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화
'아...... 더러워•••••••'
정말 기분이 너무 더러워져 잔 반 쓰레기를 보듯 얼굴을 일그러 트렸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저런 놈들이 내게 시비를 걸어올 때는 늘 저런 건수를 걸고 넘어졌 다.
뼈와 살을 인수분해해 주기 위 해 검을 발도하려 할 때였다.
쾅
"으악! 뭐, 뭐야!"
흉흉한 기세의 검이 날아와 치 들의 사이를 갈랐다. 형상화된 오 러는 보이지 않았으나, 무형의 마 나가 휘감긴 검이었다.
'따라 나오더니.'
이미 느꼈던 인기척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n: 버 u: 버
구둣발 소리가 뒷골목을 울린다.
본 지 몇 분이나 됐다고, 벌써 익숙해진 인영. 진득한 레몬 향이 뒷골목의 악취 사이에서도 내 후 각을 사로잡았다.
"이...... 구족을 멸해서 상어 밥 으로 줘야 할 천하의 미친 개자식 들이 "
골목에 들어선 이는 격분한 남 자였다.
"너, 넌 뭐야! 왜 끼어들, 크헉!"
"닥쳐! 죽어!"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아수라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치 들 중 하나를 걷어찼다. 걷어차인 사람이 굉음을 내며 벽에 처박혔 다. 그걸 시작으로 남자는 일방적 으로 치들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 으음•••••
나를 대신해 싸워 주는 남자를 보며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아기
고양이가 호랑이를 지키겠다고 발 톱을 세운 게 재밌기도 했고, 내 가 욕을 얻어먹었다고 대신 분노 해 주는 게 기묘했다.
검도 들지 않은 채 체술만으로 가볍게 저 치들을 조지는 남자를 보며 생각했다.
'나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구 나.'
머릿속 가정에 무게가 가해졌다. 얼굴에서 유일하게 드러난 남자의 하관을 보며 기억 속 한 얼굴과
대치시켰다.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아리송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했다. 내 기억이 좋지 않기보 단, 드러난 남자의 얼굴이 어딘지 희뿌옇고 희미한 느낌이었다.
'......인상을 희미하게 하는 마도 구인가.'
미간을 찌푸렸다. 소드 마스터인 나도 단번에 파훼하지 못할 정도 면 상당히 고가라는 소리였다. 고
가라는 건 남자가 부자라는 소리. 계속 불안한 쪽으로 생각이 흘러 갔다.
"뇌가 사등분 나면 더는 그런 더러운 생각 안 하겠지?"
어느새 세 명의 치를 쓰러트린 남자가 흉흉한 기세로 땅에 박힌 검을 뽑아냈다. 아예 죽여 버릴 생각인 것 같았다. 검 손잡이를 으스러져라 잡은 남자의 손으로 순간 오러가 모이다 흠칫하며 빠 르게 사라졌다.
'오러를 숨기려는 것 같은데
눈을 가늘게 떴다. 남자가 빠르 게 기운을 갈무리하긴 했지만, 소 드 마스터인 내가 그 순간을 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원작에서 서술되는 알렉산드로 의 오러는 분명 하얀색이었지.'
난폭한 폭군 알렉산드로의 오러 색이 왜 하야냐는 많은 이들의 의 문에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알렉산드로는 자신의 앞을 막은 한계를 불태워 버리는 방식으로 넘었기에, 그의 오러는 세차게 불 타고 남은 허연 재의 색이라고.'
참으로 알렉산드로다운 방식이 었다.
'하지만 방금 전에 얼핏 보였던 남자의 오러 색은...... 분명 형광 연둣빛이었어.'
압생트와 똑 빼닮은, 금방이라도 녹아 흘러내릴 것 같은 독극물을 닮은 색. 알렉산드로의 오러와는
확실히 다른 색이었다.
'......내 예상이 틀린 건가?'
얼굴을 와그작 찌푸렸다. 역시 머리를 쓰는 건 내게 어려웠다.
'내게 어울리는 건 정면 돌파 지.'
치를 향해 검을 겨누는 남자에 게 마나를 이용해 빠르게 다가갔 다. 발끝을 덮는 옅은 검은 연기 와 함께, 1초도 채 지나지 않아 바로 남자 앞으로 당도했다.
훅 다가온 나를 보고 조금 놀란 듯 움찔하는 남자의 검을 든 손을 탁 잡았다. 남자의 입이 놀란 듯 벌어졌다.
"살인은 안 돼."
내 작은 속삭임에 남자가 이해 할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 다. 물론 후드에 가려져 눈은 코 빼기도 보이지 않았으나, 분위기 를 보아 그런 것 같았다.
