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화
나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르웰린은 쉽게 화내지 않지만, 그 녀와 몇 달 동안 친밀하게 지낸 나는 그녀가 진정으로 화내는 모 습을 단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진짜 무서웠는데......•'
르웰린을 곁눈질했다. 격분이 차 오르던 르웰린의 얼굴에 어느 순 간 표정이 싹 걷혔다. 난 그녀의
분노한 얼굴보다 그녀의 무표정에 서 더욱 공포를 느꼈다.
'저건,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징 조니까......
내 예상은 적중했다. 르웰린의 무표정 위로, 광기를 담은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으니까.
"그 근본도 없이 날뛰는 아가리 엔 약도 없겠구나, 혀를 뽑아다 스프로 만들어 버릴 개자식아."
"••••••뭐?"
르웰린은 원래도 아가리 파이터 였으나, 그녀가 진정으로 화가 나 면 입에 걸려 있던 봉인이 풀리며 욕쟁이 아가리 파이터가 되었다.
"잘난 곳이라곤 하나도 없는 주 제에 허영심과 같잖은 자신감만 꽉 찬 빌어 처먹을 놈이 간덩이가 불어 터져서는 줏대도 없는 아가 리를 나불거리는군. 내가 제일 싫 어하는 놈이 너 같은 놈이야. 능 력도 없으면서 혀만 날뛰는 종자 들! 네가 잡은 사업체가 적자를 타기 시작했다는 건 제국민들 모 두가 안다고! 네가 너무 부끄러워
서 버틸 수가 없어!"
"이, 이런 미친년이! 너 지금 말 다 했어?"
"아니! 아직 안 끝났어! 나는 다 른 건 다 참아도 능력이 없는 건 못 참아! 데카르도인 주제에 사업 감각은 하나도 없고, 거래처 사람 들을 만났다 하면 사고를 치는 구 제불능 주제에! 감히 데카도의 후 계를 자칭하고 다니는 너를 더는 참지 못하겠어!"
"......이, 이!"
과열되는 분위기에 르웰린을 보 호하려 끼어들어야 하나 각을 재
고 있던 것이 무색하게, 르웰린은 정말 시원하게 욕을 뱉어냈다. 평 소의 고풍스러운 모습은 버리고 타오르는 눈으로 미친 듯이 메르 헨을 물어뜯는 르웰린은 한 마리 의 광견 같았다.
'끼어들어야...... 하나?'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춤거렸다. 이쯤 되니 메르헨이 당하는 것 같 았다.
'그래도 당당히 말하는 모습이 보기 좋네.'
르웰린을 보며 살짝 웃음 지었 다.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말들은 모두 르웰린이 평소에 누 르고 살던 말들이었다.
메르헨은 르웰린에게 트라우마 덩어리와도 같은 존재. 그 앞에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 다는 건 그녀가 트라우마를 많이 이겨 냈다는 뜻과도 같았으니, 저 절로 안심이 되었다.
드레스를 찢어져라 잡아 쥔 두 손. 독기를 담아 악문 이. 엉망으
로 엉켰으나, 여전히 모든 것을 살라먹을 화염처럼 새빨간 머리 칼.
그리고 단단한 심지 위에 미친 듯이 불타오르는 녹색 눈동자.
연약한 한 송이 장미도, 아름다 운 저녁노을도, 탐스러운 사과도 르웰린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잘 들어. 데카르도의 후계는 내 가 이을 거야! 너 같은 놈이 아니 라 바로 내가! 이제부턴 내가 후 계자야!"
그녀는 불꽃이었다. 차가운 이성 을 품고도 내가 여태껏 봐 온 어 떤 이보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시 린 화염이었다.
르웰린의 당당한 선포에 복도가 울렸다. 나조차도 놀라 살짝 입을 벌렸다. 눈을 부릅뜬 채 입을 떡 벌린 메르헨이 더듬거렸다.
"네, 네가...... 후계를 잇겠다 고......?"
"그래! 내가 너보다 수십 배는 더 잘할 테니까!"
오만하다 싶을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한마디에 신빙성은 충분했 다. 르웰린을 지그시 응시하던 나 는 친구의 성장에 기분 좋게 웃었 다.
"네가 정말 미쳤군."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게 미 친 거라면, 난 몇 번이라도 기꺼 이 미치겠어."
