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화
사냥이 시작되기 직전인지라, 숲 의 초입엔 사냥 대회에 출전하는 이들과 그런 이들을 응원하는 이 들로 북적거렸다. 나를 말이 모인 쪽으로 이끈 카이사르는 크리시스 가의 말들 사이에서 가장 날쌔고 건장해 보이는 흑마의 고삐를 내 게 건넸다.
'이건...... 카이사르가 애용하는 명마 아닌가.'
황제가 이 말의 새끼 한 마리 얻겠다고 카이사르에게 거대한 저 택 하나를 하사했을 정도로 훌륭 한 명마였다. 고삐를 잡은 채 눈 을 깜빡이고 있으니, 카이사르가 피식 웃었다.
"너야 말 없이 이동하는 게 더 편하겠지만, 사람들 앞에선 말을 타는 시늉 정도는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다."
숲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나에겐 거창한 말로 이동하는 것
보단 두 다리로 이동하는 게 훨씬 빠르고 편리했지만, 무도회에서 사냥 대회에 참가하겠다고 선포한 내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될 것 이다. 사람들이 집중하고 있는 가 운데 그냥 걸어 들어가는 건 얕보 일 수 있으니, 숲에 들어갈 때만 큼은 말을 타고 들어가라는 뜻이 었다.
"그리고 이왕 말을 탈 거면 최 고의 명마를 타야 하지 않겠나. 내 딸인데."
자신이 가장 아끼던 말의 고삐
를 내 두 손에 꽉 쥐여 준 카이사 르가 느리게 웃었다. 그 말 한마 디엔 날 향한 애정이 그득히 묻어 있어서, 난 카이사르를 향해 환하 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어느새, 이런 벅찬 호의를 어색해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 었다.
나는 카이사르의 흑마를, 카이사 르는 내가 탄 흑마만큼은 아니지 만 충분히 건강하고 날쌔 보이는
갈색 말을 타고 다시 숲의 초입으 로 향했다.
모인 이들을 쓱 훑어본 나는 고 개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교황 성하께서 안 보이시는데요."
사냥에 출전하는 성기사들은 무 리 사이사이에서 보였지만, 정작 교황인 엘은 보이지 않았다.
'보통 사냥 대회엔 황제와 교황 이 함께 참관하는 게 의례인데.'
흥미롭다는 눈으로 사냥 대회의 무리들을 응시하고 있는 황제와 빈 교황의 왕좌를 보며 의문을 품 고 있으니,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 다.
"교황은 오늘 아침 급하게 치료 가 필요한 환자가 생겨서 늦게 온 다더군. 곧 오긴 할 게다."
'흐...... '
기묘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교황의 신성력은 신전 내 어떤 사제의 것보다 강하지만, 절대 아 무에게나 베풀어지지 않는다. 보 통 환자들은 신관, 귀족인 환자는 대신관 선에서 처리되고, 후작 이 상 귀족의 목숨이 위급할 정도는 되어야 교황이 나섰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교황이 나 서서 치료해야 할 정도의 고위급 인사 중에서 환자가 생겼다는 건 좀 이상한데.'
무언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답 답했다. 말 위에 멍하니 앉아 머
리를 헤집었다.
'원작에서 나왔던 것 같기도 하 고
사실 나라고 '요정의 밤'의 모든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 은 아니다. 애초에 현생도 아닌 전생의 기억이니까. 기억하고 있 는 것은 큼직한 사건의 흐름과 중 요하게 다뤄졌던 인물들의 상세 설정뿐이었다.
'우선...... 사냥부터 하자.'
걸리는 부분들이 많았지만, 당장 은 사냥에 집중해야 했다. 엘이 도착하면 환자에 대해 물어보기로 하고, 잠시 물건을 가지러 막사로 간 카이사르를 뒤로한 채 혼자 말 위에 앉아 사냥 시작을 기다릴 때 였다.
"크리시스 영애."
그리고 그때, 옆에서 날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가 운 마음에 가벼운 미소를 걸친 채 고개를 돌렸다.
"아인하르트 경."
햇빛을 받은 금빛 눈동자가 요 요하게 빛났다. 내 나지막한 부름 에 차갑도록 무뚝뚝한 라이너의 무표정 위로 조금의 부드러움이 깃들었다.
"사냥 대회에 출전하신다고 들 었습니다."
타고 있던 백마를 몰아 내 가까 이로 온 라이너가 말했다.
'역시 라이너도 알고 있군.
황실 무도회에서 벌어진 아우디 와의 대치는 일파만파로 사교계에 퍼져 나가 사실상 이번 사냥 대회 최고의 관심거리가 되었으니, 모 르는 게 더 어렵기도 했다. 그 증 거로 온 귀족들의 시선이 따갑도 록 내게 쏠리고 있었다.
