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화
"혼자 왔나?"
나긋한 목소리가 귓가 바로 옆 에서 속살거렸다. 내 등에선 식은 땀이 흘렀다. 검은 장갑에 가려진 손끝으로 실수처럼 내 검지를 쓸 어내린 손이 내 손에서 병을 앗아 갔다. 나는 병이 빼앗긴 것에 반 박조차 하지 못하고 후다닥 소리 가 나도록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호, 혼자 왔는데."
조금 더듬거리며 대답하자 붉은 입술이 유려한 호선을 그렸다.
"그렇군."
이젠 완벽하게 내 쪽으로 몸을 돌린 남자가 상체를 살짝 내게로 기울였다. 나는 움찔 몸을 떨었 다. 검은 가죽 장갑으로 덮인 손 이 느리게 병 목 부근을 쓸어내렸 다. 그 별거 아닌 손동작이 분위 기를 진득하게 했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향기 와 분위기가 걸리긴 했지만, 우선 사적인 감상은 내려놓고 냉철한 시선만으로 남자의 의도를 파악하 기 시작했다.
'......유혹인가? 취향이 그쪽인 남자?'
술집에서 대화를 걸어왔다는 점 이나 그가 풍기는 분위기만 보면 유혹 쪽이 맞았지만, 그저 유혹으 로 치부하기엔 내가 의심이 너무 많았다.
'아니면...... 역시 함정인가.'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내게 의도 적으로 접근했다는 건 역시 미르 를 노린 함정인가 싶었다. 마음속 으론 남자를 경계하면서도 우선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당신도 혼자 왔나?"
"보시다시피."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손짓으 로 바텐더를 부른 그가 피가 흐를 것 같은 붉은 입술을 열었다.
"과일 모둠 하나랑...... 압생트 병 채로. 잔도 하나 더 가져와."
늘어지듯 나른한 목소리가 짧게 주문했다. 주문 하나조차 치명적 인 걸 보니 날 꾀기 위해 확실한 사람을 준비한 것 같았다.
'그런데...... 압생트라.'
꽤 흥미로운 술을 시켰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 살짝 고 개를 틀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압생트는 많은 예술가들이 즐기 는 독특한 술이었다. 허나 한때 압생트의 주 재료인 쓴 쑥에 독이 있다는 루머가 돌며 생산량이 확 줄어든 적이 있었다.
얼마 뒤 이는 거짓으로 판명이 됐지만, 형광 연둣빛의 기이하고 도 유해해 보이는 외향으로 인해 여전히 많은 이들이 '아름다운 독 극물'이라고 부르는 술이었다.
'나를...... 독살로 죽여 버리겠다 는 암시인가.'
시덥잖은 생각을 하며 남자를 마주하고 느리게 턱을 괴었다. 그 가 사르르 웃었다. 보이는 거라곤 하관뿐임에도 유혹적인 분위기를 뿜어내는 남자는 상당히 위험해 보였다.
"주문하신 메뉴 나왔습니다."
조금은 기묘한 침묵 아래 얼마 동안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을까. 바텐더가 과일이 담긴 그릇과 잔 두 개, 압생트 한 병과 압생트 스 푼, 각설탕이 담긴 통을 나와 남 자 앞으로 배치했다.
"마시는 방법은 어떻게......
"불을 붙이는 쪽으로. 라이터는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으니 가봐."
생수를 내려놓을까 말까 고민하 던 바텐더가 납득한 표정으로 사 라졌다. 나를 향해 싱긋 웃어 보 인 남자가 잔 위에 초승달 만다라 모양으로 구멍이 뚫린 압생트 스 푼을 올리고 하얀 각설탕을 하나 꺼내 스푼 위에 올렸다.
"압생트는 색이 참 아름다워. 그 렇지 않나?"
남자가 여상스러운 투로 말하며 술병을 잔으로 기울였다. 흘러나 오는 형광 연둣빛 액체 아래 각설 탕이 흥건히 젖고 잔이 차올랐다. 유리잔 안에 담긴 형광 연둣빛 압 생트는 치명적인 독극물을 연상케 했다.
"......그렇네."
그리고 나는 그 아름다운 독극 물을 보며 그 색을 빼닮은 한 쌍 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 레오.'
연두색은 분명 무해하고 천진난 만함을 상징할 텐데, 확연한 연둣 빛을 띈 레오의 눈동자는 볼 때마 다 나를 단숨에 죽일 독극물을 연 상케 했다.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그리고 독극물 위로 기포처럼 떠오르던 세상을 향한 증오, 깊은 슬픔, 끝없는 자괴감이 내가 소년 에게 손을 뻗게 만들었다. 내가 거두는 건 사자 새끼임을 알면서
도, 나를 해칠지도 모르는 치명적 인 독극물임을 느꼈으면서도, 그 를 품었었다.
