는데, 라이너가 다급하게 내 말을 끊어 냈다.
'텁하는 소리와 함께 강제로 말을 멈춰야 했다. 단단한 기사의
손바닥이 신체에서 가장 부드러운 부위를 가볍게 감쌌다.
입이 막힌 채로 라이너를 지그 시 응시하니, 제 손에 막힌 내 입 술을 보고 순간 멍한 눈을 하던 그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 퍼뜩 정 신을 차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미 르 님의 몸에 손을 댔습니다. 저 는 "
라이너는 지금 당장이라도 내가 명하면 할복할 것 같은 대역 죄인
의 표정을 지었다. 그는 거듭 사 과하며 황급히 내 입술에서 손을 떼어 내는데, 빠져나가려는 커다 란 손을 내가 붙잡았다.
라이너의 손은 따뜻했다. 손이 잡힌 라이너의 황금빛 눈동자가 정처 없이 혼들린다. 그의 손가락 이 경직되듯 곱아들었다. 팽팽한 분위기가 주위를 감쌌다.
'흐 '
◎ '
돌상처럼 굳어버린 라이너를 뒤로 한 채 나는 깊은 생각에 잠
겼다. 하도 간절하게 내 입을 막 기에 내버려 두었는데 아무리 생 각해도 기묘한 상황이었다.
'라이너가 듣고 싶지 않아 할 이 유가 대체 뭐가 있지?'
용병 미르가 크리시스의 공녀라 는 사실은 정보상에만 내다 팔아 도 막대한 값을 얻을 수 있는, 아 마 등급으로 치면 A+는 충분히 나올 법한 정보였다.
물론 라이너가 타인의 비밀을 내다 팔 인간은 아니다. 다만 내
가 내 정체를 발설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는 라이너 의 태도는 상당히 기이했다.
"눈치 챘죠?"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라이너의 손목을 틀어쥔 채 빙 돌 려 물었다. 돌려 말하는 건 내 성 격에 맞지 않았지만, 이유는 몰라 도 라이너가 저렇게까지 싫어하는 데 몰아붙이고 싶진 않았다.
라이너의 안색이 가라앉는다. 기 이하게 번뜩이는 황금빛 눈동자로
식탁 어딘가를 응시하던 라이너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것은 충 분한 긍정의 표시였다.
"그걸 타인에게 발설하실 겁니 까."
눈을 가늘게 뜨고 느른한 분위 기를 풍기며 라이너의 손목을 엄 지로 꽉 눌렀다. 기사라는 것을 티내듯 꽤 거친 피부가 엄지에 감 겨들었다. 피부 아래 거친 맥박이 느껴졌다.
동맥이 흐르는 손목은 급소. 협
박의 의미를 담은 손길이었다.
라이너의 손이 눈에 띄게 경직 됐다. 그의 손이 이렇게까지 붉어 질 수도 있는 걸까 싶을 정도로 피가 몰렸다.
라이너가 내게 잡히지 않은 손 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그의 양 귀가 불에 타다 못해 재가 되어 날리기 직전처럼 붉었다. 아마도 내 협박이 잘 먹혀든 모양이었다.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아인하르 트의 검과 제 기사로서의 명예와
황궁 제2기사단을 걸고 맹세하겠 습니다. 그러니 제발, 손 좀 놔주 십시오."
'음...... 저 정도면 자기 모든 것 을 걸고 맹세하겠다는 건데......
하얀 피부가 온통 붉어진 채 간 절하게 말하는 라이너를 보며 떨 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더 잡고 있으면 자기 장기와 부모님 까지 걸고 맹세할 기세였다.
"......믿겠습니다."
라이너는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까지 무서웠나 싶 어 천천히 잡은 손을 놔 주니, 그 가 황급히 제 손을 빼내어 다른 손으로 덮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튼 그의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 같았다.
조금 미묘한 분위기 사이에서 식사가 나왔다. 야채와 크림소스 를 곁들인 햄버그 스테이크였다. 맛은 괜찮게 먹을 만한 정도였다.
라이너의 기색을 살피니 그 또 한 잘 먹고 있었다. 스테이크가
아니라 그릇을 썰고 있다거나, 물 대신 소스를 마실 뻔하는 실수들 을 저지른다는 걸 제외하면 말이 다.
먼저 식사를 마치고 천천히 식 사를 이어 가는 라이너를 구경하 고 있으니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 이 흐르는 게 보였다. 조금 조심 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많이 불편하십니까?"
끼긱.
나이프를 든 라이너의 손이 접 시 중앙을 잘랐다. 얼마나 힘을 준 건지 접시에 틈이 생겨 그 사 이로 크림소스가 샐 정도였다.
"절대, 아닙니다."
그가 단호하게 부정했다. 황금빛 눈동자는 참이라는 듯 심지가 곧 아 있었으나, 어쩐지 그는 나와 오랫동안 눈을 마주치질 못했다.
'아닌 것 같은데......
"우선 알겠습니다."
본인이 아니라는데 더 할 말은 없었다. 그래도 라이너가 부담스 러워하는 것 같아 그의 식사 과정 을 빤히 바라보는 대신 고개를 돌 려 슬슬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창밖의 수도를 바라보았다. 아직 은 초봄이라 해가 짧았다.
수저가 식탁에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접 시를 깔끔히 비운 라이너가 냅킨 으로 제 입가를 닦아 내고 있었
다.
