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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69화 (69/254)

69 화

사냥 대회의 정표.

솔라티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칭송되는 패왕 챔버러 솔 라티네가 대륙을 상대로 한 최후 의 정복 전쟁에서 황후에게 정표 를 받아가 승리했다는 전설에서 기인한 풍습.

제국엔 여자가 사냥 대회에 출 전하는 형제나 연인, 혹은 연모하

는 이에게 손수건 등의 선물을 주 는 전통으로 자리 잡아 있었다.

'형제'나 '연인', 혹은 '연모하는 이'에게 말이다.

'우선 저 새끼는 내 형제가 아니 다.'

저런 형제가 있었어도 호적에서 파 버렸을 거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당당하 게 어깨를 펴고 있는 남자를 띠꺼 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눈빛에 잠시 움찔하는 듯싶 던 남자가 다시금 뻔뻔하게 웃었 다.

얼굴은 꽤 반반한 놈이다. 허나 얼굴 가득한 오만함이 모든 호감 을 마이너스로 만들었다.

'저 새끼는 내 연인도 아니다.'

내 머리가 깨지는 한이 있어도 저런 놈과 사귀지 않는다. 게다가 맹세컨대 나는 이 자식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정인은커녕 친구도 아니었다.

'그럼 지금 내가 연모하는 이의 자격으로 정표를 받고 싶다는 건 가.'

하지만 저 영식은 내게 완벽한 타인이었다. 나는 그를 연모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내게 정 표를 구한 이유를 가늠하다 우선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성함이?"

생판 남인 상판대기의 남자가 뉘 집 자식인지부터 알아야 할 것 같았다.

내 무뚝뚝한 물음에 남자의 얼 굴이 달아올랐다. 내가 자기를 이 미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 었다.

"하...... 하. 카슈미르 크리시스 영애는 사교계의 자주 발을 들이 지 않으셨으니 모르셨을 수도 있 죠. 이해합니다. 저는 프라마 백

작가의 차남, 아우디입니다. 우드 라고 불러주셔도 좋습니다."

이해를 바라지도 않았는데 자기 혼자 나를 이해하고 있는 아우디 인지 벤츠인지를 지그시 응시하다 짦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속셈인지는 몰라도 빨리 끝내자.'

때 아닌 소란에 몰려들어 시끄 럽게 입방아를 찧기 시작한 주위 귀족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사교계에서 잠적했던 나는 몰랐 지만, 저번 데뷔탕트 때문에 한동 안 사교계에서 나에 대한 사각관 계 추문이 돌았었다고 아리아가 알려 준 적이 있다.

이번도 조용히는 못 끝낼 것 같 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하 여간 빨리 끝내기로 했다.

"그래요, 프라마 영식. 사냥 대 회 정표라니, 갑자기 무슨 말이십 니까."

애칭을 요구하는 그를 가볍게

무시하고 차갑게 물었다. 내 태도 에 잠시 붉으락푸르락하던 아우디 가 애써 표정을 정리하고 매혹적 인 미소를 지었다.

얼굴은 꽤 반반했던 탓에 보기 나쁘진 않았으나 나는 불쾌하기만 했다.

'나를 어떻게 해 보려고 하는 거 구나.'

역겨움에 입매를 꿈틀거렸다. 사 랑이나 호의는 낯설어도 불쾌한 의도가 담긴 유혹은 내게 무척 친

숙하다. 무감한 눈동자로 아우디 를 응시했다.

차라리 이렇게 속이 뻔히 보이 는 수작이 나았다.

"갑작스럽다는 건 알고 있습니 다. 하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살짝 새초롬한 눈매를 늘 어뜨렸다. 가식적인 처연함이 그 의 얼굴에 만연했다.

'엘만큼이나 잘생기고, 엘만큼

연기를 잘하기라도 하든가.'

엘도 간혹 가식적인 처연함을 보이긴 했지만 그의 완벽한 연기 력과 신을 넘어선 미모 때문에 그 는 정말 처연한 한 떨기의 백합 같았다. 얼마나 안쓰럽게 눈매를 늘어뜨리는지, 그 순간엔 나도 모 르게 넘어갔다가 뒤늦게 직감으로 가식이었다는 걸 알아차리곤 했 다.

