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75화 (75/254)

75 화

시간이 흐르고, 아타라 사절단 환영 연회로부터 엿새가 지났다.

사냥 대회를 하루 앞둔 시점, 아 주 오랜만에 크리시스 네 가족이 저택 정원 테라스에서 함께 티타 임을 가지던 참이었다.

"슈슈. 줄 게 있다."

" 네?"

헛기침을 하며 답지 않게 수줍 은 표정을 지은 칼을 보다 멀뚱히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의문을 담아 고개를 기울이니 한 번 더 헛기침을 한 칼이 주머 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내일이 사냥 대회이지 않나. 정 표를 좀 준비해 보았다."

'정표'라는 단어가 나오자 얌전 히 자기 차를 마시고 있던 아리아 와 카이사르의 눈동자가 번뜩였

휙 소리 나게 돌아가 칼을 향하 는 얼굴들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 을 지었다.

"칼은 출전하지 않을 생각입니 까?"

"응. 사냥에 별 관심이 없기도 하고, 어차피 우승은 네가 할 테 니까."

내 우승을 확신하는 칼에 머리 를 긁적였다. 민망해하는 나를 보 며 피식 웃은 칼이 상자를 열어 물건을 꺼냈다.

"손수건은 줘도 쓰지 않을 것 같고. 화려한 액세서리는 불편해 할 것 같아서 가벼운 반지로 준비 했다."

상자 안에 든 것은 장식 하나 없는 얇은 은반지였다. 귀족이 차 기엔 지나치게 밋밋한 반지였지 만, 심플한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환영이었다.

"그냥 액세서리를 주면 형식적 인 것 같으니 같으니 마나의 순환 을 고르게 해 주는 마법을 걸었

다. 평소에 차고 다녀도 좋을 거 다. 내가 끼워 줘도 되나?"

반지를 제 손에 쥔 칼이 나를 향해 씨익 웃었다.

반지보단 시간 들여 준비해 준 그 마음이 고마워 기쁘게 고개를 끄덕이며 칼에게 오른손을 내밀었 다.

"아니. 오른손은 네가 검을 잡는 손 아닌가. 불편할지도 모르니 왼 손으로 주지 그래."

"어, 그럴까요."

칼의 종용에 손을 왼손으로 바 꾸었다.

칼은 상쾌한 웃음을 띤 채 내 손을 조심스레 잡고 내 손가락 위 로 반지를 끼웠다. 사이즈 조절 마법이 걸린 건지, 조금 헐거워 보이던 반지는 내 손가락에 들어 가자마자 맞춘 것처럼 조여들었 다.

'음, 그런데...... 위치가......

왼손 약지에 채워진 반지를 내

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칼을 힐 끔 곁눈질하니, 칼이 당당하게 읏 었다.

"요즘 네 주위를 날아다니는 날 파리가 많아 보여서 말이다. 달라 붙으면 애인 있다고 하면서 반지 를 보여 줘라."

" 알겠습니다."

애 달래듯 당부하는 칼을 보며 작게 웃었다.

친구는 많아도 내게 성애적 마 음을 품고 다가오는 이는 하나도

없다. 허나 칼의 걱정이 귀여워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쾅!

칼과 나 사이에 다정한 시선이 오가던 그때, 티 테이블이 큰 소 리와 함께 덜컹거렸다. 조금 놀라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도덕이 없나 봐, 오라비."

그곳엔 티 테이블 위에 부들거 리는 주먹을 둔 채 이를 악물고 웃는 아리아가 있었다.

"우리 슈슈 언니한테 주는 사냥 대회 정표는 겹치지 않게 준비하 는 걸로 합의 봤을 텐데요. 분명 내가...... 사흘 전에 반지를 준비 할 거라고 말해 뒀을 텐데......

"난 일주일 전부터 반지를 생각 하고 있었어서 말이다. 이런. 설 마 정말로 반지를 준비한 건가? 그런데 어쩌지. 슈슈 왼손 약지는 내가 먼저 차지했는데."

"이 자식이 진짜......

뻔뻔스레 웃는 칼을 보며 눈을 부릅뜬 아리아가 벌떡 일어났다.

아리아의 푸른 눈동자가 시리게 번뜩이더니 어느새 아리아의 손엔 마법진이 발동되고 있었다.

재수 없는 웃음을 지은 칼이 다 리를 꼬고 앉은 채로 여유롭게 마 법진을 발동시켰다.

"지금 마법 스승에게 마법으로 덤비는 건가? 아주 불초 제자가 따로 없군."

"마법 좀 가르쳐 준다고 유세 부리는 꼴이란......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연구에 내 치유력 도움 을 받고 있다는 건 잊었나 봐?"

