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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71화 (71/254)

71화

"슈슈. 괜찮다면 자리에 함께해 도 되겠나?"

부드럽게 눈을 휜 디에고가 물 었다.

'테라스에 함께 있는 건 최고의 추문감인데.'

날카롭게 발코니 밖 인기척을 살피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

행히 주위에 사람은 없었지만, 안 그래도 묘한 추문으로 엮이는 디 에고와 내가 단둘이 오래 있어서 야 좋은 꼴은 못 봤다.

"물론 영광입니다만, 오래 있지 는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디에고도 동의하는지 살짝 고개 를 끄덕였다. 커튼을 살짝 걷어 주니 그가 달빛이 깃든 발코니로 들어섰다. 마주 보고 선 그와 나 사이에, 잠시 미묘한 침묵이 흘렀 다.

"무슨 일이십니까?"

분노가 채 가라앉지 않은 상황 이었던지라 목소리가 거칠게 나갔 다. 시선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던 디에고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매가 살짝 처졌다.

"사과하고 싶어서 왔네."

" 네?"

'디디가 내게 사과할 일이 있었 던가.'

갑작스러운 안건에 어리둥절하

고 있으니 그가 말을 이었다.

"조금 전 프라마 영식 일 말일 세. 그대가 그런 취급을 받고 있 는 것에 분노해 끼어들었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대를 무시하는 것 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도 들더군. 그대는 그런 일쯤은 혼자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인 데 말이야."

차분한 목소리에 깊게 스민 믿 음이 굳건했다. 디에고는 정말로 나를 좋은 사람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함부로 끼어든 부분에 대해 사 과하겠네. 내가 주제넘었어."

어절 하나하나에 깃든 정중함. 애초에 그에겐 조금도 분노하지 않았는데 없던 분노도 풀리게 하 는 태도였다.

디에고의 행동은 객관적으로 봤 을 때도 다정하면 다정했지 무례 가 아닐뿐더러, 그는 황태자였다. 설령 무례였다 해도 이렇게까지 사과할 필요는 없었다.

'정말 완벽한 지도자의 상이란 말이지.'

근 몇 달간 디에고와의 주기적 인 만남을 가지며 내가 느낀 점이 었다. 누구에게나 예의 바른 동시 에 냉정하도록 공평했고, 품위를 지키는 동시에 자신을 낮출 줄 알 았다. 보기 힘든 올곧은 이였다.

"괜찮습니다. 디디가 사과할 일 은 아닙니다."

잔잔히 일렁이는 푸른 눈이 내 게로 향했다. 그를 향해 빙긋 웃

어 주었다.

"제가 스스로 처리할 일이었기 에 디디를 내친 것뿐이지, 사실 나서 줘서 무척 고마웠습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내 일에 함께 분노해 줄 수 있는 이가 있다는 존재한다는 건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그렇게 생각했다니 다행이군. 내게도 화난 건 아닌가 싶었는 데."

그제야 디에고가 진중함을 내려 놓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축 처졌던 눈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는 걸 지긋이 응시하다 입매 를 굳혔다.

'원작의 디에고는 황제가 되지 만...... 내가 미래를 비틀 현재 세 계에서도 황제가 될 수 있으려 나.'

원작에선 황제가 갑작스럽게 승 하하면서 황태자였던 디에고가 급 박하게 황위에 오른다. 허나 내가 이 스토리라인을 뒤바꿀 예정이었

기에 디에고가 황제가 되는 미래 는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현재는 황태자와 2황자 세레논 의 입지가 비등비등한 상황.'

황제는 디에고를 황태자로 밀고 있으나, 황제는 황위 다툼엔 일절 관여를 할 수가 없기에 디에고는 윗선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오직 스 스로의 힘으로 권력을 다져야 했 다. 허나 2황자는 친어미이자 현 황후인 티나 키프로스의 도움을 받고 있어 권력을 쥐는 것이 디에 고보다 훨씬 용이했다.

때문에 현재 2황자의 입지는 황 태자인 디에고조차 무시 못 할 정 도였다.

'황실 회의에서 간혹 황태자를 바꿔야 하지 않느냐는 말까지 나 온다고 하니•• ... 아슬아슬한 상황 이지.'

이 상황에서 내가 스토리라인을 비틀면 2황자가 황제가 되는 구 도가 나올지도 몰랐다.

'그건 안 돼. 세레논도 똑똑하긴

하지만...... 디에고만큼은 아니 야.'

