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화
"저, 공녀님. 잠시 실례하겠습니 다."
잠시 멍하니 연회장 구석을 걷 고 있던 나를 누군가가 불렀다.
'시종?'
잔을 나르는 시종이었다. 이런 시종들은 대개 먼저 잔을 요구하 지 않는 한 먼저 말을 걸지 않았
기에 의아해하면서도 예의 바르게 맞아주었다.
"실례일 것 없다. 무슨 일인 가?"
"큼, 저, 저기......
시종이 머뭇거렸다. 이제 보니 그의 양 뺨이 부끄러움으로 달아 오른 후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 려고 그러나 싶어 기다려 주니, 수치스러운 표정으로 한참 주저하 던 그가 들고 있던 쟁반 위에서 잔을 들어 내게 건네주었다. 얼떨 결에 잔을 건네받았다.
'......압생트?'
투명한 잔에서 찰랑이는 형광 연둣빛 액체에 미간을 찌푸렸다.
보통 연회장에선 샴페인이나 와 인, 탄산수, 물 정도를 통상적으 로 배치해 둔다. 이외 다른 주류 들은 직접 시종에게 물어 특별히 주문해야 했다.
"어...... 고맙네?"
우선 압생트를 입에 머금으면서
도 떨떠름하게 시종을 바라보자, 그가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조 금 떨어진 자리를 가리키며 외쳤 다.
"저, 저쪽 신사 분께서 보내시는 잔입니 다!"
"크흡."
순간 웃음이 터져 입에 있던 압 생트를 뱉을 뻔했다.
'이건 또 뭐야.'
이제는 개그 코드로 사용될 정
도로 해묵은 작업 방식이었다. 가 라앉던 기분이 조금은 풀린 느낌 에 키득 웃곤 시종이 가리킨 곳으 로 시선을 돌렸다.
' 레오.'
사람 없는 한적한 구석에 자리 한 의자에 앉아 있던 레오의 형광 연둣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마찬 가지로 압생트를 들고 있던 그가 나를 보며 익살스럽게 눈을 찡긋 거렸다.
'진짜 웃기는 놈이야.
이렇게까지 나를 호출하는데 응 해 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싶었다. 씨익 웃곤 그를 향해 다가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경?"
"우리 둘뿐인데 꼭 예의를 차려 야겠어, 공녀님?"
레오의 맞은편에 털썩 앉아 공 식적으로 만난 만큼 형식적으로나 마 예를 갖추자 미간을 찌푸린 레 오가 저지했다. 불퉁한 그의 표정 에 피식 웃으며 몸에 힘을 풀고 압생트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래, 레오. 잔은 왜 보냈지?"
"술이 필요해 보여서?"
레오의 장난스러운 표정에 웃음 이 나왔다.
조금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꾹 누르곤 눈앞의 레오를 지그시 응시했다. 날카로운 눈매가 휘어 든다. 비록 과거일지라도 나와 지 냈던 시간이 있는 레오는 내 감정 을 읽는 데 능했다.
어린 시절의 그와 마주한 것 같
단 감상을 받은 나는, 조금 장난 기가 돌았다.
"너희 나라 국왕은 어떤 사람이 야? 선물로 웬 무기만 보냈길래 독특하다 싶어서."
"컥."
잔을 기울이던 레오가 작게 기 침 소리를 냈다. 잠시 혼들리던 동공은 곧바로 제자리를 찾았기에 다른 이가 봤다면 잠시 사레가 들 렸다고 생각했겠지만, 내겐 그의 당황이 확연히 보였다.
"알렉산드로...... 1세 말이지."
"그래."
레오의 얼굴에 망설임이 깃들었 다. 갑작스러운 자기소개를 하게 됐으니 충분히 고민스러울 것이 다. 미묘한 레오의 얼굴을 감상하 며 즐거이 압생트를 들이켰다.
"너만큼은 아니지만 꽤 강해. 소 드 익스퍼트야."