금방이라도 서로에게 메테오를 날릴 기세인 칼과 아리아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말싸움이 고작이던 둘의 싸움은 아리아가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뒤부터 스케일이 점점 커지기 시 작했다.

'나, 이제 강해질 거야. 더는 언 니한테 지킴만 받지 않을래. 언니 를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질 거야.'

평생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든 몸을 가지고 살던 아이다.

공작 저에 온 지 얼마 되지 않 아 함께 소풍을 나갔던 날, 자신 이 마음껏 뛰어도 지치지 않는 정 상적인 몸을 갖게 됐다는 걸 자각 한 아리아는 한참을 울다가 그렇 게 말했다.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강 해지겠다고.

아리아는 한동안 자신의 무력을 기를 방법을 신중히 고심했다. 한

때는 내게 검을 배워 보기도 했으 나, 검을 배우기 시작한 지 한 시 간 만에 재능이 없음을 스스로 깨 닫고 포기했다.

냉정히 말해 아리아는 몸으로 하는 것에 재능이 전혀 없었다.

무력을 기르기 위해 여러 가지 것들을 배워 보던 아리아가 정착 한 곳은 다름 아닌 마법이었다.

아리아가 마법을 배우게 된 계 기는 무척 어이가 없었다. 여느 때처럼 칼과 싸우던 아리아는 마

법을 사용해 자신을 골리는 칼에 분노해 자기도 모르게 마법을 사 용하곤 마법에 대한 자신의 재능 을 처음으로 자각했기 때문이다.

'그 녀석에 대해서 좋은 말을 하 려니 입에서 가시가 돋을 것 같지 만...... 아리아 크리시스, 천재는 천재더군. 마법의 시전은 그리 간 단하지 않아. 복잡하고 난해한 마 법진의 수식을 모두 외우고 공식 을 이해해야 해. 그 마법을 전개 할 수 있을 만큼의 마력도 필요하 지. 때문에 하나의 마법을 배우려 면 무척 많은 시간이 필요해. 그

런데 아리아 크리시스는...... 내가 마법진을 전개한 그 잠깐 사이 나 타난 마법진의 형식을 모두 외우 고 이해한 거야. 자각도 없이 말 이야. 젠장. 걘 왜 마법까지 잘하 는 건지...... 재수가 없단 말이 지.'

마법에 있어 천재라 불리는 칼 이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한편 아리아는 칼을 이렇게 표현했다.

'요즘 칼 새끼, 아니, 칼 오라비 에게 마법을 배우고 있어. 매일 하는 일도 없이 언니한테 거머리

처럼 붙어 있기에 쓸모 있는 군데 가 존재는 하나 싶었는데...... 마 법을 좀 하더라고. 그 오만한 자 식이 잘난 척하는 꼴을 보고 있자 면 얼굴에 파이어볼을 날리고 싶 지만...... 확실히 좋은 선생이야. 으, 내 입으로 그놈을 인정하다 니, 토 나올 것 같아......

'아리아, 말. 그래도 칼이 가르 쳐 주긴 하나 보네. 안 가르쳐 줄 것처럼 굴더니.'

'......쳇. 알았어. 물론 처음엔 죽어도 안 가르쳐 준다고 질질거 렸지. 새끼, 유세 부리는 꼴이 얼 마나 같잖, 아니, 깜찍하던지. 가

르쳐 주는 대신, 나는 오라비 연 구를 돕기로 했어.'

' 연구?'

'치유의 힘을 아티팩트에 담는 연구를 하더라고. 언니가 검술 훈 련하느라 자주 다치니까 휴대용으 로 가지고 다니면서 제때제때 치 료할 수 있게 하려는 것 같더라. 흥. 내가 매일 밤마다 치유력으로 언니를 치료해 주는 게 질투 났던 거겠지. 꼬우면 지도 요정 혼혈 하든지...... 자기도 정기 부족에나 시달려 보라 해. 그게 얼마나 힘 든데.'

' 아리아.'

'......알았어. 하여튼 오라비의 연구를 돕는다는 조건으로 마법을 배우고 있어. 나야 연구를 도우면 서 치유력을 사용하는 연습도 하 고 마법도 배우니까 일석이조지.'

몸이 완치된 후에 저절로 치유 력을 깨우친 아리아는, 요즘 들어 검술 연습에 매진하며 상처가 많 이 생기는 내 몸을 밤마다 치유해 주곤 했다. 잔뜩 욕을 쏟아놓으면 서도 결론적으로 평가는 나쁘지 않은 걸 보면 칼과 아리아의 사이 는 천천히 호전되고 있는 듯 했

"오라비야, 네 주제에 언니 왼손 약지를 차지하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순순히 포기해."

"포기 못 하겠다면 어쩔 거지? 나와 마법으로 싸우려고? 마법에 재능이 좀 있다고 해서 나를 능가 했다는 망상은 하지 마라. 오억 년은 멀었으니까."