2황자 세레논은 악독하거나 멍 청한 인간은 아니었지만, 디에고 라는 완벽한 황제감과 비교할 만 한 위인은 아니었다. 솔라티네 제 국이 최고의 성군을 맞이할 수 있 는 기회를 망쳐선 안 됐다.

'크리시스가 디에고를 지지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여태껏 황위 다툼에 일절 말을 얹지 않았으나 권력은 가장 거대

한 크리시스 공작가가 디에고를 지지해 주기만 하면 황좌는 확실 히 디에고의 것이 될 것이다.

허나 크리시스 공작가는 긴 역 사 동안 권력이란 저울의 무게를 수평으로 맞추는 역할을 한 가문 으로서 완벽한 중립을 지키고 있 었다.

그 기나긴 중립의 역사를 깰 수 는 없을뿐더러, 여태껏 침묵하다 이제야 황위 다툼에 말을 얹는 것 은 신전파와 황제파 중 황제파를 더 지지한다는 암시로까지 보일

수 있었다.

'크리시스가 지지를 할 순 없지 만...... 내가 도와줄 순 있겠지.'

미래를 바꾸어 황위를 확신할 수 없게 된 부분에 개인적인 미안 함도 있는 데다, 난 반드시 디에 고를 황제로 만들고 싶었다.

그는 황좌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이것엔 반론할 여지가 없었다.

" 디디."

" 응?"

따뜻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던 그가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달 빛을 받은 금발이 햇빛처럼 반짝 거렸다. 난 근엄한 표정을 지었 다.

"제가 반드시 디디를 황제로 만 들 겁니다."

"......뭐라고?"

"자세히는 모르셔도 됩니다. 그 냥 알고만 계세요."

내 갑작스러운 선포에 디에고가 멍하게 되물었다. 그의 당황스러

움은 뒤로 한 채 검지를 세워 앞 뒤로 흔들며 톡톡히 새겨들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결심이 굳은 내 눈과 마주한 채 눈을 깜빡이던 디에고가 이내 크 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내 믿지."

심해를 닮은 푸른 눈동자엔 나 를 향한 굳은 믿음이 도사리고 있 었다.

계속해서 비쳐지는 나를 향한

믿음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절 믿으십니까? 제가 어떻 게 할 줄 알고."

"어떻게 할지는 모르지. 하지만 믿어."

은은히 반짝이는 달빛이 그와 나 사이를 비추었다. 다정한 웃음 이 디에고의 입가에 걸렸다. 그 웃음은 내 모든 걸 받아들이겠다 는 것만 같아서, 나도 모르게 입 을 열고 말았다.

"......디디가 믿는 나는 모든 걸

망쳐 버릴지도 모릅니다."

여태껏 마음을 답답하게 틀어막 고 있던 문장 하나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내가 뱉고도 내가 놀 라 흠칫 입을 막았다.

모두의 최선을 위해, 내가 사랑 하는 이들의 행복을 위해 모든 걸 이용해서라도 미래를 바꾸겠다고 굳게 결심했건만. 사실은 아직도 확신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과연 내가 미래를 바꾸는 것이 옳은가? 그것이 정녕 최선의 결

과를 가져올까?

내 노력들이 상황을 더욱 악화 시키기만 한다면. 나 때문에, 내 주위 사람들이 불행해진다면.

내 개입으로 이미 많은 것이 뒤 바뀌었다. '요정의 밤'은, 더 이상 이 세계의 묵시록이 아니었다.

이제는 활자로 적혔던 것들이 뒤바뀌고, 활자로 적히지 않았던 미래들이 펼쳐질 것이다. 오직 내 손 안에서.

나조차도 모르는 미래가 내 앞 에 있었고, 그 미래는 나를 아득 하게 만들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입술을 꾹 깨문 채 고개를 숙였 다. 무거운 부담감과 수많은 고민 들이 양어깨를 짓눌렀다.

복잡한 생각들로 조금 어두워진 나를 디에고가 지그시 응시했다.

그리고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어 깨를 단단히 잡았다.

"그대는 자주 망각하는 것 같 아."

"••••••네?',

"그대가 무언가를 아주 크게 망 친다 해도, 그걸 수습해 줄 사람 이 그대 주위에 아주 많다는 걸 말이야. 그중엔 나도 있지."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 렸다. 상냥함과 믿음으로 반짝이 는 벽안이 너무 아름다워 눈이 멀 것만 같았다. 투박한 내 손과는

달리 흠집 하나 없이 긴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린 디에고가 미소 지었다.