"흐 "
CJ •
"......그리고 돈도 많을걸. 왕이 니까."
" 그리고?"
더듬더듬 칭찬을 늘어놓는 레오 를 보며 웃음을 참았다. 또 다른 자신이 못나 보이긴 싫은 모양이 었다.
"......넌 어떤 사람이 좋아?"
한참 고민하던 레오가 되레 내 게 질문을 던졌다. 생각해 보지 않은 부분이라 잠시 고심하다 느 리게 입을 열었다.
"아마, 착한 사람."
"......착한 사람?"
레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동공이 흔들리던 그가 다급히 말 했다.
"착하기만 하면 돼? 무력의 정 도나 재력 수준 같은 건 안 봐?"
레오의 물음에 자신만만하게 웃 었다.
"강하긴 내가 충분히 강하고. 돈 도 나한테 있는데 굳이?"
레오가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턱 다물었다.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지만 딱 봐도 울적해 보이는 그 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말하는 착함의 기준 엔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것도 포 함되 겠지?"
"웬만하면 저지르지 않은 사람 이 좋지."
내 대답에 그의 얼굴이 더욱 우 중충해졌다. 힘겹게 웃음을 참으 며 은근슬쩍 한마디를 덧붙여 주 었다.
"아, 그리고 잘생긴 것도 좋아 해."
그 말에 레오의 얼굴이 확 피었 다. 안도의 한숨을 쉰 그가 씨익 웃었다.
"그럼 넌 아타라 국왕을 좋아할 걸."
레오의 날카로운 눈매가 흐드러 지게 휘어졌다.
"걘 잘생겼거든."
그 말을 하는 레오는 방금 막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처럼 아름다 웠기에 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크더니 능구렁이 한 마리가 됐 구나.'
내 한 마디 한 마디에 발끈해 빽빽거리던 어린 레오는 없다는 생각에 아쉬우면서도 능숙하게 분 위기를 주도하는 지금의 레오에게 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런데 말이야.
나른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 나 를 바라보다 내 이마로 시선을 굴 리더니 표정을 굳힌 레오가 상체 를 훅 숙여 내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의 입꼬리가 서늘하게 비 틀렸다.
"방금 같이 있었던 노란 눈 치 랑은 어떤 관계야?"
방금 같이 있었던 노란 눈의 누 군가라면 라이너뿐이다. 소후작인 라이너를 치라고 부르는 레오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 사람은 치가 아니라 라이너 아인하르트 소후작......
"알아, 누군지."
짓씹듯 말을 뱉는 레오의 눈동 자가 형형한 불길에 휩싸였다. 코 앞까지 다가온 그가 고개를 기울 였다. 휘어진 눈매로 들끓는 무언 가가 뚝뚝 떨어졌다.
"왜 그 치가 얼굴 들이미는 걸 내버려 뒀어?"
레오의 물음에 눈을 깜빡였다. 그야 처음엔 손으로 열을 재는 건
줄 알고 허락을 해 준 거지만. 친 구 사이에 이마 정도 맞댈 수 있 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야 친구니까. 너도 친구라서 허락해 줬었잖아."
뭐가 문제냐는 투로 말하니 레 오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빌어먹을 친구......
환장하겠다는 표정을 지은 채 무언가 말하려는 듯 한참 입을 열 었다 닫았다 반복하던 그가 자기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트리곤 고개 를 휙 돌려 등받이에 이마를 마구 박기 시작했다.
"아악! 짜증 나! 악! 진짜 짜증
'이 자식이 미쳤나......•'
발광하며 이마가 새빨개지도록 머리를 박아 대는 레오는 정말 미 친놈 같았다. 나는 주위를 살폈 다. 다행히 인적이 드물어 보는 이는 없었다.
"그만해. 머리 다쳐."
말리지 않으면 정말 머리를 깨 버릴 기세인 레오를 보고 한숨을 쉬며 살짝 몸을 일으켜 그와 등받 이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 제야 그가 자해를 멈췄다.
