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화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는 불편한 심기를 애써 억누르는 티가 역력 했다.
'하긴. 얜 어렸을 때도 내가 애 취급하는 걸 싫어하긴 했지.'
어리게 보는 게 아니라 넌 진짜 어리다고 말하려다 눈치 있게 입 을 닫았다. 작은 행동과 말 몇 마 디로 능숙하게 텐션을 올리는 레
오를 지그시 응시했다. 내 눈엔 아직 어려 보였지만, 확실히 내게 휘둘리기만 하던 예전보단 훨씬 자라 있었다.
"많이 컸구나."
조금 뿌듯하게 웃은 채 부드러 워 보이는 그의 연갈색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어려서처럼 동 글동글한 머리통도 아니고 만지면 솜털 같던 그 느낌도 없었지만, 자란 그의 머리칼도 충분히 부드 러웠다.
내 손길이 닿자 레오가 무섭게 얼굴을 굳혔다.
' 화났나?'
허락도 없이 손을 올려 불쾌한 건가 싶어 눈치를 보며 살짝 손을 물렸다. 그런 날 본 그가 푹 한숨 을 쉬었다.
"하......
고개를 숙인 채 마른세수를 하 는 레오의 양귀가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그걸 보면 그렇게 싫은
건 또 아닌 듯한데, 그는 상당히 불만스러워 보였다.
"제발, 애 취급은 여기까지만."
"애 취급이 아니라 너는......•"
'진짜 애야.'라는 뒷말은 레오의 흉흉한 얼굴을 보고 삼켰다. 실제 로 뱉었다간 봉변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음...... 우선 들어가서 얘기 좀 할까? 네 시간이 괜찮다면 말이 야."
그 눈에 들끓는 무언가가 폭발 하기 전에 황급히 말을 꺼내고 그 를 다시 술집으로 이끌었다.
사실 레오 표정에 조금 쫄았다.
"그래서...... 너는 원래 아타라 왕국의 귀족의 자식이었는데, 후 계 다툼으로 여차저차 해서 중상 을 입고 제국으로 피신하게 되었 고."
"으 "
흐 •
"내가 도와준 덕분에 다행히 살
아서 다시 왕국에 돌아가 귀족 작 위를 물려받은 뒤 사절단으로서 제국에 오게 되었다고?"
"바로 그거야."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레오를 지그시 응시했다.
'이건 귀족 작위가 왕위로만 바 뀌면 알렉산드로 이야긴데.'
보드카를 잔에 콸콸 따라 단번 에 비웠다. 무슨 이유인지 그는 자신이 국왕이라는 걸 숨기고 싶 어 하는 것 같았지만, 원작을 아
는 나로선 여기까지 들은 이상 레 오가 알렉산드로라는 걸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그러니까 나는 왕자한테 그런 짓들을 했던 거야?'
몸도 정신도 어렸던 과거의 나 의 만행을 떠올리자니 등 뒤로 식 은땀을 흘렸다. 레오를 노예처럼 부렸던 과거의 나를 암살하고 싶 었다.
'아, 아냐. 우선...... 레오도 앙 갚음을 하려고 나를 찾아온 건 아
닌 것 같으니까. 악의를 품은 것 같지도 않고. 얘도 컸으니까 어려 서 내가 도와준 은혜를 알겠, 지
보드카를 한 잔 더 따르며 슬쩍 레오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뺏어 마셨던 잔에 다시 압생트를 조제 한 그는, 내 입술 자국이 옅게 남 은 부근에 정확히 입술을 대고 액 체를 들이켜며 나를 향해 눈을 휘 었다. 보지 말아야 할 금단의 무 언가를 본 기분에 슬쩍 시선을 돌 렸다.
'......쟤 진짜 왜 저렇게 컸지?'
분명 어려서는 앙칼진 터키시 앙고라였는데 크더니 웬 백사자가 됐다. 무궁화인 줄 알고 열심히 재배했는데 나온 건 대마였을 때 농부의 심정이 지금 나와 같지 않 을까 싶었다.
"그래서 넌 내가 떠난 뒤에도 계속 용병으로 활동해서 지금은 소드 마스터 미르가 됐다는 거 지."
"그렇지."
"그러다 우연히 네 아버지가 카
이사르 크리시스 공작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공녀가 됐고. 미르의 활동이 멈춘 것도 그 때문이라 고."
"그......렇지."
더듬더듬 긍정을 표하며 이미 확인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우리 대화를 엿듣는 사람이 있나 확인 했다. 날 찾아온 치들로 인해 내 가 진짜 미르라는 게 술집에 알려 진 이후론 간 크게 나와 레오 쪽 으로 다가오는 이가 없었다.
"정말 믿기 힘든 일이네."
