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60화 (60/254)

60 화

합의가 끝난 뒤에도 죽어라 서 로를 물어뜯는 칼과 아리아를 피 해 몰래 거리로 나왔다. 소드 마 스터인 나는 호위가 없이도 밖을 통행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으 나, 아무래도 맨얼굴로 나돌아 다 니긴 부담스러웠기에 아예 미르로 위장하고 집을 나섰다.

정처 없이 거리를 헤매던 내 발 걸음이 닿은 곳은 다름 아닌 술집

이었다.

"......저거 미르 아니야?"

"설마. 미르가 이런 곳을 오겠 나. 미르를 따라하는 용병 중 하 나겠지."

"그래도...... 이 근방에 미르가 많이 돌아다닌다고 들었는데

"에이. 요즘 미르가 의뢰도 받지 않고 두문불출하다는 소리 못 들 었는가? 죽었다는 소문까지 있던 데 이런 데서 술이나 마시고 있을 리가."

"역시 그런가......

죽지도 않고 이런 데서 술이나 마시고 있는 거 맞다.

날 힐끔거리며 시끄럽게 수군거 리는 사람들을 익숙하게 무시한 채 바 구석에 앉았다. 내가 미르 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듯 나를 힐끔거리던 바텐더가 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다가왔다.

"뭘로 주문하시겠습니까?"

"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혼들 어서."

내 오랜 고정 메뉴였다. 한숨과 같은 한마디에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텐더의 동공이 살 짝 혼들리고, 주위의 수군거림이 더욱 커졌다.

"목소리까지 변조되는 거 보면 진짜 미르 아닌가?"

"......흠. 그래도 변조까지는 따 라할 수 있으니까......

떠들썩한 주위를 익숙하게 무시 했다. 어느새 주위 모든 소음은 내게 백색소음이 되었다. 바 의자 발걸이 위에 발을 얹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느른한 한숨을 쉬었 다• 정말 마음이 복잡할 땐 조용 한 곳보단 떠들썩한 사람들 사이 로 숨어드는 편이 나았다.

'심란해.'

생각이 뚝뚝 흘러내릴 정도로 많았다.

아타라 왕국의 사절단, 사냥 대 회, 검술 대회, 전쟁, 알렉산드로, 알렉산드로, 알렉산드로.

'빌어먹을...... 알렉산드로가 문

제군.'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앙 칼진 고양이 같던 레오의 얼굴과 포식 이후 배부른 맹수 같던 사진 속 알렉산드로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젠장! 진짜 레오가 알렉산드로 면 어떡하지?'

레오를 동네 친한 동생처럼 대 하던 어린 날이 생각나 머리를 부 여잡았다.

'밥 안 먹는다고! 먹기 싫다고 했잖아!'

'이 애송이 새끼가 진짜...... 인 간은 안 처먹으면 죽는다고, 개망 나니야.'

'그래! 안 처먹고 뒤져 버릴 거 야! 그러니까 날...... 읍! 안, 먹, 큽'

'시체 치우려고 너 데려와서 치 료까지 해 준 줄 아냐? 나도 없 는 사정에서 널 도와주는 거니까 지랄은 적당히 해.'

'치워. 꺼져. 뒤져.'

'하...... 너 이 약 만드는 데 재

료가 얼마나 비싼 게 들어가는 줄 아냐? 제발 반항 좀 그만하고 얌 전히......

'그러니까 왜 그렇게 비싼 재료 까지 써서 내 약을 만드는 건데! 그냥 나 버리면 되는데 왜 날 돕 는 거냐고! 당장 대답......! 컥!'

'네가 헌신짝이냐? 마음에 안 든다고 갖다 버리게. 다음부터 얌 전히 안 먹으면 입으로 먹여 준 다.'

'허억, 헉, 나한테, 큭, 이런, 천 한 일을, 시키고도, 헉, 무사할 줄 알아!?'

'넌 약해 빠져서 이렇게라도 운 동해야 돼. 저기 또 약초 있네. 얼른 가서 캐.'

'이 미친놈이, 큭, 진짜! 그냥 네 가 귀찮아서잖아! 윽, 내 등에서 내려오기라도 해!'

'체력 기르는 데 비료 포대 업고 다니는 것만큼 좋은 운동이 없어. 우리 집엔 비료 포대가 없으니 나 라도 업어야지 어떡하냐. 다 널 위해서야.'

'너, 내가 반드시 죽여 버릴 거 야!'

'내가 손가락만 휘둘러도 죽을 것 같은 네가? 체력 기르고 강해

진 뒤에 그런 소리를 하면 무서워 하는 척 정도는 해 주마.'

