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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70화 (70/254)

70 화

"지금 뭐라고......•"

미친 듯이 수군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넋을 놓은 표정을 짓고 있던 아우디가 멍하니 되물었다. 난 싸늘한 무표정으로 다시금 대 답했다.

"저도 사냥 대회에 나갈 거라고 했습니다."

여태껏 제국의 역사에서 여자가 사냥 대회에 출전한 전례는 없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었다. 분명 사 냥 대회 출전 대상은 '성년을 넘 긴 모든 귀족'인데 말이다.

'하지만 전례가 없다는 게 불가 능하다는 뜻은 아니지.'

말 그대로 출전하려는 여자가 여태껏 없었을 뿐, 출전 기준엔 여전히 성별을 가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최초가 되면 되 는 일이었다.

"제, 제게 정표를 주고 싶지 않 으셔서 거짓말을 하시는 겁니 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아우디 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무언가 오해를 하고 계신 모양 인데, 영식께선 제게 거짓말을 이 끌어 낼 정도로 중요한 분이 아니 십니다."

거짓말도 이유가 있어야 하지, 이 자동차 자식한텐 거짓말을 할

이유조차 없었다. 주위에서 키득 거리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아 우디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졌다.

'아우디 프라마는 권위적이고 바 람기가 심하며 가부장적인 데다 자존심이 강해 사람들 앞에서 모 욕당하는 걸 참지 못한다고 했던 가.'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 칼 에게 듣고 흘려 버렸던 아우디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칼도 아우 디를 지나가는 개미처럼 봤던 만 큼, 아우디에 대한 긴 이야기도

하지 않아 알 수 있는 정보라곤 이것뿐이었다.

'하지만 이거면 충분하지.'

서늘하게 웃음 지었다. 나를 무 시하는 행태에 조금 많이 화가 난 이상, 나는 이 자동차 자식의 무 례를 그저 흘려 버릴 생각이 없었

아주 다시는 회생하지 못하도록 짓밟아 버릴 생각이었다.

"°1,이! 감히 저를 그렇게 모욕

하고......!"

"'감히'는 그대에게 적용해야 하 는 말이지, 아우디 프라마 백작 영식."

겨우 띠고 있던 서늘한 웃음조 차 지우고 싸늘한 무표정으로 아 우디를 마주했다. 한순간에 바뀐 말투에 아우디가 놀란 표정을 지 었다.

아우디는 백작 영식• 나는 공작 영애. 어디를 봐도 내가 위다. 그 에게 존대를 사용했던 것은 그저 존댓말이 편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무례를 범한 이상 더는 존대를 해 줄 생각이 없었 다.

"감히. 그리 방자하게 굴고 내게 예의를 바랐나?"

입매를 비틀며 아우디를 노려보 았다. 살짝 흘린 살기에 그가 움 찔 몸을 떨면서도 여전히 눈을 부 라렸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모습을 보면 역시 무식함도 죄였 다.

"그래도 거짓을 고하시는 건 너 무하시지 않습니까!"

" 무슨?"

"아무리 제게 정표가 주기 싫으 셨다고 해도 이렇게 많은 사람 앞 에서 사냥 대회에 출전한다고 거 짓말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혼자서 나를 상대하는 건 무리 라고 상대했는지, 아우디가 주위 귀족들을 둘러보며 호소하듯 말했 다. 나는 차가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인파 사이에서 거의 마법을 시전하기 직전인 야차 같 은 칼을 발견하고 눈을 부라리며

전음을 보냈다.

'이건 내 일입니다. 끼어들지 마 십시오.'

'이건 나 때문에......!'

'내가 처리할 겁니다. 절 믿는다 면 나서지 마세요.'

튀어나오려는 듯 발을 움찔거리 던 칼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 동자에 맺힌 격분 어린 광기를 보 았음에도 그저 고개를 돌렸다. 이 건 내 문제였다.

"그래. 어째서 거짓이라고 생각

했지?"

" 어째서라요!"

아우디가 당당하게 선포했다.

"여자는 사냥 대회에 출전하지 못하니까! 여자가 사냥을 어떻게 합니까!"

'오...... 이건...... 정말 듣도 보 도 못한 지랄병이군.'

나는 잠시 입을 벌렸다. 내 뒤에 서 있던 디에고가 헛웃음 치는 소 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열이 올

라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 렀다.

'곱게는 안 끝낼 거다.'

그러니까 나는, 완전히 분노했 다. 내가 우습게 볼 이가 아니라 는 걸 각인시킬 겸 일을 조금 크 게 벌릴 생각이었다. 느리게 턱을 쓸었다.

"내게 정표를 요구한 걸 보아 그대도 사냥 대회에 출전하는 모 양이지?"

"네? 물론입니다."