"그대는 내가 가장 아끼고 신뢰 하는 사람이야. 나는 그대가 스스 로의 가능성에 대해 조금 더 자신 감을 가졌으면 좋겠네. 그대는 무 엇이든 잘할 수 있을 거고, 또 잘 못하면 좀 어떤가? 수습해 줄 이 들이 한가득한데. 그러니 두려워 하지 말게."

다정한 이였다, 디에고 솔라티네 는. 그의 상냥한 목소리는 사람을

안심하게 하는 힘이 있어서, 나는 어깨를 누르던 것들을 잊고 그저 웃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정말이요."

나를 믿어주고 이런 위로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어서 정말 기뻤다. 난 달빛에 비친 그 를 바라보다 표정을 진중하게 가 다듬었다.

"제가 디디에게 가장 아끼고 신 뢰하는 이라면, 디디는 제게 유일 한 주군입니다."

현 황제는 내 아버지의 주군이 었고, 세레논은 그릇이 되지 않는 다. 내가 인정하는 내 시대의 황 제는 디에고가 유일했다. 맹세하 는 기사처럼, 디에고의 손을 잡고 허리를 굽혀 그의 손등 위에 입 맞췄다. 정수리로 닿는 그의 시선 이 뜨거웠다.

"황제가 되시면 꼭 좋은 제국을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그 누구도 소외받지 않는 제국을요."

평생을 태양 제국의 그림자 속

에서 살았던 나는, 다정한 디에고 는 그 그림자까지 굽어 살필 수 있는 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 해 주신다면, 저는 그 제 국을 지키는 검이 되겠습니다."

예로부터 신전은 모든 것을 덮 는 하늘. 솔라티네 황가는 그 하 늘 위에 뜬 태양, 크리시스 공작 가는 하늘과 태양을 지키는 검으 로 표현되었다.

디에고가 모두를 비추는 태양이 되어 준다면, 나는 그를 위해 망

설임 없이 검을 들 자신이 있었

정식은 아니나, 이것은 일종의 충성 맹세였다.

"......내게 충성을 맹세하는 건 가?"

"그렇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디에고가 진지하게 낯을 굳힌 채 엄지로 제 입술을 쓸었다. 한 참 무언가 고민하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기쁘지만, 난 거절할 거 네."

예상치 못한 거절에 눈을 깜빡 였다. 조금 멍해진 날 보며 작게 웃은 그는 내 손에 잡힌 자기 손 을 살짝 빼내곤 역으로 내 손을 잡았다.

"충성 맹세는 상하 관계를 표하 지. 그대가 내 신하가 되겠다는 소리 아닌가."

"......그렇습니다."

"난 그게 싫거든."

" 2"

내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물음표를 얼굴에 띄우고 있으니, 잡은 내 손을 끌어당긴 디에고가 허리를 숙이고 내 손등 위로 입술 을 맞추었다. 금실 같은 그의 머 리카락이 손등 위를 간지럽혔다.

"난 그대가 내 옆에 섰으면 좋 겠어. 날 섬기는 게 아니라 나와 함께 걸어갔으면 좋겠네. 이 생이 끝날 때까지 말이야."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달콤하

게 속삭였다. 그 속삭임을 잠시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이던 나는, 퍼뜩 그 뜻을 알아차리고 잡히지 않은 손으로 내 입을 덮었 다.

'이건, 우리 우정이 영원하다는 소리인가......

디에고가 내게 소중한 친구인 만큼 나도 디에고에게 소중한 친 구라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했다. 나는 디에고를 향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우린 평생 친구입 니다!"

양 귀가 붉어진 채로 무언가 기 대하는 표정을 짓던 디에고의 표 정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사과나 무를 심은 곳에 촉수 괴물이 자라 나는 걸 본 농부의 표정 같았다. 그 표정에 잠시 어리둥절하면서도 나는 내 가슴을 주먹으로 한 번 치며 당당하게 선포했다.

"평생 친구로서 디디의 가는 길 을 함께하겠습니다. 우린 끝까지

함께입니다."

표정 위로 물음표를 백만 개 정 도 동동 띄운 채 날 응시하던 디 에고가 머리를 한 대 맞은 사람처 럼 비틀거리며 손을 난간으로 짚 었다.

그가 자기 손에 얼굴을 묻었다.

"슈슈, 제발...... 제발, 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순 없겠 나•...?"

디에고의 웅얼거림에 고개를 기

울였다.

역시,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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