어렸을 때의 나는 지금의 나보 다 훨씬 유치했고, 입이 더러웠으 며, 감정적이었다. 원작과 전생을 기억한 정신연령 약 50살의 현재 와 좀 어른스럽긴 해도 실제 정신 연령이 13살이던 과거가 같을 리 없었다.

앙칼진 고양이처럼 굴던 레오가 날뛸 때면, 나는 상당히 유치하게 대처하곤 했다는 소리였다.

'젠장! 진짜 날 죽이러 오면 어 떡 하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내 앞으로 들이밀어진 보드카 마티니 를 한 번에 목구멍을 들이부었다. 차라리 취하기라도 하면 좋을 텐 데, 15살 성인이 딱 되자마자 음 주에 발을 들이며 간이 잔뜩 단련 된 데다, 몸이 인간의 한계를 뛰 어넘은 탓에 웬만해선 절대 취하 지 않았다.

빈 잔을 앞에 두고 한숨을 푹푹 쉬는 나를 힐끔거리는 바텐더에게

손짓하니 그가 황급히 다가왔다.

"하...... 제일 독한 보드카로."

"아, 스트레이트로 드릴까요, 온 더 락으로......

"병째로. 잔은 필요 없어."

내 주문에 얼빠진 표정으로 보 드카를 들고 온 바텐더는, 인생 포기한 사람처럼 보드카를 병나발 부는 날 보고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슬금슬금 물러섰다.

' 젠장••••••

쾅 소리 나게 병을 내려놓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레오가 왕자이기만 해도 어떻게 든 비벼볼 수가 있다. 나는 황가, 신전과 대등한 권력을 가진 크리 시스 공작가의 공녀니까. 아타라 의 왕자 정도는 나와 서열이 비슷 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왕이 됐으면 나보다 공 식적으로 신분이 높다고!'

이게 문제였다. 나보다 신분이 낮은 이가 달려들면 검으로 쥐어

패면 그만이다. 허나 아타라의 국 왕이 달려드는 걸 베어 내면 바로 외교 문제였다.

'이렇게 된 이상 레오가 산골짜 기에서 농사짓는 순박한 농사꾼이 되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아 니, 레오가 알렉산드로라도...... 원작과 달라져서 사절단으로 위장 해서 오지만 않으면 돼. 온다 해 도 날 알아보지 못하면 되는 데...... 만약 날 알아보면...... 젠 장! 내가 걔 생명의 은인인데 왜 이런 걸 고민하고 있어야 하지?'

갑자기 억울해져서 얼굴을 일그 러뜨린 채 보드카를 잔뜩 들이켰 다. 내가 그때 그 사람이라는 걸 알아채더라도 레오가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가정은 존재하지 않 았다.

'너! 진짜 죽여 버릴 거다!'

'이 미친놈이 진짜! 반드시 죽인 다!'

'내가 다른 놈들은 몰라도 너는 최고로 끔찍하게 죽여 버릴 거 야!'

'걔가 나를 대하던 태도만 생각

하면 날 죽여 버리기 위해 왕이 됐다고 해도 납득이 된단 말이 야!'

레오를 버릇없는 꼬맹이 정도로 만 인식했던 어린 날의 나는 레오 를 노예처럼 부렸다. 과거의 나에 게 오러를 날리고 싶은 충동을 느 끼며 바에 머리를 박았다.

헤어질 때쯤 되선 서로 상당히 친해졌었지만, 끝에 가서 고분고 분하게 군 것도 날 방심하게 만들 기 위한 속셈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생각이 아주 많은 내 직 감을 쿡 건드리는 인기척이 있었

'......이런 존재감이 왜 이런 곳 에?'

조금 놀란 채 문 쪽으로 몸을 휙 돌렸다.

아마도 라이너와 비슷한 급. 허 나 절제되고 가지런한 라이너의 기운과 정반대인 듯 난폭하게 날 뛰는 광포한 기운이 문 가까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 상대가 될 바는 아니었으나, 갑작스러운 강자의 등장에 조금 긴장한 채 검 위로 손을 올렸다.

딸랑.

작은 차임벨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검은 로브로 몸을 꽁꽁 두른, 키 큰 인영 하나가 술집에 들어섰다.

' 으음

등장한 인영을 보며 침음을 삼 켰다. 온몸을 로브로 두른 데다, 후드까지 푹 뒤집어쓰고 있어 머 리카락 한 가닥조차 보이지 않았 다.

'수준은 소드 마스터 직전에 소 드 익스퍼트. 무기는 허리춤에 칼 이랑 허벅지 부근에 단검 정도가 다인 것 같은데......

