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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74화 (74/254)

74 화

"......칼 공자. 인사는 잠시 뒤로 미루죠. 언제부터 있었나요?"

내가 칼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곤 란함을 느끼고 있을 때, 목이 졸 려 컥컥거리는 메르헨에겐 시선도 주지 않은 르웰린이 차가운 이성 이 깃든 눈으로 칼을 응시했다.

'이 일이 퍼지면 르웰린도 곤란 해질 테니까.'

칼이 작정하고 이 일을 문제 삼 으면 메르헨은 가볍게 묻힐 테지 만, 그와 동시에 데카르도 가문도 욕을 먹는다. 나와는 친구니 대화 로 이 일을 정리할 수 있겠지만, 칼과는 친분이 없기에 칼로 인해 소문이 퍼질까 걱정하는 모양이었 다.

"르웰린 데카르도."

내 허리에 한 팔을 둘러 안고는 내 목에 얼굴을 박은 채 분노 어 린 숨을 고르던 칼이 그제야 르웰

린의 존재를 인식했다는 듯 그녀 에게 시선을 주었다. 귓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짧은 속삭임이 소름 끼치도록 무감각했다.

깊은 분노를 담은 붉은 눈동자 와 차갑게 불타오르는 녹색 눈동 자가 서로를 탐색하듯 세차게 부 딪쳤다.

"......그대가 후계자가 되겠다고 선포할 때부터. 복도를 지나려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기에 투명 마 법으로 잠시 숨어 있었는데......

칼이 메르헨에게로 시선을 돌렸 다. 평소 유리알같이 투명하던 그 의 눈에선 용암 같은 분노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칼의 시선을 느 낀 메르헨이 파드득 몸을 떨었다.

"저 새끼가, 감히......

" 칼."

강대한 마력이 모이기 시작한 칼의 손을 황급히 붙잡으며 저지 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메테오 를 날릴 기세로 날뛰던 마력에 내 손길이 닿자 모여 있던 마력들이 느리게 사그라졌다.

이를 악문 칼이 내 손을 꽉 잡 았다.

"아까 프라마 영식도 그러더니, 요즘 들어 별 같지도 않을 것들이 내 동생 앞에서 지랄을 한단 말이 지. 내 동생이 새끼손가락만 휘둘 러도 뒤질 텐데 말이야."

숨결이 가득한 목소리가 거칠게 속삭였다. 등 뒤로 느껴지는 칼의 기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난폭 했다.

"하지만 내 슈슈는 너무 착해서 이런 버러지들도 살려 두지...... 이럴 때는 조금 잔인해져도 괜찮 은데."

칼이 짙게 한숨을 쉬었다. 뜨거 운 숨결이 목덜미에 그대로 느껴 졌다.

"그게 내가 사랑한 네 올곧음이 니 어쩔 수 없는 거겠지."

한탄이 섞인 목소리에 마음이 간질거렸다. 날 사랑해 주는 이가 있다는 건 언제든 기분 좋은 일이

었다.

"그러니 내가 오빠 된 도리로서 너 대신 저 자식을 손봐 주려고 하는데."

"죽이는 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슬슬 풀어 주세요."

은근슬쩍 메르헨의 목을 조른 검은 연기를 더 짙게 만들던 칼이 입술을 짓씹으며 마법을 해체했 다.

나는 제 목을 부여잡고 꼴사납

게 허겁지겁 숨을 들이쉬는 메르 헨을 무감각한 시선으로 내려다보 다 르웰린을 돌아보았다.

"이 일에 대한 처분은 르웰린에 게 맡기고 싶습니다."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는 메르헨 을 응시하던 르웰린이 나를 바라 보았다. 올곧은 시선으로 그녀를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난 르웰린의 뜻을 따를 겁니다. 이 일을 공식적인 안건으로 만들 기를 바라십니까, 저희 둘 다 침

묵하길 바라십니까."

녹음이 깃든 두 눈이 옅게 일렁 였다.

이 일을 공식적인 안건으로 만 들 시 메르헨은 귀족 사회에서 매 도되어 르웰린은 아주 쉽게 메르 헨을 처리할 수 있겠지만, 대신 데카르도는 치욕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묻고 지나가면 데카르도 의 명예는 지켜도 날 모독한 메르 헨을 봐 주겠다는 의미가 되었다.

"난 괜찮습니다, 르웰린.

나 때문에 선택을 망설이는 것 같은 르웰린에게 단언했다. 르웰 린이 움찔 몸을 떨었다.

'난 정말 괜찮으니까.'

살면서 별의별 욕을 다 들어본 나야 메르헨이 한 욕설 정도는 어 린애들 장난처럼 들릴뿐더러, 내 게 중요한 건 르웰린의 마음이지 메르헨을 처벌하는 게 아니었다.

흔들리는 눈으로 날 응시하던 르웰린이 입술을 짓씹다 질끈 눈

을 감았다.

"......이번 일은, 침묵해 주셨으 면 좋겠어요."