아우디도 분명 잘생긴 편에 속 했으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리아와 그에게 직접 정신계 마

법으로 고문당하고 나서도 얼굴만 보면 다시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칼을 매일 보는 내겐 우스울 따름이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리 려다 애써 포커페이스를 지켰다.

'참고 있다니. 지금 참고 있는 건 난데.'

마음 깊숙이에서 솟아오르는 불 쾌함과 역겨움으로 검을 꺼내 들 고 싶은 충동을 참고 있는 건 나 였다. 무슨 뜻이냐는 의미로 눈썹

을 꿈틀거리자, 아우디가 사랑에 빠진 이의 얼굴을 가장하며 외쳤

"카슈미르를 향한...... 제 정열 적인 사랑 말입니다!"

웅성웅성.

아우디의 폭발 선언에 주위가 미친 듯이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조용히 넘어가려던 계획을 시원하 게 날려 버리는 아우디를 보며 이 마를 짚었다.

"압니다. 많이 당황스러우시겠 죠. 하지만 데뷔탕트에서 영애를 처음 본 순간부터 영애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영애께 사냥 대회 정표를 받고 싶습니다. 영애 의 새하얀 피부와 흑단 같은 검은 머리칼......•"

'개소리하고 있네.'

겉보기엔 정열적인 아우디의 고 백을 식은 눈으로 들었다. 그의 연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속 임수를 사용하는 몇몇 지능 높은 마수들과 수없이 마주해 본 나는

거짓을 읽는 데에 능했다. 그의 사랑 고백이 거짓이라는 건 눈 감 고도 알아차릴 수 있다는 소리였 다.

'굳이 무모하게 공개적인 장소에 서 고백을 하는 이유가 뭐지.'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사랑 노 래를 만들 기세인 아우디를 뒤로 한 채 조용히 그의 의도를 짐작하 기 시작했다.

하긴, 그가 정말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도 공개적인 고백을 자처한

이유는 사실상 하나밖에 없었다.

'나를 엿 먹이고 싶구나.'

공개 고백이 일어났는데 받은 상대가 고백을 거절하면, 보통은 받은 당사자가 쉽게 행동하고 다 닌다고 매도당했다. 특히 그 당사 자가 여자라면 훨씬 더 쉽게 욕을 얻어먹었다. 여자가 행동을 조심 하지 못한다고 말이다.

내 표정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왜?'

나는 결단코 아우디의 미움을 살 만한 짓을 한 적이 없었다. 미 간을 좁히며 기억을 뒤적이는데, 문득 얼마 전 그의 이름을 들었던 때가 떠올랐다.

'오늘 프라마 가의 차남을 만났 다. 내게 정신계 마법을 한 번만 사용해 달라는 부탁을 하더군. 제 형을 미치게 만들어서 자기가 프 라마의 가주가 될 거라나 뭐라 나...... 가주만 되면 톡톡히 보답 하겠다는 헛소리를 지껄이기에 저 주 마법을 쏘고 거꾸로 매달아

서...... 아니, 아니. 그냥 나왔다. 하도 달라붙기에 내치는 것도 귀 찮아서 내버려 둔 쓰레기였는데 내가 자기 친구라도 된 줄 아는 모양이더군. 복수한다고 꽥꽥 소 리 지르는데 같잖아서야 원...... 아니. 아니지. 복수한다는 게 너 무 무서웠다, 슈슈. 나 나쁜 짓도 안 하고 착하게 돌아왔으니 위로 해 줘라. 지금 심적인 충격이 상 당하다. 안아 줘.'

내가 공녀가 된 이후 적어도 사 흘에 한 번은 꼭 나와 티타임을 가지는 칼이 언젠가 티타임에서

스치듯 했던 말이었다. 이를 떠올 림과 동시에 모든 수수께끼가 풀 렸다.

'칼은 건드리기 무서우니까, 그 동생인 나를 추문으로 괴롭혀보겠 다는 건가.'

결론을 내리고 나니 가슴속 깊 은 곳에서 짜증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공자인 칼은 무섭고 공녀 인 나는 우습단 소리였다.

'아무리 내가 수련에 열중해서 입지를 다지지 못했다지만. 이건

너무 심한데.'

이 정도로 우습게 보였다는 건 문제가 있어도 단단히 있었다. 나 는 신비주의와 내 정체가 공개되 는 순간의 드라마틱함을 지키려고 두문불출했던 거지, 이렇게 우습 게 보이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아...... 빡치네.'

