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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76화 (76/254)

76 화

"너는 원하는 걸 말하는 법이 없어서 뭘 줄까 많이 고민했다. 그러다 네가 가장 좋아할 만한 걸 준비했지."

카이사르가 내게 상자를 건넸다. 갸웃하며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상자 안에 든 것은 검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입을 살짝 벌린 채로 상자에서 검집을 꺼냈 다. 검집까지 함께 들었음에도 검 은 무게가 무척 가벼웠다. 홀린 듯 검 손잡이를 잡고 발검했다.

스르릉.

날붙이가 긁히는 소리와 함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짝이는 눈으로 검을 자세히 관찰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좋은 강철로 만들어진 듯한 날카로운 검날. 마 법이 깃들었는지 은은히 느껴지는 마력. 금빛으로 정교하게 장식된 손잡이와 손잡이 중심에 박힌 마 정석.

'와......

계속 감탄만 나왔다. 몇 달의 고 민과 저축 끝에 15살 무렵 동네 무기 상점에서 구입한 검을 여태 껏 쓰고 있는 나로선 처음 잡아보 는 좋은 검이었다. 내가 검에 홀 려 있는 사이, 카이사르가 뿌듯한

미소를 지은 채 설명했다.

"북부에서만 나오는 강철로 만 들어진 검이다. 오러를 증폭시키 는 데 최적화되어 있지. 손잡이에 박힌 마정석은 마나의 흐름을 고 르게 하는 효과가 있다. 사실 네 가 이 저택에 온지 얼마 되지 않 아 의뢰를 맡겼었는데 이제야 도 착을 했더군. 대륙 최고의 대장장 이 아타라 왕국의 포로스가 만든 것이다. 마음에 드느냐?"

'마음에, 드냐고?'

한참 검을 응시하다 말고 카이 사르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엔 미미한 기대가 서려 있었다.

그를 향해 세상 다시없을 것처 럼 환하게 웃음 지었다.

"최고의 선물입니다, 아버지."

검은 내 영혼. 내 인생의 의미는 검으로 시작해 검으로 끝을 맺었 다.

검이 마음에 드는 것도 있었지 만, 이 선물로 검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카이사르가 인정 해 주는 것만 같아 한없이 기뻤

"이 검을 가지고 프라마 영식인 지 뭔지의 사지를 동강 내 버리면 더 좋겠지만...... 그 치는 네가 네 방식으로 처리하겠다고 선언했으 니까. 네가 처리한다고 해서 내 손을 대지 않는 것이니, 반드시 사냥 대회에서 이겨 보이며 납작 하게 눌러 버려라."

아우디를 언급하는 카이사르의 표정은 말 그대로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야차 같았다. 순간 소드 마스터인 나조차도 잠시 소름이 돋을 정도로 퍼진 살기에 어색하 게 웃었다.

'아우디를 참수해 버리겠다고 날 뛰는 두 사람을 말리느라 힘들었 지.'

황실 무도회 이후, 아우디와 나 사이의 해프닝을 소문으로 들은 아리아와 그런 아리아를 통해 해 프닝을 전해 들은 카이사르는 몇 번이나 프라마 가문으로 쳐들어가 려 했다.

'넌 내 딸이다. 카슈미르 크리시 스란 말이다! 너무 귀해서 만지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내가 내 생에 최초로 깊이 사랑하게 된 존재다! 그런 네가, 그런 내 딸이! 그런 치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걸 알고 도 가만히 있으라고? 그럴 순 없 다. 난 네가 모욕을 당하던 그 자 리에 함께 있어 주지 못했다는 것 만으로도 데베라 아가리에 머리를 처박고 싶단 말이다! 나를, 네 아 비를 이 이상 비참하게 하지 마 라. 아우디 프라마는 오늘 죽는

'내가, 내가! 평민 출신 양녀 주 제에 주제도 모르고 사교계에서 날뛴다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사 교계를 휘어잡으려고 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 언니 때문이야! 나 하 나 살리겠다고 용병계에 뛰어들어 서 평생 거칠게 산 언니가 더는 누구에게도 무시당하지 않길 바라 니까! 이 빌어먹을 사교계를 내 발 아래 꿇려서 사교계에 존재하 는 그 어떤 귀족도 언니를 무시하 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어! 그런 데, 그런 같지도 않은 놈이 언니 를 모욕한 걸 참으라고? 난 못

참아! 반드시 그 새끼를 죽여 버 릴 거야!'