"검사 된 사람으로서 사냥 대회 에 불참해서야 되겠습니까."
여유롭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그런 나를 응시하던 라이너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낮게 가라앉
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에 밝히실 생각이십니까?"
주어는 없었지만, 그가 무얼 묻 고 싶어 하는지 짐작하는 것은 어 렵지 않았다.
'미르라는 걸 밝히고 싶어 하지 않던 내가 무위의 척도를 드러낼 사냥 대회에 참가한 것을 이상하 게 생각하는 모양이지.'
확실히 그의 입장에선 이상해 보일 만했다. 그를 미르임을 발설
하지 말라 협박까지 하던 내가, 사람들의 시선을 몰기까지 하며 사냥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 말이 다.
'하지만 나는 미르인 걸 영원히 숨기고 싶은 게 아니니까.'
다가오는 북풍에서 용병왕 검은 재앙 '미르'라는 정체성은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패 중 하나였 다. 나는 이 '미르'라는 패를 버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가 여태껏 정체를 숨긴 건 오
히려 밝혀지는 순간의 드라마틱함 을 위함이지.'
현재 정체를 숨기고 있는 건 '미 르'라는 정체성을 버리기 위해서 가 아니라, '미르'라는 정체성을 대중에게 강렬하게 각인시키기 위 해서였다. 카슈미르 크리시스는 영웅 미르로서 화려하게 등단해야 했으니까.
'이번 사냥 대회는 귀족들에게 나와 내 무위에 대한 호기심을 심 어주기 위한 밑밥이지.'
내 계획에선 사람들의 지지가 필요했고, 대중의 지지를 받기 위 해서는 확실한 이미지 각인과 드 라마틱한 소재가 필요했다.
'이러니 인위적인 연출가가 된 느낌이지만...... 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일이니까.'
내 계획은 정말 말 그대로 솔라 티네 제국을 위한 것이었다. 내게 제국을 구하고자 하는 원대한 목 적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어찌 되 었건 결과적으로 내 모든 행동들 은 제국의 안위를 위한 것이었다.
"아직은 밝힐 생각 없습니다."
내 작은 속삭임에 라이너가 내 의중을 읽으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그를 향해 씨익 웃었 다.
"'아직은' 말입니다."
내 의미심장한 대답에 라이너가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의문이 어 린 그의 황금빛 눈동자를 향해 웃 어 주곤 자연스레 화제를 바꾸었
"아인하르트 경께서도 사냥 대 회에 출전하시죠?"
눈을 느릿하게 깜빡인 라이너는 불평 없이 내 말 돌림에 호응해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시스 영애께선 사냥을 혼 자 다니실 예정이십니까?"
"아무래도요. 함께 갈 사람이 없 으니."
어깨를 으쓱였다. 사냥을 같이 할 만한 사람이라곤 카이사르밖에
없는데, 그와 내가 함께 사냥을 했다가는 숲의 생태계가 망가질 것 같아서 따로 사냥을 하기로 미 리 합의를 본 참이었다.
내 대답에 고개를 숙이고 말고 삐를 매만지던 라이너는 잠시 나 를 힐끔하더니 느리게 입을 열었 다.
"그럼...... 저랑 같이 사냥하시 지 않으시겠습니까."
'라이너랑 사냥을?'
예상치 못한 제안에 고개를 기 울였다. 내 표정에서 의아함을 읽 었는지, 라이너가 조금 조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영애에 비해 많이 떨어지겠지 만, 그래도 폐가 되지 않는 선까 지는 할 수 있습니다. 사냥감 몰 이나 잡일들도 시켜 주시면 열심 히 하겠습니다."
쏟아지는 말들에 눈을 깜빡이며 그를 응시하니, 내가 거절하리라 고 생각한 건지 라이너의 입꼬리 가 축 처졌다. 표정은 여전히 무
감각하기 짝이 없었음에도 어쩐지 버림받은 개를 연상케 하는 처연 한 기색이었다.
"......역시 안 됩니까."
날카롭던 눈꼬리가 일순 내려가 고, 붉은 입술이 꾹 다물렸다. 무 섭도록 단단하던 인상의 미인이 시무룩해지는 건 상당한 공격력을 띠고 있었다.
'뭐야. 이건 마스터키 사용 아닌 가.'
조금 흠칫하며 라이너를 응시했 다. 볼 때마다 생각하지만 정말 소름 끼치도록 잘생긴 얼굴이었 다.
'한 명 정도는...... 같이 가도 괜 찮으니까.'
라이너 정도의 소드 익스퍼트면 방해가 되지 않을 수준이기도 하 고, 내가 미르인 것도 알고 있어 무위를 숨길 필요도 없었다. 무엇 보다 이렇게까지 같이 가고 싶다 는데 거절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싶 었다. 절대 얼굴에 홀린 건 아니
었다.
"원하신다면 어렵지 않습니다."