남자의 눈을 가린 검은색 후드 를 지그시 응시했다.
나는 어쩐지 그 너머의 눈이 어 떤 색일지 보고 싶어졌다.
"마시는 방법도 상당히 독특하 지. 각설탕을 물에 적셔 녹이든 지, 불 태워 녹이든지, 어쨌든 녹 이고 나서야 제대로 된 맛을 즐길 수 있으니까."
츠]
주머니에서 지포 라이터를 꺼낸 남자가 압생트로 축축하게 젖은 각설탕 위로 불을 붙였다. 화염 속에 설탕이 녹아 내린다. 불타오 르는 하얀 각설탕을 지그시 응시 하다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야살스레 웃고 있었다.
"재밌지 않나?"
후.
즐거움이 깃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 후, 남자는 입김으로 불을 꺼트렸다. 진득하게 녹은 흰 설탕 이 압생트와 섞여 들며 뿌연 초록 빛을 만들어 냈다. 설탕이 섞이니 훨씬 더 독성이 강한 독극물이 된 것 같다는 감상을 남기며 과일이 담긴 접시로 눈을 돌렸다.
"이건 당신이 사는 건가? 먹어 도 돼?"
" 얼마든지."
여러 과일들이 예쁘게 배치된 접시에서 예쁜 연록빛 청포도를
하나 집어 입에 물었다. 압생트와 도, 어린 소년의 눈동자와도 상당 히 비슷한 색감을 띤 청포도였다. 청포도를 문 내 입을 지그시 바라 보던 남자는 낮게 웃었다.
"압생트가 재밌다고 했지?"
"그래."
"나는 다른 게 더 재밌는 거 같 은데."
나는 내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남자의 허벅지 위로 손을 올렸다. 손에 닿는 근육이 단단했다.
움찔 떨리는 피부를 무시한 채 허벅지를 꽉 잡고 그에게로 훅 상 체를 굽혔다. 가까워지는 얼굴. 날 만난 뒤로 변함없이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던 남자의 입매가 처음으로 살짝 굳었다.
"난 네가 더 재밌어."
작게 속삭이곤 남자의 눈이 위 치했을 후드 위를 똑바로 응시하 며 느리게 웃었다. 살짝 굳은 남 자를 뒤로한 채, 압생트가 담긴 잔을 잡은 남자의 손등을 살짝 간 지럽혔다. 그가 손에 힘을 푸는
틈을 놓치지 않고 잔을 빼앗아 압 생트를 내 입에 털어 넣었다.
섞이지 않은 각설탕 가루가 입 안에서 거칠한 달콤함을 불러일으 켰다.
" 아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이며 얼굴을 더 가까이했다. 조금만 더 움직여도 서로 닿을 거리. 이제 남자의 입가엔 웃음을 한 점도 찾 아볼 수 없었다. 남자의 울렁이는 목울대를 확인하고, 느리게 웃었
다.
"너......
뢍!
"여기 있다는 거 다 듣고 왔다! 용병 미르 나와!"
방해꾼이 등장했다.
'빌어 처먹을 진짜......
미르로 위장을 하고 다니면 웬 만큼 생각이 가능한 정상인들은
알아서 날 피해 편했으나, 아주 가끔은 저렇게 겁대가리 상실한 귀찮은 놈들도 있었다.
속으로 쌍욕을 하며 한숨과 함 께 남자의 허벅지에서 손을 때고 가까이 했던 상체 또한 물렸다. 한숨에서 압생트 특유의 기묘한 향이 났다.
"잠깐 미뤄야 할 것 같네. 나한 테 손님이 온 거 같아서."
그 한마디의 남자의 입매가 무 섭도록 딱딱하게 굳는다. 그의 붉
은 입술이 살짝 떨려왔다. 담긴 감정은 확연한 분노였다.
'정체가 뭔지 캐내려고 했는 데......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허리춤에 찬 단검을 꺼내려던 손을 일단 물 렸다. 남자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정체를 말하라고 협박해 볼 생각 이었건만, 우선 귀찮은 놈들부터 상대해야 할 것 같았다.
"저기 미르다!"
문을 부셔져라 열어젖히며 거칠 게 등장한 세 치들 중 하나가 날 발견하고 소리쳤다. 미간을 찌푸 리며 그들의 기운을 가늠했다. 다 들 검은 차고 있으나, 소드 익스 퍼트 경지조차 다다르지 못한 애 송이들이 었다.
'우선...... 대화로 끝내는 걸 목 표로 삼자.'
악의가 가득한 기세들을 보니 결국 검은 꺼내야 할 것 같지만, 그래도 쉽게 끝났으면 하는 바람 이 있었다.