헛웃음을 뱉은 레오가 감상을 남겼다. 고개를 살짝 끄덕여 긍정 을 표했다. 솔직히 앞뒤 잘라먹고 결론만 얘기하니 이야기의 주인공 인 나도 어이가 없을 정도의 막장 드라마였다.
어려서 함께 지냈던 레오는 내 가 미르인 걸 이미 알고 있다. 허 나 크리시스의 공녀가 됐다는 사 실은 모를 테니 이참에 알려준 참 이었다.
'진짜 인생...... 내가 미르라는
걸 아는 사람이 벌써 다섯 명이 네.'
가족을 제외하고 엘, 라이너, 르 웰린, 레오에, 디에고도 미르라고 직접적으로 얘기는 안 했지만 검 은 오러를 본 이상 눈치를 챘을 테니 벌써 다섯 명에게 들켰다. 그래도 다섯 다 믿을 만한 사람들 임에 위안을 삼으며 옅은 한숨을 쉬었다.
"이건 비밀로 붙여 줘야 해. 부 탁해."
굳은 눈으로 눈앞에 레오를 응 시했다. 어차피 곧 내 입으로 밝 히겠지만, 아직은 알려져선 안 된 다. 내 계획에 중요한 건 드라마 틱하고 극적인 연출이니까.
딱딱하게 굳은 내 표정에 피식 읏은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네가 원한다면 무덤까지 가져갈게. 태양의 맹세라도 할 까?"
"그럴 것까진 없어."
비록 시간이 흘러 빛이 바랐을
지 몰라도 여전히 내겐 소중한 추 억. 레오는 여전히 내게 믿을 만 한 동료였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레오를 향해 살짝 눈을 휘었다.
"널 믿으니까."
그의 입매가 흠칫 굳었다. 살짝 흔들린 동공. 크게 동요한 기색을 보이던 레오가 한참 뒤에 헛웃음 을 뱉었다.
"......정말 무자비해."
그의 의미 모를 중얼거림에 의
아해하다 그저 피식 웃었다.
"어차피 사절단 방문 축하 연회 때 다시 만나겠지. 내가 공녀라는 게 믿기 힘들면 그때 직접 확인 해."
사절단으로 온 레오와 공녀로서 맞닥뜨리는 건 불가피한 일이다. 내 여상스러운 말에 나를 지긋이 응시하던 그가 씨익 웃었다.
"아니. 됐어. 이미 믿고 있으니 까."
그의 눈매가 야살스레 휘어졌다.
"네가 나한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
레오는 여전히 후드를 뒤집어쓰 고 있었지만 바로 앞에 앉은 나는 그의 눈동자를 어렴풋이 볼 수 있 었다. 두 눈에 가득 찬 나를 향한 굳은 신뢰. 나는 잠시 할 말을 잃 었다.
5년은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 다. 우리는 그 철없던 어린 날로 부터 훨씬 자랐고, 서로 다른 길
을 걸으며 완벽한 타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너는 여전히 나를 믿 어 주는구나. 내가 널 믿고 있듯 이.'
그게 꽤나 가슴 뭉클해서. 나도 여전히 널 믿고 있는데 이 믿음이 일방 아닌 쌍방이라는 게 따스해 서.
"우리, 여전히 친구지?"
꽤 풀어진 부드러운 웃음을 지 은 채 나긋이 물었다.
"••••••뭐?"
레오의 표정은 딱 내 정반대라 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무섭게 굳 었다. 그의 영문 모를 서늘한 정 색에 조금 움찔했다.
"......아니 o):?"
어려서 치고 박고 싸울 때도 악 우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는데. 나 만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다.
'또 나만 진심이지......
자존감이 뚝 떨어진 채로 울적 하게 눈을 내리까는 날 바라보던 레오가 제 손에 얼굴을 묻었다.
"하...... 짜증 나 진짜......
한탄과 탄식이 섞인 한숨과도 같은 목소리였다. 착잡한 얼굴로 몇 번 마른세수를 한 레오가 짙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우선 친구인 걸로 하 자."
'아닌 것 같은데......?'
이를 부서져라 악물고 비틀린 미소를 짓는 레오를 보며 떨떠름 한 표정을 지었다. 친구가 아니라 원수래도 믿을 법한 험악한 표정 이었다.
"시작은, 친구로 하자."
느리게 손을 든 레오가 술집에 들어오며 챙겨 쓴 가면에 가려진 뺨 부근을 살짝 쓰다듬곤 후드 안 으로 손을 넣어 내 목덜미를 잡고 제 쪽으로 끌었다. 가죽장갑이 예
민한 목덜미를 간지럽힌다. 무척 이나 조심스럽고 부드러웠기에 거 부감 없이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 다.
조금 전 뒷골목에서처럼, 다시금 이마가 맞닿는다. 차가운 가면 위 로 따뜻한 레오의 이마다 닿았다. 아무래도 레오는 이마 맞대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서로의 숨결 이 느껴지는 가까운 거리에서 나 를 녹일 듯 집요하게 응시하던 그 가 서늘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끝도 친구일 거라곤 확
신하지 마."
