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화
"공녀님께선 지금 나와 시간을 갖고 계십니다만."
의자에 늘어져 있던 레오가 허 리를 펴고 자세를 갖추었다. 빠르 게 변하는 말투와 제자리를 잡은 듯 익숙하게 지어지는 위압적인 얼굴이 그가 내 앞에선 편하게 굴 지언정 확연한 왕임을 알려 주었 다.
"당신이......
레오를 발견한 율리안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율리안의 자세 가 제대로 갖춰졌다. 나는 율리안 의 반응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율리안은...... 레오가 알렉산드 로라는 걸 알고 있으려나?'
아마 고위층은 모두 알렉산드로 가 사절단에 섞여 온다는 걸 알고 있을 거다. 국왕이, 그것도 소드 익스퍼트인 알렉산드로가 언질도 없이 온다는 건 전쟁 선포 비슷한
걸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니까. 알 렉산드로가 공식적으로 오지 않은 이유는 동맹국이면서도 사절단에 왕이 함께 온다는 건 국가의 위상 이 깎이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황가나 교황 정도는 알고 있을 거고, 카이사르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데...... 대신관인 율 리안까지도 알고 있으려나?'
대신관은 후작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만큼, 알고 있다고 확신하긴 상당히 애매하다. 허나 율리안은 엘과 상당히 가까운 친
구인 데다 레오를 보고 긴장한 율 리안을 보고 있자니 이미 레오가 알렉산드로라는 언질을 받았을 가 능성이 높아 보였다.
"......제가 방해를 했나 보군요. 허나 교황 성하의 호출입니다."
율리안이 자세를 낮추었다. 이전 의 기색을 완벽히 지운 레오가 서 늘한 눈으로 율리안을 내려다보았 다. 레오의 시선을 피한 율리안이 나를 바라보았다.
"공녀님. 저와 함께 가 주시겠습
니까?"
율리안은 자세를 낮추면서도 꿋 꿋이 나를 향해 물었다.
"감히."
눈을 사납게 뜬 레오가 살기를 흩뿌렸다. 나야 아무렇지 않았지 만, 율리안은 순간 숨을 쉬지 못 했다.
"어디 대신관 따위가......
"레오."
일어서려는 레오를 저지했다. 그 를 향해 씨익 웃었다.
"대신관님께 무슨 무례야. 넌 귀 족이니까 성하의 호출을 따르는 게 맞지."
한순간에 레오의 입이 닫혔다. 무어라 반박하지 못하던 그가 얼 굴을 일그러트리며 으득 이를 갈 았다. 약이 올라도 한참 오른 것 같았다.
국왕과 교황으로 봤을 땐 알렉 산드로, 그러니까 레오와 엘의 신
분이 동일하다. 그래서 나와 먼저 시간을 갖고 있던 레오가 나를 보 내지 않겠다고 하면 뒤늦게 호출 한 엘이 물러서야 마땅하다.
허나 지금은 레오가 국왕 직위 를 공식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상 황. 엘의 호출을 강제로 물릴 명 분이 없었다.
'물론 호출을 받은 당사자인 나 는 거절할 수 있지만.'
나는 크리시스의 공녀. 교황의 부름이라 할지라도 몸 상태라도
탓해서 거절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갑작스러운 호출인 만큼 거절해도 내 무례는 아니었다.
'하지만 갈 거다, 이 자식아.'
부들거리는 레오를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 말라는 뜻을 담은 그의 뜨거운 눈빛이 등 에 닿는 것을 느끼면서도 히죽 웃 었다. 생각보다 더 약 올라 하니 속이 시원했다.
내가 엘의 갑작스러운 호출에도 별말 없이 응하는 건, 그가 율리
안까지 보내가며 날 호출한 건 이 유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레오 자 식 약 좀 올랐으면 하는 유치한 마음도 있어서였다.
'이 자식, 나한테 정체를 속이고 있으니까.'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아마도 사정이 있을 것이다. 허나 그럼에 도 친구가 내게 숨기는 것이 있다 는 건 섭섭한 일이었다.
'아타라 국왕이라고 솔직히 고백 하면 내가 뭐 떼먹으려 들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를 그렇게 속 좁은 인간으로 봤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짜증이 났다.
"가시죠, 대신관님."
"어, 네••••••
나와 레오를 번갈아 본 율리안 이 얼떨떨해하며 나를 인도했다. 자리에서 꽤 멀어진 시점에서 잔 이 박살나는 파열음이 들리는 듯 했으나 가볍게 무시했다.
레오가 내게 자신이 아타라 국 왕임을 솔직히 밝혔다면 그의 자 존심을 생각해 엘의 호출을 재고 하는 척이라도 해 줬겠지만. 친구 한테 정체를 숨기는 놈의 자존심 을 생각해 줄 마음은 없었다.
"성하께서 절 부르신 이유를 아 십니까?"
율리안을 따라가며 물었다. 눈을 굴리던 그가 한숨처럼 읏었다.
"글쎄요. 다만 오늘은 특히나 지 랄이 심하더군요. 물론 그 자식이
야 공녀님이 옆에 없으실 땐 항상 미친개지만. 오늘은 특히나요. 녀 석. 지랄병엔 약도 없는데......