짧은 긍정에 라이너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하나같은 무표정에 서도 여러 감정을 드러내는 라이 너를 조금 신기하게 바라보다 말 고삐를 잡아끌었다.
"허나 숲에 들어가면 아인하르 트 경을 잘 챙겨 드리지 못할 수 도 있습니다. 제가 워낙 혼자 활 동하는 것에 익숙해서요."
"괜찮습니다. 최선을 다해 따라
가겠습니다."
라이너의 얼굴 위로 굳은 각오 가 보였다. 어쩐지 그에게 너무 기합이 들어간 것 같아 조금 민망 해졌다.
"그럼 이번 사냥 대회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가볍게 웃으며 그에게 손을 뻗 었다. 라이너가 내 손을 내려다보 다 조심스럽게 손을 맞잡았다.
두 검사의 거친 손이 맞닿았다.
나만큼이나 거친 그의 손에서 동 질감을 느꼈다. 얼마간 아무 말 없이 그의 손을 꽉 잡고만 있으니 맞잡힌 라이너의 손이 서서히 붉 어지기 시작했다. 너무 오래 잡고 있었나 싶어 빠르게 흔들고 스르 륵 놔 주었다. 천천히 손을 뺀 라 이너가 악수한 손을 빤히 내려다 보더니 살짝 고개를 돌렸다. 단정 한 은회색 머리칼 아래 드러난 귀 끝이 은은한 붉은빛을 띠고 있었 다.
"그러고 보니 아타라 왕국 사절 단이 보이지 않는군요."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보고 중얼 거렸다.
이번 사냥 대회는 아타라 사절 단의 방문을 축하하며 열린 것이 다. 하여 분명 사절단이 주축이 되어 진행되어야 할 터인데, 레오 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타라의 사절단 말입니 까."
라이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 는 거기서 뭔가 있음을 짐작했다.
몸을 옆으로 휙 기울여 라이너에 게로 가까이 한 나는 당황하는 그 를 못 본 척한 채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만."
"......제게 말해 주실 순 없는 겁니까?"
입술을 꾹 문 채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라이너의 얼굴 위로 당혹스러움이 퍼져 나갔다. 그의 두 손이 말고삐를 끊어지도록 강 하게 쥐었다.
'알려줄 것도 같은데.'
알리면 그가 곤란해지는 심각한 기밀 사항 같았다면 나도 들이대 진 않았겠지만, 분위기를 보아하 니 여차하면 말해 줄 수 있는 일 같았다. 휴일에 꾸준히 만남을 가 지며 라이너가 불쌍해 보이는 표 정에 약하다는 걸 알아낸 나는 잔 뜩 속상한 기색을 보이며 한숨을 푹 쉬었다.
"말해 주셔도 혼자만 알고 있을 건데...... 역시 저를 믿기엔 무리
이신 모양입니다."
"절대 아닙니다!"
라이너가 버럭 소리를 높였다. 이에 따라 안 그래도 시선이 몰려 있던 나와 그에게 더 많은 이들의 시선이 몰렸다. 실수했음을 깨달 은 듯 입을 턱 다물던 라이너는 옅게 한숨을 쉬었다.
"절대, 영애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그가 금빛 눈동자를 진지하게 빛내며 단언했다. 너무 단호하게
부정해 찔러 본 게 미안해질 정도 였다. 조금 눈치를 보다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럼 아타라 사절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말해 주시지 않겠 습니까."
금빛 눈동자가 망설임으로 일렁 였다. 크고 기사다운 손이 말고삐 를 자꾸만 다잡는 것이 보였다. 저렇게까지 망설이는 걸 보고 있 자니 괴롭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었지만, 그래도 나는 알아야 했
'직감이 울리고 있어. 뭔가 있
세계의 흐름을 읽는 소드 마스 터의 직감은 절대적이었으니까. 내가 잊고 있었던 중요한 실마리 하나가 수면 위로 떠오를 듯 말 듯 파들거리고 있었다.
"라이너."
간절함을 담은 나지막한 부름에 라이너가 퍼뜩 고개를 들고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인하르트 경'이라는 호칭에 익숙해져 웬만해선 입에 담지 않 는 이름.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호 칭을 부르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 았다.
"말해 주세요."
나는, 알아야만 했다.
입을 살짝 벌린 라이너가 다시 금 한숨을 쉬었다. 감았다 뜬 황 금빛 눈동자 위로 결연함이 깃들 었다. 상체를 숙여 내게 얼굴을
가까이한 라이너가 내 귓가에서 속삭였다.
"사교계에 파란이 일어날 것 같 아서 공식적인 발표를 할지 말지 아직 결정이 되지 않은 사항입니 다만......
"네."
"아타라 사절단 중 한 명이 외 부로 인한 독살 시도로 의식을 잃 었습니다."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