르웰린은 태어나기를 사업가였 다. 무엇이 이치에 맞는지 잘 알 았다. 미안함에 나와 눈도 마주치 지 못하는 그녀를 향해 괜찮다는 듯 웃어 주었다.

" 하."

그러나 칼은 괜찮지 않은 모양 이었다.

"정말 웃기지도 않는군. 그대는 슈슈를 모욕한 치를 처벌하는 것 보다 가문의 명예가 더 중요한 가?"

"••••••칼."

"슈슈는 그대를 위해 나섰는데 그대는 손익이나 따지고 있다니 역겹기 짝이 없군. 장사치들 가문 에서 나온 종자들은 다 이런 건 가? 오라비나 동생이나......

" 칼!"

칼이 한 음절 한 음절 짓씹을 때마다 르웰린이 새하얗게 질려

갔다. 칼의 비꼼이 도를 넘으려 함에 급히 그의 말을 막고, 몸을 돌려 칼과 마주 보았다.

"나를 봐요."

르웰린을 죽일 듯 노려보는 칼 의 양 뺨을 꽉 붙잡았다. 냉기가 서린 피부의 질감이 손바닥에 닿 았다.

칼이 그제야 시선을 내려 나를 바라봤다. 날것 그대로의 분노가 이글거리는 칼의 눈동자와 마주하 고 작게 속삭였다.

"그러지 마세요. 내 친구입니

르웰린이 나와 가문의 명예를 두고 손익을 따진다 한들, 그녀는 여전히 내 친구다. 난 내 친구 르 웰린이 내가 사랑하는 칼로 인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붉은 눈동자와 짙은 분홍빛 눈 동자 사이에 시선이 오가고, 칼이 입술을 짓씹었다.

"••••••하."

칼이 그의 양 뺨을 잡은 내 손 위로 자기 손을 올렸다. 손등 위 로 차가운 손바닥이 겹쳐졌다• 그 상태로 한참 마음을 진정시키듯 눈을 감은 채 호흡을 고르던 칼 은, 조금의 이성을 찾고 나서야 천천히 눈을 떴다.

"......널 봐서 입 다무는 거야."

" 그래요."

"원래라면 저 새끼를 죽여 버렸 을 텐데 너 때문에 참는 거라고."

"압니다. 잘했어요."

이런 투로 말하는 칼은 꽤 익숙 하다. 다정하게 어르며 칼의 머리 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제야 그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한숨을 쉰 칼이 아직도 끙끙거 리는 메르헨의 목덜미를 잡아들었 다. 메르헨이 고통스럽게 컥컥거 렸으나, 아무도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야. 결투 신청이다."

주머니에서 검은 가죽 장갑을 꺼낸 칼이 무감각한 표정으로 메

르헨의 뺨을 장갑으로 내리쳤다. 얼마나 세게 휘둘렀는지 메르헨의 얼굴이 휙 돌아갈 정도였다. 메르 헨이 비명을 지르며 뺨을 부여잡 든 말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칼이 내게로 시선을 돌리며 눈매 를 늘어뜨렸다.

"결투 정도는 허락할 거지? 죽 이지만 않으면 되잖아."

'......죽일 것 같은데.'

아직도 불안정하게 날뛰는 칼의 기운을 보면 당장이라도 지옥을

여는 마법진이라도 그려 메르헨을 밀어 넣을 기세이나,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아 죽이진 않을 듯싶 었다. 죽기 직전의 상태로 만들어 놓을 것 같긴 하지만.

허락하듯 고개를 끄덕이니, 칼이 빙긋 웃었다.

"이따 집에서 봐, 슈슈."

일상 같은 인사, 태평한 목소리 와 상반되게, 메르헨의 목덜미를 잡고 정원으로 질질 끄는 손길은 난폭하기 짝이 없었다. 비명을 지

르다 침묵 마법에 걸려 소리 없이 입만 뻐끔거리며 발버둥 치는 메 르헨을 무감각하게 바라보다 칼에 게 손을 혼들어 주었다. 메르헨에 겐 동정심조차 들지 않았다.

"......르웰린."

칼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 하고 살짝 고개를 돌려 르웰린을 바라보았다. 칼의 비꼼으로 상처 를 받진 않았을까 걱정되었다.

"슈슈, 미, 미안해요......

아니나 다를까, 새하얗게 질려 있던 르웰린은 나와 눈이 마주치 자마자 커다란 눈물방울을 흘려보 냈다.

' 이런.'

눈물이 흐르는 커다란 녹색 눈 동자는 너무도 처연해서, 난 잘못 한 게 없는데도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빠르게 르웰린에게로 다가 갔다.

"나는 슈슈보다 가문의 명예를 중시한 게 아니었어요! 물론 가문

의 명예도 중요하지만 슈슈에게 비할 바는 아니라고요! 슈슈는 내 게 유일한 친구예요. 정말 소중하 고, 또......

" 압니다."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며 횡설 수설하는 르웰린을 긴 말 없이 꼭 안아주었다. 움찔 어깨를 떨던 그 녀가 이내 내 품에 얼굴을 묻었 다.

