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72화 (72/254)

72 화

"......인기척이 가깝습니다. 슬슬 자리를 파하는 게 좋겠군요."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는 디에고를 걱정 스레 응시하다, 들려오는 인기척 에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대 먼저 나가게. 난 찬바람을 좀 더 쐐야 할 것 같으니......•"

세상 허망한 표정으로 밤하늘을 바라보던 그가 중얼거렸다. 같이 나가는 모습을 보였다간 또 염문 이 퍼질 테니, 디에고를 향해 짧 게 목례하고 그의 말대로 먼저 발 코니를 나섰다.

'이 정도면 돌아가도 무례는 아 닐 시간인데.'

제복 재킷 안주머니에서 회중시 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황실 무도회인 만큼 두어 시간 정도는 예의상 머물러야 했는데, 곧 시작 한 지 두 시간이 지날 시간이었

다.

'아리아는 바쁠 테고...... 칼은 나랑 같이 돌아가 주려나.'

아리아야 사교계의 황제로 슬슬 자리매김하는 시점이기에 이러한 행사에 올 때마다 상당히 바빴다. 허나 칼은 사교에 전혀 관심이 없 어 행사에 갈 때마다 와인이나 마 시다가 돌아가도 무례는 아닐 시 기가 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 고 나왔다.

'르웰린을 만나지 못한 건 조금

아쉽지만 자기 전에 조금이라

도 수련하려면 빨리 돌아가야지.'

친구를 하기로 합의를 본 이후, 르웰린과 나는 상당히 친밀한 사 이를 유지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꼭 그녀와 시간을 가질 정 도였으니 급속도로 친해지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르웰린도 이번 연회에 참석한다 는 얘기를 들었으나, 내가 워낙 구석진 곳만 다니다 보니 한 번도 마주치질 못했다. 아쉬움에 한숨 을 쉬면서도 칼을 데리고 돌아가

기 위해 연회장 홀로 발걸음을 옮 길 때였다.

"놔! 놓으라고!"

"닥치고 따라오지 못해!?"

복도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두 남녀에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 다. 이곳은 귀족들이 밀회를 즐기 기 위해 구성된 구역으로, 외지고 어두웠다. 이런 곳에서 발버둥을 치듯 큰 소리를 내며 놓으라고 소 리치는 여자의 목소리와 사나운 남자의 목소리가 난다는 것은 표 하는 바가 명확했다.

허나 내 몸이 딱딱하게 굳은 건 여자의 목소리가 내 귀에 아주 익 숙하다는 것에 있었다.

'르웰린!'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르웰린 데카르도였다.

나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저기 있다!'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복도에서 르웰린과 남자를 발견한 나는 우 선 벽에 등을 대고 몸을 숨긴 채 상황을 살폈다.

르웰린의 머리를 잡아채고 질질 끌고 가는 남자. 머리가 엉망이 된 르웰린은 저항하면서도 힘을 당해 내지 못하고 끌려가고 있었 다. 보는 사람이 아플 정도로 거 친 손길을 보며 나는 치미는 분노 를 참을 수 없었다.

"정말 천박하기 짝이 없네. 그러 니까 네게 후계자 자리를 넘길 수 없다는 거야!"

발버둥 치던 르웰린이 짓씹듯 내뱉었다. 그 한마디에 격분한 얼 굴로 르웰린을 끌고 가던 남자가 우뚝 멈춰 섰다.

"이 미친년이...... 뭐라고?"

섬뜩하게 눈을 번뜩인 남자가 잡았던 르웰린의 머리를 놓고 휙 뒤를 돌아 그녀와 마주했다. 분노 로 광인의 것처럼 빛나는 흑안과

마주하면서도 르웰린은 조금도 주 춤거리지 않았다. 그녀의 녹색 눈 동자가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남자가 이를 으득 갈았다.

"감히 사람들 앞에서 내게 치욕 을 주고도 정신을 못 차리다 니......

"치욕이라니, 웃기는구나, 메르 헨 데카르도. 나는 맞는 말을 했 을 뿐이야."

르웰린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냉철한 사업가를 닮은

차가운 비소였다.

"데카르도의 후계는 태어난 순 서와 성별을 불문하고 오직 개개 인의 능력으로만 정해지지. 아버 지는 아직 우리 중에 데카르도의 후계를 지정하지 않으셨는데 네가 사람들 앞에서 후계자를 자칭하고 다니는 걸 어떻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니?"

남자의 두 눈이 분노로 이글거 렸다. 나는 오가는 몇 마디에서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안 그래도 르웰린이랑 닮았다 싶었는데...... 메르헨 데카르도였 군.'

타오를 듯 붉은 머리에 검은 눈 동자, 르웰린과 닮은 이목구비. 르웰린보다 10개월 먼저 나온 르 웰린과 동갑의 남자 형제로, 현재 르웰린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메르헨은 탐욕스럽고 난폭해요. 인내심도 짧아서 내 형제지만 아 주 넌더리가 나는 인간이죠. 사실 그건 참을 수 있어요.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딱 하나, 그가 능력이

없다는 거예요. 슈슈, 나는...... 데카르도가 메르헨의 손에 들어가 면 분명 패망의 길을 걸으리라는 걸 알고 있어요. 아버지도 그걸 아시니 어려서부터 내게 후계자의 길을 걸을 생각이 없냐고 물으셨 던 거겠죠.'

