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화
"......어렵군요."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 를 그득히 담은 은빛 눈동자를 응 시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제게 보여 주지 않는 다른 일 면의 엘도 몰랐으면 하고. 과거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하고. 저는 당신 앞에서 멍청이가 돼야겠네 요."
" 나는••••••!"
"당신이 원한다면 모르는 척하 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엘리오
단단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여전히 조금은 어색한, 그의 새 이름을.
내가 알던 과거의 그는 이름 없 는 소년이었다. 태어지자마자 고 아원에 버려져 이름이 없다고 그 의 입으로 말했었다.
'검정아.'
나는 그를 그의 검은 눈을 따 '검정'이라고 불렀다. 투박하게 깎 은 진한 갈색 머리에 세상을 향한 증오로 불타는 검은 눈동자를 가 진 소년. 내 어린 시절 친구였던 검정이.
이름부터 외향, 직위까지 모든 것이 달라져 나타난 소년은, 더 이상 내가 읽을 수 없는 눈을 하 고서 내게 난제를 내밀었다.
"하지만 왜인지는 알고 멍청이 가 되고 싶습니다. 말해 주세요.
왜 몰라야 하는 겁니까."
나는 역시 빙빙 돌리는 것에 재 능이 없었다. 올곧은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직접적으로 물었다.
입술을 꾹 깨문 엘이 느리게 대 답했다.
"알면...... 당신이 날......
"내가 당신을?"
주저하는 엘을 도와 상냥하게 호응해 주었다.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싫어할까 봐요."
목소리에서 죽죽 늘어나는 감정 이 처참했다. 한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짙게 한숨을 뱉는 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게 미움받는 것을.
"당신 앞에서가 아닌 나는 실제 로 그렇게 상냥한 사람이 아니에 요. 율리안 그 새끼, 아니, 그 친 구가 욕하는 대로 성격도 그리 좋
지 않아요. 당신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죠. 그리고 과거는......
엘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과거를 회상하듯 느리게 구르는 동공에 차오르는 건 단연 경멸이었다. 그 러나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과 거의 자신을 향한 경멸이었다.
"이제야 당신과 조금은 걸맞은 자리에 올랐는데, 당신이 또다시 나를 그런 무능력한 꼬맹이 보듯 보지 않기를 바랐어요."
나는 그가 과거의 자신을 좋아
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
"......나는 아주 주관적인 사람 입니다, 엘."
엘의 유려한 얼굴을 가득 메운 자기혐오를 지긋이 들여다보다 천 천히 입을 열었다. 땅에 닿아 방 황하던 그의 눈동자가 내게 초점 을 맞췄다.
아주 맹목적이고 간절한, 신을 보는 신도 같은 눈빛이었다.
"난 내가 본 걸 믿고, 내 주관을 따라 만물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객관적인 당신은 중요하지 않아 요."
엘의 창백한 뺨을 잡아 내게로 고정시켰다. 엘의 눈이 한순간 몽 롱해졌다. 한 치의 혼들림도 없이 그를 응시했다.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굴든 상관없습니다. 난 내가 본 당신만 믿습니다."
사실 그랬다. 나는 내가 보지 않
는 곳에서 엘이 사람 수백을 때려 죽여도 개의치 않았다. 이기적이 라고 해도 내게 중요한 건 내 사 람들뿐이었다.
난 내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 는 걸 보지 못할 뿐, 성인군자인 게 아니었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내게 보여 준 상냥함이 거짓이었습니까?"
내 물음에 엘이 울 듯 웃었다.
촉
그리고 몇 달 전 연회장에서 춤 을 마쳤을 때처럼 내 손등 위로 입을 맞췄다.
"당신을 향한 것들은 늘 불변하 고 한 점 거짓이 없어요, 슈슈."
녹을 듯 달콤한 목소리로 엘은 그렇게 속삭였다. 곧은 진심이 담 긴 그의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불어오는 밤바람에 조금 노곤해
진 몸을 난간에 기대었다.
