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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59화 (59/254)

59 화

시간은 바닷가에서 한 줌 쥐어 올린 모래와 같다.

잠시 눈을 깜빡이는 사이 손 틈 으로 모래가 빠져 나가듯, 시간 또한 그만큼이나 덧없이 흘러가 버렸다.

그러니까, 아타라 왕국의 사절단 이 도착했다는 소리였다.

"슈슈 언니! 사절단 방문 축하 연회에 뭐 입고 갈 거야? 나랑 드레스코드 맞추자!"

"슈슈와 드레스코드는 내가 맞 출 거다. 넌 저번에 맞추지 않았 나."

"염병하지 말고 나가세요, 오라 버니. 언니는 나랑 맞출 거니까."

"염병은 네가 하고 있는 그거고. 블랙과 골드 어떤가? 얼마 전에 괜찮은 제복 디자인을 봤는데."

"하! 언니는 나랑 버건디로 맞출 거야! 버건디 제복 괜찮지? 내가 카트린느 의상실로 주문 넣을게!"

"슈슈 표정을 봐라. 간악하고 지

독한 너와 드레스코드를 맞추느니 자결하겠다는 표정이지 않나. 슈 슈를 사랑한다더니 슈슈 의견을 그런 식으로 강제하는 건가? 인 성 참 볼만하군."

"사족을 멸해야 할 깜찍한 놈이 혀만 살아서...... 눈깔 삐셨어요? 저건 언니가 제일 행복할 때 짓는 표정인데. 아, 오라버니는 언니랑 몇 달 안 살아 봐서 언니 표정도 못 읽는구나? 오라버니는 언니랑 어렸을 때 추억도 없지? 안쓰러 워서 어째."

"......고약하기 짝이 없군. 그렇 게 굴다간 슈슈도 널 싫어하게 될

거다."

난폭하게 싸우는 둘 사이에서 익숙하게 차를 들이켜다 말리는 시늉은 해 주기 위해 타협안을 내 보았다.

"그냥 셋 다 똑같이 맞추면 안 되는 건가? 뭐 블루 같은 걸 로......

"내가 왜 이 자식하고 드레스코 드를 맞춰!"

"차라리 벌거벗고 다니는 게 낫 겠군."

물론 타협안은 즉각 묵살됐지만.

서로에게 주먹을 날리기 직전인 칼과 아리아를 보는 게 하루 이틀 이 아니었던 나는 익숙하게 체념 한 채 다른 생각에 잠겼다.

'아타라 왕국의 사절단은 전쟁의 전초전과 같지.'

본격 '요정의 밤'。] 진지한 내용 을 타게 되는 시발점이었다.

'알렉산드로 레안드로 레오네 드 아타라.'

피와 재가 자욱한 왕좌를 검으 로 쟁탈한 아타라 왕국의 어린 왕. 탄생 순서가 왕위 계승에 상 당한 영향을 끼치는 아타라에서 7왕자로 태어나 기어코 왕좌에 앉은 집념의 인간이었다.

'말 그대로 검 든 망나니지.'

알렉산드로는 겨우 15살에 소드 익스퍼트 경지에 이르러 제 형과 누나를 모두 도륙하고 17살 나이 에 왕이 되는 미친 먼치킨이자, 자신을 막아서는 모든 걸 베어 내

는 광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사실 그런 것치고 상당히 얌전 해서 놀랐지만.'

티격태격하는 칼과 아리아를 멀 거니 바라보다 손에 든 오늘자 신 문을 내려다보았다.

신문은 원작을 떠올리게 된 이 후로 늘 빠지지 않고 챙겨 보고 있었다.

'여태껏 알렉산드로의 폭정에 대 해 신문 기사가 쓰인 적은 없었

지.'

원작에서 알렉산드로슨 즉위와 동시에 미친 폭정을 일삼아 대륙 전체가 무척 시끄러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허나 내가 매일 열심히 읽고 있 는 이 태양일보에선 단 한 번도 알렉산드로의 폭정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오늘자 신문에도 사절단 이 도착했다는 기사만 맨 첫 장에 떡하니 적혔을 뿐이었다.

'원작에서 설명되는 알렉산드로

의 도 넘은 폭정만 생각하면 신문 에 나오지 않을 리가 없는데...... 역시 원작은 믿을 게 못 되는 건 가.'

옅게 한숨을 뱉으며 신문을 접 었다.

원작에 너무 의지하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해도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원작이란 틀로 사람들 을 재단하곤 했다.