검은 눈동자와 녹색 눈동자 사 이에 치열한 눈빛이 오간다. 악문 잇새로 짓씹듯 내뱉는 르웰린의
말에 메르헨이 헛웃음을 지었다. 기이한 광기로 번뜩이는 그의 두 눈이 심상치 않았다.
"하! 미친년에겐 매가 답이지!"
메르헨의 큰 손이 가감 없이 쳐 들렸다. 이를 악문 르웰린이 다가 올 고통을 각오하듯 질끈 눈을 감 았다.
사람은 모든 것을 잘할 수 없기 에 함께 사는 것. 르웰린이 사업
에 있어 천재적이라면, 나는 모든 종류의 무력 다툼에서 천재적이었 다. 메르헨의 손이 르웰린의 뺨에 닿기 직전의 찰나에, 난 마나를 일으켜 그 사이를 막았다.
"적당히 하지 그래, 데카르도 영 식."
르웰린이 폭력으로 곤경을 겪는 다면, 친구인 내가 나설 차례였 다.
"크, 크리시스......?"
"크리시스 영애. 존칭은 똑바로
붙여야지."
손목이 잡힌 메르헨의 두 눈이 멍해지다 이내 동그랗게 뜨였다. 말도 제대로 못하고 더듬거리는 그를 무감각하게 응시하다 고개를 돌려 르웰린을 바라보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고통이 느껴지지 않자 살짝 눈을 뜬 르웰린이 날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르웰린, 괜찮습니까?"
" 네?"
"머리카락 말입니다. 아파 보이 는데 괜찮아요?"
내 물음에 그제야 자신의 상태 를 자각했는지 르웰린의 양 뺨이 붉어졌다. 그녀가 황급히 산발이 된 붉은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못 볼 꼴을 보였군요."
"머리카락이 엉망인 걸 지적한 게 아니에요. 그건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내 말은 아프지 않느냐 는 겁니다."
이 상황에서도 습관처럼 자신의 상태보단 외향에 신경 쓰는 르웰 린이 너무 안쓰러워, 제 머리카락
을 정돈하는 그녀의 작은 손을 부 드럽게 저지했다. 손목이 비틀린 메르헨의 짧은 비명 소리는 가볍 게 무시했다.
"......괜, 괜찮아요."
얼굴이 달아오른 르웰린이 휙 고개를 돌렸다. 살짝 떨리는 그녀 의 어깨를 못 본 척 부드럽게 웃 어준 뒤 메르헨에게로 고개를 돌 렸다. 얼굴엔 모든 감정을 빼고 차갑게 굳힌 채였다.
"데카르도 영식. 이게 무슨 무뢰
배 같은 짓인가."
"......이, 이건 데카르도 가문의 일입니다! 크리시스 영애는 빠지 시죠!"
"내 친구가 폭행을 당하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어떻게 빠질 수가 있지? 게다가 나에 대한 무례한 언급도 들리던데."
메르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게 잡힌 손목을 빼려 안간힘을 쓰던 그는, 내가 그의 손목을 부 러뜨릴 듯 힘을 주자 겁먹은 쥐새 끼처럼 파드득거리면서도 날 죽일 듯 노려보았다.
"......어디까지 들었습니까?"
"아마 처음부터 끝까지."
메르헨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갔다.
아무리 데카르도가 재산이 많다 한들, 순수 권력에선 크리시스를 능가할 수 없다. 작위부터가 후작 과 공작이었으니까. 메르헨의 막 말을 문제 삼아 크리시스가 데카 르도에게 항의하면 메르헨은 책임 을 져도 단단히 져야 했다.
'아버지나 칼, 아리아에게 말하 면 곧장 셋이서 메르헨의 사지를 찢으려 들 테니...... 웬만하면 이 일을 공개하지 않는 게 좋지만, 메르헨을 협박할 무기로는 사용하 기 좋겠지.'
차갑게 얼어붙은 시선으로 메르 헨을 느리게 훑어보며 생각을 정 리했다. 눈빛에 담긴 살기를 읽은 건지, 그가 파드득 몸을 떨었다.
"그대를 어떻게 처리할까."
내 입에서 소름 끼치도록 고저
없는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 다. 덜덜 떨던 메르헨이 이를 악 물더니 버럭 소리쳤다.
"제, 제가 영애를 욕했다는 증거 있습니까? 아무리 영애가 크리시 스더라도 증거도 없이 후작가를 고발할 순 없습니다!"
'진짜 멍청한 놈이구나.'