뜬금없는 물음에 고개를 갸웃하 는 아우디를 향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럼 내가 사냥 대회에 출전해, 그대보다 많은 사냥감을 사냥해 오면 어떡할 건가?"

주위가 크게 술렁이고 아우디의 얼굴이 굳었다. 모욕당했다고 생 각하는 모양이었다.

'너랑 비교하는 것 자체가 나한 테는 모욕이다, 자동차 자식아.'

불쾌함을 그득히 드러내는 아우 디를 보며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소드 마스터인 내가 기사 작위조 차 받지 못한 놈과 이런 내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 이었으나, 아우디를 확실히 짓밟 기 위해 참아 보기로 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지 않 습니까!"

"만약 일어나면 어떻게 하겠느 냐는 말일세."

눈을 시리게 빛내며 그를 바라

보았다. 아우디가 크게 움찔했다.

"그때는, 그대도 그대가 저지른 무례에 책임을 져야 할 거야."

아우디가 뒷걸음쳤다. 은은히 풍 기는 살기에 짓눌려 자기도 모르 게 한 행동인 듯했다. 심호흡으로 살기를 갈무리한 뒤 비틀린 웃음 을 지었다.

"만약 그대가 나보다 더 많은 사냥감을 잡아 오면, 나는 그대의 사랑 고백을 들어주도록 하지."

내 한마디에 온 사방이 시끄러 워졌다. 아우디의 얼굴이 예상치 못한 행운을 마주한 사람처럼 밝 아졌다. 칼에게 복수를 하려고 시 작한 일인데 공녀와 연애를 할 기 회로까지 치달으니 기쁜 모양이었 다.

뒤에 서 있던 디에고가 크게 움 찔하는 게 느껴졌다. 허나 나는 질 생각 따위 조금도 없는 만큼, 아우디의 얼굴에 대고 차갑게 읏 었다.

"허나 만약 내가 더 많은 사냥

감을 가져오면 말이야."

냉랭한 표정을 한 채 느지막한 걸음으로 아우디를 향해 걸어갔 다. 맹수가 먹이를 낚아챌 때 인 내심을 갖고 느린 속도로 이동하 는 것처럼, 위압감을 담아서.

'어떻게 해야 이 자동차 자식이 가장 치욕스러울까.'

내가 아우디에게 얻어낼 수 있 는 건 맹세코 단 하나도 없었다. 아우디는 나보다 잘난 게 단 한 군데도 없으니까. 다만 나는, 아

우디가 나를 무시한 대가를 치르 길 바랐다.

'이놈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하는 걸 가장 꺼린다고 했으니 까.'

떠오른 생각에 먹잇감을 눈앞에 둔 맹수처럼 눈을 번뜩이며 짓씹 듯 내뱉었다.

"그래. 그땐 그대가 온 귀족들이 보는 사냥 대회 시상식에서 무릎 꿇고 내 발등에 입을 맞추는 것으 로 하자."

발등에 입을 맞추는 건 종이 그 주인에게 굴복을 표할 때 행하는 행위였다.

줄렁.

주위가 크게 들썩였다. 경악, 의 심, 존경, 적의 등이 담긴 시선들 을 모두 의연히 받아들이는 채 입 꼬리를 비틀어 비웃자 아우디의 얼굴이 굳었다. 주먹을 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무시당했 다는 생각에 치욕스러운 모양이었

'네가 여태껏 날 무시한 건 생각 도 안 나냐.'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겉으론 비웃음을 지었다.

"설마 겁먹은 건가? 방금 전에 그대 입으로 여자는 사냥을 할 수 없다고 말했을 텐데. 이런, 자신 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누가 자신이 없다는 겁니까!?"

발끈한 아우디가 소리쳤다. 씩씩 거리던 그가 당부하듯 말했다.

"대신 영애께서도 절 받아주시 겠다는 약속 잊지 마셔야 합니다! 사냥감은 온전히 영애의 힘으로 잡으셔야 하고요! 공작님이나 공 자님의 도움을 받으시면 절대 안 됩니다!"

'이 새끼가 날 무시해도 유분수 지......•'

내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거라고 확신하는 표정에 이를 악 물었다. 솔직히 지금이라도 제복 재킷 안에 숨긴 단검을 꺼내 자동

차 놈 얼굴에 박아 버리고 싶었으 나, 가까스로 참으며 싸늘하게 읏 었다.

"물론. 태양에 대고 맹세하지."

태양의 제국 솔라티네에서 태양 에 대고 맹세한다는 건 목숨을 끊 겠다는 말과 같았다. 내 확신 어 린 말투에 아우디가 살짝 움츠러 들었다.

"그럼 사냥 대회 날 보지."