"그리고 무언가 오해를 하고 계 신 것 같은데요."
우두커니 서 있는 엘의 턱을 살 며시 잡아끌었다.
그가 속절없이 내게로 끌려온다. 멍한 그의 얼굴을 바로 앞에 둔 채 장난스레 웃음 지었다.
교황은 태양신 라의 대리. 그런 교황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것 은 라의 권위를 무시한 것으로 간
주되어 중범죄에 속한다.
허나 그럼에도, 나는 엘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주저치 않았다.
"내가 친애하는 건 교황 엘리오 르 라가 아니라 과거 내 친구였던 엘입니다."
내가 그를 친애하는 건 그가 교 황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교황 이든, 여전히 진창을 구르는 고아 소년이든,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미 내 친구이고, 내 사람
이니까.
"......아."
한참 몽롱한 눈으로 나를 응시 하던 엘이 짧은 탄식을 뱉었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 그가 날 마주한 채 두 손으로 난간을 짚었 다.
나는 엘의 두 팔 사이에 갇힌 모양새가 되었다.
"......당신은 그때도 그랬죠."
얼굴이 가까이 다가온 탓에 속 삭임이 귓전에 꽂힌다. 고개를 살 짝 기울인 채 엘을 바라보자 그가 짙은 숨을 뱉었다. 공기 중에 일 렁이는 백합 향이 어지러울 정도 로 강했다.
"그렇게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 로, 아주 태연하게 나를 구원해 요."
여전히 내가 읽을 수 없는 눈빛 을 띠고 있으나, 그 사이에 내가 알고 있는 감정이 하나 깃들었다. 마수들에게서도 간혹 볼 수 있는,
가장 짐승적인 본능.
욕망. 나를 향한 욕망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태양신을 섬기 는 교황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내게 신은 당신이라는 걸 아나 요?"
신성모독이다. 교황의 입에서 나 온 것이라곤 상상도 못할 만큼 불 경한 소리. 허나 그렇기에 훨씬 자극적이 었다.
엘의 눈이 곱게 접힌다. 겉보기
엔 기쁜 웃음이었지만, 그가 속을 숨기기 위해 웃은 것 같다는 느낌 을 지울 수 없었다. 욕망으로 붉 게 달아오른 그의 눈가를 지그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사람을 신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위험해요."
"나도 알아요."
내 손을 가볍게 잡아들고 상체 를 숙인 엘이 내 손등에 그의 입 술을 대었다.
" 아.
짧은 단말마를 뱉었다. '춥-' 하 는 물기 어린 소리와 함께 투박하 고 흉터투성이의 피부가 부드러운 붉은 입술 사이로 잠시 빨려 들어 갔다 나왔다. 손등 위로 열꽃이 퍼진 듯 붉은 자국이 남았다. 조 금 얼떨떨해하고 있으니, 날 올려 다본 엘이 빙긋 웃었다.
"하지만 위험하다고 해서 물러 설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서."
기묘한 속삭임이 귓가로 파고드 는 감각은 오싹했다.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주저하다 그와 마주했다.
엘의 은빛 눈동자와 마주했을 땐 무방비한 상태로 맹수를 마주 친 느낌이었다.
"......아타라 사절단과는 접촉해 봤나요?"
얼마나 시선이 오갔을까. 내게서 진득한 시선을 떼며 느리게 물러 난 엘이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주 제를 돌렸다. 무어라 더 말을 하 려다 말았다. 그가 말을 돌리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으니, 그에
따를 뿐이었다.
"멀리서 본 게 답니다. 친분을 쌓을 틈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만나 본 이가 한 명은 있을 것 같은데요."
'있긴...... 하지. 사절단이자 국 왕••...
레오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의 눈빛이 순간 서늘 해지다 도로 평소의 빛을 찾았다.
"그 자식이 슈슈한테 달라붙었
습니까?"
