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화
세레논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자 내게로 눈을 돌린 그가 방긋 웃었 다. 맑고 호쾌해 보이는 웃음이었 다.
"아쉽게 되었네, 공녀. 너무 형 님이랑만 놀지 말고 나와도 놀아 주면 고맙겠어."
양해를 구하듯 친절한 목소리. 가식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세레논에 대해 너무 선입 견을 가지고 있었나.'
공식 석상에서 몇 번 스치듯 보 기만 했지 그와 제대로 대화를 나 눈 건 이번이 처음임에도 세레논 에 대한 선입견을 품고 있었던 것 같았다. 편협했던 인식을 스스로 반성하며 입가 위로 잔잔한 미소 를 띠었다.
"영광입니다, 저하. 언제든 불러 주시기 바랍니다."
세레논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내 웃음을 보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던 세레논은, 이내 나보다 더 밝게 웃었다.
"하하! 그래. 이만 가 보게. 형 님께서 기다리실 것 같으니."
세레논에게 짧은 목례를 마친 뒤 눈짓으로 시종에게 길 안내를 종용했다. 나와 세레논을 사이에 두고 안절부절못하던 시종이 이제 야 환한 낯을 하며 나를 안내했 다.
"황태자 저하. 크리시스 공녀님 을 모셔 왔습니다."
커다란 막사 앞에 도착한 시종 이 문 앞에서 나지막이 말했다.
"안으로 들여라."
시종이 문 앞에서 물러나고, 나 는 막사의 문을 걷으며 천천히 안 으로 들어섰다.
크고 화려해 보이던 겉모습과는 다르게 막사 안은 겉치장 없이 단 정하고 깔끔했다. 잠시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다, 반짝이는 금빛 실 들이 머무는 곳에 시선이 멈췄다-
보통 공식 석상에서 입던 화려 한 황가의 제복 대신 엉덩이를 덮 는 길이의 와인색 튜닉 위에 허리 띠를 착용한 디에고에게선 느슨한 분위기가 풍겼다. 의자에 기대 와 인 잔을 기울이던 그의 눈동자가 내게로 고정되었다.
늘 생각하지만, 디에고의 두 눈 은 금방이라도 잠겨들 것만 같은 색을 품고 있었다. 모험을 위해 길을 떠난 선원들의 배를 집어삼
키는 심해처럼. 눈동자 속에서 넘 실거리는 파도가 위협적이지만, 집어삼켜지는 순간에도 황홀할 만 큼 매혹적이었다.
'확실히, 디에고만큼 왕좌에 어 울리는 사람은 없어.'
디에고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디에고는 눈짓 한 번, 몸짓 한 번에도 지배 자의 아우라가 풍겼다.
마침내 디에고 앞에 선 나는, 정 중히 허리를 굽혔다.
"황태자 저하를 뵙습니다."
황태자. 눈앞에 남자에게 지독히 도 어울리는 명칭.
새삼스레, 그가 미래의 태양이라 는 것이 마음에 와 닿았다.
"그래. 와 줘서 고맙군, 슈슈."
한참 나를 응시하던 그가 조금 뒤늦게 대답했다. 내 옷을 살피던 시선을 조급하게 든 그가 어색하 게 웃었다.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으니, 조금 멍해 보이던 그가 아, 하더 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라간 시 야에 고개를 뻣뻣이 들었다.
"그대, 이번 사냥 대회에 출전하 지 않나."
"그렇습니다."
"친, 구 된 도리로서 그냥 보낼 수는 없지."
'친구'를 발음할 때 이 가는 소
리가 살짝 들린 것만 제외하면 말 을 깔끔히 마친 디에고가 탁자 위 에 있던 상자를 잡아 내 앞으로 내밀었다.
"사냥 대회 정표일세."
디에고의 붉은 입술 위로 유려 한 미소가 피어났다. 사랑스러운 것을 보듯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 를 잠시 응시하다 기분이 이상해 져 열린 상자로 시선을 돌렸다.
상자 안에 담긴 것은 벨벳 재질 로 만들어진 짙은 푸른색의 긴 천
이었다. 디에고의 눈 색과 똑 닮 은 리본은 아무래도 머리를 묶는 리본 같았다.
'참 다정한 사람.'
정표까지 준비해 준 디에고의 정성에 가슴이 찡했다. 내 반응을 살피는 디에고를 향해 활짝 웃었
"감사합니다, 디디. 덕분에 안전 히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따뜻한 마음이 담긴 물건엔 마
법이 깃드는 법이다. 애초에 북부 에서 많이 벗어나 마수도 없는 숲 속에 나를 해칠 만한 동물은 없겠 지만, 그래도 디에고의 정표 덕분 에 더 안전히 다녀올 수 있을 것 만 같았다.