"••...슈슈."
고개를 휙 돌린 레오가 내게로 얼굴을 가까이 했다. 직전에 있는 그의 눈동자가 일렁이며 파동 치 다, 형용할 수 없는 착잡함을 담 아 질끈 감겼다.
툭.
레오가 고개를 기울이며 이마가 맞닿았다. 눈가를 간지럽히는 그 의 연갈색 머리칼에 나도 덩달아 살짝 눈을 감았다. 진동하는 레몬 향 사이로, 그가 한숨을 쉬었다.
"우린 친구니까 이런 거 해도 되는 거지."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
여상스레 대답했다.
난 내 선 안으로 들인 이들에게 관대한 편이다. 스킨십을 특별히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겨우 이마를 맞대는 것 정도야 레오가 원한다면 언제든 허락해 줄 의향 이 있었다.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그의 입매가 일그러 졌다.
"그럼 만약에."
섬세한 속눈썹이 느리게 들리고 투명한 연녹빛 눈동자가 나를 주 시했다. 욕망. 분노. 갈증. 수많은 감정들을 뒤섞은 마녀의 독극물
냄비가 보글보글 끄는 듯했다.
"내가 이것보다 더한 걸 원한다 고 하면 어떡할 거야?"
짙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숨결을 섞어 속삭인다. 레오가 눈을 가늘 게 떴다. 이마가 맞닿은 상태에서 그가 고개를 살짝 트는 바람에 피 를 머금은 듯 붉은 그의 입술이 내 입술 직전까지 다가왔다. 번들 거리는 붉은 입술에서 압생트 향 이 났다.
'녀석. 자기가 라이너보다 더 친
한 친구라는 걸 확인받고 싶은 건 가.'
안타깝게도, 내게 레오는 아직 너무 어려 보였다.
난 그의 얼굴을 직전에 둔 상태 로 뿌듯하게 웃었다. 누나라고 불 러주지 않아 내게 거리를 두려는 건가 싶었지만 이렇게 보니 여전 히 나를 따르는 것 같았다.
내 미소를 본 레오의 미간이 크 게 꿈틀거렸다.
"물론."
턱을 살짝 들어 레오의 이마 앞 에 입술을 두고 천천히 고개를 숙 여 입술을 내려앉혔다. 이마에 하 는 키스는 우정의 의미를 담으니 까.
그가 크게 몸을 떨었다. 그의 이 마에서 입술을 떼어 내고 패닉 상 태에 가까워 보이는 레오에게 한 마디 덧붙였다.
"네가 원한다면 더한 것까지도 허락할게."
눈이 마주치고, 눈빛이 오간다.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담긴 나 를 지그시 응시했다. 친애를 담아 빙긋 웃고 있는 나를.
형광 분홍빛 눈동자와 형광 연 둣빛 눈동자. 동일한 형광빛으로 빛나는 나와 그의 눈이 꽤 닮았다 고 잠시 생각했다.
그 속에 담긴 건, 너무도 달랐지 만.
"••••••하."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레오가 숨을 뱉었다. 다시금 고개를 돌린 그가 더욱 세게 등받이에 이마를 박기 시작했다.
"악! 아악! 아아아악! 악! 흐악!"
레오는 소리를 지르며 등받이가 먼저 부러지나 이마가 먼저 깨지 나 확인해 보겠다는 듯 미친 듯이 머리를 박았다.
'얘가 왜 이래 진짜? 이런 답을 원했던 게 아닌 건가?'
이유를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소리를 질 러대니 없는 사람들도 올 것 같아 황급히 레오의 어깨를 쥐고 입부 터 틀어막고 보았다. 아타라에서 온 사자가 광인이라는 소문이 나 봤자 좋을 것 하나 없었다.
보드라운 입술이 굳은살 베긴 내 딱딱한 손바닥에 눌리고 나서 야 그는 미친 짓을 멈추었다.
