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화
카이사르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 졌다.
'슬슬 제국도 전쟁이 다가오는 걸 눈치챌 시기지.'
노아 아인하르트는 황궁 제1기 사단의 기사단장. 그런 그가 군 총사령관인 카이사르를 북부 관련 문제로 부른다는 건 전쟁에 관련 된 심각한 이야기일 게 분명했다.
"......미안하군. 함께 있어 주고 싶었는데 심각한 문제라 가 봐야 할 것 같다."
" 다녀오세요."
미안한 표정을 짓는 카이사르에 게 괜찮다는 뜻을 담아 웃어보였 다. 나와 카이사르를 번갈아보던 후작과 눈이 마주쳤다.
'유전자는 위대하구나 •'
은회색 머리칼부터 황금빛 눈동 자까지, 라이너와 얼굴을 복사했
다 붙여넣기 한 것처럼 닮은 후작 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나를 지그시 응시하던 후작이 흥미롭다 는 표정을 지었다.
" 여기는......
"아, 안녕하십니까, 아인하르트 후작. 카슈미르 크리시스입니다."
"반갑습니다, 공녀님. 노아 아인 하르트입니다."
짧은 인사가 오가고 금방 갈 줄 알았건만, 후작은 흥미롭다는 표 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아들놈이 공녀님을 많이 존 경하더군요."
"••••••네?"
"허허. 아인하르트와 크리시스는 대대로 함께 제국을 지켜온 무가 였죠. 이참에 결합해 보는 것 도......
콰직.
"아인하르트 후작."
손에 들고 있던 빈 와인 잔을 단숨에 가루로 만든 카이사르가 경고하듯 읊조렸다. 싸늘하게 식
은 표정이 금방이라도 사람 열댓 은 찢어 죽일 기세였다.
"하하! 늙은이의 농입니다. 실례 가 많았습니다, 공녀님. 공작님은 저와 자리를 옮기시지요."
보통 사람이라면 무서워서 꼼짝 도 못했을 카이사르의 기세 앞에 서도 후작은 허허롭게 웃으며 능 청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하기야. 후작도 소드 마스터니 까.'
노아 아인하르트는 황궁 제1기 사단장으로, 제국의 몇 안 되는 소드 마스터 중 하나. 그는 카이 사르 수준의 실력자는 아니었으 나, 끝없는 노력으로 40대가 되어 서 소드 마스터 자리를 거머쥔 대 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다가오는 전쟁에서 전사하지.'
전쟁은 떠올리기만 해도 우울하 다.
어렴풋이 후작의 최후를 떠올리
다 점점 더 울적해지는 기분에 고 개를 휘저어 생각을 지워냈다.
'그나저나 아인하르트 부자는 대 단하네.'
아버지인 노아는 소드 마스터에 황궁 제1기사단장이고, 아들인 라 이너는 소드 익스퍼트에 황궁 제 2기사단장이었으니, 불공평한 유 전자를 가진 부자가 쌍으로 해 먹 는다 싶었다. 물론 부녀가 소드 마스터인 크리시스 공작가에서 할 말은 아니었지만.
"이번 승자는 나군."
아리아와 카이사르가 떠난 내 옆에 남은 이는 칼이었다.
"나는 반드시 이 연회가 끝날 때까지 네 곁에 있어주지."
칼이 배부른 맹수처럼 만족스럽 게 웃었다. 사실 그를 향해 다가 오고 싶어 하는 이들도 상당히 많 은 것 같았으나, 누군가와 눈만 마주쳐도 찢어 죽일 듯한 눈을 하 는 칼 때문에 다가오지 못하는 듯 보였다.
"물론, 칼과 연회를 함께하면 무 척 즐겁겠죠."
귀엽게 구는 칼을 향해 방긋 웃 어주었다. 내 웃음을 정면으로 마 주한 칼의 귓가가 살짝 달아올랐 다. 아리아와도 드레스코드를 맞 추기 위해 착용한 버건디색 하네 스를 제외하면 칼과 내 제복은 디 자인만 조금 다를 뿐, 블랙과 골 드의 비슷한 색 배치를 띠었기에 커플룩 같아 보이기도 했다.
"요즘 아리아와 함께 마탑을 다
닌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아리 아도 마법을 배우고 있다는데, 잘 합니까?"
"......우리 둘이 있는데 꼭 걔 얘기를 해야 하나? 뭐, 그렇긴 하 다. 자기도 자기 몸 하나 정도는 지키고 싶다길래 마탑을 소개시켜 줬는데 의외로 마법에 대한 재능 이 상당하더군. 물론 나만큼은 아 니지만. 네가 아버지와 대련에서 다친 이후엔 마음에 변화가 있었 던 건지 치유력을 증폭시키는 연 습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꼴사납 긴 하지만 꽤 열심이야."