인영을 대충 훑어 무력 정보를 확인했다. 상당히 수상한 복색에 강자였지만, 내 상대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조금 수상하긴 해도 술집에 술 마시러 온 게 문제는 아니다. 내 가 등장한 인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레몬 냄새••••••

조금 멍하니 인영을 바라보았다. 오래 되어 빛바랠 만도 한데 아직 도 내 기억 한 편에 자리 잡은 소 년의 씁쓸한 레몬 향기.

술집에서 풍기는 지독한 술 냄 새와 술주정뱅이들에게서 나는 강

한 악취 사이에서도 확연히 내 후 각을 사로잡는 그리운 향취였다.

'••••••레오?'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로브 를 꽁꽁 싸맨 남자를 멀거니 관찰 하는데, 술집을 두리번거리던 남 자의 얼굴이 일순 내 쪽으로 고정 됐다.

후드를 푹 눌러쓴 탓에 보이는 건 남자의 입술뿐이었으나, 나는 그와 내가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 다. 분명 후드에 가려져 있음에도

그의 시선이 나를 진득하게 훑어 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붉은 입술 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입가에 짙은 웃음이 걸린 다. 찾던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 같은 웃음이었다. 나는 어쩐지 소 름이 쫙 끼쳐 휙 몸을 돌렸다.

" 허."

몸을 돌린 뒤에도 내 모든 감각 은 방금 들어온 남자에게 집중되 어 있었다. 그가 헛웃음을 뱉는 소리를 들으며 보드카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빨리 다 마시고 돌 아갈 생각이었다.

탁.

그리고 내 감각을 사로잡은 장 본인은, 굳이 내 옆 자리에 걸터 앉았다.

'••••••굳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갸웃했다. 이 술집은 바와 보통 식탁이 함께 있는 곳으로, 단체로 둘러앉을 수 있는 식탁 자리들은 꽉 찼지만,

바 앞엔 자리가 많았다. 굳이 구 석에 박혀 있는 내 바로 옆자리에 앉을 필요는 없단 소리였다.

'구석 자리를...... 즐기는 사람일 거야.'

훨씬 더 가까워진 레몬 향기를 애써 무시하며 남자의 행동을 과 대 해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남 자에게로 향하려는 시선을 보드카 에 고정시킨 채 슬슬 관심을 거둘 때였다.

끼익.

어느 정도 거리가 있게 배치되 었던 의자와 의자 간의 거리가 좁 혀진다. 레몬 향기가 내 후각을 지배했다. 내 의자와 남자의 의자 가 살짝 부딪쳤다.

남자는 나와 몸이 닿기 직전까 지 의자를 내 쪽으로 가까이 끌었 다.

'나한테...... 부담을 주려는 건 가......?'

바로 직전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에 떨떠름하게 눈을 깜빡였다. 남 자는 몸까지 내 쪽으로 돌린 채, 턱을 괴고 가면을 쓴 내 얼굴을 부담스레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 선에 어쩐지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독특한 차림을 하고 있어서 시선이 간 거겠지.'

애써 합리화했다. 심장이 두근거 렸다. 이건 이성과 가까워짐에 따 른 설렘이 아니라 직감에 의해 느 껴지는 싸함과 불길함에 따른 심

장 박동 수 증가였다.

'모르는 척하자.'

여기서 남자를 모르는 척하는 게 상책이라는 걸 직감으로 느꼈 다. 남자에게 시선을 줄 틈 없다 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깊 은 근심이 있는 척 한숨을 푹 쉬 고 보드카 병을 들어 올릴 때였 다.

" 이런."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내 귓

가를 간지럽힌다. 후드에 가려져 있던 새하얀 목덜미가 움직임에 따라 살짝 드러나며 내 시선을 사 로잡았다.

검은 가죽장갑에 가려져 있어도 곧고 긴 형태가 드러나는 예쁜 손 이 보드카 병을 잡았다. 병을 사 이에 둔 채 손 끝이 옅게 스쳤다.

후드를 깊게 눌러써 보이지 않 는 눈 아래로 날카롭게 뻗은 코와 선악과의 한 면처럼 붉게 달아오 른 예쁜 입술이 보였다.

붉은 입술이 야살스레 호선을 그린다. 고의인지 습관인지, 입술 보다 더 붉은 살덩이가 느리게 입 술 틈을 쓸고 사라졌다.

내 바로 앞까지 다가온 목덜미 에서 진동하는 향을 느끼며 나는 새삼 깨달았다.

"술만 마시면 속 버릴 텐데."

내 눈앞의 남자가 지닌 체향은 오두막 소년의 것처럼 풋내와 시 큼함이 가득한 어린 향이 아닌, 관능적이고 날 선 어른의 향이라

고.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동공이 크게 혼들린다는 걸 느낄 수 있었 다. 이렇게까지 다가오면 모르는 척할 수가 없다.

남자가 이곳에 온 목적이 나라 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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