이런 내가 싫었지만, 다가올 전 쟁에서 내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선 어느 정도 원작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원작에 따르면, 이번 사절단엔 사자 중 한 명으로 위장한 알렉산 드로가 제국으로 온다.'

개연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사건이었다.

원작이 연재될 때도 국왕이 왕 국을 어떻게 비우냐는 독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는데, 작가는 이에 대해 검 든 망나니 알렉산드로 눈 에 뵈는 건 아리아밖에 없기 때문

이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사실 그럴 만도 ofl. 알렉산드로 는 정말 아리아에게 미친놈이

었으니까.'

부드러운 연분홍빛 머리칼을 휘 날리며 사랑스러운 산홋빛 입술로 칼에게 쌍욕을 하는 아리아를 멀 거니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알렉산드로가 왕궁을 비우는 사 상 초유의 미친 짓까지 하며 제국 을 방문하는 이유는 오직 아리아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로는 소설계에선 흔한, 사연 있는 개자식이었다.

7황자로 태어나 왕위 계승권에 선 가장 미비한 입지를 가지고 있 던 알렉산드로슨 왕위를 위해 지 반을 다지던 손위 형제들에게 처 리하기도 귀찮은 애송이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무시와 홀 대를 받는 게 일상이었으며 결국 12살이 되던 해에 2황자가 보낸 암살자들을 맞닥뜨린다.

'반드시 강해지셔야 합니다. 그 래서 복수해 주셔야 합니다! 전 한낱 왕자의 유모로 남고 싶지 않 습니다! 왕이 돼 주십시오. 왕이 돼서, 제가 왕의 기틀을 닦은 신 하로 남게 해 주십시오!'

유일하게 제 옆을 지켜 주는 이 였던 유모의 희생으로 간신히 텔 레포트해 도망친 알렉산드로는, 중상을 입은 채 솔라티네 제국 어 느 뒷골목에 떨어진다.

'어! 여기 사람이......!'

그리고 그곳에서 아리아를 만난

'원작에 따르면 아리아가 알렉산 드로를 치료해 주고 플래그를 꽂 았어야 했는데...... 음......

이제는 개처럼 서로를 물어뜯고 있는 칼과 아리아를 바라보며 애 매한 표정을 지었다.

원작에 따르면 카슈미르는 10살 때 아리아의 곁에서 사라졌어야 했으나, 내가 카슈미르가 되며 아 리아의 어린 날을 함께하게 되었

다.

아리아와 평생을 함께 살아온 내 기억에 따르면, 아리아는 알렉 산드로는커녕, 개 한 마리조차 주 워서 집으로 데려온 전적이 없었 다.

'오히려 뭘 잔뜩 주웠던 건 나였 지.'

어린 날 주워 버렸던 카르텔과 레오, 이름 없는 소년, 커서 주웠 던 디에고까지 떠올리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면 난 어려서부터 아 프고 약한 것들에게 약했다.

'어려서 인연들이 이렇게 될 줄 은 상상도 못했는데...... 참 진한 인연들이네.'

이제는 다 커 버린 라이너와 엘 리오르를 떠올렸다. 커서 이렇게 만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한 인연 들이었다.

'어려서 구해 준 애들이 다 남주 인공들일 줄 누가 알았겠냐고!'

솔직히 이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들의 미묘하던 태도는 이제 이해가 됐지만, 내가 그들을 어떻 게 대해야 할지 감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엘리오르는 모르는 척해 달라고 제 입으로 말했으니 모르는 척해 주고 있고, 라이너도 모르는 걸로 하겠다고 했으니 우선 나도 모르 는 것처럼 하고는 있는데......

이것들은 다 모르는 척이지, 정 말 모르는 건 아니다. 그들과 함 께했던 날들은 피와 재로 자욱하 던 내 어린 나날들에서도 여전히 빛나는 소중한 기억들이었다.

그 기억들을 아는 척하고 추억 들을 나눠 보고 싶은데 둘 다 짠 것처럼 모르는 척을 하니 나로선 조금 섭섭했다.

'참...... 다들 나보다 나이도 많 은 데다 하나는 나보다 직위도 높 으니 내외들 하지 말라고 뒤통수 를 쳐 줄 수도 없고...... 진짜 어

떻게 대해야 하냐고......

복잡한 마음에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트렸다. 그러다 문득, 어린 날 구해 준 세 소년 중 아직 다시 만나보지 못한 게 단 한 명뿐이라 는 사실을 깨달았다.

' 레오.'