어쩌다 보니 격분한 두 사람에 게서 가슴 저리는 진심을 들어 버 리고 울컥한 나를 도와준 건 다름 아닌 칼이었다.

'나라고 그 새끼 목을 따고 싶지 않은 것 같습니까? 그 새끼를 가 장 죽이고 싶은 건 납니다. 내 가...... 내가, 원인이니까. 그 새 끼는 내게 앙갚음하려고 카슈미르 를 건드린 거니까'. 마음 같아선 그놈 정신을 제발 죽여 달라고 애

원할 때까지 고문해 버리고 싶습 니다.'

'그런데 왜......!'

'모욕을 당한 건 슈슈니까. 슈슈 가 자기 방식으로 처리하겠다지 않습니까.'

'우린 그걸 방해하면 안 됩니다. 슈슈가 누구도 끼어들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날, 칼은 나를 향한 존중을 보 여 주었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불타는 눈을 하고서도 자신의 감 정은 뒤로한 채 내 방식을 존중해

야 한다고 말했다.

'칼은 메르헨에 관한 건에서도 내 선택을 존중해 침묵해 줬지.'

황실 무도회 다음 날 메르헨이 죽기 직전의 꼴로 황궁 정원 구석 에서 발견되긴 했지만, 칼은 나와 약속한 대로 메르헨이 날 모욕한 건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만약 칼의 발설로 카이사르와 아리아가 아우디에 이어 메르헨까지 나를 모욕한 걸 알았다면 사교계 자체 를 뒤집겠다고 날뛰었을 테니, 큰 소란을 원치 않는 나로선 다행인

일이었다.

칼의 설득에 두 사람은 분노에 차 씩씩거리면서도 자신들의 감정 을 누르고 나를 존중해 주었다.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고 싶다는 표정으로 내 방식을 존중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너무 사랑스럽고 소중했다.

'어, 언니? 울어? 자, 잠깐만. 울지 말고...... 그 빌어먹을 새끼 진짜...... 나 봐. 응?'

'......네가 우리의 참견을 원치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내

가 조지러 가지 말라고 해서 섭섭 했나? 지금이라도 가서 그놈 정 신을 붕괴시킬까?'

'슈슈. 울지 마라. 네가 울 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 다.'

부어지는 과분한 사랑이 내 좁 은 마음을 꽉 채우다 못해 넘쳐흘 러 버려서, 그날은 조금 울었던 것 같다.

'이 시간이 오기 위해 내가 여태 껏 불행했던 게 아닐까.'

행복과 불행은 등가교환이기에, 이 벅찬 행복을 위해 지금까지의 불행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 도였다.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지금의 난 행복했다.

'그래서 반드시 이 시간들을 지 킬 거야.'

다시금 결심하며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세 사람을 눈에 담을 때 였다.

"빌어먹을! 마스터키 사용하시기 있습니까! 검 관련한 선물은 안 하는 걸로 합의 보지 않았습니 까!"

"누군 지금 검 좋아하는 거 몰 라서 선물 안 한 줄 아나!"

칼과 아리아가 격노한 표정으로 들고 일어났다. 아무래도 내가 모 르는, 세 사람 사이의 협상이 있 었던 모양이다. 편법을 저지른 것 같은 카이사르를 어리둥절한 표정 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재수 없게 입꼬리를 올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 가 가장 사랑받는 법이다."

쾅!

말이 끝남과 동시에 두 사람이 카이사르에게 공격 마법을 시전했 다. 카이사르가 오러로 날아오는 공격들을 막아낸 건 익숙한 순차 였다.

평화롭고, 참을 수 없이 행복한 하루.

그리고 사냥 대회 날이 다가왔

다.

"......정말 그대로도 괜찮으신 거죠?"

나갈 준비를 마친 나를 일일이 뜯어보던 마리아가 몇 번이고 물 었던 물음을 다시금 입에 담았다. 걱정 근심이 가득한 그녀를 향해 빙긋 웃어 주었다.

"충분해."

"그래도...... 치장도 하나도 안

하신 데다 사냥 대회에 출전하시 는데 보호구가 하나도 없는 건......

"마리아. 네 앞에 있는 나는 누 구지?"

내 확언에도 염려를 늘어놓는 마리아의 말을 뚝 끊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입술을 앙 다문 그녀가 허리를 굽혔다.

"크리시스 가의 공녀이시며, 제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소드 마스터 미르지."

마리아의 어깨가 흠칫 튀었다. 마리아는 내가 미르라는 것을 발 언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사용인들 중 하나로, 내가 미르라는 것을 직접 입에 담지 못했다. 미르라는 이름이 나오자 긴장한 기색이 된 그녀를 향해 당당하게 웃었다.

