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화
'......폭탄들이 아주 대거로 몰려 오는구나.'
연회장 문을 열고 등장한 인영 들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가장 선두에 자리 잡은 건 황가 의 일원들.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 워 낸 황제 헬리오스와 황후 티나 키프로스, 2황자 세레논.
그리고 황태자 디에고였다.
'안 그래도 잘난 얼굴이, 차려 입으니까 정말 빛이 나는구나.'
금빛 제복을 차려 입고 포마드 로 머리를 깔끔히 넘긴 디에고를 친근하게 바라보았다.
친구가 되기로 한 이후 그의 초 대에 응해 몇 번 티타임을 가지며 디에고와 친분을 쌓은 참이었다.
그 다음으로 연회장에 등장한 건 신전의 일원들이었다. 엘을 선
두로 사뿐히 들어서는 신관들의 행렬엔 율리안도 껴 있었다.
'엘은...... 그냥 신 같은데.'
안 그래도 누가 뒤에서 전광판 을 들고 있나 싶은 성스러운 외모 에 청명한 하늘빛과 깨끗한 흰색 이 섞인 교황 정복까지 차려입었
거기에 하늘빛 생머리를 허리까 지 늘어뜨리고 신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으니 교황 정도가 아니라 어디 신전에서 막 튀어나온 신 같
았다.
'좀 얄밉긴 하지만.'
엘이 대신관이라고 확신하며 이 곳에서 춤을 췄던 걸 생각하면 아 직도 좀 열불이 나지만, 숨긴 이 유가 나를 위해서였던 만큼 너그 럽게 봐주기로 했다.
신관들의 행렬을 유심히 관찰하 고 있을 때였다.
'어. 눈 마주쳤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기색을 버리 고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율리 안과 눈이 마주쳤다.
금방 짓궂은 기색을 드러낸 그 가 나를 향해 윙크했다. 엘과 담 판을 지은 이후로 여러 번 신전을 방문하며 마주했던 덕분에 이제는 친근해진 율리안을 향해 피식 웃 어 주었다.
'레오는 맨 뒤네.'
그 다음으로 여러 휘황찬란한 물건들을 들고 줄줄이 등장한 사
절단 일행에서 레오를 찾았다. 맨 뒤쪽에 자리 잡은 그는 칙칙한 검 은 로브를 벗어 던지고 아타라 왕 국의 상징인 초승달이 은실로 수 놓인 남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솔직히 적응이 안 돼......
좁은 오두막에서 아옹다옹하며 지내던 소년이 저렇게 자랐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예민하면 서도 권태로운 레오의 차가운 얼 굴이 새삼 낯설었다.
연회장 맨 앞에 자리한 두 거대
한 왕좌에 황제와 엘이 자리 잡 고, 그 앞으로 사절단이 섰다. 가 장 첫 순서는 사절단이 가져온 선 물을 황제와 교황에게 선보이는 시간이었다.
"국왕 폐하께서 보내신 선물입 니다."
그러니까 알렉산드로 1세, 즉 저 사절단 무리에 조용히 껴 있는 레오의 선물은 말 그대로 무기의 향연이었다.
아타라 최고의 대장장이가 만든
명검, 아타라의 가장 뛰어난 보석 세공인이 세공한 보석으로 꾸민 단도, 금으로 만들어진 권총 등 등. 사절단이 가져온 수십 개의 상자에 든 것은 모두 무기였다.
"이번에 즉위한 국왕은 제 형제 를 모두 죽이고 왕좌에 올랐다 죠? 그래서 저런 선물들을 준비 한 건가......
"이제 17살인 어린 왕이니 사교 에 무지한 모양이에요."
경악한 귀족들의 수군거림이 이 곳저곳에서 들려왔다. 조금 굳은
표정으로 선물 전달식을 지켜보던 나는 사절단 사이의 레오를 곁눈 질했다. 소드 익스퍼트인 그가 귀 족들이 자신을 욕하는 걸 듣지 못 했을 리 없음에도, 그의 표정엔 조금의 감정 동요도 없었다.
'확실히 전후 사정을 모르는 사 람들이 보면 이상한 상황이긴 하 지.'
새 왕이 즉위하며 동맹국에게 사절단을 보내는 것은 '야. 우리 나라의 주인이 좀 바뀌었어도 우 린 여전히 친구야, 알지?'라는 뜻
이다. 나라의 주인은 바뀌었어도 동맹은 여전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만약 새 왕이 즉위하고도 사절 단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건 동맹 은 옛날이야기라는 뜻으로, 더는 동맹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뜻 이었다.