처음에 르웰린은 메르헨을 두려 워해 그에 대해 말을 꺼내지 못했 다. 허나 어느 정도 나와 시간을 가지며 용기를 가지게 된 그녀는 자신의 가장 큰 고민을 내게 털어 놓게 되었다.

'장성한 자식이 둘이 있는데도 현 후작 체슬러 데카르도가 여태 껏 후계자를 발표하지 않아 무슨 속사정이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 는데...... 이런 문제일 줄은 몰랐 어.'

그녀의 형제인 메르헨 데카르도 는 성격도 더러운데 능력도 없는, 말 그대로 쓰레기였다. 거기다 허 영심이 많고 허풍도 심해 데카르 도의 재산을 축내며 아직 후계자 가 정해지지 않았음에도 자신이 후계자가 될 거라고 마구 떠벌리 고 다닌다고 했다.

데카르도 후작가의 후계는 모든 것을 불문하고 오직 능력의 유무 만으로 정해진다. 이런 메르헨에 게 후계를 맡길 수 없었던 현 후 작 체슬러는 르웰린에게 후계를 맡는 것이 어떠냐고 끊임없이 물 었다고 했다.

'사실 르웰린은 사업 가문 데카 르도의 완벽한 후계자지.'

르웰린을 알게 될수록 느꼈던 건, 그녀는 진정으로 사업가라는 것이었다.

'하네스 사업이 무척 성공적이라 는 얘기 들었어요. 하지만 저번에 의상실에서 열었던 이벤트는 조금 실수였던 것 같군요. 시도는 나쁘 지 않았지만 겨냥한 대상이 좋지 않았어요. 아리아 영애에게 이벤 트 대상을 한 번 더 생각해 보라 고 말해 보세요.'

르웰린은 냉철한 분석과 사업적 감각에서는 세기의 천재인 아리아 를 능가할 정도였다. 르웰린은 아 리아를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면서 도 어린 나이에 사업을 성공적으

로 이끌어 가고 있는 아리아를 존 중했기에, 나와 시간을 가질 때면 슬쩍 사업에 대한 팁을 흘려 주곤 했다.

그녀와의 대화에서 알게 된 정 보를 아리아에게 알려줄 때면 르 웰린을 싫어하는 아리아조차도 고 개를 끄덕일 정도였으니, 르웰린 은 사업가로 타고난 것이 분명했 다.

이를 일찍이 눈치챈 체슬러 후 작은 르웰린이 어렸을 때부터 후 계 수업을 시키는 등 그녀를 후계

자로 세우려 고군분투했지만, 정 작 르웰린 자신이 후계를 잇기를 꺼려했다.

'메르헨 때문이었지.'

르웰린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에 무척 조심스러웠기에, 나도 그녀 가 완전히 내게 마음을 연 얼마 전에 알게 된 얘기였다.

'어려서부터 메르헨이 너무 무서 웠어요. 제가 무언가 생산적인 걸 하려고 하면• ... 절 거울 앞으로 끌고 가서 네게서 쓸모 있는 부분

은 그 얼굴밖에 없다고 소리를 질 컸거든요. 제가 동의하지 않는 한 놔 주지 않았죠. 제가 후계자 수 업을 받을 때면 들어와 난동을 피 웠어요. 메르헨에게 휘둘리지 않 겠다고 결심했는데...... 점점 자라 면서 어느 순간 돌아보니 나는 이 미 그 말에 의해 살고 있더라고 요. 메르헨이 두려워 후계자 자리 에 욕심을 부리지 못했고, 난 내 아름다움에 집착하고 있었죠.'

이는 명백한 정신적 폭력이었으 나, 르웰린은 보호를 받지 못했 다. 르웰린의 어머니는 그녀를 낳

으며 죽었고, 체슬러는 아이들 사 이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음 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바빴으며, 데카르도의 사용인들은 침묵했다. 완벽한 능력주의 가문인 데카르도 에선 모든 것을 자기 힘으로 헤쳐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메르헨의 세뇌로 인해 르웰린은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이로 자라났 다. 아름다움만이 그녀의 유일한 쓸모라고 배웠으니까.

사교계에 입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교계를 휘어잡게 된 르웰

린은 이내 사교계에서의 권력에도 집착을 하기 시작했다. 사교계에 서의 넓은 입지는 후계자가 될 수 없는 그녀가 휘두를 수 있는 유일 한 권력이었기 때문에.

기어코 사교계의 황제 자리를 차지한 르웰린은 그 후에도 행복 하지 못했다. 그녀가 진정으로 원 했던 건 자신의 장점을 완벽하게 뽐낼 수 있는 사업가의 자리였으 니.

그녀의 주위를 차지한 이들은 모두 그녀의 아름다움에 꼬인 남

자들이거나 데카르도의 돈을 보고 붙은 장사치들이었다.