아리아 얘기가 나오자마자 얼굴 이 곧바로 얼굴을 구기던 칼은, 그래도 내 질문에 성실히 대답해 주었다. 싫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리아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술 술 나열하는 칼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처음엔 칼과 아리아가 서로에게 암살자를 보냈다는 소식을 들을까 봐 무서웠는데. 이젠 꽤 친해졌나 보네.'
물론 지금도 여전히 틈만 나면 서로에게 칼을 겨눌 것 같긴 하지
만, 이 정도면 미운 정 정도는 충 분히 든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크리시스 영애."
그리고 칼과 담소를 나누는 내 게로 다가온 인영이 있었다. 고개 를 돌렸다가 황금빛 눈동자와 마 주치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인하르트 경?"
코끝을 간지럽히는 로즈우드 향 기. 살짝 입을 벌렸다.
새하얀 황궁 기사단 정복을 차 려 입은 라이너는 빛의 사자처럼 빛났다.
'진짜 잘생겼다.'
새삼 감탄했다. 라이너는 외모가 범죄인 국가에서 태어났다면 필시 구족이 몰살당했을 것 같았다.
휴일에 미르로서 그와 만날 때 약식으로 된 간단한 기사단 제복 을 입은 모습은 몇 번 봤지만, 정 식 제복을 차려입은 모습은 또 처 음이었다. 하얀 천에 금실이 수놓
인 정복은 은회색 머리칼에 금빛 눈동자를 가진 라이너와 맞춘 듯 어울렸다.
"반갑습니다, 경. 오늘 정말 빛 나시는군요."
짧게 인사하며 진심을 담아 칭 찬했다. 라이너의 양 귀가 빠른 속도로 달아올랐다. 내 시선을 살 짝 피한 그가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이 차림이 마 음에 드십니까?"
"네. 제복 색 배치가 경과 정말
잘 어울립니다."
휴일마다 만나며 부쩍 가까워진 라이너와 자연스럽고 편하게 대화 를 나눴다. 거듭 되는 내 칭찬에 라이너의 목덜미까지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하필 흰 제복을 입고 있어 붉어지는 피부가 확연히 눈 에 띠었다.
'진짜 부끄럼 많단 말이지.'
나와 시선도 맞추지 못하는 라 이너를 보고 귀엽다고 생각하며 작게 웃었다. 여러 번 만나본 라
이너는 작은 칭찬이나 접촉에도 얼굴을 붉히는 부끄럼쟁이였다.
"그럼...... 자주 입고 다녀야겠 군요."
"음, 자주 입기엔 좀 불편해 보 이는데요."
잘 정리된 제 머리칼을 살짝 헝 클어트린 라이너가 중얼거렸다. 제복을 장식하는 수많은 화려한 액세서리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 다. 무척 멋있긴 했지만 훈장이나 어깨 장식 등이 주렁주렁 달린 제 복은 무척 불편해보였다.
"그래도 자주 입고 다닐 겁니
계속 시선을 피하던 라이너가 이제야 나와 시선을 맞춰 주었다. 늘 무심해 보이던 황금빛 눈동자 가 별처럼 반짝거린다. 항상 굳은 직선을 그리던 입매가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영애께서 마음에 드신다고 하 지 않으셨습니까. 전 영애께 잘 보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늘 부끄럼쟁이처럼 구는 라이너는 가끔 이렇게 사람 마음 을 훅 치고 들어오는 말들을 던지 곤 했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덩치 큰 개 같아.'
라이너의 흔치 않은 웃음을 멍 하니 바라보다 어쩐지 목이 타는 느낌에 손에 들고 있던 와인을 들 이켰다. 평소엔 만사에 관심이 없 는 호랑이 같은 라이너는 가끔 이 렇게 굴곤 했다.
"......그래. 아인하르트 경 눈에 나는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야?"
잠시 묘한 기류와 함께 이어지 던 나와 라이너의 시선 교환을 뚝 끊어낸 건 차갑게 날 선 칼의 목 소리였다. 그제야 칼에게로 시선 을 돌린 라이너는 조금 난감한 기 색으로 칼을 향해 짧게 목례했다.
"......안녕하십니까, 공자님. 뒤 늦게 인사드리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오. 용서하기 싫은데 어쩌지."