웃고 있는 나를 한참 들여다보 던 디에고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한숨과 닮은 탄식 섞인 숨에 내가 무언가 잘못했나 싶어 눈을 깜빡 이니, 그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싱긋 웃었다.
"괜찮다면 내가 이걸로 그대 머
리를 묶어줘도 되겠나?"
'황태자한테...... 이런 일을 맡겨 도 되나?'
끈을 꺼내 들고 반짝이는 눈으 로 나를 올려다보는 디에고를 보 며 잠시 고민했지만, 자신이 원한 다는데 안 될 게 뭐가 있나 싶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디디만 괜찮다면, 물론입니다."
환히 웃은 디에고가 내 등 뒤에 섰다. 목덜미로 옅은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막사 안에 퍼진 익숙한 바닐라 향에 느리게 눈을 감으며 머리카락으로 닿는 손길을 받아들 였다.
쓱. 쓰윽.
빗대신 디에고의 길게 뻗은 손 가락이 내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 다.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숱 많은 머리카락을 일일이 빗어내는 게 귀찮을 법도 한데, 디에고는 군말 없이 내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매 만졌다. 그의 손길 아래 내 머리 카락에 발랐던 향유 향이 사방으
로 퍼지며 막사 안을 덮은 바닐라 향과 뒤엉켰다.
'기분이 좀, 이상한데.'
시녀들이 빗으로 머리를 빗어 주는 거야 늘 있는 일이지만, 건 장한 사내가 손으로 직접 내 머리 를 정리해 주는 건 처음이었다.
곧 깨질 유리 인형을 다루듯 조 심스러운 손길. 머리카락을 쓸어 내리다 간혹 목덜미를 스치는 손 끝. 머리카락 위로 퍼지는 고른 숨결. 그 모든 요소들이 막사 안
의 분위기를 기묘하게 만들었다.
"......그대 머리카락은 참 부드 럽군."
한참 아무 말 없이 내 머리카락 을 쓸던 디에고가 중얼거렸다. 낮 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 옆을 스침에 따라 눈을 느리게 깜빡이 다 짧게 감사하다는 말을 뱉었다.
"이제 묶겠네."
머리를 빗던 손이 머리카락을 한데 모으기 시작했다. 두피가 조
심스레 당겨지는 것을 느끼며 조 금 노곤하게 눈을 깜빡였다. 부드 러운 손길에 잠이 들 것만 같았 다.
"높게 묶는 것이 좋나, 낮게 묶 는 것이 좋나?"
"전 높게 묶는 편입니다."
보통은 풀어헤치고 다니는 편이 었지만 묶게 되면 포니테일로 높 게 묶는 것이 내 성향이었다. 고 개를 끄덕인 디에고가 위쪽에서 머리를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이 에 따라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목덜미에 시원한 바람이 깃들었 다. 휑한 목덜미가 조금 어색해 목덜미를 매만졌다.
멈칫.
머리카락을 그러모으던 디에고 의 손길이 일순 멈칫했다. 소드 마스터의 예민한 감으로 머리카락 에만 닿아 있던 그의 시선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유려 하던 그의 손길이 뻣뻣하게 굳자 어리둥절해 고개를 돌렸다.
"디디?"
멍한 기색이 깃든 푸른 눈동자 와 마주쳤다. 나와 눈이 마주친 디에고의 눈동자가 살짝 혼들리며 목울대가 울렁였다.
"안 묶으십니까?"
고개를 기울이며 묻자 퍼뜩 정 신을 차린 디에고가 높이 잡아 올 렸던 내 머리카락을 확 아래로 내 렸다. 뭔가 싶어 디에고를 지긋이 응시하니, 그가 살짝 내 시선을 피했다.
"......그대는 머리를 낮게 묶는 게 좋겠군."
"
설명을 바라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아도 그는 대답 없이 내 얼 굴을 앞으로 돌려 버렸다. 얼핏 스쳐본 그의 귀 끝이 붉었다. 디 에고는 내 머리카락을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목덜미가 덮일 만큼 느슨하게 묶기 시작했다.
'이럴 거면 왜 물어본 거지?'
어이가 없긴 했지만 선물을 받
는 입장인 만큼 얌전히 있기로 했 다. 하나로 묶인 머리카락을 만지 작거리다, 생각 난 물음에 느리게 입을 뗐다.