여러 번 율리안과 만나며 느낀 것은, 그에겐 간덩이가 없다는 것 이다. 제국의 교황을 익숙하게 개 취급하다니. 처음엔 엘 앞에서도 엘을 개라고 부르는 율리안을 보 며 그의 목을 걱정했지만, 이젠 나도 익숙해졌다.
'그나저나 엘은...... 대체 평소에 어떻게 사는 거지?'
율리안의 발언들이나 간혹 엘을 마주한 성기사들의 반응을 보면 그리 쉬운 성격은 아닌 것 같은 데, 내게는 또 보드라운 시나몬롤 처럼 굴었다.
'어려서도 그리 쉬운 성격은 아 니긴 했지. 끝에 가서는 고분고분 하게 굴었지만......
음, 소리를 내며 골똘히 생각했 다. 하여간 내 주위의 사람들은 다 복잡하고 어려운 것 같았다.
'엘은 내게만 특별하게 구는 건
가?'
이 정도의 유추는 쉽다. 문제는 내게 특별하게 구는 이유였다. 나 를 앞서가는 율리안이 주절거리 는, 엘에 대한 욕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리 고 피식 웃었다.
'역시 나랑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냈기 때문이겠지. 엘에겐 내가 절친인 건가?'
카슈미르 크리시스는 눈치가 빨 랐다.
더 정확히는 눈치만 빨랐으며, 그 어떤 것도 사랑과 연관시키질 못했다.
율리안이 나를 안내한 곳은 이 미 커튼이 쳐져 있던 발코니였다. 발코니 앞에서 물러서는 율리안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헛기침으로 인기척을 낸 뒤 커튼을 걷었다.
달빛이 깃든 발코니는 묘한 분 위기를 풍겼다. 살살 불어오는 밤
바람을 따라 흐르는 밤의 향취에 섞여드는 익숙한 백합 향기를 맡 으며 발코니 안으로 들어섰다.
"성하.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테라스 난간에 기댄 엘은 지그 시 눈을 감고 있었다. 달빛을 받 은 그의 하늘빛 머리칼이 신비롭 게 반짝였다.
그의 고개가 천천히 내게로 향 했다. 하얀 속눈썹이 살짝 들리며 달빛보다 더 반짝이는 은빛 눈동 자가 드러났다.
' 아.'
그의 눈을 본 순간 속으로 탄식 했다. 분명 빛나고 있는데. 요정 가루를 한 움큼 묻힌 듯 찬란한 데. 그렇게나, 아름다운데. 여전히 천사 같은 얼굴인데.
'너무 어두워.'
그의 눈빛은 소름끼치도록 가라 앉아 있었다. 빛이 들지 않는 달 의 뒷면을 봐 버린 기분이었다.
TTTT-
굳게 닫혀 있던 입매가 흐드러 지듯 휘어진다. 원래도 축 처진 순한 눈매로, 순하게 눈웃음까지 지으니 태어나서 누구도 해쳐 본 적 없는 무해한 존재 같아 보였 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인 내가 그에게서 흐르는 기류를 읽지 못할 리 없 다. 난간을 부서져라-실제 난간은 여러 군데 금이 가 있었다- 잡은
뼈마디가 툭 튀어나온, 조금은 거 친 두 손. 살짝 떨리는 입꼬리. 새하얀 치열로 짓씹어 피를 뱉기 직전의 붉은 입술.
나와 눈을 맞추려 하지 않는, 온 갖 어두운 감정들이 뚝뚝 떨어지 는 은빛 눈동자.
엘은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것도, 아마 나 때문에.
"제게 화가 나셨습니까?"
이에 대해 말을 꺼내도 되나 잠
시 고민하다 결국 입을 열었다. 어딘지 위험해 보이는 엘을 건드 려선 안 될 것 같았으나, 돌아가 는 것은 내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게 중요한가요?"
내 물음에 다시금 눈을 감은 엘 이 잠시간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 다. 다시금 그의 섬세한 속눈썹이 들렸을 땐 그의 눈동자에서 흘러 넘치던 모든 것들이 갈무리된 이 후였다.
"난 어차피 당신한테 화를 낼
수 없을 텐데."
엘이 평소와 같은 낯으로 웃었 다. 그 인간 같지 않은, 조각 같 은 미소로. 순진하다 못해 맑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한 제국의 교황인 이는 그리 쉽 게 자신의 권한을 깎아내렸다.
고개를 푹 숙은 채 느린 발걸음 으로 내게 다가온 엘이 조심스럽 게 흘러내린 내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의 얼굴이 내 어깨 너머를 향하며 나와 시선이 엇갈
렸다.
"내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당신 한테 화를 내요."
귓가 바로 옆을 간지럽히는 나 긋하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이를 악문 듯한 건 분명 환청이 아니었 을 것이다.
"화를 내진 못하지만 화는 나셨 다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담담히 지적하자 그가 입을 다 물었다. 침묵은 긍정의 다른 말이
었다.