......아주 천천히 말이다.

서로에게 얼굴을 들이민 채 서 로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직전인 칼과 아리아를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둘 다 평소엔 지나치게 어른스 러운데 붙여만 놓으면 애 같아진 단 말이야.'

아리아는 어려서부터 무척 차분 하고 영민했다. 천재적인 두뇌에 어려운 환경이 겹쳐지니 어떤 일 에도 떼 한 번 쓰지 않는 애어른 이 된 것이다.

칼 같은 경우 만사에 인간답지 않을 정도로 냉정하고 능숙했으 니, 둘 다 지나치게 어른스러웠

다.

'가끔 이렇게 애다운 모습들을 보이는 게 좋긴 하지만...... 요즘 은 마법까지 사용해서 싸우니 너 무 격해지면 위험하단 말이지.'

'이게 무슨...... 둘 다 괜찮아? 오다가 폭탄 맞았어?'

'아니, 그냥......

'그냥 이 자식이랑 좀 싸웠어.'

얼마 전 마탑에서 의견 차이로 싸우고 사이좋게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왔던 둘을 떠올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또 싸우기 시작할 게 뻔했다.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칼과 아 리아의 대치를 관전하고 있는 카 이사르는 둘을 말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기에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둘 다 그만."

내 한숨 섞인 제지에 칼과 아리 아가 흠칫하며 마법진을 해제했 다. 그들이 나를 향해 고개를 휙 돌리곤 눈빛을 불태웠다.

"언니, 말해 봐! 저 자식이 준 반지는 버리고 내 반지를 왼손 약 지에 끼울 거지?"

"쟤 말은 들을 거 없다. 계속 거 기에 끼우고 있어라!"

'둘 다 왜 저렇게 왼손 약지에 집착하는 거지.'

어디 끼우든 끼우고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논쟁 주제였다. 대답을 종용하는 둘의 뜨거운 시선을 받 으며 눈을 끔뻑이다, 아리아에게

로 손을 내밀었다.

"아리아. 준비한 정표 지금 줄 래?"

눈을 깜빡이던 아리아가 주머니 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내게 건 넸다. 케이스를 열자 보인 것은 작은 오팔이 박힌 은색 반지였다.

'둘 다 귀엽단 말이야.'

칼이 준 반지와 아리아가 준 반 지를 번갈아 보다 피식 웃었다. 둘 다 나를 위해 고민하고 숙고해

서 정표를 준비했을 거라는 생각 에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아리아의 반지를 손 안에서 굴 리다, 칼의 것과 마찬가지로 왼손 약지 위에 끼웠다.

"둘 다 고마워."

두 개의 반지가 끼워진 약지를 보며 흐드러지게 웃음 지었다.

"심장 멎을 뻔했네. 기분 좋으니 한번만 봐 주지."

"심장 멎고 그대로 생을 마감했

으면 좋았을 텐데. 슈슈가 좋아하 니 물러서는 거다. 다음엔 물러서 지 않을 거야."

날 지그시 응시하던 칼과 아리 아가 서로를 돌아보더니 굳은 표 정으로 악수했다.

피부와 피부가 닿지 않은 채 손 을 혼드는 시늉만 하는 이상한 악 수였다.

둘 사이에 기묘한 대화가 오가 는 사이, 내 맞은편에 조용히 앉 아 있던 카이사르가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제 내 차례인가."

나를 향해 위풍당당하게 걸어오 는 그의 손엔 내 키의 반절쯤 되 는 크기의 상자가 들려 있었다.

"나도 네게

나."

선물을 주고 싶구

내 의자 옆에 선 카이사르가 한 쪽 무릎을 꿇고 나를 올려다보았 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아버지는 사냥 대회에 출전 하시잖습니까. 그런데 제게 정표 를 "

"그러니 정표가 아니라 선물이 다. 나만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카이사르가 옅지만 부드럽게 웃 었다. 처음엔 볼 수 있을 거라고 상상조차 못 했으나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카이사르의 새로운 읏 음을 지그시 응시했다.

나는 크리시스의 일원이 된 뒤 조금씩 달라졌다.

늘 억누르던 감정을 분출하는 방법을 배웠고, 호의를 경계하는 대신 감사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다가오는 행복에 불안해하는 대신 마음 놓고 누리는 방법을 배웠다.

내가 달라졌듯, 카이사르도 달라 졌다.

지나치게 과묵하던 그는 비록 대상이 저택 사람들뿐일지라도 조 금씩 타인과 대화하기 시작했고, 나를 무감각하게 응시하는 대신 웃기 시작했다.

내가 누군가로 인해 변한다는 건, 또 누군가가 나로 인해 변한 다는 건 그 자체로 놀랍고 황홀한 일이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