이를 으득 가는 소리와 함께 목 을 긁는 그르렁거리는 목소리. 그 안엔 불만이 가득했다. 치열하게 들끓는 형광 연둣빛 두 눈을 멍하 니 바라보았다. 주위에서 진동하 는 레몬 향이 분위기를 뭉근하게 만들었다.
한참, 고개를 조금만 숙여도 입 술이 닿을 거리에서 시선이 교차 되었다.
"......사고 치기 전에 가야겠군."
조금 멍한 표정을 지은 날 보며 점점 깊어지던 레오의 동공이 훅 멀어졌다. 이마에 닿아오던 온기 도 사라진 뒤였다. 조금 다급하게 후드를 푹 눌러쓴 레오가 남은 압 생트를 단숨에 비우곤 압생트가 묻어 번들거리는 붉은 입술을 느 리게 핥았다.
"곧 다시 보자."
내 손 쪽으로 손을 뻗은 레오가 잡아도 되냐고 허락을 구하듯 내 게 눈짓을 했다. 어렸을 때처럼
손이라도 꼭 잡으며 작별인사를 하려나 싶어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니, 그가 부드럽게 내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고 내 예상은 확실히 빗나 갔다.
드러난 손목 위로 따뜻하고 부 드러운 살덩이가 닿는다. 살짝 벌 어진 축축한 틈새 사이로 압생트 향이 배어났다. 긴 속눈썹을 내리 깔고 꽤 오랫동안 내 손목을 머금 고 있던 붉은 입술이 촉, 하는 물 기 어린 소리와 함께 천천히 떨어
졌다.
"보고 싶을 거야."
가늘게 뜨였던 눈이 흐드러지게 휘어진다. 분명 달큼함이 뚝뚝 떨 어지는 눈웃음이었으나, 그 속에 형형하게 불타는 눈빛 때문인지 달콤함으로 사람을 꾀어내고 잡아 먹는 사이렌의 무언가 같았다.
그 눈과 정면으로 마주친 내가 흠칫하니, 그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놓아주곤 씨익 웃었
"안녕, 슈슈."
검은 로브가 흩날리고, 나를 뒤 혼들던 인영이 빠르게 사라진다.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조금 전에 끝도 친구일 거라고 확신하지 말라는 말......
착잡함에 손바닥 위로 얼굴을 묻었다.
'제대로 안 하면 손절할 거라는
절교 협박인가?'
5년 만에 다시 만난 레오와의 동상이몽 같던 첫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며칠 뒤, 황궁에서 아타라 왕국 사절단 방문 축하 연회가 열렸다.
"크리시스 공작가의 카이사르 크리시스 공작님과 칼 크리시스 공자님, 카슈미르 크리시스 공녀 님과 아리아 크리시스 공녀님께서
연회장에 입장하십니다!"
느지막히 도착한 연회장은 붐비 고 있었다. 피부 위로 꽂히는 따 가운 시선들을 익숙하게 무시한 채 주위를 살폈다. 아직 황가와 교황, 사절단은 오지 않았지만 그 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귀족들이 도착한 것 같았다.
"어머, 크리시스 영애! 오늘도 드레스가 너무 아름다우세요!"
"오늘은 루비로 장식한 바디체 인을 착용하셨네요. 전 얼마 전에 사파이어로 장식된 바디체인을 구
매했답니다."
연회장에 발을 들이자마자 아리 아는 몰려든 영애들에게 끌려갔 다. 가면서도 아쉽다는 듯 나를 뒤돌아보는 아리아에게 웃으며 손 을 흔들어 주었다.
"이번 연회에선 계속 너와 있을 거다."
데뷔탕트 이후 처음으로 함께 나온 연회에서 카이사르가 비장하 게 다짐했다. 아무래도 데뷔탕트 시작과 동시에 황제의 명으로 끌
려 나가 함께해 주지 못했던 게 못내 미안했던 모양이다.
"공작 각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 카이사르의 다짐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훌쩍 다가온 중년 남성에 의해 깨졌다.
'라이너랑 똑같이 생겼네.'
늙은 라이너라고 해도 믿을 법 한 노년의 사내를 힐끔 곁눈질했 다. 머리가 하얗게 센 그는 얼핏
봐도 60이 넘어 보였다.
라이너가 현 후작의 늦둥이 외 동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니, 노년 의 사내가 현 아인하르트의 가주 인 노아 아인하르트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인하르트 후작. 꼭 지금 해야 하는 이야긴가?"
카이사르의 붉은 눈동자에 불만 이 가득 묻어났다.
오금이 저리도록 서늘한 카이사
르의 얼굴을 보고도 끄떡하지 않 는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