"식사 맛있게 하셨습니까?"
"만족스러웠습니다. 대접해 주셔 서 감사합니다."
형식적인 인사가 오가고,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말을 골라 궁금했던 것을 입에 담았다.
"그러시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어째서, 내 정체와 마주하지 않 으려 하는지. 주어는 필요치 않았 다. 라이너가 생각이 많아 보이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천천히 가 라앉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황 금빛 눈이 눈꺼풀 아래 모습을 감 췄다. 눈을 질끈 감은 라이너가 한숨처럼 말했다.
"......아직은 알고 싶지 않습니 다."
"아직은, 말이죠."
그냥 알기 싫다고 하면 나와 엮 이기 싫다는 뜻으로 이해했을 텐 데, '아직은'이라는 전제가 내게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라이너가 천천히 눈을 떴다. 먹 구름처럼 그의 눈동자를 덮었던 깊은 고뇌가 사라진 뒤였다. 불꽃 처럼 타오르는 깊은 열망만 남은 황금빛 눈동자를 지그시 응시했 다.
'그 아이.'
검은머리에 파란 눈을 하고 나 를 올곧이 바라보던 소년. 오래전 일임에도 빛바래지 않고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이.
그 아이와 비슷한 양상을 띤 로
즈우드 향이 끊임없이 내 코를 간 지럽 혔다.
"당신과 등을 맞대고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을 때. 그때 내가 당신을 직접 찾아갈 겁니 다."
라이너 그 자체만 봤을 땐 알아 들을 수 없는 말.
허나 만약 그가 그때 그 아이라 면.
작은 가정이 내 머릿속을 어지
럽혔다.
라이너가 천천히, 내 얼굴을 향 해 손을 뻗었다. 접촉해도 될지 허락을 구해 오는 눈빛에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 우선 해 보라는 뜻 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의 손답게 굳은살로 거친 손끝이 가면에 덮인 내 뺨 부근을 조심스레 쓸어내린다. 당연하지만 감촉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천 천히 내 뺨을 잡았다. 긴 손끝이
내 귀 부근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
금방이라도 무언가 터질 것처럼 팽팽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가 이미 내 정체를 알고 있다 는 걸 확신했기에 가면이 벗겨지 는 건 두렵지 않다. 그럼에도 이 상황이 긴장되는 것은, 단연 눈앞 에 라이너 때문일 것이다.
금방이라도 내 가면을 벗겨 버 리고 싶다는 듯 가면을 이은 줄을 매만지는 손. 무언가를 필사적으 로 억누르듯 꽉 문 붉은 입술. 애 타는 것처럼 계속 입술을 쓸고 모
습을 감추는 붉은 혀.
열망으로 가득 차 이젠 틈새조 차 없어 보이는, 맹수를 닮은 황 금빛 눈동자.
"그날엔 반드시 답을 주셔야 할 겁니다."
얼굴이 훅 가까워짐과 함께, 낮 고 굵은 목소리가 내 귓가를 거칠 게 긁었다.
그 순간 나는 과거로 저물어 버 린 기억의 편린을 떠올리고 말았
다.
'우리 둘 다 컸을 때 말이야. 뱉 은 말에 무게가 생기고, 네가 나 만큼 강해졌을 때. 그때도 네 마 음이 여전하다면...... 그땐 확실히 답을 줄게.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는 모르겠지만.'
'설마, 진짜......?'
과거와 현재가 어지럽게 뒤섞이 며 내 마음을 헤집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이글거리는 황금빛 눈동자 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까
워진 그의 목덜미에선 짙은 로즈 우드 향이 났다.
" -.1 W
Or
라이너가 짙은 한숨을 뱉었다. 그의 손은 분명 가면 너머를 겉돌 고 있음에도 내 피부를 파헤치는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무언 가를 품고 넘실거리던 눈동자가 일순 퍼지는 피비린내와 함께 눈 꺼풀 너머로 사라졌다. 그의 붉은 입술이 날카로운 송곳니에 혹사되
어 붉은 핏줄기를 흘렸다.
이윽고 다시 드러난 그의 눈동 자엔 오직 처절한 간원만이 남아 있었다.
"......그때까지는 모르는 걸로 하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정체를 모르고, 당신은 나를 '라이너 아 인하르트'로만 아는 겁니다. 우리 는, 아직 다시 만나지 않은 겁니 다."
그 말을 하는 라이너의 표정은 너무 단호해서. 나는 다른 말을
덧붙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밖이 많이 어둡습니다. 데려다 드리고 싶지만 미르 님께서 원치 않으실 것 같군요. 먼저 가 보겠 습니다."
내 뺨에 닿았던 손을 거둔 라이 너가 손등으로 입술에서 흐른 핏 줄기를 거칠게 닦아 내곤 벌떡 일 어났다. 도망치듯 다급한 몸짓이 었다.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심해 저 너머로 처박힌 듯 낮게 그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짧은 인사 를 남겼다. 라이너가 휙 몸을 돌 려 식당을 빠져 나갔다. 흩날리는 은회색 머리칼을 멍하니 바라보다 작게 읊조렸다.
"카르텔......
마수가 가득한 숲에서 만났던 소년의 이름.
"라이너 카르텔 르 노아 아인하
르트."
나는 그제야 라이너의 풀네임을 기억해 냈다.
다시 만난 소년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자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