자신을 레오라 소개한, 13살쯤 중상을 입고 뒷골목에 쓰러져 있 던 소년을 하나 구한 적이 있었 다. 디에고를 치료했던 그 오두막 에서 앙칼진 소년과 실랑이를 하

며 꽤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지 금 생각해 보면 몇 되지 않는 어 린 날 추억이었다.

'......잠깐만.'

일순 퍼뜩 떠오르는 하나의 가 정.

틈만 나면 남주인공들과 엮이는 내 불운일지 행운일지 모를 이 불 문율을 토대로 했을 때 예상되는 말도 안 되는 가정이었다.

내가 13살이면 알렉산드로는 12

살. 알렉산드로가 제국으로 도망 쳐 온 게 바로 12살 무렵.

알렉산드로슨 제국 뒷골목에 떨 어졌을 때 중상을 입고 있었고, 폭우가 내리는 한여름에 뒷골목에 서 쓰러져 있던 레오 또한 중상을 입고 있었다.

'레오가...... 알렉산드로......?'

이 문장 하나에 머리가 띵했다.

황급히 신문에 찍힌 알렉산드로 의 얼굴을 확인했다. 지독하게 잘

생긴 얼굴은 또 다시 기시감을 불 러일으켰다. 내 직감이 위험하게 번뜩였으나, 우선 침착하게 생각 부터 정리했다.

'그...... 앙칼진 고양이가 알렉산 드로 같은 검 든 망나니처럼 됐을 리 없어. 머리색도 다르고. 얼굴 은...... 꽤...... 닮은 것 같기도, 하지만...... 상황도 거의 흡사하 고...... 아니 진짜? 아니, 아니야. 우선 실제로 만나 보기 전까진 몰 라.'

나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알렉산드로를 구했다는 것 자체 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함께 머무는 동안 앙칼 진 고양이처럼 구는 레오를 상당 히 거칠게 다뤘다는 것에 있었다.

'알렉산드로가 원작처럼 사절단 으로 위장해서 올까......? 아니, 아리아가 구해 주는 사건이 없었 으니 안 올지도 몰라. 그런데...... 만약, 만약에 내가 구한 레오가 알렉산드로면...... 나한테 앙심 품 고 복수하려고 돌아오는 거 아니

야......?'

수많은 생각들로 머리가 아팠다. 레오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 을 여러 번 하긴 했지만, 레오가 알렉산드로 같은 검 든 망나니로 자랐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엘이 말하던 미친놈은 또 누구 지......

사절단을 생각하다 보니 데뷔탕 트에서 엘의 충고가 떠올라 더 머 리가 아파졌다.

한참 머리를 잡고 끙끙거리다, 한숨과 함께 생각을 멈췄다.

'다음 주에 있을 사절단 방문 축 하 연회에서 다 밝혀지겠지.'

거기서 엘이 말한 미친놈이 누 군지, 레오는 정말 알렉산드로인 지 확인하면 되는 노릇이었다.

'만약 레오가•••••• 정말 알렉산드 로라면...... 그래서 나한테 앙심을 품고 사절단으로 위장해서 왔다 면...... 뻗대야지. 별 수 있나.'

아무리 그가 검 든 망나니라도 크리시스의 공녀인 나를 댕강 하 진 못할 것이다. 내가 쉽게 댕강 당해 줄 사람도 아니고.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거 당당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애초에...... 알렉산드로에겐 오 두막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별거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잊 었을 수도 있고...... 날 알아보지 못할지도 몰라.'

생각이 여기까지 닿으니 조금

씁쓸해지기도 했다. 내겐 꽤 소중 했던 시간이 함께했던 이에겐 별 거 아니라는 건 조금은 슬픈 일이 니까.

하지만. 복잡한 이해관계들이 수 없이 얽혀져 관계가 퇴색될지라 도, 어린 내게 문득 찾아와 짙은 레몬 향만 남기고 사라진 소년이 행복하기를 기도했던 시간은 변질 되지 않았다.

'그래도. 레오가 알렉산드로든 저 멀리 변방의 농부든 행복했으 면 좋겠네.'

진창 속에서 살던 어린 아이가 빈 작은 소원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내 드레스코드를 가지고 서로 멱살을 잡게 생긴 아리아와 칼을 간신히 설득해 합의점을 찾았다.

그 결과 내 의상은 버건디와 블 랙, 골드가 적절히 섞인 제복으 로, 칼은 블랙과 골드로 이루어진 연미복으로, 아리아는 버건디색

드레스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서 로와 비슷한 드레스코드인 의상은 죽어도 입지 못하겠다는 칼과 아 리아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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