광포한 마수들을 상대하면서도 검은 망토 하나만 입고 다녔던 나 다. 보호구는 몸을 무겁게만 할 뿐, 내겐 방해만 되었다.

"소드 마스터의 마나는 어떤 보 호구보다 강해."

그 어떤 단단한 보호구도 내 마 나보다 나를 더 잘 지켜줄 수 없 으리라는 자신감이었다.

"언니! 준비 다 끝났어?"

1층으로 내려가니 아리아와 칼, 카이사르가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 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 웃었다. 내게로 달려온 아리아는 날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흠칫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러고 간다고?"

"으2 으 "

흐 • 흐 •

아리아의 표정이 와그작 구겨졌 다. 눈을 끔뻑이다 문제가 있나 싶어 고개를 기울였다.

" 이상해?"

"아니, 아니...... 어울려. 엄청 멋진데...... 그게 문제야."

"뭐?"

"너무...... 치명적이잖아."

데뷔탕트 때의 데자뷰를 느끼며

얼굴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저번 엔 칼과 카이사르가 그러더니, 이 번엔 아리아도 그랬다.

'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거 지?'

현재 내 복장은 평범하다 못해 밋밋하기 짝이 없었다. 피부가 직 접적으로 드러나는 부분도 무릎과 종아리 윗부분 조금뿐이었다.

문제점을 모르겠다는 뜻을 담아 아리아를 바라보고 있자니, 소파 에 앉아 있던 칼과 카이사르도 덩

달아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 왔다.

"......이런 여자라면 착취를 당 해도 좋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 다. 너무 위험해."

"맞다. 조금...... 아슬아슬한 느 낌이군."

"언니 옷차림은...... 드러내고 외설적인 게 아니라 은은히 치명 적이야.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시 키는 느낌이랄까?"

'대체 어디가?'

내 복색을 훑어보며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칼과 카이사 르, 아리아를 보다 혼란스러워졌 다. 내 복색을 몇 번 더 관찰해도 지나치게 심플하면 심플했지, 외 설적인 부분은 한 군데도 없었다.

"이 정도면 귀족 영식의 평범한 차림 아닙니까?

"......그렇긴 하다. 하지만 네가 입으니까 뭔가 이상해. 배덕감이 든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짜게 식은 표정으로 헛소리를 하는 칼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쩐 지 나와 눈을 맞추지 못하고 시선 을 피했다.

'뭐, 세 사람이야 워낙 내게 칭 찬이 후하니까.'

이것도 그의 일종이라고 생각하 며 어깨를 으쓱하며 넘겼다.

"우선 알겠습니다. 하지만 옷 갈 아입을 시간은 없으니 출발하죠."

세 사람의 얼굴에 불만이 차올

랐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냥 대회가 열리는 숲 앞 공터 엔 여러 채의 천막들과 많은 귀족 들로 바글거렸다. 수많은 귀족들 이 입방아를 찧는 대화 주제는 단 연 이것이었다.

"이번 사냥 대회엔 카슈미르 크 리시스 공녀가 출전한다죠?"

일주일 전 사절단 맞이 환영 연 회에서 돌연 사냥 대회 출전을 선

포한 카슈미르 크리시스.

등장과 동시에 사교계를 휘어잡 으며 종횡무진하는 아리아 크리시 스에 비해, 카슈미르는 지나치게 고요했다. 불참 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 거대한 행사가 아닌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의뭉스러운 인물.

모습을 드러내도 거리감이 느껴 질 만큼 인외적인 분위기를 풍기 며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두 문불출하면서도 가끔 황궁과 신전 에서만 모습을 보이니, 그에 따라

달라붙는 소문들은 무궁무진했다.

"황실 무도회에서 프라마 영식 과 대치하던 거 봤나요? 정말 당 당하던데요."

"전 당당하기보단 조금 거칠다 고 느껴지더군요. 게다가 검을 쓴 다잖아요. 성격이 어떨지는......

"황태자 저하께서 프라마 영식 을 막아서던 거 봤나요? 저하와 크리시스 영애가 교제하는 사이라 는 소리도 들리던데요."

"난 크리시스 영애가 교황 성하 와 친분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어 요."

"저번 데뷔탕트에서 아인하르트 소후작이 춤을 신청하지 않았나 요?"

수군수군.

호의와 적의,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는 뜬구름 잡는 소문들이 사방 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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