"궁금한 것이 하나 있는데, 물어 도 괜찮겠습니까?"
"무엇이든."
그의 혼쾌한 대답에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디디의 막사 앞에서 2황자 저 하를 만나 뵈었습니다."
"세레논과? 그럴 수도 있었겠
군. 그 아이 막사는 내 막사 바로 옆에 있으니."
세레논에 대해 말하는 디디의 말투는 조금의 불쾌함도 없이 유 려했다. 리본을 천천히 동이는 그 를 방해하지 않으려 희미하게 고 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어디로 가는지 물으시 더니 디디에게 가는 거라면 잡지 않겠다고 하시더군요. 제 짧은 생 각으론 디디와 2황자 저하께서 사이가 그리 좋지 않으리라 예상 했었는데...... 아닌 것 같아 놀랐
습니다."
리본을 묶던 디에고의 손이 멈 칫했다. 그의 한숨이 내 머리카락 을 간지럽혔다.
"그래. 실질적으로 세레논과 나 는 사이가 나쁘지 않아. 사실 우 애가 괜찮은 편에 속하지. 세레논 은...... 황위의 욕심이 없거든."
"2황자 저하께서 말입니까?"
"그래."
조금 놀라 높아진 목소리로 물 었다. 어쩐지 착잡한 목소리로 짧
게 긍정하는 디에고에 깊은 생각 에 빠졌다.
그러고 보면 정말 2황자가 대외 적으로 황위에 욕심을 드러낸 것 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무성한 소문들 중심에서 수많은 거짓 거 죽을 쓰고 묵묵히 서 있었을 뿐, 실질적으로 2황자의 황위 계승에 힘쓰는 건 그의 외가인 키프로스 백작가를 중심으로 한 2황자파 귀족들이 었다.
"나는 슈슈, 그대가 다른 이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싫네."
디에고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 삭였다. 이유를 묻기도 전에 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세레논과는 그대가 조 금 친하게 지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세레논은 무척 안쓰러운 아이거든."
'......안쓰럽다고?'
황위를 놓고 다투는 호적수에게 할 평가는 확실히 아니었다. 기묘 하다고 생각하며 세레논에 대해
조금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 됐군."
내 머리카락을 한참 매만지던 디에고가 느리게 손을 떼어 냈다. 꼼꼼히 묶인 머리카락을 만지작거 리다 작게 웃었다.
"묶어줘서 고맙습니다, 디디."
등 뒤로 한숨 같은 그의 읏음이 느껴졌다. 디에고가 살짝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목덜미 위로 촉촉 한 무언가가 닿았다 떨어졌다.
촉
갑작스럽게 와 닿은 부드러운 감촉에 살짝 흠칫하며 뒤를 돌아 보았다. 정작 내 목덜미에 입을 맞춘 디에고는 태연하게 웃고 있 었다. 눈을 끔뻑이며 그를 바라보 고 있으니, 디에고가 피식 웃으며 내 눈가를 간지럽히는 앞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승리의 키스일세. 다치지 말고, 꼭 프라마 영식의 코를 납작하게 누를 만큼의 사냥감을 가져오라는
뜻이야."
다정한 한마디에 마음이 간질거 렸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가득 들어찬 애정보다 조금 더 진득한,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바 라보다, 눈꼬리를 휘며 방긋 웃었 다.
"물론, 승리를 가지고 오겠습니 다."
나는 평생 동안 마수들을 학살 해 온 용병 미르.
애초에 날 대적할 수 있는 존재 는 이 숲속에 없었다.
"슈슈."
" 아버지?"
디에고에게서 정표를 받고 크리 시스의 막사로 향하던 도중, 황제 의 호출로 사라졌던 카이사르와 마주치고 반갑게 그에게로 다가갔 다. 잠시 내 머리를 묶은 끈을 지 그시 노려보던 카이사르는 이내 나를 보며 옅게 웃었다.
"슬슬 사냥이 시작할 시간이다. 준비 됐느냐?"
"네. 준비는 마쳤습니다."
등에 멘 활과 허리춤에 찬, 카이 사르가 선물한 검을 보며 뿌듯하 게 웃었다. 카이사르가 내 옆에 섰다.
"그래. 그럼 숲의 시작까지는 함 께 가자꾸나."
내 어깨에 팔을 두르는 카이사 르를 이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
며 함께 걸음을 맞춰 사람들이 모 여 있는 숲의 초입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