고집스럽게 팔짱을 낀 칼이 서 늘하게 식은 붉은 눈동자로 라이 너를 느리게 훑어보았다. 라이너 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짙어졌 다.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이와 마 주쳤을 때 먼저 인사를 하는 것은 귀족 사회의 아주 기본적인 예의 다. 라이너는 내게 인사할 때 나 와 같은 신분인 칼에겐 인사하지 않았으니, 확실히 예의에 벗어난 행동이었다.
"'내' 동생과 친하게 지내는 모
양이야, 경."
'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한 칼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이는 확연한 언짢음의 피력이었다. 나 를 힐끔 곁눈질한 라이너가 조심 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님께서 어울려 주신 덕분 에 친분을 쌓고 있습니다."
"원래 슈슈가 착해서 누구하고 나 잘 어울려 주긴 하지."
'영애'에서 '공녀님'으로 딱딱해 진 호칭을 보니 라이너가 긴장을
한 모양이었다. 라이너와 내 친분 이 별거 아니라는 듯한 칼의 말투 에 라이너의 표정이 굳었다.
"얼마나 슈슈가 반가웠는지 나 는 발견도 못 하더군. 내 키가 그 렇게 작은 것도 아닌데 말이야."
"무례에 대해선 사과드리겠습니 다. 말씀하신대로 제가 공녀님이 너무 반가워 공자님을 보지 못했 던 것 같습니다."
"슈슈도 경을 반가워했을까 싶 네만, 그래도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아 기쁘군. 둘은 좋은 '친구'인 모양이야?"
'친구'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 하는 칼에 라이너의 미간이 크게 꿈틀거렸다. 라이너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저 친구라고 정의하기엔 부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에게 귀감이 되고 천천히 알아가는 사 이라."
칼과 라이너 사이에 강렬한 시 선이 오간다. 날카롭게 밀어붙이 는 칼과 지지 않고 받아치는 라이 너를 구경하며 와인을 홀짝였다.
자고로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건 남의 사랑과 싸움 구경인 법이 었다.
'재밌는데.'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목덜미를 뜯을 재규어처럼 으르렁거리는 칼 과 조용히 죽일 각을 재는 호랑이 처럼 눈을 번뜩이는 라이너를 보 며 생각할 때쯤.
"뭐••••••?"
모든 걸 살라먹을 듯 세차게 불 타는 칼의 붉은 눈동자가 내게로 향했다.
"슈슈! 저 말이 사실인가?"
칼의 거친 물음에 눈동자를 굴 렸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라이너는 내 단련을 돕고 있으니 그가 내게 귀감이 돼 주는 것도 맞았고, 휴일마다 정기적으로 만 나며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천천 히 알아가고 있다는 것도 틀리진
않았다.
"음...... 네."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니 뺨 이 은은히 붉어진 라이너가 의기 양양하게 칼을 바라보았다. 표정 은 여전히 무표정인 주제에 자랑 하듯 눈을 빛내는 라이너는 형제 와의 다툼에서 엄마가 제 편을 들 어줘 의기양양해진 5살 꼬맹이 같았다.
칼이 얼굴을 확 굳혔다. 그의 눈 동자에 광기 비슷한 것이 깃들었
다. 입술을 잠시 짓씹은 그가 얼 굴이 굳은 상태 그대로 입꼬리를 비틀었다. 원작 칼이 지었을 만한 기이한 표정에 잠시 소름이 돋았 다.
"......재밌군."
전혀 재밌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하.' 하고 헛웃음을 터트린 칼이 그의 미려한 손을 덮은 검은 가죽 장갑을 느리게 벗겨 냈다. 그의 하얀 손이 모습을 드러냈다.
"라이너 아인하르트 소후작."
칼이 빙긋 웃었다. 소름 끼치는 웃음이었다.
"얼굴 대게. 장갑 던질 거거든."
귀족 사회에서 타인의 얼굴에 장갑을 던진다는 건 결투 신청을 뜻했다.
라이너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 다. 아무리 결투가 시작한 이상 신분은 따지지 않는다지만 공자와 다투는 게 부담이 되는 듯했다.
'그런데 천재 마법사인 칼이랑 천재 검사인 라이너가 싸우면 누 가 이길까?'
머리로는 막아야 된다 생각하면 서도 머리는 계속 이런 생각만 떠 올렸다. 뼛속까지 검사인 나는 본 능적으로 싸움 구경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래도 이 시국에 개판을 만들 순 없으니 둘을 막아서려 할 때였 다.
"황제 폐하와 교황 성하, 아타라
왕국의 사자들께서 입장하십니
타이밍 좋게 황가와 교황, 사절 단의 입장을 알리는 시종의 우렁 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상황은 흐지부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