"너 어디 아파? 의원 불러 줘?"
정신분열이 일어난 건 아닌가 싶어 그의 양 어깨를 붙잡고 걱정 스레 물었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나를 멀거니 바라보던 레오가 두 손에 제 얼굴을 포개곤 고개를 푹 숙였다. 덕분에 붉어진 귀 끝이 잘 보였다. 해석할 수 없는 해괴 한 소리를 내던 그가 작게 웅얼거 렸다.
"나, 네가 너무 싫어."
'얘 사춘긴가?'
갑자기 또 왜 이러나 싶었다. 뭐
라고 말하나 들어는 보려고 또다 시 해괴한 소리를 내는 레오를 앞 에 두고 잠자코 기다리고 있으니, 한참 뒤에야 얼굴을 든 그가 얼굴 을 일그러트렸다. 그의 양 뺨에 꽃물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여전히 너무 좋아."
낮은 목소리가 체념을 담고 있 었다. 모순을 말하는 레오의 얼굴 에 비참함이 깃들었다. 무어라 말 하려다 그의 얼굴이 너무 착잡하 다는 것을 깨닫고 그만 입을 담았 다. 수많은 감정들이 벅차올라 금
방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그 의 눈동자를 응시하다 그저 등을 토닥여 주었다.
"넌 너무 무자비하게 다정 해......
그르렁거리는 목소리가 거칠었 다. 한 손에 얼굴을 묻은 그가 짙 게 한숨을 쉬었다. 한숨에 압생트 향이 섞여 표류했다.
' 취했구나.'
난 확신했다. 아무나 잡고 난리
치는 게 그의 주사라면야 이 꼴도 납득할 수 있었다. 난 그의 등을 몇 번 더 토닥여 주었다. 내 무릎 에 토하지만 않는 이상 어떤 주사 든 받아 줄 수 있었다.
"그래도 너랑 이마를 최초로 맞 댔던 남자는 나지."
가라앉은 목소리가 옅은 간절함 을 담아 묻는다. 긍정하지 않으면 살인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이 기도 했고, 사실이기도 했기에 고 개를 끄덕였다.
"응. 내 최초는 네가 가졌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긍정했다. 내 대답을 들은 레오가 크게 움찔 하며 손바닥에 묻고 있던 얼굴을 휙 들었다.
"뭐•..."?"
그가 물음표가 백만 개 정도 떠 오른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왜 말을, 말을 그렇게 하지?"
"내가 잘못 말했어?"
"아니, 왜...... 왜 그렇게 설레
게...... 너, 너, 다른 사람들한테 도 그런 식으로 말해?"
갑자기 버럭 화를 내는 그를 보 며 눈을 끔뻑였다.
"난 너한테만 이래."
내가 레오에게 하는 것만큼이나 편하게 말을 붙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내 말 한마디에 레오는 기름 묻은 짚단에 화르륵 옮겨 붙 은 불처럼 순식간에 얼굴을 붉히 고 죽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나한테 왜 그래...... 나 오늘 잠 못 잔단 말이야• ...
웅얼거린 레오가 내 어깨에 이 마를 툭 기대었다. 그런 그를 보 며 확신했다.
'확실히 취했구나.'
붉어진 얼굴. 제정신으로 할 수 없는 자해 자행. 오락가락하는 기 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어딘가 에 기대는 몸.
사랑이나 그 비슷한 것 때문이
란 선택지는 없다. 레오는 취한 게 분명했다.
졸지에 취한 이의 뒤치다꺼리를 하게 되어 골치가 아팠지만, 그래 도 안쓰러우니 잘 돌봐 주기로 마 음을 먹었다. 넋 나간 표정을 짓 고 있는 레오를 의자에 기대게 하 고 물이라도 가져다주려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오랜만이에요, 공녀님."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교황 성하께서 공녀님을 부르 십니다."
느리게 휘는 연보라색 눈동자.
대신관 율리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