'나도 마음 같아선 사지를 분질
러 버리고 싶지.'
아무리 소드 마스터가 되고 정 신연령이 높다 해도, 다른 사람들 보다 침착한 것뿐 감정이 사라지 는 건 아니다. 여전히 저런 부류 의 저질스러운 말들은 나를 분노 케 했다.
'하지만 얼마 뒤엔 어차피 죽이 고 싶지 않아도 수많은 사람을 죽 여야만 할 텐데. 내 사적인 일로 업보를 더 쌓고 싶진 않아.'
내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들어야 할 시간이 올 것이 다. 그때도 동정과 연민 같은 것 에 휩싸여 살인을 주저할 생각은 없었으나, 아직은 아니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네 손을 저런 것들로 더럽힐 필요는 없잖아."
얼굴이 가까워진 채로 조금은 상냥하게 속삭였다. 굳이 도와줄 필요는 없었으나, 그래도 날 대신 분노해 싸워 준 남자가 저런 검을 더럽히기도 아까운 치들 때문에
손을 더럽히길 원치 않았다.
"하......
한참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것 같던 남자가 옅게 탄식 같은 한숨 을 쉬었다. 워낙 거리가 가까워 그 옅은 숨결조차 가까이 피부로 와 닿았다.
"넌 참 여전해, 알아?"
숨소리 섞인 낮게 긁히는 목소 리가 속삭였다.
여전하다는 말은, 예전의 나 또 한 알고 있다는 소리겠지.
더는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는 남자를 향해 씨익 웃었다.
"너는 꽤 변했어, 알아?"
조금 짓궂은 목소리로 마주 속 삭이며 주저 없이 허리춤에서 단 검을 뽑아내 남자의 얼굴을 덮은 후드를 훅 걷어 냈다. 남자는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기꺼이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주하는, 내 기억과 똑 같은 채도의 형광 연둣빛 눈동자.
달콤한 설탕물을 넣으면 금방이 라도 완벽한 압생트 한 잔으로 완 성될 것 같은 유해한 빛깔. 밉살 스럽던 소년에게 유일하게 아름답 다고 칭찬해 줬던 그 눈동자와 똑 같은 색. 금방이라도 내 목을 옭 아맬 듯 위험해 보여도 기어코 손 을 댈 아름다운 독극물.
"오랜만이야, 레오."
살랑거리는 봄 밤바람에 아무렇
게나 흩날리는 연갈빛 머리칼에 시선을 주다, 추억 속에 가라앉았 던 이름을 꺼내 혀 위에 올렸다. 아무리 인상을 희미하게 하는 마 도구를 사용한다 한들 뇌리에 깊 게 박힌 그 눈동자를 본 이상 알 아보지 못할 수는 없었다.
"그러게."
한참 침묵하던 그가 느리게 입 을 열었다• 내 한마디에 거칠게 일렁이던 눈동자엔 이내 환희가 담겼다.
마녀의 냄비에서 끓어오르는 독 극물처럼 그의 형광 연둣빛 눈동 자가 위험하게 들끓었다.
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 내 가면 을 벗겨낸다. 내치면 바로 빠져나 갈 수 있을 만큼 느리고 조심스러 운 손길. 나와 그를 제외하고 주 위엔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 았기에, 그가 벗기게 내버려 두었 다.
가면이 끌려 내려가고, 얼굴이 조금 허전한 느낌이 든다. 내 맨 얼굴을 확인한 그가 배부른 맹수
처럼 만족스럽게 웃음 지었다.
그와 내 사이가 훅 좁혀지고 나 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큰 그가 상 체를 숙였다. 서로의 온기를 확인 하는 것처럼 이마가 맞닿았다. 그 의 하얀 이마는 꽤 따뜻했다.
시야에 오직 서로만 담긴 상태 로, 레오가 사르르 입꼬리를 올렸 다.
"오랜만이야, 슈슈."
낮은 청년의 목소리가 내 귓가 를 간지럽힌다. 그의 사납던 눈이 다정함을 머금고, 날카롭던 눈꼬 리가 휙 내려갔다.
불이 붙은 압생트처럼 불타는 눈동자가 위험함을 숨기려는 듯 각설탕처럼 달콤한 눈웃음을 걸쳤
"보고 싶었어. 정말."
홀연히 사라졌다 5년 만에 다시 돌아온 소년은, 더 이상 소년이라
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자라 있 었다.
이마가 맞닿은 채 시선이 오간 다. 그가 상체를 살짝 숙이고 있 음에도 그와 제대로 시선을 맞추 기 위해선 살짝 고개를 들어야 했 다.