끓어오르는 용암이 내 몸속을

태우는 듯했다. 오랜만에 느껴보 는 생생한 분노와 승부욕에 섬뜩 하게 웃으며 주위를 둘러싼 사람 들을 제치고 당당하게 걸어갔다.

사냥 대회는 검사로서 나의 데 뷔전.

아무래도, 상당히 화려한 데뷔전 이 될 것 같았다.

"후

성큼성큼 테라스로 나가 거친 숨을 뱉었다. 분노로 붉게 달아올 랐던 머리가 밤바람을 맞으니 조 금 식는 것 같았다. 난간에 몸을 기댄 채, 테라스 너머로 펼쳐진 아름다운 황궁 정원을 바라보았 다.

"개새끼 진짜...... 뼈와 살을 인 수분해해서 데베라에게 던져 줬어 야 했는데......

알코올 충동을 강하게 느끼며 아우디 얼굴 앞에서 내뱉지 못했 던 상스러운 욕설들을 짓씹었다.

평민으로 태어나 용병으로 살아 온 내 말투는 상당히 거친 편이었 다. 허나 공녀가 된 이후로 내 언 행은 크리시스의 명예와 직결되었 기에, 감정을 억눌러야 할 때가 많았다.

'......진짜 짜증나.'

난간에 등을 기댄 채 뻗은 손으 로 난간을 으스러져라 잡았다. 쩌 적, 하는 소리와 함께 살짝 금이 갔다. 차오르는 분노를 애써 누르 며 크게 심호흡했다.

어려서부터 억눌리고 살았던 나 는 감정을 억누르는 것 또한 능했 다. 빈민가 고아 소녀에게 불의와 맞설 힘이 없었으니, 분노를 이끌 어 내지 못할 정도로 감정을 짓밟 아 놓아야 했다.

허나 그럼에도 내가 분노를 참 지 못하는 일이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 가족을 욕하는 것. 또 하나는, 내 무위를 무시하는 것.'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가족'이 란 테두리엔 아리아밖에 없었지 만, 이제는 둘이나 더 생겨 버렸 다. 크리시스 부자까지 너무 사랑 하게 돼 버린 나는 그들이 모욕을 당하는 걸 절대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무위는...... 내가 내 존 재 가치를 증명하던 단 하나의 매 개체니까.'

입술을 꾹 문 채 품속에 숨긴 단도를 느리게 매만졌다. 정식 기 사 작위를 받은 기사가 아닌 이상 연회장에 날붙이를 소지하는 건

금지되는데도 몰래 품고 온 검.

씻을 때도 검을 옆에 두고 씻고, 잘 때도 머리맡에 검을 두고 자는 내가 연회장에 왔다고 검을 포기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카이사르도, 칼도, 아리아도 늘 내가 소중하다고 말해 주었다. 존 재를 증명하려 노력할 필요 없다 고, 나는 존재 자체로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그런 달콤한 말들 을 했다.

' 하지만......

옅은 숨을 뱉으며 오른손을 내 려다보았다. 귀족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처 가득한 손을.

수많은 사고들로 수차례 부러졌 다 붙은 손가락과 두터운 굳은살, 찢어졌다 붙은 흉터들로 인해 이 젠 형태 자체가 기이하게 변형된 못난 손이었다.

'나는 여태껏 검으로 내 존재를 증명해 왔는걸.'

평생을 어둠 속에서 살아왔다. 마수의 피비린내 사이에서 뒹굴며 살던 생의 길이에 비하면 카슈미 르 크리시스로서의 삶은 터무니없 이 짧았다.

가족들이 속상해할까 봐 직접 입으로 옮기진 못하지만, 나는 여 전히 내 존재 가치를 확신하지 못 했다. 과연 내가 강력한 검사라는 것 외에 다른 장점이 있는지 아직 도 잘 모르겠다.

'검은 내 모든 것이었지.'

검으로 아리아를 지키는 것으로 생을 증명하던 내 세계는 여러 사 람들을 만나며 조금씩 확장해 가 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 히 검은 내 많은 부분을 차지했 다.

검은 내 유일한 자존심. 검을 휘 둘러 온 삶은 내 생의 증명. 강력 한 무위는 내 가치.

때문에 나는 내 무위를 무시한 아우디를 절대 두고 볼 수 없었 다.

부스럭.

그리고 상념에 빠져 있던 나는 커튼 너머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누군가 온다.'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커튼 앞에 서 미간을 찌푸리다, 발소리 가 커튼 앞에 당도한 순간 내가 먼저 커튼을 젖혔다.

촤르륵.

그리고 마주한 얼굴.

코끝을 스치는 바닐라 향에 눈 을 끔뻑였다.

"......황태자 저하?"

날 찾아온 이는 황태자 디에고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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