"어...... 달라붙는다기보다는 그 냥 친구입니다."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엘의 표정 이 상당히 미묘해졌다. 불신, 비 웃음, 동정 등이 뒤섞인 기묘한 얼굴이었다.
"왕국을 선물로 갖다 바칠 놈이 던데 친구라고요......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물론 레오가 나와 친하긴 하지
만, 왕국까지 줄 정도로 미친놈은 아닌데.
"음, 엘은 레오와 아는 사입니 까?"
"......레오? 그 잡초 색 눈에 사 납게 생긴 애송이 말씀하시는 겁 니까?"
"잡초 색 눈...... 맞는 것 같습 니다."
미의 신도 울고 갈 레오의 아름 다운 외형을 단번에 깎아내리는 엘을 보며 순간 웃음이 튀어나올 뻔했으나 입술을 깨물어 참았다.
엘의 얼굴은 애교 부리는 데베라 를 본 것처럼 썩어 들어갔다.
"......얼굴은 알지만 그리 유쾌 한 사이는 아닙니다. 직접 만난 것도 아니고 영상 통화 마도구를 통해서만 봤죠."
국가 간의 급한 회의는 영상 통 화 마도구를 통해 진행되는 경우 가 많았으니, 교황인 그가 아타라 국왕의 얼굴을 모르는 게 더 이상 했다. 다만 레오에 대해 말하는 엘은 손에 검만 있다면 그를 베어 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으
니 기이할 따름이었다.
"저번 데뷔탕트에서 만나면 처 단하라고 하셨던 사절단의 미친놈 이 레오를 말씀하셨던 겁니까?"
레오가 국왕이라는 걸 모를 리 없는 그가 설마 국왕을 미친놈이 라고 칭했을까 싶긴 했지만 레오 말곤 접촉한 사절단의 일원이 없 었으니 어쩔 수 없는 추측이었다.
긴가민가하며 물었던 내 자신이 우습게도 엘은 단호히 긍정했다.
"몇 번 봤지만 미친놈이 확실했 습니다."
"오 ...
"슈슈와는 어떤 연관도 생기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미 꽤 친 해지신 것 같군요."
"어려서부터 알던 사이였거든 요."
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팔짱을 낀 채 숨을 고르는 그의 눈은 기 이한 열기로 들끓고 있었다.
"내가 슈슈의 인간관계에 참견 할 자격은 없지만...... 그래도 그
치와 너무 친하게 지내진 않았으 면 해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눈을 끔뻑이다 고개를 기울였다. 엘이 레오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 는 건 쉬이 알 수 있었지만 그 이 유는 알 수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엘의 의중을 파악하자니, 그가 물기 어린 웃음 을 뱉었다.
"당신은 평소엔 소름 끼치도록 예리한데...... 자신이 사랑받고 있
다는 자각은 전혀 하지 못하는 것 같단 말이죠."
사랑도 많이 받아 본 사람이나 그게 무엇인지 아는 법.
나도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진 않다. 아리아는 늘 나를 사랑해 주었고, 짧은 시간이었으나 칼과 카이사르가 베푸는 사랑도 충분했 으니까.
허나 엘이 말하는 사랑이 내가 여태껏 익숙해진 가족 간의 사랑 이 아니라는 건 쉬이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당신의 시야가 향하는 모 든 곳을 질투해요, 슈슈."
엘이 빙긋 웃었다. 태연자약한, 어떤 흠도 없는 완벽한 미소.
허나 나는 그의 분위기가 심상 치 않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런 마음을 당신이 이해하기 를 바라는 건 내 이기심인 걸 알 아요. 하지만 그래도......
뒷짐을 진 채 상체를 숙인 엘의 얼굴이 부쩍 가깝게 다가왔다. 살 랑거리는 봄바람을 닮은 미소 뒤 에 숨어 있는, 질척이는 무언가가 내 신경을 간지럽혔다.