이마를 살짝 떼어내 거리를 둔 채 천천히 그를 관찰했다. 그는 탐색이 섞인 내 시선을 기껍게 받 아들였다.
젖살이 어느 정도 남아 있던 얼
굴은 베일 듯 날카로워졌고, 늘 치기 어린 오기를 품고 있던 눈동 자는 포식 후 맹수처럼 나른하면 서도 기이한 무언가로 들끓고 있 었다.
어려선 세기의 미소년처럼 빛나 는 미모를 가지고 있던 그는 이젠 완연한 성인처럼 성숙하고 매혹적 인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이건...... 사람이 좀 달라진 것 같은데?'
살짝 입을 벌렸다. 분명 어려서
얼굴이 희미하게 남아 있긴 했으 나, 근 5년 간 대체 무슨 일이 있 었던 건지 그는 무섭도록 성장해 있었다.
"너......
아타라 왕국 국왕이냐......?
레오를 코앞에 둔 내 머릿속을 차지한 것은 딱 하나뿐이었으나, 혀를 맴도는 질문을 애써 삼켜 냈 다.
내 머릿속에선 이미 99퍼센트
확률로 레오가 알렉산드로라고 확 신하고 있었지만, 아직 상황을 잘 모르는 만큼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건 재고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날 불러놓고 왜 말을 안 해."
조금 멍한 표정으로 생각만 하 고 있으니 레오가 상체를 숙여 내 가 떨어트린 거리를 좁혔다. 조금 움찔해 몸을 물리며 날것 그대로 의 생각을 그대로 입에 담고 말았 다.
"아, 아직도 안 뒤지고 살아 있
었네......?"
'젠장! 너무 시건방지게 말했어!'
스스로 뱉은 말을 되새기며 눈 을 질끈 감았다. 어려서 레오와 정말 친한 동네 친구처럼 지냈던 기억이 있어 그가 국왕일지도 모 른다는 자각이 있음에도 입이 함 부로 나불거렸다.
"하하하!"
내 말에 눈을 끔뻑이던 레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웃
던 그가 나를 바라보며 눈꼬리를 흐드러지게 휘었다. 상당히 유혹 적인 자태였다.
"당연흐]•지. 널 다시 만나러 오겠 다고 했으니까."
'......얘 진짜 레오 맞아?'
흠칫하며 그에게서 살짝 물러섰 다. 이런 다정하고 능숙한 언변은 내가 알던 미친 고양이 레오에게 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너...... 정말 많이 달라졌다.'
샘솟는 이질감을 무시하고 최대 한 평범하게 안부를 묻듯 이렇게 말하려 했으나, 다시금 내 입은 뇌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너...... 왜 나 누나라고 안 부 르냐?"
'젠장! 미쳤나 진짜!'
내 입을 마구 때리고 싶었다. 눈 앞에 인물은 국왕일지도 모르니 정중히 대해야 한다고 머리를 세 뇌시켜도 내 입은 자꾸만 뇌의 명
령을 어기고 5년 전 레오를 대하 듯 움직였다.
내 불만 섞인 한마디에 레오가 입매를 굳혔다.
"......누나라곤, 절대 안 부를 거 야, 슈슈."
순간 정색하듯 얼굴을 굳혔던 레오의 입가로 서늘한 미소가 걸 쳐졌다. 그의 이글거리는 눈에서 뭔지는 몰라도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걸 건드렸음을 어렴풋이 짐 작했다.
'어려선 잘만 부르더니 왜......
처음 만났을 땐 빌어먹을 놈, 개 자식, 죽일 놈 등의 다채로운 호 칭으로 부르긴 했지만, 그래도 헤 어질 때가 가까워서는 나를 누나 라고 불러 주었다.
뭐가 문젠지 몰라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레오를 멀뚱히 보고만 있으니, 헛웃음을 뱉은 그가 천천 히 손을 올려 내 턱을 느리게 쓸 었다.
불편하다면 언제든 내칠 수 있 을 정도로 느른한 손길. 분명 내 가 단번에 꺾어 버릴 수 있는 손 이었으나, 어쩐지 위험하다는 느 낌이 들었다.
내 속의 무언가를 끌어 올리듯 턱 부근을 간지럽히던 크고 단단 한 손이 내 뺨을 잡았다. 가면을 쓰지 않아 그의 손이 품은 온기가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 닿았다.
무언가 들끓는 눈으로 한참 나 를 응시하던 레오는 심기가 불편 한 듯 입꼬리를 비틀곤 내 귓가
가까이로 고개를 숙였다.
"지금도 이런 노골적인 행동의 의미도 못 알아들을 정도로 나를 어리게 보는데 누나라고 부르기까 지 하면 얼마나 더 어리게 보겠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