사절단은 말 그대로 왕을 대신 해 온 왕의 사자들-이 경우 진짜 왕이 숨어 들어오긴 했지만-. 사 절단의 태도와 사절단을 맞는 태 도에 따라 나라 간의 사이가 결정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사절단이 선물로 무기만 가져왔다는 건...... 해석하기에 따라 상당히 예민한 문제가 될 수 있지.'
동맹국에 사절단을 보내는 왕은 해당 나라에서 보낼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을 보내는 게 일반적이 다. 그런데 무기만 보냈다는 건, 싸우자는 의미로까지 받아드려질 수 있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에게도 다 생
각이 있겠지.'
알렉산드로는 난폭할지언정 멍 청하진 않았다. 전쟁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제국과 척을 지면 나라 의 패망을 이끌어 낸다는 것을 그 는 알고 있었다.
'이건 전쟁을 대비하라는 일종의 메시지.'
보석과 진귀한 물건들은 모두 전쟁에 필요치 않다. 무기야말로 전쟁을 앞둔 제국에게 알렉산드로 가 보내는 최선의 선물이었다.
내가 읽어낸 것을 황제와 교황 이 읽어내지 못할 리 없다. 헬리 오스와 엘의 불쾌하지 않은 표정 이 이 증거였다.
사절단이 전달한 국왕의 편지를 받아 읽은 황제의 입가로 옅은 미 소가 띠었다.
"북풍을 조심하라...... 애송이가 제법이군."
마나를 사용해 황제의 작은 중 얼거림을 엿듣고 레오에게로 시선
을 돌렸다.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있는 그의 입가 위로 황제와 비슷 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후로 이어진 차례는 제국이 왕국에게로 보내는 선물 전달식이 었다. 둘이 짜 맞춘 것도 아닐 텐 데 제국이 준비한 선물도 무기들 이었다. 전쟁이 다가오는 것을 모 르고 왕국을 욕하던 하위 귀족들 사이에 혼란이 퍼졌다.
'하위 귀족들만 아직 모르는 거 겠지.'
북부의 움직임은 나도 매일 신 경 써서 조사하고 있는 바, 그들 은 무척이나 심상치 않았다. 제국 에 혼란이 일까 봐 아직 공식적으 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 북부 가까 이에 거주하는 변경백들이나 황 가, 신전, 수도의 고위 귀족들은 모두 눈치채고 있을 게 뻔했다.
'하지만...... 다들 쉽게 생각하고 있겠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현재 제국 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북부의 반 란은 역사에도 여러 번 있었던 일
이다. 그리고 그 수많은 반란 동 안 북부는 단 한 번도 제국을 이 긴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모두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을 게 뻔했 다.
북부의 가장 위험한 무기를 모 르니까.
'원래라면 북부는 절대 제국을 이길 수 없지. 용과 지렁이의 싸 움 같은 거니까.'
체계화된 훈련을 받아온 막강한 제국의 군대를, 떠돌아다니며 사
는 북부의 유랑민들이 이길 가능 성은 소수점 아래로 내려간다.
하지만 지렁이가 용을 이기기 위해 호랑이를 길들이는 방법을 알아냈다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 졌다.
'북부는 마수를 길들이는 방법을 알아냈다.'
마수. 북부 지역에 흐르는, 인간 은 느낄 수 없으나 짐승에겐 영향 을 주는 마기에 잠식되어 신체가 기괴하게 비틀리고 신체 능력이
놀라울 정도로 강하게 변화된 동 O C
=•
마수들로 인해 늘 고통받으며 터조차 잡지 못하고 유랑민으로 살아온 북부인들은 기나긴 마수와 의 싸움 끝에 금지된 흑마법으로 마수를 조정하는 방법을 알아냈 다.
루주 마을의 마수 토벌에서 칼 과 함께 마주한 데베라 떼도 북부 인들에 의해 조정당하는 마수였 다.
'늘 제국의 지배 아래에 눌려 살 았던 북부인들은 마수들로 제국과 의 전쟁을 준비하지.'
내가 제국인이고, 내 소중한 이 들이 제국에서 살고 있기에 제국 의 편을 들고 있지만, 사실 제국 이 북부인들에게 해 온 짓들을 생 각하면 정말 반란이 일어나 마땅 했다.
'북부를 식민지 취급하며 북부인 들을 노예로 부리고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공물을 요구했지.'
역사 속 지배층들이 모두 선했 던 것은 아니다. 이번 황제와 교 황은 성군으로 불리며 북부를 착 취하지 않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쌓여 온 제국을 향한 북부의 원한 은 한 세대의 의로운 정치로 풀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북부의 반란은 합당하지만...... 나는 제국의 편을 들어야 해.'