메르헨에 대한 욕으로 대하소설 을 적을 기세이던 르웰린이 이해 가 되는 순간이었다. 궁지에 몰린 쥐처럼 찍찍거리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었다.
"저 미친놈이 가문을 말아먹으 려고......
내 뒤에 서있던 르웰린이 중얼 거렸다. 나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메르헨을 응시하며 가볍게 팔짱을 끼었다.
"아무래도 영식은 권력 축에 대 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군."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은 메르헨의 손목을 잡은 손 에 더 힘을 주었다. 그가 새된 비 명을 질렀다. 메르헨이 르웰린에 게 했던 짓들을 생각하면 그냥 부 러뜨리고 싶었으나, 그가 발광하 는 모습은 또 보고 싶지 않아서 애써 욕구를 눌렀다.
입꼬리를 살짝 비튼 채, 메르헨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속삭였 다.
"크리시스는 이 제국에 유일한 공작가네. 포도나무에서 사과가 난다 해도, 크리시스 입에서 나왔
다면 그 말은 진리란 말일세."
크리시스는 대대로 제국의 군 통솔권을 물려받는다. 아무리 공 작가라고 한들 군 통솔권을 이어 받는 것은 과한 세습이 아니냐는 타 귀족들의 항의는 매 시대마다 있었으나, 크리시스는 피를 타고 이어지는 검에 대한 재능과 카리 스마, 군 통솔 감각으로 그 모든 항의들을 눌렀다.
"내 아무리 아직 작위가 없는 영애여도 크리시스야. 그대 하나 묻는 것도 못할 것 같나?"
그러한 크리시스는 제국의 역사 가 존재하는 동안 최상의 권력을 지니며 모든 이들에게 공포의 대 상이었다.
무감각한 속삭임에 메르헨이 딱 딱하게 굳었다.
"그대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지. 참고로 크리시스를 입에 올린 값 은 상당히 비싸네."
눈을 접은 채 입꼬리를 비틀었 다. 눈을 부릅뜬 채 덜덜 떨던 메
르헨은 이내 짓씹듯 속삭였다.
"평민에게서 난 사생아 계집애 주제 에
작은 속삭임이었으나 고요한 복 도에서 그 속삭임을 듣지 못할 이 는 없었다. 메르헨은 무능한 주제 에 상황 파악도 못하고 입도 간수 하지 못하는 쓰레기였다.
'이 새끼가.'
내 입매가 살짝 굳고 분노한 르 웰린이 메르헨 앞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콱.
"커흑!"
순식간에 일대에 스며든 검은 연기가 메르헨의 목을 틀어쥐었 다. 갑자기 목이 졸린 메르헨이 제 목을 부여잡고 콜록거렸다.
익숙한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고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일 났네.'
정작 욕을 들은 당사자인 나는 용병 생활로 워낙 욕설에 익숙해 조금 짜증이 난 게 다인데 몰래 숨어 듣고 있던 다른 이가 격분한 것 같았다.
전부터 인기척이 느껴지던 어딘 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메르헨 뒤쪽 복도는 눈으로 봐선 아무도 보이지 않았으나, 공간의 흐름을 느끼던 나는 전부터 누군가의 존 재를 짐작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죽이면 안 됩니다.
내 한숨 섞인 한마디에 인기척 이 가까워졌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투명 마법이 옅어지며 천 천히 사람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천천히 색채를 찾기 시작한 검 은 머리카락. 사납게 발을 옮기는 긴 다리. 광기와 분노가 들어찬 안광으로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
"......칼."
내 형제, 칼 크리시스였다.
"글쎄. 이런 숨 쉬는 공기조차 낭비하는 쓰레기는 죽어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평소엔 짓지 않는 화사한 미소 를 얼굴 가득 지은 칼이 내 곁으 로 다가와 고양이처럼 내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부드러운 검은 머 리카락이 검은 제복 위에서 뭉그 러졌다.
다른 이가 보면 어리광을 부리 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칼과 몇 달 동안 함께 지내온 난 온몸을 잔뜩 긴장시켰다.
사람들마다 화내는 성향은 다르 다. 얼굴을 구기고 버럭 화를 내 는 사람이 있는 반면, 차갑게 정 색을 하는 사람도 있고, 오히려 웃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칼의 경우는 맨 후자였 으니.
"죽이면 안 돼? 응?"
이건 칼이 머리끝까지 화가 났 을 때 보이는 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