"무슨 볼일이 있는지 몰라도 우 선 나가서 얘기하지."
시끄럽게 웅성거리는 사람들과 사고가 일어날까 불안한 눈으로 나를 힐끔거리는 바텐더를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집에까지 피해를 주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내 로브 소매 자락을 살 짝 잡아끄는 손길이 있었다.
"......무슨 일이지?"
"나도 같이 가."
남자와 씩씩거리는 세 치들을 번갈아 보고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살짝 떼어 냈다.
"위험할지도 모르니 여기 있어. 금방 돌아오지."
사실 소드 익스퍼트 경지의 남 자가 저 애송이들로 인해 위험해 질 가능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 으나, 내 새끼손가락으로도 제압 가능한 이들을 상대하는데 둘이 가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
내 단호한 말에 남자는 입술을 꾹 깨물면서도 더는 붙잡지 않았
"무슨 일이지?"
술집에서 난동을 부리려는 치들 을 겨우 밖으로 끌고 나와 바로 옆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이끌고 물었다. 나와 치들이 술집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술집을 나와 골목 가까이에 자리 잡는 인기척 을 느끼긴 했으나 그 정도는 모르 는 척해 주기로 했다.
"이 비겁한 놈! 네가 우리 일을 빼앗았잖아!"
우락부락한 몸의 대머리 남자가 나서 버럭 화를 냈다. 금시초문이 라 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너희를 오늘 처음 본다 만."
"이 자식 모르는 척을! 8개월 전에 우리 일이었던 팔라딘 상단 의 호위 일을 네가 가져갔잖아!"
'아, 그거?'
워낙 보수가 짭짤했던 일이라 기억했다. 암브로시오 왕국에서 온 거대 상단, 팔라딘의 호위 일 을 맡게 된 건 꽤 갑작스러웠었 다.
'미르! 의뢰 하나만 당장 맡아 주면 안 될까? 보수도 엄청 좋고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야!'
'무슨 일인데.'
'팔라딘 상단을 북부 지역을 지 나기까지만 호위하는 일! 원래 다 른 놈들이 맡기로 했는데 아직도 연락이 안 돼! 빌어먹을, 어젯밤 술을 그렇게들 처먹더니 아직 못
일어난 게 분명하다고!'
'음 •'
'팔라딘 상단은 고위급 손님인데 이런 식으로 약속을 못 지켜서 신 뢰도가 떨어지면 큰일 나는 거 알 지? 네가 한 번만 대신 가 줘. 미 르가 간다고 하면 상단도 훨씬 좋 아할 거라고!'
'그때 술 처먹고 못 일어나서 못 나왔다는 정신 빠진 놈들이 이 치 들이었나.'
시큰둥한 눈으로 잔뜩 열이 오 른 것 같은 세 사람을 둘러보았
다. 자기들이 잘못해 놓고 내 앞 에서 난리 치는 꼴이 참 보기 사 나웠다.
"한동안 두문불출하기에 우리가 무서워서 도망친 줄 알았는데 잘 만났다! 너 같은 키 작은 애송이 따위, 단칼에 혼내 주지!"
놀라운 남 탓에 이어 경이로운 과대망상까지. 이런 놈들 때문에 내 칼을 더럽히기도 싫었다. 나는 귀찮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 다.
"그냥 돌아갈 생각은 없나? 지 금 가면 얌전히 돌려보내 줄 텐 데."
"하! 이 자식 쫄았군!"
저 치 중 하나가 헛소리를 했다. 그냥 헛소리나 좀 하다 가 버렸으 면 좋겠다는 생각 반,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심정 반으로 자기들 끼리 떠드는 꼴을 지켜보았다.
"역시 우리 기세에 눌린 거야! 내가 미르 별거 아니라고 했잖아! 저번에 봤는데 키도 덩치도 작아 서는 발차기 한 방에 날아갈 것
같았다니까!"
"직접 보니 정말 그렇군. 저게 정말 황금 방패 용병 맞아? 그냥 마약굴에서 몸 굴리는 남창 같은 데."
"미르가 몸 굴려서 일 따낸다는 소문도 있잖아. 그게 사실일지도 모르지."
"흠...... 역시......
'이건 좀 기분 더러운데.'
수많은 비방들을 들어오며 단단 한 멘탈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 지만, 저런 계열의 저질스러운 말
들은 언제 듣든 기분이 더러웠다.
눈을 느른하게 뜬 채 어떻게 조 질까 구상하며 검집 위로 느리게 손을 올렸다.
"혼을 내 주기 전에...... 다른 방식으로도 혼을 내 볼까?"
자기들끼리 숙덕거리던 치들이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