"괜찮아요, 르웰린. 정말이에요. 난 괜찮습니다."

내 가슴을 축축하게 적시는 르 웰린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며 끊 임없이 속삭였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기 때문에, 자주 만나 본 것들엔 점점 무뎌졌 다. 그리고 적의와 무시, 비하는 이 세계에 태어난 내가 가장 먼저 익숙해진 것들이었다.

10살쯤 되었을 때부터 검을 잡 고 쭉 용병으로 살아왔다. 용병으 로서 산다는 건, 돈만 쥐여 주면 뭐든 할 수 있는 천박한 종자로 취급받으며 내 생명을 담보로 한

일들에 마구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네가 이번 의뢰를 맡은 용 병이라고? 지금 나랑 장난하나? 이런 땅딸보가 오면 어쩌자는 거 야!'

'돈만 주면 뭐든 하겠다고? 하 하! 재밌군! 1골드 줄 테니 내가 뱉은 침 한번 핥아 보지 그래!'

나라고 처음부터 강했던 것은 아니다. 검은 재앙 미르라는 이름 을 공짜로 얻은 것도 아니었다. 소드 마스터 경지에 다다라 누구

도 날 무시하지 못하게 된 것은 17살 무렵. 소드 마스터가 되기 전 7년 동안은 갖은 무시와 치욕 을 당해야 했다.

쉽지 않은 삶이었다. 내 몸은 돈 몇 푼에 사지를 오가야 했고, 내 귀는 모든 폭언을 감내해야 했으 며, 내 입은 무슨 일이 생겨도 불 평 없이 침묵해야 했다.

돈이 필요했으니까. 나와 아리아 가 하루를 더 버티기 위해선 동전 하나가 간절했으니까.

살기 위해 시작했던 일은 나를 죽고 싶게 만들었다.

힘들지 않은 하루는 없었다. 키 가 작고 마르다는 이유로 끊임없 이 쏟아지는 무시들을 버텨야 했 고, 용병은 돈만 주면 뭐든 한다 는 인식 아래 나를 함부로 다루는 이들에게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

매일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가 되어 집에 돌아갔다. 날 기다리던 아리아에겐 걱정하지 않도록 웃어 주고, 매일 밤 아리아가 잠든 집 을 나와 숲속 나무 위에서 소리를

죽여 울었다. 모두가 잠든 평화로 운 밤에 나만 깨어 죽음을 상상했

모두가 행복한 것 같은데, 왜 나 만 불행할까. 왜 수많은 사람들 중 하필 아리아가 아파야 했을까. 나는 왜 이런 환경에서 태어나 이 런 일을 해야 할까. 나는 왜, 왜 나만.

날 수몰시킬 듯 몰아치는 불행 에도 결국은 익숙해졌다. 그것은 매일 밤 나를 찾아왔으니까. 더 이상 닳을 곳이 없을 만큼 닳고,

침몰하는 감정에 못 견뎌 눈물을 터트리는 것이 일상이 되고 나서 야 나는 닥쳐오는 모든 부정적인 것들에 무덤덤해질 수 있었다.

"괜찮아요. 정말로."

'메르헨의 욕설 정도면 칭찬 수 준이니까.'

불행의 끝을 본 이는 웬만한 충 격엔 반응하지 않는다. 굳은살이 너무 짙게 박여 웬만한 통증은 느 껴지지도 않으니. 나는 정말 괜찮 았다.

"나는, 가문의 명예가 슈슈보다 중요했던 게 아니에요. 메르헨을 공식적으로 매도하면 슈슈의 손을 더럽히는 것만 같아서...... 메르헨 과는 태어나면서부터 이어진 끈질 긴 악연이었으니, 내 손으로 그를 끊어 내고 싶었어요. 공작가의 힘 을 빌리는 게 아니라 내 손으로, 내 손으로 그를 무너뜨리고 싶었 어요. 그래서, 그래서......

"네. 압니다. 괜찮아요."

물기가 가득 찬 목소리로 중얼 거리는 르웰린의 등을 천천히 토

닥여 주었다.

그걸 알았기에 선택을 르웰린에 게 맡겼던 거다. 메르헨의 처분은 전적으로 그녀의 몫으로 남겨 주 고 싶었으니까.

경직돼 있던 르웰린의 어깨가 풀리고, 뻣뻣하게 굳어 있던 두 팔이 내 허리에 감겼다. 르웰린이 소리 없이 울었다. 엉망이 된 그 녀의 붉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 다듬으며 빙긋 웃었다.

"미안해하지 말고 르웰린의 길

을 가요. 친구라는 건 당신이 가 는 길을 돕는 존재니까. 난 르웰 린이 어떤 길을 택했든 응원했을 겁니다. 메르헨을 처벌하지 못하 면 좀 어떻습니까. 당신이 더 중 요한데. 괜찮습니다."

거센 흐느낌이 들려왔다. 나는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며 르웰린의 울음이 그칠 때까지 담담히 곁을 지켜 주었다.

탈 많았던 연회는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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