'무엇이 부족한지도 자각하지 못 한 채 끝없는 갈증만 느끼며 살았 어요. 공포와 마주하기 무서워 스 스로 꽃으로 사는 길을 택했으면 서도 삶에 대한 불만은 멈추지 않 았죠. 불만만 가득하니 성격은 점 점 날카로워지기만 했어요. 삶에 대한 회의와 내가 지금 쥔 사교계 권력에 대한 집착만 늘어나고 있 을 때, 나는 당신을 만난 거예요.'

내가 르웰린을 구했던 그날, 그

녀는 처음으로 타인에게 관심을 가져 보았다고 했다.

'원작에선 그런 관심이 라이너에 대한 잘못된 사랑으로 이루어지면 서 르웰린이 완전히 망가져 버린 듯하니...... 내가 구한 게 다행이 었어.'

르웰린은 그녀의 외모에도, 데카 르도의 재력에도 욕심을 품지 않 은 채 자신을 구하기만 하고 사라 진 내가 누구인지 미친 듯이 궁금 했다고 한다.

'나는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앞으로만 나아가는 슈 슈가 부러워요. 너무 곧아서 부러 지진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지 만...... 그게 바로 내가 당신을 좋 아하는 이유니까요. 슈슈, 나는요, 당신을 부러워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한다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거든 요. 당신은 검으로 당신의 사랑하 는 것들을 지키겠다고 했죠? 나 는 내 가문과 사업체들을 사랑해 요. 그것들이 멍청한 메르헨의 손 에 망가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 어요. 나는 내 능력으로, 메르헨

에게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지 킬 겁니다.'

르웰린은 정말 빛나는 사람이었 다. 그녀는 그녀가 이런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게 모두 내 덕분이 라고 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 랐다.

르웰린은 태어나기를 화염으로 태어난 이였다. 냉철과 야망으로 이글거리는 그녀의 두 눈을 보자 마자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화염 위에 작은 장작 하나를 던졌 을 뿐, 모든 결심과 실행은 그녀

의 손아래에서 이루어졌다.

"르웰린, 너 대체 왜 이렇게 변 한 거니? 원래는 말 잘 들었잖아, 응? 오빠한테 화난 거 있어?"

소리를 지르는 걸로는 르웰린이 굽히지 않으리라는 걸 짐작한 건 지, 메르헨이 르웰린을 달래듯 채 근했다. 르웰린이 차갑게 웃음 지 었다.

"난 변하지 않았어. 네가 무서우 니까 말을 듣는 척했을 뿐,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그리고 우리 어

차피 동갑인데 오빠 타령은 그만 두지 그래. 후계자 사칭도 그만두 고."

르웰린의 날카로운 말투에 메르 헨의 얼굴이 단숨에 구겨졌다. 자 기 뜻대로 되지 않는 르웰린이 마 음에 들지 않는지, 메르헨이 이를 악물었다.

"데카르도의 후계자는 나야. 너 도 인정했잖아!"

"아니! 난 단 한 번도 너 같은 치를 후계자로 인정한 적 없어! 데카르도의 후계자라고 자칭하고

다니면서 감정 조절도 못 하고, 툭하면 손부터 나오지! 그렇다고 일을 잘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 야! 너 같은 걸 어떻게 후계자로 인정하겠니? 가문 망하라고 비는 꼴인데!"

둘 사이에 격해지는 분위기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 팽팽했다. 르 웰린에게 이런 직접적인 말을 들 어 본 것은 처음인지, 메르헨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다 분노로 눈을 부라렸다. 난폭한 분노를 머 금은 검은 눈동자와 두려움 없이 올곧이 뻗은 녹색 눈동자가 치열

하게 부딪쳤다.

"......그래. 뭐가 널 이렇게 망쳤 는지 이제야 알겠군. 넌 분명 크 리시스의 장녀를 만나면서부터 이 렇게 변했지? 남자 옷을 입고 설 치는 미친 계집애 말이야."

르웰린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눈매를 사납게 세운 그녀가 으르 렁거 렸다.

"닥쳐. 네 더러운 입에서 논해질 이름이 아니야."

"그래, 그 계집 때문이구나! 그

계집이 네게 더러운 물을 들인 모 양이지? 정말 웃기지도 않는군! 그 근본도 모를 계집에게 물들다 니!"

" 닥치라고!"

나는 르웰린이 그렇게까지 분노 한 모습을 처음 보았다. 드레스를 찢어져라 쥔 채 부들부들 떠는 그 녀는 당장이라도 메르헨의 따귀를 올려붙일 것 같았다.

"그 계집이 네게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헛된 믿음을 심어 주 든? 그래, 그 계집이 미쳤다는 건

검을 휘두르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 때부터 알아봤지! 여자가 검을 어떻게 휘두르겠어!"

르웰린의 얼굴이 분노로 파랗게 질렸지만, 정작 욕설의 당사자인 나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 히려 나는 르웰린이 걱정되었다.

'르웰린은, 정말 화나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