제국은 확실히 북부인들에게 지 울 수 없는 죄를 지었다. 허나 나 는 내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죄 지은 제국을 승리로 이끌어야
했다.
이걸 자각하면서부터 나를 짓누 르기 시작한 거대한 바위가 점점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숨 막히 는 죄책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카슈미르 크리시스는 선하지 않 다. 아무리 선을 가장한다 한들, 내게 가장 중요한 건 내 사람들일 뿐
나는 이기적이었다.
"크리시스 영애.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안 좋아지셨습니다."
차례가 시작된 이후 칼과의 기 묘한 기 싸움을 멈추고 내 옆에서 차례를 지켜보던 라이너가 조심스 레 물었다. 그의 무뚝뚝한 표정 위로 깃든 걱정이 고마워 살짝 웃 었다.
"괜찮습니다. 잠시 생각이 깊어 져서."
그래도 그의 얼굴에 먹구름처럼 낀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울 한 멍멍이처럼 살짝 눈을 내리깔
던 라이너가 잠시 머뭇거리다 물 었다.
"하지만 정말 안색이 좋지 않으 십니다. 열을 한 번 재 봐도 되겠 습니까?"
"어...... 그렇게 확인을 원하신 다면 그러십시오."
아무리 내가 소드 마스터 평균 에서 많이 떨어지는 체력과 신체 내구도를 가졌다 한들 쉽게 열이 날 리는 없지만, 거절했다간 라이 너가 땅굴을 파고 들어갈 기세라 우선 수락해 주었다.
물론 나는 당연히 손으로 열을 재는 평범한 상황을 상상하고 수 락한 일이었다.
조심스럽게 다가온 라이너의 큰 손이 눈썹을 가리는 내 앞머리를 살며시 쓸어 올렸다. 머리칼에 닿 는 손길이 간지러워 살짝 눈을 감 았다. 나를 지그시 응시하며 조금 몽롱한 표정을 한 라이너가 상체 를 굽혀 훅 얼굴을 가까이했다.
툭.
그리고 맞닿는 이마. 조금 미지 근한 온기가 이마 위로 퍼졌다.
'뭐, 뭐......
순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기다 란 속눈썹을 내리깐 라이너가 코 앞에 있었다. 주위에 웅성거림이 퍼진다. 닿아 오는 온기에, 가슴 께에 퍼지는 몽글거림을 느낄 때 였다.
뢍
"꺄악!"
교황의 지팡이가 굉음과 함께 연회장 중심에 떨어졌다.
그제야 라이너가 이마를 떼고 지팡이가 떨어진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재빨리 상황을 살폈 다. 다행히 사람이 없는 곳에 떨 어져 다친 이는 없었고, 연회장 바닥이 패인 것 외에 단단한 지팡 이는 흠집 하나 없이 멀쩡해 보였 다.
미안하오. 손이 미끄러져서."
떨어진 지팡이의 주인인 엘에게 시선이 쏠리자 감정 하나 깃들지 않은 차가운 무표정을 짓고 있던 엘이 무감각한 어투로 말했다.
'......저게 말이야 소야?'
엘은 현재 연회장 맨 앞에 자리 한 왕좌에 앉아 있다. 그런 그의 지팡이가 맨 앞에서부터 상당한 거리가 있는 연회장 중심에까지 떨어졌다는 건 필시 고의로 던졌 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교황이 미끄러졌다면 미
끄러진 거다.
이 연회장에서 교황에게 '미끄러 진 게 아니라 던진 거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멍청이는 없었기 에, 시종이 황급히 지팡이를 가져 다 엘에게 돌려주는 것으로 사건 은 일단락되었다.
"믿을 수가 없군. 방금 무슨 근 본 없는 짓을 한 거지, 경?"
분명 나와 라이너가 대화를 나
누기 바로 직전에 와인을 가지고 오겠다며 떠났던 칼이 불같이 돌 아와 나와 라이너 사이를 갈랐다. 뵈는 게 없는 광인의 눈을 한 칼 앞에서도 라이너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공녀님의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아 열을 재 본 것뿐입니다."
"열을 대체 왜 그렇게 재냐는 뜻일세! ......그런데 정말 슈슈에 게 열이 있나?"
"이렇게 재는 게 훨씬 느끼기 쉽습니다. 열은 없으십니다만, 여 전히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느끼긴 뭘 느끼나! ......안색이 안 좋긴 하네. 빨리 연회를 마치 고 가야겠군."
싸우는 건지 내 몸 상태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건지 모를 칼과 라 이너의 대치를 멀거니 구경하다 그냥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둘이 쿵짝이 잘 맞는 거 보니 그냥 친구끼리 티격태격하는 수준 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