계속 같지도 않은 고백을 늘어 놓는 아우디를 보다 잘 정돈되어 있던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 다. 넘치는 분노로 인해 나도 모

르게 희미한 살기를 흘리자 아우 디가 소름이 끼치는지 몸을 부르 르 떨며 잠시 헛소리를 멈췄다.

"이쯤 하는 게 좋겠군, 프라마 영식."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든 한 사 람이 있었다.

"화, 황태자 저하?"

평소의 다정하고 단정한 미소가 아닌, 섬뜩한 미소를 지은 디에고 였다.

"잠시 상황을 봤는데, 영애가 당 황해하는 것 같아서. 연회장에서 할 얘기는 아니지 않나."

금방이라도 사형을 명할 것 같 은 싸늘한 표정과 별개로 디에고 는 능숙하게 상황을 중재했다. 갑 자기 벌어진 삼파전에 좌중이 크 게 술렁였다. 예상치 못한 거물의 등장에 당황해 버벅거리는 아우디 를 서늘하게 바라보았다.

'황태자는 무서운데 나는 부스러 기로 봤다 이거지.'

어쩐지 갈수록 더 화나는 기분 이었다. 내 앞을 막듯이 선 디에 고를 한 팔로 정중하게 저지하며 앞으로 나섰다.

"......크리시스 영애?"

조금 당황한 목소리였다. 그런 디에고를 향해 애써 분노를 억누 르고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표 정 관리가 실패한 모양인지 내 얼 굴을 본 디에고가 움찔했다.

"저하. 중재는 감사하지만 제가

정리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데뷔탕트에서 내게 춤을 신청한 이후, 디에고는 나와의 염문에 시 달리고 있었다. 이후 내가 디에고 가 개인적으로 청한 티타임에 여 러 번 응하면서 크리시스의 공녀 와 황태자가 꾸준히 교제하고 있 다는 소문이 서서히 퍼지고 있었

나야 추문이 돌든 염문이 돌든 조금의 관심도 없다. 허나 아직까 지도 2황자와 황위를 두고 기 싸 움 중인 디에고는 나쁜 소문이라

도 돌면 입지가 상당히 위태로워 질 게 뻔했다.

이 상황에서 디에고가 상황을 정리한 모양새가 되면 디에고와 나에 대한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날 게 분명하다. 이건 내가 정리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는.

'나는 내 일을 정리하는 데 백마 탄 왕자 같은 거 필요 없어.'

내 일은 내가 끝마쳐야 했다.

"우선 프라마 영식이 보여 주신 마음엔 감사를 표합니다. 허나 전 영식께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더 는 절 마음에 품지 않으셨으면 하 는군요. 상대를 배려도 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이런 일을 벌이시는 분의 마음에 담기고 싶지 않습니 다."

디에고를 앞서 나와 차갑게 식 은 미소를 입가에 걸친 채 날카롭 게 말했다. 그가 정말 나를 사랑 했다면 최대한 돌려 거절해 주었 겠지만, 이런 치에게까지 돌려 말

할 생각은 없었다.

아우디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졌 다. 무언가 변명하고 싶은 표정이 었으나 이 상황이 크나큰 무례라 는 자각 정도는 있는지 더 입을 열진 않았다.

"그리고 일주일 뒤 열릴 사냥 대회에 정표는 조금 다른 이유로 드리지 못할 것 같군요."

눈을 나른하게 뜬 채 입꼬리를 삐딱하게 비틀었다. 카이사르와 몇 달을 함께 하며 나도 모르게

답습해 버린 그의 산물. 타인의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권위적인 표정이었다.

주위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커짐 과 동시에, 날 바로 마주한 아우 디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었다.

'사냥 대회의 정표는 사냥 대회 에 나가지 않는 영애들이 나가는 남자들에게 무사히 돌아오라는 기 원을 담아 선물하는 것.'

개인적인 마음으론 저 빌어먹을 자동차 자식이 맹수에게 목덜미라

도 물어뜯겼으면 하는 마음에 주 지 않는 거지만, 공식적으론 다른 이유였다.

'어차피 다들 곧 알게 될 거니 까', 이 김에 선전포고하는 것도 좋겠지.'

오만한 눈을 한 채 당당하게 선 포했다.

"저도 사냥 대회에 출전합니다."

나는, 사냥 대회를 먹어 버릴 예 정이었다.

일대에 거대한 파문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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