살짝 물러서서 그의 표정을 살 피려 했으나, 사뿐히 내 어깨를 잡는 엘로 인해 저지되었다. 그는 여전히 내게 얼굴을 보여 주려 하 지 않았다.
"대화는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는 것이 예의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번만 무례를 범하도록 하죠."
" 엘리오르."
"••••••아."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신음 같은 한숨을 뱉었다.
"얼굴 보여 주세요. 우리 꽤 오 랜만에 보지 않습니까."
엘과 담판을 지은 이후 틈틈이 신전을 찾아갔으나, 요새 들어서 여러 일 때문에 바빠 찾아가지 못 했다. 둘만 대면하는 건 벌써 몇 주 만이었다.
엘의 양 어깨를 잡고 살짝 밀었 다. 그가 순순히 물러났다.
그와 눈이 마주치고, 잠시 할 말
을 잃었다.
' 어려워.'
평생을 마수와 사활을 건 싸움 을 하며 보냈다. 때문에 내겐 사 람보다 마수가 익숙했고, 대화보 다 검 휘두르는 것을 잘했다. 가 까운 사람이라고 할 법한 존재는 아리아뿐이었던 좁은 세상에서 졸 업한 지 이제 얼마 되지도 않았 다.
인간과 인간의 감정은 여전히 내게 어려웠다.
투명한 은빛 눈동자를 잠식한 어둠의 의미를 난 읽을 수 없었 다. 그럼에도 저 멀리 어딘가로 추락하는 그 눈에서 눈을 뗄 수 없어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엘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의 눈이 천천히 나를 훑다, 결 국은 땅에 떨구어졌다.
"왜 화가 나셨습니까?"
수많은 감정들이 뒤엉킨 그 눈 에서 내가 읽을 수 있었던 건 한
자락의 분노뿐이었기에 그리 물었 다. 엘이 내게 했던 것처럼 살짝 흐트러져 내려온 그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최대한 상냥하 게.
굳은살 박인 내 손끝이 엘의 하 얀 귓바퀴를 살짝 쓸었다. 그가 입술을 짓씹었다. 한참 바닥을 노 려보던 그가 느지막이 입을 열었 다.
"......당신의 다정함에, 계속 욕 심을 부리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났 어요."
이해할 수 없는 대답. 여전히 읽 을 수 없는 감정. 그저 검으로 베 기만 하면 끝나는 이지 없는 마수 들만 상대하던 내게, 인간이란 복 잡한 동물은 난제였다.
"그럼 제게 화가 나신 게 아니 네요."
"난 당신에게 화를 낼 수 없다 니까."
"그럼 왜 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십니까?"
엘이 입을 다물었다. 고집스레
바닥을 노려보는 그의 미간 어딘 가를 지그시 응시했다.
인간이 익숙하지 않은 나는, 말 의 진위를 읽고 복잡한 감정의 이 유를 알아내는 것을 잘하지 못했 다. 마수는 말을 하지 못하고, 간 혹 머리를 굴리는 놈이라 해도 복 잡한 감정을 품지 못하니까.
허나 눈치는 빨랐다. 눈치는 본 능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는, 동물 적인 감각. 눈앞의 인간이 품은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지라 도, 그 감정으로 인해 일어날 일
들을 읽을 수는 있었다.
'아가씨는 어쩜 그렇게 눈치가 빠르신지 몰라요. 제 마음을 다 아시는 것 같다니까요! 정말 섬세 하세요.'
그러니까 여러 번 들어왔던 이 런 종류의 칭찬은 사실이 아니었 다. 나는 타인의 속마음을 아는 게 아니라, 겉으로 묻어나는 감정 을 겉핥기로 읽어 내고 그로 인해 일어날 상황을 대비할 뿐이니까. 내가 모르는 감정과 마주했을 땐 그 마음을 오해하기도 했다.
"눈, 마주쳐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전 엘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모릅니다."
눈은 그의 영혼. 아무리 감추는 데에 능숙한 사람도 영혼을 바꾸 진 못한다.
그래서 나는 타인과 대화할 때 반드시 눈을 마주치고, 그 눈에 담긴 것을 읽어 낸 후에 행동했 다.
'그르릉...... 크앙!'
이 또한 마수들과 맞서며 생긴 습관이었다. 마수들의 눈이 향하 는 방향. 물든 마기의 정도. 그 안에 드는 감정들. 그 모든 것을 파악하고 움직여야 죽지 않았으니 까.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 만큼 다정한 사람이 아니에요."
엘이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그가 나를 특별하게 대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친한 친구니까. ......아마도.'
짐작하고 있는 이유가 맞는지 확신하지 못할 뿐.
나는 내가 모르는 감정을 해석 할 줄은 몰라서, 그런 것들과 마 주하면 내가 알고 있는 감정으로 치환하기만 했다.
"나는 당신이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일 거예요. 잔인하고, 난폭하 며, 생명을 중시할 줄 모르고, 유 치하기 짝이 없는 그런 사람."
엘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내 시 야를 가득 채우는 은빛 눈동자.
"그리고 그런 모습은 당신이 모 르길 바랐어요."
또다시, 미지와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