"내게 당신이 얼마나 간절한지, 조금은 알아 줬으면 좋겠어요."
달콤한 목소리에 인위적인 단내 가 그득하다. 은빛 눈동자에 뚝뚝 떨어지는 것은 분명 간절함이었으 나, 내게 살려 달라 애원하는 이 들의 간절한 눈동자와 너무 달랐
나는 한참을 미지와 마주하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제겐 무척 어려운 일이네 요. 하지만 노력해 보겠습니다."
감정은 어렵다. 공녀가 되어 많 은 이들을 만나고서도 여전히 어 려웠다. 허나 엘은 내게 이미 소 중한 사람이었다. 그가 이름 없는 소년이었을 적부터 말이다.
내게 소중한 엘이 원한다면 그 가 품은 미지와 마주하려는 노력
은 할 수 있었다.
" 부디요."
그제야 그가 조금은 진심으로 웃었다.
살짝 맑아진 엘의 얼굴이 참 예 뻐 잠시 감상하다, 닫힌 테라스 커튼에 생각이 닿았다.
"너무 오랫동안 단둘이 있으면 성하의 명예에 누가 될까 염려됩 니다."
소문나기 전에 슬슬 일별하자는 뜻이었다.
한 제국의 교황이라고 해도 추 문은 피할 수 없다. 특히 그는 혼 인 적령기의 완벽한 신랑감이었으 니 많은 이들이 그의 연애 소식에 기를 쓰고 귀를 기울이고 있을 터 였다.
'엘을 연모하는 이들도 한가득하 니까.'
교황이라는 막강한 직위에다 어 딘지 처연하고 신비로운 외모는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기에 충분 했다. 권력은 비슷해도 결혼을 정 치의 한 축으로 보며 황제의 결혼 에 개입하는 황가와는 달리, 신전 은 교황이 평민과 연애해도 개입 하지 않았다. 황후보단 교황 반려 가 훨씬 가능성 있는 꿈이란 소리 였다.
'돌 맞기 전에 나가야지.'
과년한 남녀가, 그것도 교황과 공녀가 연회장 테라스에서 단둘이 오랫동안 있었다는 얘기는 어떻게 퍼져도 좋지 않을 게 뻔했다. 마
침 커튼 밖 인기척이 완전히 잦아 든 참이니 이틈에 슬쩍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요. 나도 추문으로 슈 슈를 힘들게 하고 싶진 않으니까 요."
엘이 느지막이 물러났다. 축 처 진 그의 입꼬리가 신경 쓰였지만, 그를 위해서도 이만 헤어지는 게 좋았다.
"빠른 시일 내로 또 신전에 뵈 러 가겠습니다."
" 기다릴게요."
"그럼 이만. 늘 태양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짧게 목례하고 물러나서 테라스 를 나왔다. 다행히 바깥엔 아무도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단조 로운 걸음으로 인파가 많이 몰린 메인 홀에 다다랐다.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구석으 로 향하니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 지 못한 채 날 지나쳤다.
홀만 들어서면 따갑도록 쏟아지
던 시선들이 사라지니 숨쉬기 편 하다고 생각할 때였을까. 누군가 내게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들려왔 다.
"크리시스 영애! 찾고 있었습니
그리고 그 누군가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수많은 시 선들이 내게로 몰렸다.
'빌어먹을!'
조용함을 즐기다 갑작스러운 낭
패에 속으로 욕을 씹으며 내게 다 가온 인영을 떨떠름하게 바라보았 다• 단 한 번도 대화를 나눈 적 없는 내 나이 또래의 영식이었다.
의문을 가득 품은 눈으로 그를 바라볼 때였을까, 잔뜩 붉어진 얼 굴을 한 그가 크게 소리쳤다.
"곧 다가올 사냥 대회에서 제게 정표를 만들어 주시지 않으시겠습 니까!"
초면인 남자는 내게 냅다 엿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